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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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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2021. 8. 20.

작가 김연수의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은 시인 ‘백석’의 이야기다. 치밀한 자료조사와 작가의 상상력으로 북한에 살았던 백석의 삶을 그리고 있다.

 

백석은 8.15 해방 이후 평양에 머물며  비서 겸 러시아어 통역으로 스승인 조만식을 도왔다고 한다.  6.25 전쟁 전후로 후배인 고정훈이 그에게 월남할 것을 제의했으나, 그는 4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1. 조만식 선생을 모셔야 한다.

2. 북에는 가족과 친지가 많아, 자신만 월남하면 남은 가족과 친지가 고초를 겪을 것이다.

3. 가족과 친지가 모두 같이 간다 해도, 남에는 생활 터전이 없어 더 힘들지도 모른다.

4. 이젠 감시가 심해져, 가고 싶어도 못 간다.

 

함경남도 홍원이 고향이었던 우리 아버지는 20대 초반에 단신 월남한 실향민이다. 미국에 이민 온 후, 북한에 가서 형제를 만나고 오셨다. 아버지 탓에 가족과 친지들이 겪었던 힘든 삶을 보고 듣고 오신 후에는 자주 죄책감과 후회에 빠지고 하셨었다. 

 

종전이 된 북한에 불어닥친 세력다툼과 개혁의 물결은 문단에도 밀려와, 소설과 시에도 주체사상과 독재자에 대한 찬양과 충성의 내용을 담아야 했다. 향토색이 짙은 서정적인 시를 쓰던 백석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 하지 않았나. 글 쓰는 사람인 백석은 나름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찬양과 충성의 시를 쓰기도 했다. 그는 주로 번역과 동시를 쓰며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고 한다. 전쟁 중, 서울이 북한의 손에 떨어지자 월북한 문인들이 서울로 와 정치 선동을 했지만, 그는 평양에 남아 번역에만 집중했다. 1년에 10여 권씩 번역을 했다고 한다.

 

1958년에는 당의 새로운 문예정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양강도로 추방됐다. "사상과 함께 문학적 요소도 중요시 하자"는 주장을 했다가 숙청을 당한 것이다. 1959년에는 부르주아적 잔재로 비판을 받고 외딴 양강도 삼수군의 협동농장 축산반으로 쫓겨났으며, 1962년 이후로는 북한의 문단에서 자취를 감춘다.

 

삼수군에서는 양치기와 농사를 지었으나, 일이 서툴러 이웃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부인 이 씨의 말에 따르면, 밤새 밭에 나가 연습을 해 나중에는 능숙하게 되었다.

 

평양에서 유명한 시인이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위 사람들이 자녀의 교육을 맡겨, 그는 젊은이들의 문학 관련 교육에 힘썼다고 한다. 지역 당국은 그런 그를 모른 척 내버려 뒀다. 그 후 1996년 사망하기까지, 그에 대해 알려진 자료는 없다. 화려한 문인의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다든가 하는 비참한 삶을 산 것도 아니다. 그는 죽는 날까지도 북한 문단으로는 돌아오지 못했다.

 

책을 읽으며 50-60년대 북한의 문화계에 닥쳤던 변화를 엿볼 수 있었다. 해방이 되며 북한에는 소련이, 남한에는 미국이 들어왔다. 남한에서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득세를 했다. 당연히 북한에서는 러시아어를 하는 사람들이 활개를 쳤다. 

 

하지만 종전이 된 후에는 주체사상을 앞세워 서방과 교류가 있고, 북한에 비해 표현이 자유로운 소련을 배척하는 운동이 벌어진다. 유학을 하고 돌아왔던 소련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밀려났다. 

 

가끔씩 한국에서 벌어지는 친미/반미에 대한 논란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지나친 민족주의는 결국 단절을 가져오게 된다. 문화나 정치도 적당한 순환이 필요하다. 사람은 피가 멈추면 죽게 된다. 사회와 국가도 멈추면 퇴보한다. 남의 것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면, 우리 것도 남에게로 흘러나가게 되어 있다. 

 

좋은 것을 좋다고 하고, 싫은 것을 싫다고 할 수 있는 세상에 사는 우리는 얼마나 행운인가. 

 

P.S. 책에는 저자의 사인이 들어 있었다. 일련번호까지 찍힌 것을 보면 사인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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