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산천

거친 호흡 몰아쉬며 바람 저편 굽이치는 산맥 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

수원 화성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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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학음악

2008. 1. 22.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華城) 야경 

[답사·사진 2008.1.21.(월요일 밤 10시) 한국의산천]

 

눈이 쌓인 城의 야경을 촬영하러 퇴근 후 답사를 갔으나 눈은 없었다. 화성의 성벽은 조명의 방향이 아래에서 위를 비춰주므로 성벽의 상단이나 건물의 처마 위쪽 지붕 부분은 어둠에 묻히기에, 눈이 쌓임으로 해서 하늘금과 공제선이 자연스럽게 나타남을 포착하려고 했으나 눈이 다 녹아버렸다. 눈이 없으면 어떠랴. 지금 그대로도 얼마나 멋있는데...   

 

 

▲ 성밖에서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왼쪽 성벽위에 있는 본 각건대(동북포루)ⓒ 2008 한국의산천

 

정조대왕은 과연 죽었는가?

요즘 서점가에서는 정조에 관한 서적이 많이 출간 되고 있으며 또한 그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 '이산(정조의 이름)'(MBC)이 인기리에 방영 중이며, 비극적 삶에 초점을 맞춘 '한성별곡’(KBS)과 '정조암살미스터리 8일'(채널 CGV)도 전파를 타고 있다.

또 다른 채널로 정조대왕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수원에 있는 화성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왕권을 강화할 의도로 축조한 성이다. 이곳 수원에는 정조의 숨결이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화성행궁

※ 야간 촬영시 카메라 조리개는 5.6~8/셧터스피드는 4초 또는 8초로 장시간(?) 노출 촬영하였습니다. DSLR카메라가 아닌 작은 카메라에도 촬영시간 조절기능이 있으니 4초~8초정도를 설정하시고 촬영하시면 야경이 환하게 잘 나옵니다. (삼각대 거치 필수

 

 

▲ 화성행궁의 정문 신풍루 ⓒ 2008 한국의산천 

 

성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전배(展拜)하기 위하여 행행(幸行)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留守)가 집무하는 부아(府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왕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園行)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그뒤 순조·헌종·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다.

따라서 이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수많은 행궁 중 그 규모나 능행면에서 단연 으뜸이 될 만큼 건축물의 규모 뿐만 아니라 성곽과 더불어 정치적·군사적 면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화성행궁은 처음부터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일시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행궁과 수원부 신읍치의 관아건물을 확장·증측하는 가운데 조성되었다.

 

정문인 신풍루는 정조 13년 누문 6칸을 짓고, '진남루(鎭南樓)'라 편액했던 것을 정조 18년 남·북군영을 누대 좌우에 처음으로 설치하고, 좌우각간(左右閣間) 21칸을 추가하여 27칸의 규모를 이루었다. 이에 대하여 '화성성역의궤'는 "행궁 밖 3문의 윗층을 신풍루라 한다. 그 제도는 6칸으로 서쪽에서 동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기유년(정조 13)에 지은 것으로 처음 이름은 지남주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여기에서 '신풍'이란 이름은 한고조(漢高祖)의 발상지인 풍패(豊沛: 흔히 '豊沛之鄕'이라고 함)에서 유래된 것으로 '신풍'은 바로 정조의 새로운 고향이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 화성행궁 ⓒ 2008 한국의산천 

 

조선 22대 왕 정조가 정조19년(1795년) 윤2월9일~16일까지 8일간 어머니 경의왕후(敬懿王后: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 : 사도세자) 가 묻힌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를 하였다. 본래의 목적은 사갑(死甲)을 맞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 참배였지만 어머니 혜경궁 홍씨 환갑을 맞아 잔치를 열었다.

화성으로 가는 도중 비가 내렸다. 조금이라도 험한 길이 나오면 정조는 매번 말에서 내려 혜경궁의 가마 앞으로 나가 안부를 물었다. 어의가 비에 젖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화성에 도착하여 여러 예식을 차례로 치루면서 정조가 의식에 따라 절을 마치자 정조가 지은 어제 장락장(長樂章)을 부르고 어머니에게 머리를 세번 조아리고 천천세를 불렀다.

"긴긴 봄날 장락궁에서 술잔을 올리며, 세차례의 축원을 올리옵니다. 자손에게 끼쳐주신 어머님 은혜, 그 무엇이 이보다 높으리까. 복록이 풍성하게 넘쳐흐르며 찬란하게 빛나옵니다.함지(咸池)의 북소리에 운문(雲門)의 거문고,신선주 따라 올리며 해마다 축원하오리다. 

