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군사 자료

충실한해병 2009. 8. 24. 00:55

제1話 溫故知新 (40)국군 창군 `산파역' 맡은 이범석 장군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국군 창군(創軍)에는 민간인 신분으로 광복 후 바로 준군사단체인 `남조선경비대'에 입대한 국내파와 광복 전에 일본군(만주군 포함)·중국군(장제스 군대)·광복군으로 활동하다 입국한 해외파가 두루 참여했다. 그런데 국군 창군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1948년 정부 수립 당시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지낸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장군이다.

1900년 서울에서 출생한 이범석 장군은 1915년 경성고보 재학 중 중국으로 망명, 윈난(雲南)에 있는 중국 육군강무학교(陸軍講武學校) 기병과(騎兵科)를 졸업하고 만주로 진출했다. 그리고 1920년 그 유명한 청산리(靑山里) 전투에 중대장으로 참가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후 이범석 장군은 소련합동민족군·중국군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 광복군 창설을 계기로 1941년 한국 광복군 참모장에 취임,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광복군 중장으로 귀국했다.

꿈에 그리던 조국 땅을 밟은 이범석 장군은 이 나라 청년들을 광복된 새 나라의 역군으로 조직화하고 훈련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일이라 판단, 1946년 10월 `국가지상, 민족지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우익 민족청년운동 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약칭 족청)을 창설한다.

당시 족청에 참여한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단장에 이범석, 부단장에 안호상(安浩相), 전국위원에 김관식(金觀植)·김활란(金活蘭)·이철원(李哲源)·현상윤(玄相允)·이용설(李容卨) 외 32명, 이사에 백낙준(白樂濬)·최규동(崔奎東) 외 10명, 상무이사에 김형원(金炯元)·노태준(盧泰俊)·박주병(朴柱秉)·설린(薛麟)·김웅권(金雄權) 등이 선출됐다.

족청은 각 지방 지도급 인사들의 적극적인 호응과 협조뿐만 아니라 미 군정 당국으로부터도 재정적 지원을 받아 단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창립 당시 30명에서 9개월 후에는 20만 명, 창립 2주년에는 무려 120만 명의 단원을 거느리는 전국적인 막강한 힘의 대조직을 형성하게 됐다. 족청은 비군사·비정치를 단시(團是)로 정했으나 이념적 조직이었던 족청의 뿌리는 족청계(族靑系)라는 말이 생길 만큼 그후로도 오랫동안 정부 수립기의 인재 풀로 남게 된다.

물론 족청의 배타적 이념성 때문에 폐단도 생겨났다. 창군의 산파역을 맡은 국방부장관이 족청의 단장을 했기에 족청 출신들이 사관학교에 대거 입소해 소위 족청계가 군에서 득세한 측면이 있었다. 이를테면 5·16 군사혁명만 해도 우여곡절 끝에 순수 육사8기생들이 주축이 된 국내파가 거사한 것이지만 원래는 족청계 장교들이 자기들끼리 모의해 일으키려 했던 것이다.

나는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이 초대 국방부장관에 독립운동에 참여한 광복군 출신을 임명한 것을 매우 잘한 일로 생각한다.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철기 이범석 장군 같은 분이 국방부장관을 했기에 과거 일본군에서 고급장교를 지낸 분들도 치욕스러운 생활을 청산, 참회하는 뜻에서 우리 군대에 참여하게 됐기 때문이다. 물론 개중에는 친일(親日) 행적이나 반(反)독립군 활동에 대한 뉘우침 없이 광복이 되자 약삭빠르게 변신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신태영(申泰英)·신응균(申應均) 부자(父子) 장군의 사례에서 보듯 우수한 일본군 출신 고급장교들이 국군에 들어와 자신의 과거 활동을 반성하고 창군에 임한 것은 “일본군에 충성한 것을 속죄하는 차원에서라도 우리 군대에 들어와야 할 것 아니냐”는 이범석 장군의 말씀에 설복당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설득이 주효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범석 국방부장관이 광복군 출신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감사히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