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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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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2021. 6. 9.

내가 어렸을 때의 일이니 이제 50여 년이나 된 이야기다. 식구 중에 누군가 몸이 아프거나 집안에 나쁜 일이 생기면, 할머니는 김치와 콩나물을 넣고 구수한 죽을 끓여 그걸 집 주변 여기저기에 뿌리며 “잡귀야, 물러가라.” 고 했다. 배고픈 잡귀들에게 죽 한 그릇 주며 우리 곁을 떠나라고 구슬린 것이다.

 

어떤 때는 한지 위에 반죽한 쌀가루를 얹고 김을 올려 쪄내어 작은 크기의 백설기를 만들어 장독대에 가지고 가서는 연신 손을 비비며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고 주문을 외우기도 했다. 솥에 물을 데워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후 어딘가 다녀온 후에는, 빨간 물감으로 쓴 한자가 적힌 부적을 접어, 알게 또는 모르게 식구들 옷깃에 숨겨 넣기도 했다.

 

할머니가 부정한 기운의 잡귀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었던 방법들이다. 

 

작가 정세랑의 장편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으며 할머니를 떠올리게 되었다. 방법과 대상이 다르기는 하지만 안은영도 주변 사람들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잡귀들과 싸운다. 

 

안은영은 보통의 보건교사가 아니다. 직업은 보건교사지만 그녀에게는 악한 기운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런 악한 것들을 처치하고 쫓아내는 ‘퇴마사’ 역을 자처한다. 그녀가 근무하는 학교 설립자의 후손인 홍인표는 그녀에게는 없는 에너지를 가졌다. 두 사람은 힘을 합하여 기이한 괴물, 미스터리한 현상, 학교 곳곳에 숨어 있는 괴상한 힘들과 싸우며 주변 사람들을 지켜낸다.

 

책에는  두 사람 외에 비슷한 초능력을 지닌 다른 인물들도 등장한다. 이들은 왜, 어떻게 이런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 악령들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붙는지에 대한 전후 설명이  부족하다. 

 

모두 10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단편을 모은 연작소설 같다. 정세랑은 작가의 말에서 “오로지 쾌감을 위해 썼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말처럼 책은 재미있고 시원하게 읽힌다. 미국의 마블 시리즈처럼 다소 황당한 이야기지만 재미있다. 깊게 생각할 것도, 심한 감정의 고저장단도 없다.

 

작가는 독특한 소재로 톡 튀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어느 도서 출판사는 이 책을 ‘본격 학원 명랑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 이건 학생잡지에 실릴만한 이야기들이다.

 

그림 없는 그래픽 소설 같은 느낌의 책이다. 이 책은 동명의 넷플릭스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던 모양인데, 나는 드라마는 찾아보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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