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학(東洋医学) 이야기

댓글 2

카테고리 없음

2014. 11. 15.

 

 

 

 

동양의학(東洋医学) 은 중국 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에서 진행되어 온 전통 의학 이다. 동양 의학, 중의학 중국 전통 의학이라고도 불린다. 최근에는 구미에서도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TCM, 전통 중국 의학)의 이름에서 보완 대체의학 (영어 : alternative medicine)" 일반적으로 의료 의 대신에 이용되는 의료 '라는 뜻이 담긴 용어이다. 대체 의학은 "보완 의료 ','보완 의학 '이라고도 불린다)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다.

 

Unani 책의 제목 페이지 생리학 에서 우르두어 1289 인쇄 언어 회교 에 (1868 AD) 인도

 

아유르베다 ( 산스크리트어 : आयुर्वेद 라틴 음역 : Āyurveda 는 인도 대륙 의 전통 의학 이다. 유나니 의학 (그리스 아라비아 의학), 중의학 과 함께 세계 삼대 전통 의학의 하나이며, 서로 영향을 서로 발전했다. 토리 도샤라 는 3 가지 요소 (체액, 病素)의 균형이 깨지면 질병이 되는 것으로 생각 되며 이것은 아유르베 다의 근본 이론이다 인도 전통 의학이다) · 유나니 의학 ( "Yunan"라는 말은 페르시아어 로 "그리스"(Ionia)라는 의미로, Yunani ''그리스 '(Ionian) 또는 "그리스를 근원으로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현재도 이슬람 문화권에서 행해지고 있는 전통 의학이며, 고대 그리스 의학을 기원으로 한다.)과 함께 삼대 전통 의학 꼽히고 서로 영향을 주고 있다고 믿고 있다.

 

 

Chinese_meridians

 

중국 지역에 전해지는 전통 의학은 다양하지만, 중화 인민 공화국의 성립 이후 정리되어 중의학의 이름으로 통일 이론이 확립 되었다. 따라서 한국은 중국에서 정리 된 의학 체계를 "중의학" 이라고 하며 이전을 "한약"으로 구별 할 수 있다. 중화 인민 공화국에서는 동양 의학이라는 용어는 한국의 전통 의학을 가리킬 수 있지만, 국제 동양의학회 는 국제 학회가 있듯이, 한국, 대만, 일본에서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소수 민족 토착 의료와의 대비에서 주로 한족 이 실천해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Islamic_MedText 티무르 제국 (15 세기)로 작성된 의학 전범(Kitāb al-Qānūn fī al-ṭibb) 사본이다

 

한국에서는 한의학을 한약과 같은 것으로 파악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한의학은 중국에서 전래 된 의학이 한국에서 발전한 것이며 중시하는 이론과 진단법 및 사용하는 생약 량 등에 차이가있다. 한반도, 티베트, 일본등 중국 주변의 의학은 중국 의학의 영향을 짙게 받고 발전했다. 의료서적이나 문헌은 한문 을 사용하는 중국, 한반도, 일본에서는 도서의 번역이 필요 없었던 것도 있어, 의학 서적의 교류도 활발했다. 동남아시아 의 전통 의학은 중국 의학과 아유르베다 모두 도입 한 것이 많다.

 

 

chuyak

 

개요

다음과 같은 점이 중국 의학의 특징으로 꼽힌다. 전신을 보고 치료를 실시한다. 서양 근대 의학과 달리 여러 증상이 " 증거 "라는 개념으로 치료 방침을 결정한다.

인간의 심신이 가지고 있는 자연치유력(라틴어; vis medicatrix naturae 영어; spontaneous cure 는 인간 · 동물 등의 심신 전체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부상이나 질병을 치료하는 힘의 기능을 널리 모아 가리키는 표현이다 수술을 하지않고 인공적인 약물을 투여하거나하지 않고 스스로 치료를 하는 기능이다.)을 높임으로써 치유에 지도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생약 등을 사용한다.

