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군사 자료

충실한해병 2009. 8. 24. 00:54

제1話 溫故知新 (38)국군의 前身 광복군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우리 국군은 올해로 건군 55주년을 맞이했다. 55년이라는 국군의 연륜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국군조직법이 공포된, 즉 건군의 법적 형식과 절차가 이뤄진 1948년을 원년(元年)으로 산출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국군은 아이가 모체에서 열 달 동안 태아로 자라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에 견주면 무려 41년의 태아기를 가졌다. 우리 국군은 1907년 일본의 강제에 의해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가 의병(義兵)으로 항일 무력투쟁을 벌이면서 잉태돼 독립군에서 광복군(光復軍)으로 이어지는 태아기를 보냈다고 하겠다.

이러한 국군의 역사적 명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정부군으로 광복군을 창설하면서 발표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임시정부는 이 보고서에서 일본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킨 8월1일을 광복군 창설일로 정하고 광복군이 대한제국 군대의 후신으로 의병·독립군의 항일투쟁정신과 그 활동을 계승한 정통무장(正統武裝) 단체임을 밝히고 있다.

나는 몇 해 전 중국 충칭(重慶)시에서 거행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복원 개관식에 참석, 광복군의 유적을 답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광복군 창설 전례식(典禮式) 장소와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등을 살펴보면서 이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광복군에 참여, 악전고투했던 분들에게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그리고 `광복군의 국내 진공(進攻)작전이 성공했더라면…'이라는 역사의 가정(假定)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1941년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연합국 진영에 가담했다. 이에 따라 광복군은 연합군의 합동작전에 참가하는 한편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또 미국과 군사합작을 하고 OSS(미국 정보전략처)의 특수훈련을 받은 대원들로 정진군(挺進軍)을 편성, 국내 진공을 계획했으나 일본의 조기(早期) 항복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만일 광복군이 국내 진공에 성공했다면 임시정부는 한반도의 전후처리과정에서 당당한 발언권을 갖게 되고 광복군도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치안유지 등 건국의 기틀을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을 것이다. 따라서 미·소 점령군의 진주나 남북분단도 없이 단일국가를 세웠을 것이고 동족상잔(同族相殘)의 6·25전쟁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광복에 우리 군대가 참여할 기회를 놓침으로써 광복 후 미 군정 당국이 국군 창설을 주도하며 창군과정에서 `광복군 중심의 국군 편성'을 수용하지 않은 채 과거에 군 경력만 있으면 출신·성분을 크게 따지지 않고 참여시켜 국군의 뿌리인 광복군의 정통성을 명실공히 계승하지 못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통성은 어느 조직체를 막론하고 그 조직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명분으로 조직 구성원의 명예와 긍지, 그리고 사기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국군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먼저 국군의 뿌리가 구(舊)한국군 -의병-독립군 -광복군으로 이어져왔음을 국군장병은 물론 국민의 인식 속에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

또한 국군의 전신인 광복군의 정신과 위업을 발굴·재조명하고 광복군 출신으로 창군에 참여, 원대한 뜻을 펴지 못하고 군생활을 마감한 분들을 재평가해 그 진면목을 국민에게 현양(顯揚)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호국의 전당인 전쟁기념관에 광복군동지회·창군동우회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음은 여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