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군사 자료

충실한해병 2009. 8. 24. 00:58

제1話 溫故知新 (43)美군정하 軍수뇌 발탁 이응준 장군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일본 육사(26기) 출신으로 국군 창군의 산파역을 맡은 이응준(李應俊·군영·중장 예편·작고)장군은 우리나라 군인 가족의 대표적인 전형이다.

이응준의 장인은 구일본 육사를 마친 후 대한제국 군대에서 활동하다 군대가 해산되자 만주·시베리아로 망명, 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이갑(李甲)이다. 이갑 또한 유동열(柳東說)과 함께 일본 육사15기 출신이다.

유동열은 나중에 임시정부의 참모총장이 됐으며 이갑 또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재목으로 주목받았지만 3·1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7년 러시아령 시베리아의 니콜리스크에서 41세로 병사, 임시정부에 가담하지 못했다.

이응준의 맏사위 이형근(李亨根·군영·대장 예편·작고)장군 또한 일본 육사(56기) 출신이다. 광복 직전 일본군 소좌까지 진급, 제13야포연대 중대장을 지냈고 광복 후 미 군정 하에서 경비사관학교 초대 교장을 지낸 인물이다. 이형근은 그 후 대장까지 승진해 육군참모총장·합참의장을 지냈다.

이형근은 일본군 제3사단에 소속돼 인도차이나·베트남 전선에서 싸웠으며 광복 후 이응준의 집에 숙식하면서 그를 보좌하다가 사위가 됐다. 이응준은 광복 후 미 군정청 군사고문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사위를 군사영어학교(군영)에 입교시켜 미 군정 하의 경비대 요직을 맡게 했다.

그 후 이형근이 군사영어학교가 폐교되고 나서 새로 출범한 조선경비사관학교(미 군정의 명칭으로는 조선경비대훈련소) 초대 교장에 임명된 데에는 미 군정청 군사고문인 장인의 영향이 작용했을 것임은 얼마든지 추측 가능한 일이다. 그는 `대한민국 군번 1번'으로 유명하다.

이형근의 동생 이상근(李尙根·육사1기·준장 예편)장군 또한 미 군정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했으나 폐교되는 바람에 육사의 전신인 경비사관학교 1기로 넘겨졌다. 이상근 또한 학도병 출신의 일본군 소위로 미 군정 시기에 육사1기를 마친 후 수도사단 참모장을 지냈으며 6·25전쟁 때 대령으로 전사, 준장으로 추서됐다.

이응준은 화려한 경력이 말해주듯 일제의 군국주의 정신에 철저히 물든 일본 군인이었다. 그는 일본의 군국주의 전쟁이 본격화됨에 따라 군대를 그만두고 예편되거나 일본군 부대를 탈출, 독립군에 가담한 소수의 조선인 일본 육사 출신 장교들과 달리 일본군 장교로 출세의 길을 걸었고, 일제 식민지 지배를 계승한 미 군정 하에서 한국군 최고 수뇌로 발탁돼 한국군 창설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의 군국주의 정신은 1943년 8월 징병제 실시의 날을 기념해 매일신보와 회견한 아래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이응준은 북지(北支)전선에서 혁혁한 무훈을 떨치고 돌아온 일본군 대좌로 알려져 있었으며 징병제 실시를 앞둔 조선 청년들에게 일제의 군국주의 정신을 고취시키려고 애썼다.

“징병제 실시에 의해 조선 청년에게도 국가 방위의 숭고한 병역 의무가 부여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무상(無上)의 광영이며 명예이다. … 조선 청년들도 이 국방 의무의 분담 수행에 의해 비로소 한 사람 몫의 남자가 되어 가슴을 펴고 대도(大道)를 활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 비상시국에 있어 국가 방위의 최고 책무를 분담하게 된 것은 진실로 감사·감격에 이기지 못하는 터로 조선 청년인 자는 크게 감분, 흥기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