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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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이산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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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학음악

2008. 1. 28.

정조 못다한 이야기 [사진 2008.1.28.(월요일한국의산천]

 

지지대에 얽힌 정조의 효심 보기=>  http://blog.daum.net/koreasan/13675557

사도세자의 고백 ==>  http://blog.daum.net/koreasan/13737026 

 

▲ 언제나 밀리는 길. 아침 6시 경인고속도로 풍경 (성균관 대학교에 있는 영조의 탕평비를 찾아 가는 길)  ⓒ 2008 한국의산천 

아침 5시 경인 고속도로. 지금 모두 같은 방향의 길을 달리지만 추구하는 목적지는 모두가 다르다. 그것이 인생이다.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

영조는 1694년 (숙종20) 숙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1776년(영조 52)에 8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조선왕조 임금 중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군주다. 그는 숙종과 무수리 출신 화경숙빈의 소생으로 이름은 금이다. 숙빈 최씨는 중간 계층에서 뽑는 궁녀 출신도 아니고, 궁녀가 부리는 종(하인)인 무수리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영조는 어머니 핏줄로만 보면 사대부나 역관보다도 미천한 출신이다.

이러한 영조의 개인적 약점은 통치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숙빈 최씨는 영조에게 항상 조심스럽게 처신하도록 훈계했다고 한다.

무수리 출신의 아들로 태어나 왕위를 둘러싼 노·소론간의 건곤 일척의 승부에 목숨을 건 영조는 이복형 경종이 죽음에 따라 조선 21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피비린내 나는 정쟁에서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것이다.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복형제인 선왕 경종을 독살했다는 세간의 의심을 받게 되었고 이는 영조가 평생 떨치지 못하는 업보로 남았다.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붕당의 폐해를 열거하고 탕평정국을 열어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마침내 조정을 탕평정국으로 안정기에 접어들며 재야에서는 실사구이 학문이 일어나 사회전반에 새바람을 일으킨다. 

▲ 정조가 세운 수원 화성의 화홍문 야경 ⓒ 2008 한국의산천

 

영조 (이금:1694 -1776 재위기간 1724년 8월 - 1776년 3월.51년 7개월.83세) 

  ↓

사도세자(이선:1735-1762. 27세 卒)

  ↓

정조 (이산:1752-1800  재위기간 1776년3월-1800년 6월.24년 3개월. 49세)

 

노론이 가장 두려워한것은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정조)이 즉위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어찌 그 아들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세손(정조)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서 희생되었듯이 항상 죽음의 위협속에서 세손시절을 보내며 고립무원의 길에서 살얼음을 밟듯 조심 조심 두렵게, 위태 위태하게 이때까지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왔다.

 

세종에 버금갈 만큼 수신(修身)과 제가(濟家)에 완벽했던 정조. 

  

조가 83세로 승하한 후 뒤를 이은 22대 정조는 1776년 3월10일 영조가 세상을 떠난 지 엿세만에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했다. 그리고 임오년(사도세자가 죽은 해) 이후 하루도 잊지 않고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 아!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선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선대왕께서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하지 않는것(不貳本)'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즉위 일성(一聲)에 대신들은 경악했다. 특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물어넣었던 노론은 공포에 휩싸였다. 14년전 뒤주속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가 다시 살아난 듯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조는 열흘 후인 3월 20일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이라 올리고 묘호는 영우원, 사당은 경모궁이라 높혔다. 그리고 그 5일 후 홍인한등과 결탁해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환완공주의 양아들 정후겸을 경원으로 귀향 보냈으며, 이어 정후겸의 양모이자 자신의 고모이기도한 화완옹주를 서녀로 강등시켰다. 화완은 이후 정치달의 부인을 뜻하는 '정처(鄭妻')라는 치욕적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형조판서 이계의 상소가 있고 성균관과 사학의 유학생까지 나서서 홍봉한(정조의 외할아버지· 어머니 혜경궁의 친정아버지),홍인환을 죽여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전하께서는 홍봉한의 도당이 대략 제거되어 근심할것이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홍봉한의 한가닥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군신상하가 편히 먹고 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조는 이 주청을 거부했다.

