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군사 자료

충실한해병 2009. 8. 24. 00:58

제1話 溫故知新 (44)이응준 장군(中)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광복 당시 50대의 중견급 군장교로 한국군의 모태인 미 군정의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한 원로급 일본군 장교는 대부분 일본 육사 제26, 27기생들이었다.

1907년 군대 해산 후 통감부는 구한국 정부의 군대와 무관학교를 폐지하고 사관 양성을 일본 정부에 위임하게 했다. 이에 따라 당시 무관학교의 1, 2학년 재학생 중 44명을 선발해 일본에 유학시켰는데 이들이 후일 육사 제26, 27기생이 됐다. 이처럼 일본 육사 제26, 27기생의 유학 경위는 부국강병과 새로운 군사기술을 익히기 위해 유학의 길을 떠난 대한제국 말의 일본 육사 유학생들과는 달랐다.

제26, 27기생 중에는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중장까지 승진해 종전 이후 전범으로 처형당한 홍사익(洪思翊)장군과 광복 후 한국군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응준(李應俊)·신태영(申泰英)·김석원(金錫源)장군이 포함돼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이응준 장군은 친일행적과 관련해 이견이 많았다.

1920년대 초 이응준은 대부분의 나머지 동기생과 마찬가지로 조선군사령부 예하 제19사단(함북 나남)과 제20사단(서울 용산)에 전속돼 조선으로 돌아왔으며 1920년대 중반에 대위, 1930년대 중반에 소좌로 승진했다. 이응준은 다른 동기생들과 마찬가지로 1930년대 말 중좌로 진급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대좌로 승진해 원산기지사령부 수송관직을 맡았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대좌까지 진급해 광복될 때까지 일본군에 복무한 한국인 장교 가운데 일본군에서 가장 활약이 컸던 사람으로는 김석원과 함께 이응준이 손꼽힌다. 두 사람은 시베리아 출병에 참가한 것을 비롯,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에도 출정했다. 이들이 이끄는 소속 부대가 싸운 러시아 적군이나 중국군에는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이청천(李靑天) 등 독립군들뿐만 아니라 조선인 항일 무장투쟁 부대가 들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광복 후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점령 초기부터 한국인 군대 창설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미 점령군사령관 존 R 하지(John R Hodge)중장은 미군의 많은 잔일을 덜어줄 병력을 필요로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 수립에 대비해 조기에 군대를 창설코자 했다.
이에 따라 새 국방사령관에 아서 S 챔페니(Arthur S Champeny)대령을 임명했다. 같은 해 말께 챔페니 국방사령관은 국방사령부 고문인 이응준과 함께 이른바 `뱀부 계획'(Bamboo Plan)을 수립, 일정한 주둔지를 근거로 하는 필리핀식 경찰예비대와 비슷한 군대의 창설안을 입안했다.

미 군정하 초기 한국 군대의 명칭이 정식 군대가 아니라 조선경비대(Korean National Constabulary)라고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정부 수립 이전의 초기 육사 또한 정규 육사가 아니라 일종의 조선경비대훈련소(1946년 5월1일 태릉에 설립)라고 불렀다. 이렇게 하여 정부 수립 이전에 총 5개 여단·15개 연대 규모의 군대가 조직됐으며, 이때 충원된 일본군·만주군 계열의 군 장성들이 이후 한국 군부의 주축이 됐다.

이응준의 영향은 군 창설 계획안의 수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군 세력 내부에 일본 육사 출신을 대거 진출시킨 데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는 이응준과 함께 미 군정 군사고문으로 발탁된 원용덕(元容德)장군(군영·중장 예편)에 의해 만주군의 진출이 용이했던 것과 비슷하다.

이응준의 `화려한 경력'은 식민지 조국의 암담한 상황에서 개인적 야심과 민족적 양심 속에서 일본군 장교생활을 그만두거나 탈출, 독립투쟁에 가담했던 사람들과는 무척 대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