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군사 자료

충실한해병 2009. 8. 24. 01:00

제1話 溫故知新〈45〉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 장군-下-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이응준(李應俊)초대 육군참모총장(군영·중장 예편·작고)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6·25전쟁 전에 발생한 최대 규모의 국군 집단 월북사건이다. 지금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6·25전쟁 전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1949년 5월4일, 춘천에 주둔한 제8연대 제1대대장 표무원(表武源)소령은 대대병력을 이끌고 야간행군을 빙자, 월북했다. 다음날에는 홍천에 본부를 둔 같은 연대 제2대대장 강태무(姜泰武)소령이 야간공격 훈련을 가장, 대대병력을 출동시키고 38도선을 월경해 북한군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태무·표무원 두 소령은 제주도에서 체포된 오일균(吳一均·육사2기·사형됨)의 세포로 그들의 정체가 폭로될 것을 짐작하고 북한에서 남파한 간첩과 접선, 월북을 계획했던 것이다. 훈련에 참가한 양 대대 장병들은 38도선을 넘은 뒤에야 비로소 대대장의 음모를 간파하고 사전에 배치된 북한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그러나 일부 병력은 아무것도 모르고 우물거리다가 북한군에 붙들리고 말았다. 당시 제1대대는 출동병력 456명 중 239명이 탈출했으며 제2대대는 294명 중 143명이 탈출했다.

그리고 5일 뒤인 5월10일에는 해군 제2특무정대 508정이 주문진 근해에서 경계임무 수행 중 월북했다. 불과 1주일 사이에 잇달아 발생한 이 사건은 대내외에 적지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중국내전이 공산당 측에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던 때인 만큼 미국에 군원(軍援) 무용론(無用論)이 거론되는 요인의 하나가 됐다.

표무원은 일본 도쿄의 다이세이(大成)중학을 졸업하고 일본군 군조(軍曹·중사)를 지냈고, 강태무는 도쿄의 릿쿄(立敎)대학 예과를 마치고 학병으로 끌려갔다. 둘 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과 함께 육사2기생이고, 월북 당시 박정희 소령은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으로 있으면서 반란(여순반란) 기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을 때였다.

남로당 군사부가 군부에 심어놓은 프락치인 박정희 소령이 1948년 10월19일에 터진 여순반란 사건으로 체포됐으나 살아남은 이유는 군부 내의 좌익을 색출하는 숙군(肅軍) 수사에 적극 협력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소령은 자신이 알고 있는 군부 내 남로당원의 명단을 모두 털어놓아 형제처럼 친했던 육사(당시는 경비사관학교) 동기생인 오일균·조병건·이재복 등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죄책감 때문에 한참 괴로워했다. 동기생들의 집단 월북도 그 무렵에 벌어진 사단(事端)이었다.

박정희 소령은 군법회의에서 좌익 혐의 사실을 순순히 시인하고 `파면·무기징역·전 급료 몰수' 판결을 받아 재심에서 징역 15년으로 감형되고, 1949년 4월18일 이응준 육군참모총장의 형(刑) 확인과정에서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게 된다. 정식으로 옷을 벗게 돼 비공식 촉탁문관이 된 것은 바로 동기생들의 집단 월북 사건이 터진 직후였다. 이응준 참모총장은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육사에 가면 2기생들이 모교에 기증한 사열대에 동기생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월북한 두 사람의 이름만 빠져 있다. 강태무는 몇 년 전까지 북한 당국이 납북인사들을 중심으로 대남 선전활동과 통일전략 선전에 활용하기 위해 조직한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의회' 서기국장을 지냈다.

군은 이 사건 이후 월북에 대한 조치로 홍천지역의 제6사단 제8연대를 수도경비사단으로 예속 변경하고 수도경비사단의 제2연대를 홍천지역에 배치한 상태에서 6·25전쟁을 맞게 된다. 일본군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경험 많은 참모총장이 물러나고 경험이 일천한 젊은 총장에게 지휘권을 맡긴 것도 6·25전쟁 패인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