"비록 죄가 용서 할수 없는 것이라도 자궁(慈宮:혜경궁)의 어버이이고 내가 목숨을 부지한것은 곧 우리 자궁(慈宮:혜경궁)덕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적극 가담자인 홍봉한의 동생 홍인환은 유배를 간 후 그해 7월 사사당한다)

 

혜경궁은 친정이 위태롭게 공격을 당하자 단식까지 하며 아들 정조에게 시위하지 않았다면 친정아버지인 홍봉한과 그 아들들, 아우 홍인환은 일찌감치 저 세상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이후 명문가 였던 풍산 홍씨를 비롯해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노론의 명문가는 대부분 몰락의 길을 걸었다. 궁중문학의 효시라고 여기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역시 자신의 친정과 사도세자와의 죽음은 관련이 없다는 것과 친정아버지인 홍인한을 변명하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도 해석된다.     

 

이후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원수를 갚고자 하였으나 홍봉한(혜경궁 홍씨의 친정아버지)을 처단하면 어머니에 대해 원수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 이것이 정조를 괴롭힌 풀 수없는 '뫼비우스의 띠'였고 딜레마였다.

▲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 대학교 정문(왼쪽으로 탕평비각 지붕이 보인다) ⓒ 2008.1.28 한국의산천  

조선 역사상 가장 비운의 세자로 단연 손꼽히는 인물이 사도세자다. 지금도 성균관대학교 입구에는 8세가 된 사도세자의 태학 입학과 함께 때를 같이하여 세운 탕평비가 있다.(세자는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이 '세자시강원'에서 교육을 별도 시켰으므로 태학에 실제 입학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유학을 중시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탕평비는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으로 인하여 기념비가 아닌 추모비가 되어버렸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힌 것은 영조 38년(1762) 윤 5월 13일, 그리고 세상을 떠난 것은 윤 5월 21일, 사도세자는 복더위에 무려 9 동안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신음하며 죽어간 것이다. 
   

 

▲  영조께서 친서한 탕평비(성균관 대학교 정문에 있음) ⓒ 2008.1.28  한국의산천   

탕평비는 조선 후기인 1742년(영조 18년)에 영조가 공정한 정치를 하는 탕평책을 널리 알려서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선비들에게 교훈으로 삼도록 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불렀다.

"유복(儒服)을 입고 오게하라"

영조는 유복, 즉 학생복을 입은 세자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영조는 세조와 함께 태학에서 공부하는 여러 집사의 입시를 명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훈시했다.

"당습하지 말라"

영조는 어린 세자의 주위에 당습이 머물것을 염려했다. 영조는 이 때 어필로 글씨를 써 대사성에게 전하며 비로 새겨 성균관 반수교((泮水橋) 에 새우라고 명했다.


周而不比乃君子之公心
보편적이면서 편당하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심이요
比而不周寡小人之私意
편당하면서 보편적이지 않는 것은 소인의 사심이다.

 

탕평비(蕩平碑)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 대학교內 )
시대 : 조선 1742년 . 크기 : 155×62cm, 두께 30cm
 

 

▲ 탕평비각과 하마비 ⓒ 2008. 1. 28 한국의산천

하마비(下馬碑)

조산시대 종묘, 궐문,및 문묘앞에 세워놓은 석비이다.  1413년(태종13년) 처음으로 예조에서 건의하여 왕의 허가를 받아 나무로 만든 표목(標木)을 세운것이 계기가 되었다. 비석 전면에는 大小人員皆下馬 (대소인원개하마: 대소관리로서 이곳을 지나는 관리는 모두 말에서 내려라)라고 쓰여있다. 그리고 내리는 지점도 품계에 따라 각각 다르게 표시하고 있는데 1품이하는 궐문으로 부터 10보, 3품이하는 20보, 7품 이하는 70보 거리에서 말에서 내려야 한다고 되어있다.

1742년(영조 18년)에 성균관 입구 반수교(泮水橋) 위에 영조가 친서한 탕평비를 세워 유생들에게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자기 당파를 이루지 않는 군자의 도를 익히게 권했다. (영조 18년 아들 (사도)세자의 성균관 태학에 상징적으로 입학)


탕평이란 '서경(書經)'의 "無偏無黨王道蕩蕩  無黨無偏王道平平 (무편무당왕도탕탕 무당무편왕도평평)"이라는 데서 나온 말로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탕평책을 논하는 자리에 식사때가 되어 음식이 나왔는데 청포에 채소를 섞어 무친 음식이었다. 이 후로 묵청포를 '탕평채'라 불렀다. 
탕평책이 시행됨으로 당쟁으로 인한 폐해를 어느 정도 없앴으나, 사도 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시파와 벽파의 대립 이후 외척과 연결되면서 당쟁은 다시 세도정치로 이어졌다. 
 