 

 

진단도 四診(視診· 聴診· 問診· 触診) 방법으로 한다. 서양 근대 의학처럼 기계와 채혈 검사 결과를 가진 것은 아니다. 따라서 몸의 내부에 침범하지 않고 피해가 적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의서 (医書)

" 황제 내경 "( 黄帝内経; 은 서한시대(기원전 206 - 8 ) 만들어진 의학서적으로 현존하는 중국 최고의 의학서라고 되어있다. 옛날에는 "鍼経"(심경) 9 권과 "素問"(서먼) 9 권이 있었다고 되어 있지만, 이러한 9 권 책은 현존하지 않고 현재 王冰 이 편찬 한 素問' '霊枢 "을 바탕으로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황제 가 岐伯 (기백)를 시작하여 몇 사람의 학자에게 일상의 의문을 "素問" 이라고 문답 형식으로 기술되어있다. "霊枢" "鍼経"별명으로 "素問"이 기초이론이며 "霊枢"는 실천적이고 기술적으로 설명되어있다.) : 현존하는 중국 최고의 의학서. 음양 이론과 오행 이론을 참고로 기록되어있다. 생리 · 요양 · 환경 위생, 요양 등 기후 · 계절 등과 관련하여 언급하였고 철학적 · 이론적인 "素問"으로 해부 · 생리를 폈다 침구 (鍼灸, Acupuncture and Moxibustion 은 신체에 침이나 뜸을 이용하여 자극을 주기위한 다양한 질병에 대한 치료적 개입과 건강 증진을 가능하게 하는 의료 기술이다,) 등의 임상 의학을 실천으로 논한 "霊枢"로 구성되어있다.

 

 

Zhangzhongjing 장 기계

 

" 상한론(傷寒論) "( 張仲景;(150 ? - 219 )은 중국 후한 의 관료 의사로 일반적으로는 張仲景"으로 잘 알려진 그 의학적 업적에서 医聖으로 일컬어진다. 이름은 張璣 이다.) : 전염성 질병에 대한 치료법이 중심이 였고. 이미 四診 ,八綱변증 ( Shaw; (증거)는 중의학 · 한의학 의 치료 지침이 될 수 있도록 하며, 서양 의학에서 말하는 병명 (진단명)에 상당하는 것이다. ), 八法 의 원칙과 구체적인 방법이 설명되어있다.

" 難経 "( 難行은 고대 중국의 의학서이다. 성립 연대는 명확하게 모르지만, 황제 내경성립 이후 내용에서 후한 이후에 성립했다고 여겨지고있다. 저자는 역사서 사기 (史記) (기원전 91 년경)扁鵲倉公열전으로 알려진 전설적인 명의 · 扁鵲 (越人)이라고도 하지만 "扁鵲倉公열전및 조정의 장서 목록 한서 」 「 예문관 (78 )難経에 대해 언급하지 않었고 저자가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다. "황제 81 難経"(難行) 이라고도 한다.) :" 황제 내경 "을 문답 형식으로 설명. 자체의 내용도 침술 요법이나 후세에 영향을 미쳤다.

 

 

Compendium_of_Materia_Medica 본초 강목 금릉 버전  금릉 난징 고추에서 첫 출판으로 초판을 금릉 버전이라고 부른다.

 

본 초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経)( 번체 : 神農本草經, 간체 : 神农本草经, 병음 : Shén nóng běn cǎo jīng, 로마자 표기법 : Shennung Ben Ts'ao King 친왕 본초경은 후한에서 삼국 시절에 성립 된 중국 의 본초서적이다. ) : 365 종의 약물을 품위 (養命薬)별로 중품 (안양 성 약물) · 저속 (治病薬)의 세 종류로 분류하여 설명서적이다 .

본초 강목(本草綱目)( 중국 의 본초학 사상에서 분량이 가장 많은 내용으로 가장 충실한 약학 서적이다. 저자는 명나라 이시진 (李時珍; (1518 - 1593 )1578 ( 만력 6 )에 완성하였고 1596 (만력 23 )에 남경에서 출판되었다. ) : 중국 본초학 사상 내용이 가장 충실한 본초 책. 52 권이다.

