문학과 미술

이진숙 2015. 12. 7. 10:12

이진숙의 접속! 미술과 문학25 -역사를 만드는 '흑수저'들의 힘 미술과 문학

2015.12.07. 10:08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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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만드는 ‘흙수저’들의 힘

[이진숙의 접속! 미술과 문학] -25-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과 브뤼겔의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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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겔의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1559)

웃음은 힘이 세다. 진정한 웃음 속에는 풍자의 칼, 전복의 지렛대와 미래에 대한 낙관, 현재를 견디는 유쾌한 힘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웃음은 오랫동안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희극보다 비극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면서, 자고로 고매한 예술은 일단 진지해야만 했다. 프랑스의 문인 프랑수아 라블레(1494~1553)와 네덜란드의 풍속화가 피테르 브뤼겔(1525~1569)이 억압당하던 웃음을 복권시킨 것은 16세기. 때는 르네상스의 발흥과 종교개혁 등 중세의 낡은 관행들을 뚫고 근대적인 세계가 새롭게 움트던 시대였다.

라블레와 브뤼겔은 탁월한 인문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이 보여주는 웃음 속에는 세상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판과 연민,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희망이 동시에 담겨 있다. 웃음의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잘난 위인들의 영웅적인 모험담이 아니라 저속하고 끈적끈적한 삼류들의 세상 이야기가 시작된다. “웃음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대놓고 주장했던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1532년 무렵)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행복을 알고 있던 가르강튀아 왕
가르강튀아는 탄생부터 난장판이다. 위인들의 탄생은 일반적으로 성스럽게 미화되기 마련인데, 그의 탄생은 똥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머니가 기름진 소의 창자를 너무 많이 먹어 항문이 빠져버려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태어난 것이다. 대식가 왕에게는 늘 ‘식욕 나리’가 강림하시기 때문에 끊임없이 먹고 마시고 실없이 떠들어대고 싸는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정신보다 육체를 중시하고, 천상의 행복을 구하는 것보다 지상의 기쁨을 누리는데 여념이 없는 가르강튀아의 모습은 금욕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를 중시하던 중세의 관행에 대한 웃음 섞인 비판이다.

가르강튀아는 어떤 왕이 되었을까. 후대에는 너무 많이 먹어 부패한 왕의 상징으로 오해되기도 했지만, 라블레의 소설에서 그는 모든 사람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매우 훌륭한 왕이 되었다.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훌륭한 리더십은 언제나 위기의 순간에 발휘되는 법. 이웃나라와 사소한 일로 전쟁 상황이 발발했을 때, 가르강튀아의 아버지와 가르강튀아, 아들 팡타그뤼엘은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전쟁 대신 평화로운 화해를 선택했고, 부하들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둔다. 그런데 이들의 집안에는 독특한 내력이 있다. 이들의 선조들은 서양 모과를 잘못 먹어서 신체의 일부가 끔찍하게 부풀어 올랐던 거인족이다. 다윗에게 패한 골리앗, 오디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한 외눈박이 폴리페무스, 여자 거인 세쿤딜라, 나중에 카뮈에 의해서 유명해지는 시지포스 등. 이들은 기이한 외모와 어리석은 행동으로 악역을 담당하며 무시당했던 일종의 세계 문화사의 ‘흙수저’들이다. 흙수저 가문의 왕답게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행복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거대한 승전비를 세워 이름을 남기는 대신, 그 비용을 전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데 썼다.

문학비평가 바흐친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중세 사육제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이 소설을 높이 샀다. 부활절 전까지 40여 일간의 금식과 특별기도 등 경건하고 금욕적인 생활이 이어지는 기간이 사순절인데, 사순절 직전에 행해지는 한바탕의 난장이 사육제다. 금욕 대신 폭식이, 질서 대신 무질서가, 근엄함 대신 웃음이 지배하는 시간이다. 지배 계급이 주도하는 ‘공식적인 세계 옆’에 구축되어 있지만, 평상시에는 은폐되어 있던 ‘제2의 세계’가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자유로운 인간 내면엔 도덕적 본능
라블레와 브뤼겔, 16세기의 두 문화 엘리트는 기층 민중문화를 자양분으로 삼아 새로운 예술을 창조했다. 라블레의 소설이 민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쓰여졌다면, 브뤼겔은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1559)에서 사육제와 사순절을 한 화면에 등장시켰다.