탕평비의 의의

조선 선조때인 16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각 붕당끼리의 대립은 임진왜란을 겪고 난 이후에 더욱더 어지럽게 전개되어 갔다. 이러한 각 붕당 사이의 대립은 국가와 백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각 붕당의 정치적인 출세와 권력 유지를 위한 대립이었다. 붕당 정치도 처음에는 상대 붕당에 대한 견제와 건전한 비판을 통해 부정 부패를 줄이고, 각 붕당에 속한 사람들의 의견이 정치에 반영되면서 여론을 통한 정치가 이루어지는 등 정치의 발전을 가져왔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치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의 수는 늘어나는 반면에 실제로 관리가 되어 권력을 잡게 되는 기회는 그대로였기 때문에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따라서 한 번 권력을 잡은 붕당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상대 붕당의 사람들을 가혹하게 다루어 다시는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제 각 붕당들은 다음 왕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서 자신들의 권력 유지의 가능성이 결정되게 되자, 자연히 왕위 계승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 도움을 준 붕당에 대하여 왕들은 왕으로서의 권한을 발휘하는데 주저하게 되었고, 그들의 눈치를 보며 자연히 왕권은 약해져 갔다.

영조는 이러한 현상을 바로잡고 국가 발전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하여 탕평책을 강력하게 실시하였으며, 탕평책을 통해 왕권이 강화되고,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게 되자, 영조 자신의 의지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탕평비를 세웠다.
그러나 영조의 이러한 노력도 자신의 아들인 사도 세자 죽음을 둘러싸고, 각 붕당 사이의 대립이 다시 치열해지게 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왕의 의지를 나타낸 탕평비는 아직도 남아서 당시의 정치적인 혼란을 극복하고 국가와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영조의 마음을 전해 주고 있다. 
 
탕평채

 

▲ 청포묵으로 만든 탕평채 ⓒ 2008 한국의산천

묵청포라고도 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탕평채라는 음식명은 조선왕조 중엽에 탕평책의 경륜을 펴는 자리에서 청포에 채소를 섞어 무친 음식이 나왔으므로 탕평채라고 하였다.

▲ 今古一般 (금고일반: 바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이 새겨진 과학고 교정에 있는 천년바위 ⓒ 2008. 1. 28 한국의산천 

이른 아침 이곳을 친절히 가르쳐 주신 행정반에 계신 ***님께 감사 말씀 전합니다.  

 

당쟁을 폐혜를 줄이고자 하였던 영조 자신도 정치 싸움에 휘말려 아들을 죽이고 말았다. 

노론의 거두 송시열이 천년 바위(서울과학고등학교 교정)에 새긴 금고일반(今古一般:바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이란 글자가 꿋꿋하게 하다. 예나 지금이나 이 모든 것이 정치 질서의 무상함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정조는 유난히 송시열을 존숭(尊崇)했다.

▲ 서울 과학고 교정 뒤편에 있는 천년바위  ⓒ 2008. 1. 28  한국의산천 

사도세자(이선: 장헌세자)

영조와 궁녀 출신 선희궁(영빈 이씨)의 아들로 태어난 사도세자는 천성이 어질고 너그러웠다고 한다 기골이 장대한데다가 장난감 무기를 가지고 전쟁놀이를 즐겨할 만큼 어려서부터 풍부한 무사적 기질을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배우지 않고도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다는 부왕을 닮아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자라면서는 칼쓰기와 활쏘기를 위시한 기예에 특히 뛰어났고, 유교경전보다는 점복을 비롯한 잡서들을 즐겨 읽곤 하였다. 부왕의 강한성격에 눌려 지내서인지 소심한 측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우스갯소리를 곧잘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5세 이전에는 부왕이 능행 등의 바깥나들이에 데려가지 않아서 궁궐 안에서만 갇혀 지냈다. 그러다가 1749년(영조 25) 15세부터 대리청정을 했다 15세밖에 안 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것은 영조가 체력이 약해져서 정양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영조의 의도는 탕평정치를 빨리 익히게 하려는 데 있었다. 이는 대리청정중인 사도세자에게 늘상 당론을 타파해야 한다는 탕평의 뜻을 가르친 데서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리청정이 화근이 되어, 결국에는 '뒤주 속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사도세자는 당시 정국을주도한 외척당 계열과 별로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외척당을 견제한 청류당 계열 대신들에게 많이 의지했다. 곧 정치적으로는 외척당과의 갈등이 비극의 가장 큰 이유라고 해야 할것이다.
 