 

 

 

 

 

역사

 

고대

갑골문 등에는 」 「이라는 문자는 눈에 띄지 않고,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 의료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곧 무당(巫祝)이라는 주술사가 마을의 제사와 함께 사람들의 병도 치료해주고 주술사적인 존재가 드러나게 된다. 최초의 의료는 지금 말하는 운세」 「부적에 해당하는 것이 주류였지 만 곧 거기에 생약 등의 약물 치료 와 침구 의 원초적 단계가 통합되어 간다. 그러면서 무당도 무녀를 전문으로 하는 신관 인 존재와 의료 전문 의사 인 존재로 구별 되어갔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렇게 진나라 이전에도 명의의 존재가 수많은 기록에 남아 있으며, 예를 들어 환자는 여섯가지 불치 의 하나로서 "무당을 믿고 의사를 믿지 아니할 경우 즉 치료되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이 시대에 의사와 주술사적인 존재가 의학 및 종교와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을 엿보게 한다.

 

 

 

중고대

전한 ( 기원전 202 ~ 서기 8 )의 시대에는 " 황제 내경 "이라는 현재 알려진 가장 오래된 의서가 편찬되어 있다. 후한 ( 25 ~ 220 ) 시대에 張仲景을 통해 "傷寒雑病'이 편찬된다. 다만, 이 상한잡병론(傷寒雑病論) '은 긴 전란으로 소실되고 雑病부분은 찾지 못하고" 상한론 "만 남었다고 한다 손자思邈 "천금要方등에 인용문이 적혀있지만 "雑病 '에 해당하는 부분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북송 시대에 王洙가 금궤옥함 요약방법(金匱玉函要略方)을 발견하고 그 후반부가 "雑病"부분에 해당한다고 하여 이 린들에 의해 상한론과 중복되는 부분을 나누어 金匱要를 생략 (정식 명칭은 금궤 요략 방법 론) 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다. 張仲景傷寒雑病론 의 서문에서 황제내경 을 이해하고 읽어야 한다 라고 써있기 때문에 황제내경 도 읽지 않고 상한론이나 금궤 요략 를 가볍게 취급하는 것을 의문시하는 유파도 있다. 상한론은 현재 의학에서 유행성 감기로 추측 된다 급성 열성 질환을 모델로 병세의 진행 단계와 치료법을 논의했다고 하는 유파도 있지만, "傷寒"은 협의의 의미는 급성 열성 질환 이다 광의는 열성 질환에만 머물지 않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이 또한 의견이 분분하이기도 하다. 한약은 張仲景 의해 처음 이론적으로 체계화 된것이라고 한다.

당나라의 손사맥( 孫思邈; ( 541 ? - 682 ?)은 중국 당나라 의 의사, 도사 . 생년은 541 , 581 년 다. 중국 내지 세계 역사상 유명한 의사, 약물 학자, 약의 황제라고도 부르며, ​​많은 중국인은 의사 신으로 모시고 있다.) 의학 전서 인 비급 千金翼法 등을 저술, 지금까지의 의학 사상에 신선 계의 의학 사상과 불교 의학의 사상을 가미했다. "상한론"薬方를 도입하고 千金翼法을 저술했다.

 

 

 

 

중세

元時代( 960 ~ 1367 )에는 金元四大家로 불렸다 劉完素 張子和 李東垣 朱丹渓 들이 나타난다. "황제 내경"의 이론을 바탕으로 六淫理論四傷理論 등 새로운 이론이 표현되었다. 한편 남송 에서는 太平恵民局 이라는 공공의 약국이 마련되어 의사 나 관민에 좋은 약을 제공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송자(宋慈) 가 세원 집록(洗冤集録) 이라는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법의학 서적을 저서 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성과는 남송 을 멸망시킨 원나라에서도 계승되었다.

또한 명나라 시대에 의사 이시진(李時珍) " 본초 강목 "을 저술하여 약학 · 본초학 분야에서도 큰 진전이 있었다.

