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군사 자료

충실한해병 2009. 8. 24. 00:56

제1話 溫故知新 (41)배속장교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이범석 장군과 6·25전쟁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학도군사훈련을 실시하고 배속장교를 양성한 공로다. 이범석 장군은 6·25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이라는 중책에서 물러나 공직을 맡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범석 장군은 전직 국방부장관이자 군 원로로서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고 공산화를 막는 데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공헌을 했다.

신생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건국 초기 국방의 중요성을 고려해 초대 국무총리에 이범석 장군을 지명하고 국방부장관을 겸하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승만은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이라는 세력과 국민적 지지 기반을 갖고 있는 이범석 장군을 경계해 광복군 출신 전체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같은 의도 하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족청을 포함하는 모든 청년단체를 대한청년단으로 통합, 자신이 총애한 신성모와 김윤근에게 맡기고 그들에게 전폭적인 신임을 주었다.

바로 이같은 배경에서 상선 선장 출신인 신성모는 고속 승진을 거듭해 대한청년단 단장, 제2대 내무부장관(1948~49년)을 역임한 후 제2대 국방부장관(1949~51년)으로 재임하면서 1950년 4월3일 이범석 국무총리가 사임하자 국방부장관과 국무총리서리를 겸직(1950년 4월21일~50년 11월22일)하는 막중한 직책으로 6·25전쟁을 맞은 것이다.

그러나 군을 지휘해본 경험이 없는 신성모 국방부장관 겸 총리서리가 갈팡질팡하고 상황이 악화일로를 거듭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군사 경력자의 자문을 받아 난국을 타개하라”고 지시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신성모 총리서리는 전쟁 발발 다음날인 6월26일 오전 10시에야 군 관계 원로들을 국방부로 소집해 비상회의를 가졌다.

신성모 총리서리 주재 하의 이날 회의에 참석한 인사는 군 원로 중에서 유동열(전 통위부장)·지청천(전 광복군 사령관)·이범석(전 국무총리)·김석원(전 제1사단장) 등과 현역인 채병덕·이응준·김홍일 장군 등 8인이었다.

이날 회의에서도 채병덕 참모총장은 “염려할 것 없습니다. 격퇴는 시간문제입니다”라고 호언장담했으나 이범석 장군은 “이 자리에서 결정해야 할 것은 한가지밖에 없다”며 “그것은 서울을 사수하느냐, 아니면 포기하고 내려가느냐 하는 문제다”라고 단언했다. 이장군은 “서울을 포기할 경우 시민들을 전부 피난시킨 뒤 한강다리를 끊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석원·김홍일 장군도 이에 동조했다.

족청의 단장·부단장이었던 이범석 국방부장관과 안호상(安浩相)문교부장관은 1948년 중·고교 학도호국단을 조직, 학생들을 훈육할 교련선생 격인 배속장교(配屬將校)를 양성하게 된다. 배속장교 제도는 일제 치하에서도 군국주의 교련을 가르치기 위해 존재했다. 그러다 광복이 되어 없어졌다가 주로 체육선생들을 사관학교에 데려와 단기교육을 시켜 이들 배속장교들을 곧바로 각급 학교에 조직된 학도호국단 훈련 교관으로 임명했다. 또 서울사대 내에 국립훈련소를 설치, 간부훈련도 실시했다.

6·25전쟁 당시 나는 중대장으로 전투에 참여하는 한편 모병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 당시만 해도 길을 가는 체격 좋은 청년들을 보면 M1 소총 8발을 쏘게 하고 바로 현역으로 종군시킬 만큼 훈련의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비록 단기간이지만 평시에 군사교육을 받고 중·고생 교련을 가르쳐 온 배속장교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유비무환(有備無患)의 간성(干城) 자원이었다. 또 이들을 육성해 놓았기에 수백 명의 이 `예비역 장교'들을 현역으로 전과시켜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이들은 전공(戰功)도 많이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