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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같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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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2021. 8. 10.

아마존이 만든 영화 ‘패터슨’(Paterson)을 보았다. 제목 패터슨은 주인공 (아담 드라이버)의 이름이며 그가 사는 소도시의 이름이기도 하다.

 

뉴저지의 작은 도시 패터슨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시내버스 운전사다. 그에게는 인도계 여자인 아내가 있다. 영화는 일주일 동안 그들에게 벌어지는 일을 보여 준다. 패터슨은 아침에 눈을 뜨면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다. 그는 6시 10분 경이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월요일 아침 눈을 뜬 그는 손목시계를 집어 시간을 확인한 후 왼쪽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잠들어 있는 아내에게 입맞춤을 한 후, 어제저녁에 꺼내 놓은 옷을 들고 씻으러 간다. 아침으로는 시리얼을 먹고, 아내가 싸 놓은 도시락을 들고 집 근처 차고로 출근을 한다. 배차원이 와서 출발시간을 알려줄 때까지, 그는 운전석에 앉아 노트에 시를 쓴다.

 

퇴근 후 집에 와서는 아내가 만들어 주는 저녁을 먹고 아내가 아끼는 애완견과 산책 길에 나선다. 산책 길에는 작은 술집이 있다. 술집 앞에 개를 묶어두고 바에 들어가 맥주 한잔을 마시고 귀가한다. 시곗바늘이 돌듯 그는 똑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남들이 보면 무미건조한 일상이지만 그는 매일 아름다운 시를 쓴다. 성냥갑을 보고도 시상을 떠올려 멋진 시를 써낸다. 그는 시를 발표한 적도 없으며, 누구에게 보여 준 적도 없다. 그의 아내는 그에게 이런 멋진 시는 발표해야 한다며 시를 복사해 달라고 조른다. 그는 마지못해 주말에 복사해 주기로 약속한다.

 

정해진 루틴(routine)에 따라 톱니바퀴 돌듯 같은 궤적을 도는 그에 반해, 패터슨의 아내는 예술적이며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그녀는 페인트로 무니를 그려 넣은 천으로 커튼을 만들고 옷을 만든다. 벽이며 방문에 페인트를 새로 바르고, 컨트리 싱어가 되겠다고 기타를 산다.

 

영화를 보며 패더슨에게서 나를 보았다. 나 역시 일상에 젖은 삶을 좋아한다. 예측 가능한 반복의 편안함이 좋다. 음식도 입에 맞는 것을 돌아가며 먹는 것을 좋아한다. 식당에 가면 늘 같은 메뉴를 선택한다. 

 

반대로 아내는 패터슨의 아내 같다. 가구의 위치를 바꾸고, 멀쩡한 커튼을 갈고, 새로운 음식을 찾아 먹기를 좋아한다. 

 

금요일 오후, 패터슨의 버스가 길에서 서 버린다. 승객들을 버스에서 내리게 한 후, 회사에 전화를 하려는데, 공중전화가 망가져 있다. 그는 핸드폰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결국 버스 승객이었던 꼬마의 핸드폰을 빌려 회사에 전화한다. 

 

토요일 아침, 컵케이크를 구워 파머스 마켓에 나간 그의 아내는 $286를 벌었다며, 그에게 한턱내겠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영화까지 보고 귀가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내의 애완견이 잘게 찢어 놓은 그의 시작 노트다. 그동안 써놓았던 시가 모두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망연자실할 뿐 화를 내지는 않는다. 

 

생각해 보면 패터슨이 시작노트를 잃은 것은 어머어마한 사건이다. 브런치에 올려놓은 원고들이 하루아침에 몽당 사라진다면, 그리고 내게는 단 한 줄의 자료도 남아있지 않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마도 나라면 그 강아지를 갖다 버리라고 고함을 쳤을 것이다. 아니, 한 차례쯤 발로 찼을 것 같다. 패터슨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그의 고통은 더 컸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 아내가 낙담한 그의 기분을 살려주려고 하지만 그는 잠시 산책을 하겠노라고 집을 나선다. 근처 강가의 공원 벤치에 무심히 앉아 있는데, 일본 관광객이 그의 곁에 다가와 앉는다. 시인이라는 일본인은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선물이라며 새 노트를 한 권 패터슨에게 주고 간다. 노트를 받아 든 그는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다시 시를 쓴다. 

 

영화에서는 그가 시를 쓸 때 소리 내어 낭송하며 자막도 함께 뜬다. 쉬우면서도 아름다운 시들이다. 한 편의 시집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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