 

 

 

 

현대

중국에서는 전후 국민당 정부의 전통 의학 폐지 운동에 반발하는 형태로 공산당 정권에 의한 전통 의학 부흥이 국책으로 실시 되어 "중의학"으로 정리했다. 현재 서양 의학 을 행하는 통상의 의사와 전통 의학을 행하는 중 의사 " 두 의사 자격이 병설되어있다. 중화 인민 공화국 성립에 따라 중국 공산당은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던 전통 의료의 담당자를 "노중의사"라고 소집하고 전통 의학 교육에 충당했다. 그러나 청나라말기 이후 전란으로 대륙에서는 체계적인 전통 의학 등은 남아 있지 않고 노중의사라 해도 대부분 家伝의 생약 방법이다 침구 방법을 각개 전했다. 따라서 이러한 개별 전통 기술을 통합하는 이론 체계가 필요하여 마오쩌둥(毛沢東)의 강한 주장으로 전통 의학을 정리 · 통일하여 "중의학"이론이 설비 되었다. , 현재 중의학은 중국에서 통일 교과서 교육이 필요하게 된 1959 년을 시작으로, 문화 대혁명의 시기를 중심으로 전개 된 것이다, 이는 이전의 한약을 "중의학"로 구분 하였다.

1958 년 남경 중의학 연구원 이 편찬 한 교과서 " 중의학 개론 에서는 오장 육부 마다 병증(病証)이 전개되고 있으며, 질병 증도 " 千金方 "의 오장 병증과 유사하다. 이 교과서에서는간허한증( 肝虚寒証)처럼 현재 중의학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병증이 포함된다. 또한 " 千金方 "" 腎実熱'등까지 포함된다.

침구 를 예로하면 현재 중의학 이론은 경락치료(経絡治療; 경락 의 허실을 조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침구 치료의 치료술의 하나이다.) 와 비슷하고 오장의 모자 관계와 상극 관계를 중심으로 이론 구축을 전개한다. 대략 1960 년대부터雑病중 하나였던 "肝気郁逆"(肝気鬱滯)가 간 기본 병증의 하나가되었다. 또한 肝実証 은 간 실증하다는 인식은 중국에는 있다.

 

 

Rizichin 이시진 생가

 

중의학

중의학은 중국에서 다양한 중국 전통 의학을 정리 통합하여 만들어진 의학 체계이다. 진료는 기본적으로 한의사가 한다. 미국 등에서는 허용되고 있다. 현대 중국의 중의학은 서양 의학의 영향을 받아 중의 내과, 중의 수술, 중의 부인과, 중의 소아과 등으로 세분화되고 복잡해지고있다. 중국 중의사의 자격 종류는 다음과 같이 나뉜다.

한의사 (생약 처방을 중심으로 탕 액 치료 전문)

침구 치료 중심의 중의사

서양 의사가 있지만, 서양 의대를 졸업 후 중의학 교육을 받아 서양 의학 도 한의학도 결합치료하는 의사 (중 의학에서는 서양 의학뿐만 아니라 학습을 위한 두 처방이 가능하다)도 있다. 이때 진찰과 처방에서 "서양 의학으로치료하겠느냐? 아니면 한방으로하겠느냐? 등으로 환자에게 질문할수있다.

한국의 한의학은 중국의 중의학과 유사하지만 일본은 중국이나 한국의 사회적 사정 역사적 경위, 생활 습관, 풍토 등의 차이에서 한의학과 한약은 진찰 방법 등이 크게 다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中薬(일본에서 말하는 한약 )

약식 동원 ( 의식 동원 ), 약선

침구; ( , )

안마 : 중국의 안마요법, 마사지. 모두. 일본 안마 는 그 형태가 다르다.

기공(気功); 은 중국 전통 민간 요법 대체 치료이다.

 

 

 

 

구미에 보급

최근에는 구미에서는 중의학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TCM , 전통 중국 의학)의 이름으로 대중 보완하여 대체의학으로 치료 · 연구가 널리 행해지고 있다.