 

정조가 머리를 세번 조아리자 다시 여집사가 외쳤다.

"천세(千歲)를 불러야 합니다".

정조가 손을 마주잡고 이마위에 올리며 '천세'를 축원했다.

여집사가 또 '천세를 불러야 합니다'라고 외치자, 다시 천세를 축원했고, 또 '거듭 천세를 불러야 합니다'라고 외치자 정조가 '천천세'를 외쳤다.

정조가 천세를 부를 때마다 내,외명부와 여관들이 모두 선자리에서 일제히 소리쳐 호응하고 악대가 낙양춘곡을 연주했다.

여민락의 환환곡과 청평악,오운개서조곡등이 연주되는 가운데 음식상과 술상이 차려졌다.계속이어지는 가무속에 정조가 연회의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자궁(慈宮)의 덕 순일함이여. 대지와 같아 표현하기 어려워라 ... 아 어머니의 덕 아름다워라, 이번에 회갑을 맞으셨도다. 화창한 이 시절의 완상(玩賞)함이여, 만물이 어울려 화락하도다. 새로지은 고을에서 기쁨을 누림이여, 집집마다 노랫소리 울려 퍼지도다. 떠오르는 저 해와 달처럼 천년토록 오래 사소서". 

그날 혜경궁 홍씨는 감격했다고 전한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몸소 실천하는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심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 화성행궁 정문 신풍루 ⓒ 2008 한국의산천  

화성행궁 정문 왼편의 위로는 팔달산 정상에 있는 군사 지휘소 서장대가 보인다. 서정대가 있는곳은 수원에서 가장 높아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화성행궁은 드라마를 통하여 널리 소개되므로 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관광지가 됐다. '대장금'을 이곳에서 찍었고, 현재 방영 중인 '이산'의 덕도 톡톡히 보고 있다.  주말이면 장용영(왕의 친위부대) 갑주 입어 보기, 궁중한과 만들기 등의 문화 체험행사가 열린다. 아이들과 함께 겨울방학 나들이 코스로 딱 좋다. 행궁을 거쳐 팔달문 쪽으로 빠져나오면 수원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 닿게 된다.  

▲ 화성행궁 ⓒ 2008 한국의산천

장남헌은 정조 19년 혜경궁 홍씨의 주갑년(周甲年)을 맞아 회갑연을 이곳에서 베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다시 '봉수당'으로 편액했다. 내외의 행각은 정조 13년에 건축한 정당, 정조 13년에 건축한 정당 21칸, 행각 43칸이던 것을 정조 18년에 북각도(北閣道) 등 48칸을 새로이 추가하여 모두 11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정조(正祖, 1752년 ~ 1800년)
조선의 제 22대 임금이다.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묘호는 정조(正祖), 시호와 존호는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렬성인장효대왕(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대한제국 때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 추존되었다.

 

할아버지인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장조 莊祖· 1735년 ~ 1762년, 장헌세자)와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8살에 왕세손에 임명되었다.

 

영조는 조선조 후기 학문과 정치 사회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다. 그러나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일념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왕세자로 책봉된 장헌세자의 호탕한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겨오던차에 후궁 문숙의(文淑儀)의 질투심 어린 참소와 신하였던 나경의 으로부터 세자의 비행을 적은 상소를 받고 대노하여 세자를 서민으로 폐하고 쌀뒤주속에 가두어 창경궁 선인문앞에 내놓고 큰돌을 올려놓는 공개처형의 형벌을 내렸다. 뒤주속에 갇혀있던 세자는8일째 되던 날 허기와 더위로 인해 질식사하는 끔찍한 궁중 참극이 벌어진다.

국가 기강확립차원에서 형벌을 내렸지만 부모로서 애통함을 금할수없었던 영조는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 혼을 위로하고 서울 배봉산 아래에서 장례를 지냈다. 

1762년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속에서 갇혀죽는 비극적인 죽임을 당하자, 11살에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되었다.

1776년에 영조가 83세로 승하하자 25살의 나이로 조선의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3월 정조는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면서 12년 넘게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라고 선포한 뒤 사도세자 추숭작업에 나섰으며 능력과 학식 있는 인물을 위조로 대거 등용하여 노론을 견제할 수 있는 친위 세력을 키워나갔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직접보았기에 더욱 극진한 효심을 보인다.