그림 아래 중앙에는 사육제의 대표선수와 사순절의 대표선수가 맞대결을 펼치고 있다. 술통 위에 걸터앉은 배가 불룩 나온 사육제는 가르강튀아를 연상시키는데, 그의 무기는 맛있는 음식들이다. 머리에는 두툼한 파이를 이고, 구운 고기를 끼운 긴 꼬챙이를 무기로 휘두르고 있다. 반대편 교회를 상징하는 벌집 왕관을 쓴 삐쩍 마른 금욕의 사순절은 청어 두 마리라는 빈곤한 무기로 대항한다. 다른 손에는 고해자를 채찍질하기 위한 회초리를 들고 있고 발 아래는 사순절의 음식인 프레첼이 놓여 있다. 그 뒤쪽으로는 사순절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화면 왼쪽에는 사육제의 시끌벅적한 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기괴한 가면을 쓴 연극패들이 지나가고, 소외되던 장애인들도 모두 함께 어우러져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실제로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이라는 행사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사육제 측에 그려진 메마른 나무와 사순절 측에 그려진 연한 잎이 달린 나무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 그림은 사육제부터 사순절까지 열리는 다양한 축제 행사를 한 화면에 그린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브뤼겔이 일련의 행사를 대립되는 세력의 싸움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두 세력은 서로 무시할 수 없는, 세상의 절반들이다. 브뤼겔의 그림에는 늘 이렇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려진다. 그의 세상은 작은 사람들이 저마다 깨알 같은 이야기를 담고 살아가는 ‘세계 극장(Theatrum Mundi)’이다. 위대한 영웅들의 역사에 가려져 있던 평범하고 못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웃음과 함께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띄엄띄엄 보면, 영웅들이 세상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영웅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오래된 착각이다. 뛰어난 영웅들의 의지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거나 방해하는 것은 브뤼겔의 그림 속 작은 사람들이고, 라블레가 소설을 쓰기 전에 ‘가르강튀아’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역사를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인 것이다.

이 작고 평범한 사람들의 소망을 라블레는 자기 작품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팡타그뤼엘리즘’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평화로이 즐겁고 건강하게 언제나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충족시켜주지 못할 때는, 제 아무리 영웅처럼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다. 이 소박하고 본원적인 욕망을 채워줄 다른 사람에게 민중들은 권력을 다시 위임할 뿐이다.

팡타그뤼엘리즘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평화롭고 즐겁기 위한 정신적인 자유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가르강튀아는 유토피아의 일종인 텔렘 수도원을 건설한다. 텔렘은 그리스어로 의지라는 뜻으로, 텔렘 수도원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최대한 보장하는 자발적인 수도의 장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곳에 통용되는 유일한 규칙은 ‘원하는 바를 행하라’이다. 자신을 영웅이라고 생각했던 독재자들은 국민을 우매한 존재, 훈육과 통치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곤 했다. 수도사였던 라블레는 인간을 이해하고 싶어서 의학을 공부했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모두 알고 있었던 그가 인간에 대해서 내린 결론은 “자유로운 인간들에게는 천성적으로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하고 악을 멀리하도록 하는 본능이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속의 굴레에 갇히게 되면 거꾸로 “금지된 일을 시도하고 우리에게 거부된 것을 갈망하게 된다”고 말한다. 인간 행복의 요건을 요약한 팡타그뤼엘리즘은 라블레의 시대뿐 아니라, 21세기 흙수저들의 여전한 소망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