 

 

 

 

한국의 한의학(韓醫學)

한의학(韓醫學) 또는 고려의학(高麗醫學), 동의학(東醫學)은 한국의 동양의학이다. 전통적인 한의학은 근대 과학혁명의 영향을 받은 현대의학과는 철학적, 방법론적으로 차이가 있다

 

또한 성립과정에서 중국의 철학과 사상이 큰 영향을 끼쳤으며, 나아가 태국이나 인도, 아랍과 그리스 등의 전통의학과도 유사한 부분이 많다.

 

 

 

 

 

 

역사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이전에도 독자적인 의학이 발달해 일본에 의료기술을 전해주기도 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중의학에서 사용하는 본초(本草)와 한국에서 사용하는 한약재인 본초의 차이점을 구분한 '향약(鄕藥)'이 나타난다. 이러한 노력이 조선시대 초기 '향약집성방' 등의 책자의 편집으로 이어진다. 광해군 재위 기간에 허준은 '동의보감'을 집대성하게 되는데, 내경과 외형, 잡병, 탕액, 침구편 등으로 나뉘어 만든 점과 치료 부분을 탕액, 음식, 침구, 도인(수양법)으로 정리하고 있는 점은 기존 임상서와 많은 차별을 둔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 중심의 '한의학(漢醫學)'으로부터 '동의(東醫)'라고 하는 이름을 조선후기 동무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으로 이어지게 한다. 한편 동의보감 이후의 임상서적은 동의보감을 간추려 보는 방식이 유행하여 조선 말기 황도연의 방약합편은 광복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의학 임상가가 애용하는 책이 되었다.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은 체질의학이라는 한국의 독특한 의학사상으로 익히 알려져 있으며 조선 '성리학'적 세계관이 투영된 의학이라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연과 사람, 사회와 사람, 사람과 사람, 물질과 사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만든 심신의학이다. 한편 일제 강점기 중에 선교사를 통해 전래된 서양의학과 학문 논쟁이 일기도 했는데, 여기서 조헌영은 '통속한의학원론'이라는 책에서 한의학으로 보는 인간관과 서양의학으로 보는 인체관의 차이점과 한의학의 특수성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근현대의 한의학(韓醫學)

조선 말기 고종, 순종 때 활동했던 한의(韓醫)들은 조선후기까지 이어온 한국 한의학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진 한의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개항기 유입된 서양의학으로 인한 한의학의 위기를 점차 인식하기 시작한 세대였다. 일부 인물들은 궁중에서 어의로 근무하면서 세계 의료계의 변화를 느끼면서 진료를 했고, 민간에서 활동한 인물들은 한의학에 대한 국민적 선호를 바탕으로 사회적 입지를 굳혀나갔다.

 

궁중에서 어의로 근무한 인물들은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일성록 등 궁중의 역사 속에서 그 활동상을 찾아볼 수 있다. 박준승(1847~?), 홍철보(1853~?), 서병효(1858~1939) 등 이 시기 어의들이 치료의 공적으로 상을 받거나 관직의 품계가 상승하거나 지방관에 임명되었다는 기록들이 나온다. 이들 어의는 일제가 조선을 점령한 1910년 후에도 한의사 단체를 설립하거나, 한의학 교육기관의 운영 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일제가 조선을 점령하자, 이들은 크게 좌절하여 궁중에서 나와 서울 장안에 한의원을 개설하여 진료활동을 하기도 했다. 일제의 서양의학 위주의 정책은 이들로 하여금 한의학 부흥을 위한 운동에 나서도록 했고, 이때마다 이들은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이준규(1852~1918)1906년 의방촬요라는 제목의 의서를 간행하는데, 이 책은 고종의 명령을 받고 직접 지은 조선 최후의 관찬의서라는 데 의의가 있다. 이준규는 당대에 명망 있던 어의로서 백성에게 도움이 될 의서를 만들어달라는 고종의 뜻을 받들어 책을 지었다.

 

배석종(1874~?)은 어의로 1906년 상중임에도 고종이 치료를 위해 입궐할 것을 명할 정도로 실력 있는 명의였다.