 

정조는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을 높여 왕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치와 경제 등에 대한 개혁을 진행시켰다. 또한 정조는 영조가 평생의 과제로 생각해 왔던 영조 이래의 기본 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여 당쟁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12년에 이르는 동안 외척 세력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 특히 노론 세력을 제거하거나 약화시켜 친정 체제를 구축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규장각 제도를 정비하고 문화 정치를 표방하는 동시에 붕당의 비대화를 방지하고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그는 또한 영조 때부터 시작된 문물 제도의 보완 및 정비 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인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정조는 우수한 인재를 뽑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매월 2차례씩 시험을 치루었으며 상과 벌을 직접 내리기도 했는데, 소외받던 영남계 인사들도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는 중인 이하 평민에게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조 시대는 양반은 물론, 중인, 서얼, 평민층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져 문화를 크게 꽃피웠던 시대였다.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는 법,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매우 그리워하여 아버지의 묘소인 현륭원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고 정기적으로 참배하며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현륭원 주변인 수원에 과학적인 성채인 화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는 행궁을 만들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그 또한 어렵게 노론의 공세라는 역경을 헤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1800년 6월 49살의 나이에 병이 악화되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 참고 정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모신 융·건릉 돌아보기 클릭 ■☞ http://blog.daum.net/koreasan/11275811

  

▲ 화성행궁 ⓒ 2008 한국의산천

다음 장락당(長樂堂)은 정조 18년 2월에 새로 지은 것으로, 봉수당과는 서쪽으로 연접해 있는 7량 13칸의 건물이며, 장락당 앞에는 10.5칸의 경룡관(景龍館)이 있어 아래는 3문이고, 위는 다락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봉수당과 장락당은 행궁 내의 가장 중요한 전각인데, 정조의 전교 가운데 다음과 같이 이 건물의 건립과 편액하게 된 경위를 밝히고 있다.

"봉수당은 곧 나의 자궁(慈宮)을 받들어 잔으로 수(壽)를 드리는 곳이며, 장락당은 대개 한(漢)나라의 궁실 이름에서 취한 것이지만, 내가 곧 머무는 곳이니라."
 

▲ 화성의 남문 팔달문 ⓒ 2008 한국의산천  

성의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은 수원의 상징이며 중심이다. 서울의 남대문 격인데 옹성까지 갖추고 있어 훨씬 더 크고 웅장한 느낌이다. 장안문은 한국전쟁 때 무너진 것을 다시 복원했고, 팔달문은 창건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화성을 남과 북으로 가로지르는 장안문~팔달문 길은 경제도시 수원의 중요 통행로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시전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18세기 조선 상인들의 분주한 생활을 상상하며 종로삼거리 쪽을 둘러봐도 좋다. 본래 십자로였던 곳이지만 지금은 화성행궁으로 난 길을 막아 종로삼거리가 됐다. 

 

▲ 화성(華城) ⓒ 2008 한국의산천  

 

역사 깊은 문화유적이 살아 숨쉬는 수원은 조선조 22대 정조대왕이 실학 사상을 바탕으로 지역의 입지적 특성을 살려 건설한 계획도시로 수도 서울 남부의 관문 역활을 했다.  

 

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現 융,건릉)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정조 14∼19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화성은 정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던 실학의 대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성벽 길이는 6km. 빠르게 걸으면 약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천천히 성 안팎을 돌아보고 기록하고 촬영까지 하며 걷는다면 반나절은 잡아야 한다.

 

 

▲ 화성(華城) ⓒ 2008 한국의산천

화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 화성(華城) ⓒ 2008 한국의산천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인해, 폐해가 극심했던 구 정치체계의 개혁을 위해, 그리고 은퇴 후 수원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해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화성행궁을 신축했으며 화성을 쌓았다.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 했던 정조의 아버지,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의 유택(幽宅)인 영우원(永祐園)을 1789년(정조13) 풍수지리상 최길지의 명당으로 지목된 수원 화산(수원의 융,건릉)으로 옮기면서부터 정조대왕은 수원 백성들을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먼저 수원의 새로운 읍치(邑治)를 팔달산 기슭 <당시 지명은 신기리(新機里)>으로 옮기면서 행정, 치안기관인 관아와 교육기관인 향교, 교통기관인 역참(驛站), 상가, 도로, 교량 등 도시 기반 시설을 마련하고 민생 대책을 강구했다. 또 사도세자의 묘역이 조성된 구 읍치에 살던 백성들('수원하지초록(水原下旨抄錄)'에 따르면 244호-인구 677명)에게 넉넉한 보상금과 이사비용을 나눠주었다. 아울러 수원부에 감금된 죄수 전원과 수원부 사람으로서 유배 중에 있는 이 들도 풀어 주고 수원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해주는 등 특별 조치를 베풀었다.  

