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군사 자료

충실한해병 2009. 8. 24. 00:57

제1話 溫故知新 (42)창군과 다양한 인적자원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국군이 창군(創軍) 과정에서 독립군(광복군)·중국군·일본군·민간인 출신 등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적 자원을 수용했는데도 출신별로 심각한 갈등이 없었던 것은 이범석 국방부장관 같은 광복군 원로들이 군 수뇌부에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범석 장군처럼 창군의 정통성을 가진 원로가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인적 자원을 한데 묶어 건군의 기초를 잘 다진 덕분이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 수반이자 광복군 통수권자인 김구(金九)국무위원회 주석(主席)이 서울로 귀환하기 전인 1945년 9월3일 임정(臨政) 특파사무국(特派事務局)을 통해 공표한 `임정의 당면정책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하는 성명'의 제13항은 `적군(敵軍)에게 피박(被迫) 출전(出戰)한 한적군인(韓籍軍人)을 국군으로 편입하되 맹군(盟軍)과 협상 진행할 것'이라고 돼 있다.

사실 그 당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적 자원 가운데 가장 잘 훈련된 군대는 일본군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한국인으로 일본군 최고위 장교에 올랐던 홍사익(洪思翊)중장을 구명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범재판에 회부돼 교수형을 선고받은 홍사익 장군을 특별사면해주도록 미 군정에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홍사익 장군은 경기도 안성 출신으로 1905년 15세 나이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1909년 무관학교가 폐쇄돼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육군사관학교(26기)에 이어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일본군의 육군대학 졸업자는 주장(主將)까지 진급하는 것이 관례인데 한국인으로는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일본 육사29기)과 홍사익 장군 두 명만이 육군대학을 나와 중장까지 올라갔고 만주군에서는 정일권(丁一權)장군(군영·대장 예편·작고)만이 육군대학 과정을 거쳤다.

1941년 육군소장으로 진급해 북지(北支)파견군 여단장 등을 역임한 홍사익 장군은 일본의 패전을 1년 앞둔 1944년 남방총군(南方總軍) 병참감 겸 포로수용소장으로 필리핀 전선에 부임, 뒤이어 중장으로 진급해 종전을 맞았다. 그러나 그는 포로수용소 책임자로서 연합군 포로에 대한 부하들의 잔학행위에 책임을 지고 전범 법정에 서야 했고,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태평양전쟁 A급 전범으로 교수형을 언도받고 필리핀 현지에서 사망했다.

그는 한국인으로 최고 계급에 올랐으면서도 일제가 한국인에게 강요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끝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국내에서는 건군에 필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 일부 인사들이 맥아더 사령부에 진정서를 내는 등 구명운동을 폈고, 일본에서도 패전 직전 작전권이 없는 보급지휘관이었던 그가 A급 전범으로 처단되는 것에 대해 부정적 여론이 없지 않았다.

홍사익 장군과 일본 육사 동기이면서 국군 창군의 산파역을 맡은 이가 바로 이응준(李應俊) 장군이다. 이 밖에 한국인으로 일본군 고급장교에 오른 사람 중 국군 창군에 참여한 일본 육사 출신은 신태영·유승렬(26기)장군과 김석원(27기)장군 등이 있다. 이종찬·채병덕은 49기이고 박정희·이한림은 54기에 해당된다.

이처럼 기수에 격차가 나는 것은 일본 육사가 한동안 한국인 입학을 허용하지 않다가 17년 만에 재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창군 초기에는 일본 육사 출신의 경우 부자(父子·신태영-신응균, 유승렬-유재흥)뿐만 아니라 장인·사위(이응준-이형근)가 함께 근무하면서 아들이 아버지보다 계급이 높은 과도기적 현상을 낳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