 

홍재호(1872~?)는 구한말 궁중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에 '음양백초정'이라는 약물을 개발하여 대중화시킨 어의 출신 한의사이다. 그는 약물 개발로 얻어낸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동아일보>와 의방유취를 찬양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개항기에 민간에서 활동하면서 한의학 연구로 시대를 빛낸 3대 명의 황도연(1807~1884), 이제마(1836~1900), 이규준(1855~1923)의 활동도 두드러진다. 이들 세 인물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한국 한의학의 명맥을 현대 한의학으로 계승한 학술 대가들이다. 유의라는 공통점을 지닌 이들은 당시 최고의 지식인들로서 독창적인 학문관을 드러내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인물들이다.

 

 

1898년 최규헌과 이학호는 대한의사총합소라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한의사 단체를 구성하는데, 이 단체는 이후 설립되는 한의사 단체들의 모태가 되었다. 이 단체는 1909년에 취지서를 내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발기인 명단에 들어간 인물들은 임병후, 김해수, 김진하, 김양제, 홍종철, 조병근, 김관직, 이해성, 경도학, 노구영, 장형빈, 정재철, 이희풍 등이다.

 

1904년에는 장용준(1867~?)을 중심으로 동제의학교라는 한의학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는데, 이 학교는 이후 설립된 한의과대학의 모태가 되었다. 이 학교에 도교수로 선발되었던 김영훈(1882~1974), 전광옥(1871~1945) 등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유흥기(1831~?) 같은 인물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법, 백춘배, 정병하, 이종원 등 개화파 지도자들을 키운 '백의정승'으로 명성을 떨쳤다. 조성찬(1865~?), 손사준, 심희택 등은 이 시기에 명의로서 장안에 이름을 널리 알린 인물들이었다. 구한말 이들의 활동은 일제의 폭압이라는 길고 긴 터널을 뚫고 지나갈 바탕을 만들엇다. 이들의 활동은 현대 한의학의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이 일제로 넘어가면서 한의학은 위기에 봉착했다. 일제가 1905년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에 대한 간섭을 본격화하면서 이듬해인 1906년 국립의료기관인 광제원에서 강제로 서양의학 위주의 시험을 치러서 한의사들을 축출하는 등 한의학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한의들은 고종의 도움으로 1904년 동제의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는데 헤이그 말사사건으로 후원자인 고종이 강제로 퇴위 되면서 1907년 동제의학교가 폐교되고 모처럼의 한의학 공교육의 기회도 사라지게 되었다.

 

1913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제정된 의생제도 역시 한의학의 위상을 떨어뜨렸다. 의생제도가 시행되면서 한의사를 '의사라는 호칭보다 아래의 '의생'이라는 호칭으로 격하시켜 부르기 시작했다.

 

 

 

 

1914년 조선의생회에서는 한방의약계라는 학술잡지를 간행하는데, 이 잡지는 한국 최초의 한의학 학술잡지라는데 그 의의가 있다. 전국에 있는 한의사들은 1915년 가을, 공진회라는 산업박람회를 계기로 770여 명이 창덕궁 광장에 모여 전선의생대회를 열었다. 이때 전선의회라는 한의사 단체가 구성되었다. 이 단체의 회장으로는 지석영, 부회장으로는 최동섭, 총무로는 김수철, 임원으로는 조병근, 경도학, 김영훈 등이 선출되었다.

 

1921년에는 한의사들의 친목과 학술진흥을 목적으로 하는 동서의학연구회라는 단체가 설립되었다. 회장은 김성기, 부회장은 이을우였다. 동서의학연구회는 1923년부터 동서의학연구회월보라는 학술지를 간행하면서 학술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 단체는 1936418일에 <동아일보>후원으로 '통속한의학강연회'를 열고 통속한의학의 확산을 위해 노력한다. 이때 김영훈은 '폐병과 뇌염에 대하야', 신길구는 '민중보건과 한방약', 조헌영은 한방의학에서 본 현대병'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한편, 1935년에는 성주봉을 발행인으로 하는 충남의약이 창간되었다. 충남의약은 충남의약조합이라는 충청남도에 조직된 한의약계를 총망라하는 단체에서 간행한 기관지로서 1937년에 한방의약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1942년 제50호까지 간행되었다.