 

화성은 정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던 실학의 대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 화성(華城) ⓒ 2008 한국의산천   

 ▲ 화성(華城) ⓒ 2008 한국의산천  

▲ 수원천 위에 지어진 화홍문(華虹門)과 오른쪽에 보이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 2008 한국의산천

 

칠간수문마다 오색의 전등을 설치하여 불빛이 아름답다.

청계천의 수문이 다섯 간(五間水門)이었던 반면, 수원천은 그보다 폭이 넓어 칠간수문(七間水門)을 만들었다. 화홍문은 그 칠간수문 위에 자리 잡은 누각이다. 수원천을 따라 인근에 사는 시민들이 가벼운 산책이나 운동을 즐긴다.

 

화홍문(華虹門)

화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자는 무지개를 뜻하는 화홍문은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을 넘쳐나는 경치가 장관이라 화홍관창이라 하묘 수원 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성모퉁이에 방화수류정이 있고, 정자 아래에 있는 바위는 옛날부터 용머리라 하여 낚시터로 삼을 만하다. 못의 서쪽에 석각 이두(石刻頭)를 설치하였는데, 물이 많이 차면 이 이두로 물을 화홍문 밖으로 뿜어 내게 되어 있다. 

 

▲ 수원천 위에 지어진 화홍문 ⓒ 2008 한국의산천    

 

북수문은 편액에 화홍문'사인(士人) 유한지(兪漢芝)가 썼다'이라 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44보 되는 곳에 있다.

광교(光敎) 언덕을 대천(大川)이 가로로 자르며 흐르고 있어,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하였다. 넓혀서 소통을 시키고 7간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하천 위에 걸쳐서 설치하였다.

7개의 안팎 홍예 사이에는 각각 좌우에 돌기둥 4개를 세웠다. 홍예가 서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잠자리 무사를 붙였다. 중앙에는 장군형 무사를 덧붙였다. 거기에 다리 놓을 돌을 깔고 다리 위 바깥 쪽에는 장대석(長臺石)을 설치하였다. 

아래에는 방안 대포 구멍(사방 각 1척)을 뚫었다. 위에는 소포 구멍 14개(사방 각 7촌)를 뚫었다. 안쪽은 장대만을 두고 누혈(漏穴) 6개를 뚫었다. 동서 양끝에는 8면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를 새겼다.

  

▲ 동북각루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 2008 한국의산천 

방화수류정은 화홍문 옆 작은 언덕에 세워진 정자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현륭원)를 방문한 뒤 찾아와 활을 쏘고 직접 시를 지어 읊었다고 전해진다. 워낙 풍광이 뛰어나 정조의 심정이 이해가 갈 정도다. 아래쪽의 작은 연못인 용연과 하나로 어우러진 모습이 일품이다. 용연은 용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가운데에 버드나무가 심어진 자그마한 섬이 있다. 이 인근의 길은 성벽 안쪽도 바깥쪽도 호젓하고 한가롭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방화수류정이란 '꽃을 쫓고 버드나무를 따라가는 아름다운 정자'라는 뜻이다.

동서로 세 간인데 가운데는 온돌을 놓았고 북쪽으로 한 간을 붙이고 남쪽은 반 간(半間)을 물리었으며, 서쪽의 한 간은 또 길게 두 간을 늘리었다. 남쪽을 밖으로 물린 것은 마치 곡척(曲尺)처럼 생겨 있는데 평난간을 둘러쳤다. 그리고 위에 만(卍)자 쇄창(蔘)을 갖추었다. 온돌 4면에는 또 다시 만(卍)자 장자(障子)를 갖추었는데, 온돌의 면과 판자를 깐 면은 서로 판판하게 만들었다.  