'한중록'에서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품이 다른 것도 화근이라고 지적했다. 영조는 세밀하고 민첩한 데 비해, 사도세자는 말수 적고 민첩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조가 물어볼 때 머뭇거리는 일이많았고, 자기 견해를 명확히 표현하지 못해 영조가 늘상 답답하게 여겼다고 한다 또한 공무를 집행하는 스타일도 달랐다. 사도세자는 말솜씨와 얼굴빛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려 하지 않아 과묵하고 위엄이 있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부왕인 영조보다 사도세자를 더 어려워했다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이런 성격은 대리청정중에 정사를 처리하면서 영조와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들을 일으키는 소지로 작용하였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했다고 하지만 실무적으로 중요한 사안은 대체로 비변사의 논의를 거쳐 처리했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안은 언제나 영조의 재가를 얻어서 결정했다. 그러므로 이런 데서 사단이 발생할 여지는 적다. 문제는 당론에 관계된 상소문 처리에서부터 벌어진 것 같다.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을 때는 불호령이 떨어졌고, 세자에 대한 영조의 꾸중과 격노가 심했다고 한다.
 

대리청정을 시작한 후 3∼4년간은 그런 대로 무사히 넘어갔다. 그러다 정조가 출생하던 1752년 겨울, 사도세자는 당론을 잘못 처리했다 하여, 홍역이라는 열병을 앓는 상태에서 눈 위에 엎드려 대죄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영조가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는 선위소동을 잇달아 일으켜 또다시 며칠 동안 얼음 위에서 석고대죄까지 해야 했다. 그 결과 사도세자는 정신병을 얻었고, 이것이 화병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후 사도세자는 부왕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데 맛을 들여 행동이 난폭하게 거칠어졌고, 이윽고 법적 어머니인 정성왕후와 할머니 인원왕후가 사망한 다음 해인 1758년에는 세자폐위 전교가 내려지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 폐위 전교는 당시 도승지였던 남인 채제공이 끝까지 만류하여 심각한 상황으로까지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로부터 4년 뒤인 1761년 봄 석 달에 걸친 평안도 여행이 빌미가 되어 나경언의 고변으로 사도세자는 다음해에 부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무릇 임금이 배라면 신민은 물과 같다" 말을 남기고...

 

세손(정조)이 종일 음식을 끊고 곡을 하며 우는것이 지나쳤다. 차마 애처로와서 위로하며 곁에 품고 누워서 잠이 들게 하였다. 그래도 늦게까지 잠을 못이루니...

서러울수록 보배로운 내 몸을 보호하거라 비록 한이 많지만 스스로 착하게 행동하여 아버님의 한을 갚으라. 

▲ 정조께서 현륭원을 참배하고 돌아오며 이 고개를 넘기전에 한참을 머물렀던 지지대고개 ⓒ 2008 한국의산천 

 

영조의 나이 예순아홉. 내일을 기약할수 없는 노령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병을 늘 달고 살았다. 이러다가 순식간에 세상을 하직한다면 현재 대리청정을 하는 (사도)세자의 즉위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관서행을 계기로 세자를 제거하려던 노론의 계획이 무산되자 영조에 대한 멱모로 몰아가는 계획을 세웠다.  치밀한 대본을 작성하고 그 세자를 고변할 사람을 골랐다.

영조 38년 (1762년)5월22일 나경언이라는 자가 올린 투서 한장이 궐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나경언

영조실록을 보면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꾀어냈다. 가산이 탕진되어 자립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노론 윤급의 종(청지기)으로 알려져 있으며 액정별감 나상헌의 형이었다.   