 

1939416일과 17일 양일간 태평동 부민관에서 동양의약협회의 결성식이 거행된다. 이날 창립총회에서는 이사장 김명녀, 부이사장에 조인섭, 이정옥을 선출하고, 의약계를 망라한 42명의 이사를 위촉하여 총무, 재무, 연구사업의 각 부서를 정했다. 또한, 한방의약전문학교와 부속한방병원을 설립하고 학술지 및 한방문헌을 간행하며 한약재의 생산 권장과 조달 등을 실천할 것을 결의했다.

 

 

 

 

 

노병희(1850~1918)와 조종대(1873~1922), 강우규(1855~1920)와 심병조(1894~1945) 등은 일제에 저항한 한의사들로 이름이 높다. 이들의 독립운동활동은 청사를 빛내고 있다.

 

일제강점기 한의사들은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술 논쟁을 전개했다. 1934<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소개된 한의학 분흥 논쟁은 특히 유명하다.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조헌영, 장기무, 정근양, 이을호 등의 논쟁은 한의학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유도해내기에 충분했다.

 

일제강점기 한의학 학술잡지를 살펴보면 당시 어떤 문제가 주된 논쟁거리였는지 분명해진다. 이 시기 한의들은, 시대에 맞게 한의학을 개량하고 한의사들의 의식을 개혁해 진정한 보건의료인으로서의 자질을 함양시키려고 했으며 한의사에게 주어진 사회적 소명을 수행하여 한의학의 사회 속에서의 위치를 정립할 것을 갈망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의학을 부흥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1947년에 동양의학회라는 학술단체가 결성된다. 이 단체는 1947년에 동양의학이라는 학술잡지를 간행하면서 조병근, 김영훈, 홍재호, 신채성 등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하여 한의학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교육계에서의 활동도 빛났다. 1946년에 동양의학전문학교설립기성회에 경기도의 한의사들이 경기도의생회관을 기부하는데, 이것이 바탕이 되어 1948년 한의학교육기관인 동양대학관이 설립된다. 박호풍이 초대 학관장을 맡았다. 이 학교는 1951년에 서울한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고 1953년 동양의약대학으로 교명을 바꾸면서 더욱 발전하여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의 모태가 되었다. 1957년에는 박성수, 김장헌, 홍성초 3인의 한의사들이 대학교수 자격을 공식적으로 획득하면서 현대 한의과대학 교육이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65년 경희대학교가 동양의약대학을 흡수합병하면서 한국 한의계는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 명문 사학에 한의학과가 설치되어 한의학이란 전통학문이 현대화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경희대학교는 1971년 한국 최초로 한방 병원을 설립하였고 1972년에는 세계 최초로 무약물 침술 마취에 성공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의사제도의 창립도 큰 업적으로 꼽힌다. 19511월 전쟁기간 동안 부산에 임시국회의사당이 마련되었을 때 김영훈, 방주혁, 박성수, 박호풍 등이 적극적으로 국회의원들과 교섭하고 윤무상, 권의수, 이우룡, 정원희 등이 국회에서 증언해 한의사제도가 국회본의회에서 통과되었다. 한의사제도가 완비되면서 대한한의사협회와 대한한의학회가 정식으로 출범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1973년에는 서울에서 제3회 세계침구학술대회가 개최되어 세계 25개국의 학자들 700여 명이 모여서 학술대회를 열었다. 학술대회가 열릴 수 있기까지 배원식의 노력이 빛났다.

 

1976년에는 강효신, 구본홍, 최용태, 유근철 등 4인이 최초로 한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의사 제도화 성공 이후로 학위제도에 의한 최초의 박사학위 수여자들이라는 점에서 큰 영예라고 볼 수 있다.