 

 

▲ 동북공심돈ⓒ 2008 한국의산천  

▲ 지난 가을에 촬영한 동북공심돈ⓒ 2008 한국의산천    

 

▲ 봉돈ⓒ 2008 한국의산천    

돈은 일자문성의 위에, 동2포(東二鋪)와 동2치(東二稚)의 사이에 있는데 행궁을 안조(案照)한다. 4성을 쌓고 나서 파수를 설치하여 정찰할 임무를 맡긴 것은 척후의 의미를 가진 것이니, 멀리 육지나 바다에 대한 경보를 알리는 것을 더욱이 소홀히 해서는 안되기에 철성(凸城)의 제도에 의거하여 비로소 봉돈을 설치하였다. 

벽돌로 쌓아올려 성의 몸체 위에다가 벽돌로 다시 높게 쌓았으며, 성 밖으로 18척이나 튀어 나오게 하여 마치 치(雉)처럼 생겼으면서도 그 보다 크다. 내면은 굴곡이 지게 하여 3층으로 만들었다. 

양쪽 가장자리의 층계 끝에는 벽돌로 지은 집이 이어졌고, 용마루 없이 기와로 덮었다. 남북에 각각 한 간씩 있는데, 남쪽에 있는 것은 온돌로서 지키는 군졸이 거처하는 곳이고, 북쪽 것은 판자를 깔았는데 기계 따위를 넣어둔다.  

ⓒ 2008 한국의산천     

▲ 지난 가을에 촬영한 화홍문 (클릭하시면 파노라마로 펼쳐집니다) ⓒ 2008 한국의산천 

 ※ 상기의 내용의 일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이덕일의 역사서와 팜플렛과 화성 홈페이지를 참고 하였습니다. ⓒ 2008 한국의산천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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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 장녹수

장녹수 (張綠水 · ?~1506)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은 문과에 급제하고 성종 19년에 충청도 문의현령까지 지냈으나 더 이상 크게 출세하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장한필의 첩이었고 신분도 노비출신으로 천인 중 천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부모 중 한 쪽이 천인이면 자녀는 자동으로 천인이 되었으며, 그 자녀의 소유권은 모계를 따라 가도록 되어 있었다. 결국 장녹수는 태어날 때부터 '노비의 딸' 로 신분도 미천한데다가 가난하기까지 했던 장녹수의 젊은 시절은 비참하리라만큼 불행했다. 제안대군의 종과 결혼해 아기까지 낳았던 장녹수는 돈을 벌기 위해 여러번 몸을 팔았고 돈에 쪼달리자 가정을 뛰쳐나오기까지 했다.

 가정을 버린 장녹수는 몸을 파는 천기의 수준에서 벗어나 술과 기예를 배우기 시작했고 정식으로 기생으로 데뷔했다. 뛰어난 외모는 아니었지만 앳된 외모와 여성스러운 애교를 지니고 있었던 장녹수는 명기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다. 용모가 뛰어나고 가무에도 능하여 연산군의 눈에 들어 입궐, 내명부(內命婦) 종4품 숙원(淑媛)에 봉해졌고 많은 금·은·노비·전택(田宅) 등을 하사받았다. 
 

 왕의 총애를 기화로 국사(國事)에 간여하고 재정의 궁핍을 초래하고 모든 상형(賞刑)이 그녀의 입에서 행하여지는등 연산군 실정(失政)의 한 원인을 만들었다. 즉, 1503년(연산군 9) 종3품 숙용(淑容)에 봉해진 뒤에는 선공감(繕工監)으로 하여금 그녀의 집을 새롭게 단장시켰으며, 1506년에는 오빠 복수(福壽)와 자녀들을 양인 신분으로 올려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친척 중에서 제일 출세한 사람이라면 형부 김효손인데, 연산군 10년 이전에는 겨우 7품 무관직인 사정(司正)을 받았을 뿐이다. 6품과 7품은 질적 차이가 있어서 7품 이하는 정치적 비중이 거의 없는 단순 행정 또는 실무직에 해당하며, 서리 출신들도 여기까지는 많이 진출했다. 그러나 연산군 10년에서 12년 사이에 김효손은 벼락승진을 해서 정3품 당상관까지 올라갔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때 참형(斬刑)에 처하여지고 적몰가산(籍沒家産)되었다. 

 

중종반정 (中宗反正)
1506(연산군12)년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성희안과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박원종 등이 재위 12년간 화옥(禍獄)과 황욕(荒慾) 등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놓은 연산군을 폐하기로 밀약하고 경복궁에 들어가서 대비(大妃:成宗의 繼妃)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조선왕조 제11대 왕 中宗)을 맞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