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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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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2021. 2. 28.

김애란의 소설집 ‘침이 고인다’에는 70-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보고 듣거나 경험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그런데 그녀는 80년 생이다. 아마도 이런 일들은 2000년대 초까지도 이어졌던 모양이다. 어떤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인 것도 있다.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난하고 척박하지만 지질하거나 구차하지는 않다. 초라하고 힘든 삶에도 나름 낭만과 재미가 있고, 내일에 대한 희망의 빛이 있다.

 

도도한 생활 –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은 빚더미에 앉게 되고 화자는 언니가 세든 지하방으로 오게 된다. 장마에 지하방에는 빗물이 흘러들고, 동생은 일 나간 언니를 기다리며 빗물을 퍼낸다. 영화 ‘기생충’의 지하방을 연상하게 된다.

 

장마에 비가 오면 할머니는 부엌에 들어가 빗물을 퍼내야 했다. 마당보다도 낮게 자리한 탓에 아궁이로 빗물이 새어 들었기 때문이다. 빗물에 젖어 연탄불이 꺼지면 할머니는 번개탄을 피워 연탄을 살려냈다. 그 연탄이 있어야 아침밥을 지을 수 있었다. 외가가 있던 관훈동은 지금은 번쩍번쩍한 도심이 되었다. 

 

침이 고인다 – 주인공은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혼자 사는 강사다. 어쩌다 갈데없는 후배를 자신의 방에 들여 함께 살게 된다. 처음에는 집안 일도 분담하고 생활비도 보탬이 되어 좋아 보이던 후배와의 삶이 어느 날부턴가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직장인 학원에서는 체육대회를 거치며 동료 선생들의 평소와 다른 경쟁심과 사나운 모습을 보게 된다. 지쳐 돌아온 날, 후배에게 이달 말까지 나가 달라고 말한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후배는 짐을 싸서 집을 나갔고, 그녀는 언젠가 후배가 주었던 반개의 인삼 껌을 무심히 입에 넣었다가 아직도 단 맛이 남아있음에 놀란다.

 

성탄특집 – 사내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 동생과 한방에 산다. 사내는 마음 놓고 연인과 잘 수 있는 방을 가져본 적이 없다. 반지하와 옥탑방을 전전하는 동안 연인은 그를 떠났다. 한편 그의 여동생은 이번 성탄절을 남자 친구와 함께 보낸다. 처음으로 함께 보내는 성탄절이다. 과거 세 번의 성탄절이 있었지만, 한 번은 마땅한 옷이 없어서, 두 번째는 남자가 돈이 없어 부모님이 아프다는 거짓말로 피했으며, 마지막은 둘이 잠시 멀어졌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함께 비싼 저녁을 먹고 모텔을 찾는다. 그러나 성탄절이라 빈방은 없고, 허름한 여인숙에 들어갔다가 돌아 나오고 만다. 단칸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오빠와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잠이 든다. 

 

외가는 집 전체가 고작 11평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방 3개에 작은 마루방까지 있었다. 당연히 방은 작았다. 겨울에는 안방에만 불을 피우고 살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나, 그리고 어쩌다 누이가 오게 되면 5명이 그 작은 방에 누워 잤다. 다들 똑바로 누우면 팔이 닿았다. 옆 사람의 날숨이 나의 들숨이 되는 상황이었다.

 

남의 집에 방한칸 얻어 살며 석유곤로에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이고 달걀을 부쳐 밥을 먹으며 살던 시절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았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 – 재수생과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의 이야기다. 

 

이 소설집에는 고시촌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학교 성적으로 아이를 평가하고, 시험 결과로 운명이 바뀌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판, 검사도 아니고 말단 9급 공무원이 되기 위해 한창 꽃 피워야 할 청춘의 시절을 고시원에서 지내는 일이 과연 정상적인 사회현상인지 묻고 싶다. 

 

칼자국 – 20여 년 동안 국숫집을 하던 어머니의 삶을 지켜본 딸의 이야기이다. 손칼국수 장사를 하는 어머니에게는 오래된 칼이 있다. 무디에 지면 갈고, 또 갈아 써 이제는 작아진 칼이다.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입덧으로 장례식장에서 음식을 못 먹는 그녀에게 아버지가 집에 가서 쉬다 오라고 한다. 집에 와서 어머니를 생각하다 잠이 든다. 눈을 뜬 그녀는 어머니의 칼을 보고 참을 수 없는 식욕에 그 칼로 사과를 베어 먹으며 장례식장으로 돌아간다.

 

할머니에게도 그런 칼이 있었다. 손잡이에 ‘US’라고 쓰여 있는 미군들이 쓰던 작은 칼이다. 할머니는 이 칼로 생선의 배를 가르고, 배추를 자르고, 과일을 깎았다. 세월의 흔적만큼 길이도 줄고 폭도 좁아진 칼이었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다. 그 동네 많은 남자들이 바람을 피우고, 여자들도 바람을 피운다. 남자가 바람을 피우려면 상대해줄 여자가 있어야 하니까. 정말 그런 시절이 있었다. 본처가 내연녀의 거처를 찾아가 살림을 부셔버리는 일도 있었다.

 

기도 - 대학 졸업 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하는 ‘내’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신림동 산동네 고시원까지 오게 된 언니를 찾아 가 만나는 반나절 동안의 이야기다. 신림동 고시원 사람들의 모습과 뚜렷한 목표도 없이 살고 있는 ‘나’의 모습에서 이 시대 젊은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네모난 자리들 - 자신이 태어났던 집을 엄마와 찾아갔던 기억을 회상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대학 시절 짝사랑했던 선배를 기억하고 그의 셋방을 찾아간다. 그는 항상 자신의 방에 불을 켜 둔다. 빈방을 둘러보고 문을 나서며 불을 끄고 나왔던 그녀는 얼마 후 다시 들어가 불을 켜 놓고 나온다.

 

자기가 태어난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여인의 살을 찢고 태어났으니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기억하는 일들은 아마도 이제는 기억하지 못하는 일에서부터 생겨났을 것이다.

 

플라이데이터리코더 – 이곳은 상상의 섬이다. 할아버지, 삼촌과 함께 사는 아이는 어느 날 섬에 추락한 노란색 경비행기 근처에서 주황색 상자를 발견한다. 이게 무엇이냐고 묻는 아이에게 삼촌은 엄마라고 둘러댄다. 엄마는 아이의 아버지가 죽은 얼마 후, 불이 난 여관방에서 벌거벗은 사내와 함께 죽었다. 추락한 경기행기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육지에서 온 정보원들이 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블랙박스의 행방을 찾는다. 상자를 엄마라고 여기며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는 할아버지에게 발각이 되어 상자를 돌려주게 된다. 정보원들은 블랙박스를 가지고 돌아가지만 부품 손상과 잡음으로 사고 원인은 알아내지 못한다. 다만 들릴 듯 말 듯 녹음된 조종사의 마지막 메시지를 간신히 건졌다. 그것은 ‘안녕’이라는 말이었다.

 

이 작품은 ‘어린 왕자’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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