 

나경언의 고변서에는 세자의 허물 10조가 적혀 있었다. 영조가 읽고 영의정 홍봉한과 윤동도가 읽은 후 바로 불태워졌다.  

  

"네가 자결하면 조선 세자의 이름을 잃지 않을것이니 자결하라" 

영조는 칼끝을 두드리며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하라고 명하였다. 

 

영조는 전에서 내려와 섬돌 위에 앉아 말했다.

"내가 죽으면 3백년 종사가 망하고 네가 죽으면 3백년 종사는 보존 될것이니 네가 죽는 것이 옳다."

이말에 (사도)세자는 통곡했다.

 

세자는 말했다.

"전하께서 칼로 찌르신다해도 신은 칼끝에 놀라지 않을것입니다. 지금 죽기를 청합니다." 이어 세자는 허리띠를 풀어 목을 맸고 곧이어 땅에 쓰러졌다. 

 

모두가 (사도)세자를 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세손(정조)이 들어왔다. 당시 세손의 나이는 만 10살이었다. 세손은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관과 도포를 벗고 세자뒤에 엎드렸다. 

 

"아비를 살려주옵소서"

 

영조는 말했다.

누가 세손을 데려왔는가? 빨리 데리고 나가라."

 

이후 홍봉한이 준비한 뒤주에 (사도)세자를 들어가게 한다음 영조는 직접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잠근 후 큰못을 밖고 동아줄로 뒤주를 봉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렸다

"세자를 폐해 서인으로 삼는다."

이 후 삼복더위에 물한모음 먹지 못하던 세자는 8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자가 사망하자 바로 그날 세자의 호를 사도세자라고 직접 지어주었다. 영조가 남달리 눈물과 인정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권력은 눈물과 인정을 넘는것이었다. 이 후 두달 후 세자의 장례가 치러지고 영조는 배봉산에 친히 나서서 제주를 하였다. 

친히 제주를 하면 훗날 노론이 사도세자의 신주를 땅에 묻어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예방책이었다.  

▲ 화성 융·건릉內에 있는 융릉(융릉: 사도세자/ 건릉: 정조) ⓒ 2008 한국의산천 

또 어느날 40대의 정조는 능행차 길에 70대의 영의정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아버지가 계시는 현륭원 근처 언덕에 묻어 주시오."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세상에서 하지 못한 효도를 죽어서라도 해야 겠다는 비장한 유언이었던 것이다. 

 

조13년 7월 정조는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양주 배봉산에 있던 장헌세자, 즉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기로 한것이다. 사위(부마)이고 정조의 고모부였던 박명원의 제안에 따라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길 것을 전격적으로 결정했다. 이미 27년이나 지난 묘소를 옮기는 데 대해 신하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았다. 노론의 입장에서는 어떤 경우이건 사도세자가 거론되는 게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정조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나갔다.

또한 새로운 도시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794년 (정조 18년)정조는 현륭원 이장 이후 5년 만에 화성 신도시건설에 착수한다. 노론의 서울이 아닌 국왕의 서울 그리고 백성의 서울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는 규장각 설치 장용영 강화와 함께 정조가 추진했던 왕권강화 작업의 핵심 사업이었다. 이어 '지극히 吉하고 모든것이 완전한 묏자리'라는 수원 용복면에 있는 화산으로 이장지를 정하고 화산에 살던 백성들에게 후한 배상금을 주고 '국세가 크게 트여 큰 고을을 조성하기 좋다는 팔달산 아래로 옮기는 대역사가 벌어진다.  

 

▲ 융·건릉 안에 있는 융릉. 2007.4.15.(일) 촬영ⓒ 2008 한국의산천    

융릉(隆陵)은 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의 합장릉이다. 
정조는 융릉 조성에 많은 애를 썼다. 세자의 묘인데로 병풍석을 설치하고 무인석까지 세웠다. 그만큼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사후에도 효도를 다하겠다는 정조의 효심을 엿볼 수 있다.   

 

1789년 7월 영조의  그는 경기도 이천에 있는 세종대왕의 묘소 ‘영릉’과 더불어 국내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는 수원 화산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새로운 묘소를 만들어 ‘현륭원’이라 이름 지었다. 정조는 이 묘소에 정성을 다해서 국왕의 지위에 준하는 정도로 화려하게 단장했다. 그때까지는 사도세자를 국왕의 지위에까지 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묘를 지키는 돌로 만든 동물의 숫자를 줄이는 등 간소화하기도 했지만 묘를 둘러싼 병풍석을 설치하는 등 기존의 왕세자 묘소와는 현격하게 다른 격식을 갖추고 당대 최고의 예술가를 동원해서 아름다운 조각을 하도록 했다.

