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회고

충실한해병 2009. 10. 9. 02:08

바다의 사나이·영원한 해병-74-원산·함흥 방어 작전


미 해병대가 혹한 속에 철수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그들을 돕는 후방지원작전에 동원됐다.

적이 아군의 철수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함흥과 흥남·원산 일대의 안전을 확보하는 임무였다.

원산방어작전은 11월 말부터 한국 해병 제1대대에 의해 먼저 착수됐다.


해안선을 따라 도망쳐 올라오는 적을 섬멸하기 위해
강원도 고성지구에 주둔했던 제1대대가 북상해 갈마반도에 도착했다.
이때 유엔군 철수 결정이 내려져 지원작전에 동원된 것이다
북한지역 첫 상륙지인 원산은 미군의 병참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철수작전이 이만저만 복잡하지 않았다.

미 해병 제1사단으로 구성된 장진호부대와
육군10군단의 혜산진부대에 각종 장비와 보급품을 공급하는 기지였던
원산 병참부대는 엄청난 규모였다.
드넓은 야적지에 쌓여 있는 갖가지 전쟁 물자와 장비를 배에 싣고 가는 것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부대를 안전하게 철수시키려면 적의 도발을 잠재우지 않으면 안 됐다.

11월 말에야 목포에서 달려온 제3대대도
원산 교외에 배치돼 덕원 안변 방향에서 가해지는 적의 압력을 막아냈다.
우리 해병 용사들은 미군 비행장 근무 부대의 철수를 끝까지 엄호하고 12월 9일에야
미 해군 수송선 편으로 철수했다.

미해병대 철수 지원작전에 동원

같은 시기에 수행한 함흥방어작전은 전략적으로 더 큰 의미를 띠고 있었다.
함흥은 장진호부대와 혜산진부대가 통과하는 길목이었다.
이런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12월 초까지도 고성지구에 위치하고 있던
해병대사령부까지 그곳으로 옮겨가 현장 가까이에서 작전을 지휘한 것이다.

함흥방어작전에는 한국 해병대 제2대대와 제5대대가 동원됐다.
작전의 중요성 때문에 미 육군7사단 병력도 가세했다.
장진호부대의 철수를 방해하기 위해 중공군이 하갈우리 일대를 겹겹이 포위한 가운데
밑에서 협공을 가하려는 적의 기도를 저지해야만 했다.
함흥 서북방 흑수리 일대에서 고전 중인 미 육군7사단 제7연대의
구원도 화급한 일이었다.

영흥만을 장악한 미 해군의 함포사격 지원과
함재기들의 공중 지원에 힘입어 미군의 철수를 엄호한 함흥방어작전은 12월 14일에야 끝났다.
미군 장병들의 철수선 승선이 끝날 때까지 함흥 외곽을 지킨
우리 해병대는 15일 미군 연포비행장으로 철수, 미군 수송기 편으로
부산 수영비행장에 돌아왔다.

병력·장비 등 안전하게 해상수송

1950년 12월 초부터 24일 사이에 전개된 흥남철수작전에서
남한 땅으로 철수한 인원은 유엔군과 한국군 병력 10만5000명, 피란민 9만8000명(추정)이었다.
아울러 차량 1만7500대와 연료 2만9000여 톤을 포함한 화물 35만 톤이 해상으로 수송됐다.

군 병력과 장비는 당연히 실려 오는 것이지만
그 많은 피란민이 내려오게 된 데에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많다.
흥남부두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의 현장이다.
그곳에 몰려든 피란민들은 몇 사람의 박애정신에 힘입어 자유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미 10군단 민사부 고문 신분으로
아몬드 10군단장 통역관이었던 현봉학 씨였다.
신현준 사령관 통역관이었던 그는 유창한 영어 실력 때문에 알몬드 장군에게 발탁됐다.
자신의 고향인 리치몬드 의과대학 출신이라는 인연 때문에
알몬드 장군은 그에게 더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고향 사람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고 내려오려고 동분서주하는 그를
미 해병대 포니 대령이 적극 도왔다.
현씨는 철수작전 탑재 책임자인 포니 대령을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피란민들을 철수 함정에 태워 달라고 요청했다.
포니 대령은 선선히 “같이 노력해 보자”고 말했다.
즉석에서 함께 알몬드 장군을 찾아가 건의하기로 약속했다.

<공정식 前해병대사령관 정리=문창재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