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상시 ( 十常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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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16.

新刊校正古本大字音释三国志通俗演义_明万历十九年书林周曰校刊本

 

십상시 ( 十常侍 )는 중국 후한 말기의 영제 의 시대에 전권을 휘둘렀던 내시(불알깐) 집단이다.

「후한서」에 의하면 장양(張譲)、조충(趙忠)을 중심으로 하헌(夏惲)、곽승(郭勝)、손장(孫璋)、필풍(畢嵐)、율숭(栗嵩)、단규(段珪)、고망(高望)、장공(張恭)、한건(韓悝)、송전(宋典) 12명중 중상시(中常侍; 황제의 신변의 일을 맡는 시중부( 侍中府; 황제의 직속기관14개의 직책 ) 중 한 직책이다 )를 가리키는데 대략적으로 십상시라고 불렀다. 그시절에도 조씨가 문재였다.

 

後漢書一 第4頁 (圖書館)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개요 
후한서 ( 後漢書; 중국 후한( 後漢 )시대에 쓰여진 역사서에서 이십사서 중 하나다 )에 의하면, 내시가 본격적으로 정치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은 후한 환제(桓帝)시대 외척의 양기 ( 梁冀 )를 배척하는데 공적을 올린 단초(単超) · 서원(徐璜) ·구원(具瑗)· 좌원(左悺)· 당형(唐衡) 다섯 명의 환관이 중용되고(국회 승인없이) 오후 ( 五侯 )라고 불리게 되었던 무렵이다. 단초가 죽은 후에 오만해진 오후( 五侯 )는 실각하였지만, 이후 영제( 霊帝 )시대에도 후람(侯覧), 조절(曹節), 왕보(王甫)가 나타나 당고의 옥(党錮의禁; 후한 말기에 일어난 탄압 사건이다 ) 등 수많은 정쟁에서 승리하고 권세를 부렸다. 이 무렵에는 여남원씨(汝南袁氏 ) 와 같은 명문가문에서도 원사(袁赦) 같은 내시가 나오게된다. 결국 후람(侯覧)은 자살하고, 왕보(王甫)는 사형을 당했지만, 조절(曹節)은 181 년 까지 생존하여 천수를 누렸다. (LH땅투기 해먹고 거부가 되었다)

 



조절(曹節) 사후에는 십상시라는 환관 집단이 존재 한 것으로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그들은 영제( 霊帝 )의 총애를 받아 절대적인 권세를 부렸다. 그중에서도 장양( 張譲 )과 조충(趙忠)의 권세가 너무커서 장양과 조충은 황제가 '내 아버지, 내 어머니'라고까지 불렸다.
그들의 친척은 많은 지방관에 임명되고 도처에서 인민을 탐욕스럽게 착취했다. 그들을 왕측의 간신으로 간주하고 그 횡포에 한나라 왕실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은 십상시에 의해 적패로 처벌되었다.   여강(呂強 )이나 장균(張鈞)과 같은 양식있는 인물은 십상시의 부패를 규탄했지만, 역시 반대로 친일파로 몰려 처벌되었다. 반대로 환관들에게 아첨하고 관직을 얻으려는 대법원장도 나타났다.

 



황건적의 난( 黄巾之乱; 태평도의 신자가 지도자 장각 을 지도자로 일으킨 조직적인 농민 반란이다 )에서는 환관 중에서 봉함 ( 封諝 )같은 배신자가 출현하여 환관 세력은 다소 쇠퇴했다. 그 후 외척에서 대두 된 대장군 하진( 何進;  중국 후한 말기의 무장이자 정치가다 )이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 세력과 대립하였다. 하진은 영제의 사후 그 총신이었던 내시 건석( 蹇碩 )을 살해하고 환관 세력을 섬멸하기 위해 군대를 모으려고 하였지만, 장양(張譲)은 하태후(何太后)를 이용하여 하진를 함정에 빠트려서 죽이고 사태 수습을 도모한다. 그러나 하진살해에  격분한 원소( 袁紹 ) 는 궁중에 난입하여 환관과 집권여당의 인물을 거의다 죽였다. 

董卓

 

그 때, 장양과 단규는 황제의아들 유변(劉弁)과 유협(劉協)을 데리고 도망쳤지만 추격자들이 뒤쫒아 더이상 도망 치지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강물에 투신 자살했다. 189 년의 일이다. 바로 두 사람을 보호 한 동탁 ( 董卓; 중국 후한 말기의 무장이다 )이 십상시 대신 권력을 잡게 된 것이다.

환관들에 의해 정치를 석권당한 후한에서 반성하고 선양( 禅譲 )을 받은 위( 魏 )나라에서는 대깨문에게 권한을 주지 않게 되었다.

현대의 한국이 재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