 

1976년부터 '집념'이라는 드라마로 허준의 동의보감 열풍을 일으킨 이은성은 한의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고시킨 인물이다. 1990년에는 드라마 각본을 바탕으로 소설 동의보감이 집필되었고 1999년에는 드라마 '허준'이 제작되면서 한의학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

 

 

 

 

최광수, 김만호, 신경희 등은 문화계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들이다. 특히 최광수가 그린 허준, 이제마, 유성룡의 영정과 김만호, 신경희의 글씨가 유명하다. 동양의약대학에서 배구로 국가대표를 지낸 한의사들은 배우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

 

개인적 학술활동도 빛난다. 조규철, 임홍근, 허연, 최석근 등은 한의학을 학술적으로 한 단계 도약시키기 위해 학술지를 간행했으며 의료봉사에도 힘썼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한의사 가문의 활동도 두드러진다. 일부 인물들은 후손들을 한의대에 진학시켜 지금까지 한의사 가문을 이어가고 있다. 춘원당한의원 가문, 홍가비전의 홍순승 가문, 삼성가계로 대표되는 권오진 가문, 전광옥과 전석붕 부자, 박병곤과 아들 박경균 등이 대표적이다. 김기택 교수와 조세형 원장처럼 학문적 사승관계로 끈끈이 이어진 경우도 있다.

 

한편, 조헌영, 채인식, 맹화섭, 노정우, 신길구, 김상효, 이은팔, 박인규, 한남수, 최주약, 이병행 등 한의학의 신 영역을 개척해나간 선구자들의 활약도 눈에 띈다. 이들은 이론과 임상, 저술 등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한의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상승시켰다.

 

 

 

Ayurveda_humors.

 

중국과 일본의 전통 의학과의 비교

 

중국의 중의학

첫째로 철학이다. 한의학에서는 조선 말기에 동무(東武) 이제마가 기존의 한의학적 사고를 종합하여 현대 한의학으로서의 사상의학을 주창하였으며, 이외에 부양론, 형상의학, 사암침법 등의 다양한 현대 한의학 이론들이 있다. 사상의학은 인간의 체질, 성격에 따라서 약의 처방을 달리하는 맞춤의학으로서, 현대 중의학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

 

둘째로 의학과 협력할 수 있는 법적 제약이 어느정도인가에 있다. 중국은 의학과의 결합을 법적,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나, 한국은 이러한 결합에 있어 많은 제약이 있다. 중국의 경우 중의(中醫)와 서의(西醫) 외에 이들이 결합된 중서의(中西醫)로 삼원화되어 있지만. 아직까지 한의학은 특별히 융화되기보다는 이원화하여 따로 분리되어 다뤄지고 있다.

 

 

Ayurveda-Utensils Āyurveda

 

일본의 한방의학(캄포)

메이지 유신 이후 한의사 제도가 사라지고 일원화되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가 Kampo 처방을 할 수 있고 침구대학을 졸업한 침구사가 따로 존재했다. 그러나 그 후 일본은 1934년부터 Kampo에 관심있는 의사들 사이에서 조직적으로 전통의학과 동양의학에 대한 전문 분과 추진이 이루어져 동양의학회가 부활하고 Kampo 수련 기관 병원들이 생김으로서 한방 전문의들이 동양의학회 소속으로 약 2만여명이 활동 중이다. , 1989년부터 Kampo 전문 분과 병원에서 수련을 받고, Kampo 전문의로 인정을 해주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일본동양의학회는 Kampo 전문의들의 모임이다. 1950년 창립되어 1991년에 정식으로 일본의학회에 등록이 되었다.

영문 정식 명칭은 "The Japan Society for Oriental Medicine(JSOM)으로, 20082월 현재 회장인 이시노 쇼고는 산부인과 전문의로 키타사토 연구소 동양의학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1954년도부터 Kampo 처방에 대한 국민 의료보험이 적용이 되면서 현재 많은 내과의사, Kampo 전문의들이 Kampo 처방을 내리고 있다. 2007년 기준으로 일본 후생성의 발표에 따르면, 인가된 Kampo 처방은 210종이며, 이 가운데 의료보험 약가수재는 148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