첫째로 봉분이 장릉(長陵)에서와 같이 목단·연화문을 새긴 병풍석을 두르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인석(引石)이 특이하게 꽃봉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며, 셋째는 장명등이 전기(前期)의 팔각장명등과 숙·영조 연간의 사각장명 등의 양식을 합하여 구름무늬를 다리에 새겨 넣었고 대석(臺石)에는 꽃을 새겨 넣어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고 있다는 점이며, 넷째는 난간석을 생략하면서 방위 표시를 위해 꽃봉오리 모양의 인석에 문자를 새겨 넣었다는 점이다. 다섯째는 추존왕릉임에도 무인석을 만들어 세웠다는 점이다. 석마가 무인석 곁에만 한 마리씩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융·건릉 상세히 보기 클릭 ■☞ http://blog.daum.net/koreasan/11275811

 

 

▲ 정조가 원손(元孫) 시절 외숙모(홍봉한洪鳳漢의 며느리)에게 보낸 문안 편지. 1750년대. 정조는 8세 때 세손(世孫)에 책봉되므로 이 편지는 그 이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린 나이라서 글씨체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문안 편지의 형식을 �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남아있다.[출처:디지털 한글 박물관]

 

조는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열고 다시 염을 한다음 궁중으로 모시고 국장처럼 성대하게 장을 치룬 후 양주에서 화산까지 이 나라의 중심부를 지나 지금의 능자리인 경기도 화성군 화산(花山)으로 옮겼다.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영구를 파내니 광중(壙中)에 물이 한자 남짓이나 고여 있었다. 부친이 물속에서 신음하는것을 본 정조가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사도세자의 영구는 열번 죽어도 씻을 수 없는 한을 지닌 시신이 27년만에 임금이된 자신의 아들 정조와 함께 새로운 안식처로 떠나는 것이었다.

 

어가와 잉여가 함께 새로운 안식처인 화성으로 향했는데 떠나는 행렬은 웅장했다. 경기 관찰사가 선도하고 담당 신하들은 예법에 따라 좌우로 늘어섰다. 취타수 18명과 붉은 군복을 입은 4백여명의 군사들이 세줄로 늘어섰으며, 사도세자와 잉여 곁에는 호위군사 200여명이 겹줄로 늘어섰고 가가각 50여개의 만장이 앞뒤로 하늘을 수놓았다. 노제 장소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했으며, 수백리 밖에서 어가와 영가의 행렬을 보기위해 몰려 들었다. 이 행렬을 호위한 인물은 병조판서 윤숙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날 정승들에게 세자를 구하라고 명한죄로 홍봉한에게 탄핵당해 해남으로 귀향길에 올랐던 한림 윤숙이었다.다시 사도세자를 구하려던 자의 호위를 받으며 안식처로 길을 떠나고 있다.  

 

'부주(父主)여 살려주소서!' 했던 아버지와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주시옵소서!'라고 호소했던 세손이 왕이되어 함께 떠나는 길이었다. 

각영마다 늘어선 깃발, 그리고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북소리와 취타소리는 사도세자의 혼이 펄럭이고 울부짓는 소리였다. 

임금을 상징하는 황룡기를 비롯하여 사방을 표시하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등의 수많은 깃발을 펄럭이며 영원한 안식처인 화산(現 융건릉)에 도착했다.   

 

정조는 새 묏자리에 나가 재실에 들러 시복을 갗추어입고 정자각까지 걸어나가 재궁(사도세자의 관)을 본 다음 곡을 했다. 그리고 걸어서 주산까지 오른다음, 보여(步與)를 타고 산능성이를 한바퀴 빙 돈 다음 하교하여 "이산의 이름이 화산(花山)이니 꽃나무를 많이 심는것이 좋겠다."고 하여 이후 화산은 지극한 정성으로 나무가 울창하고 사시사철 꽃이 수를 놓은 꽃산이 되었다.

 

정조는 이곳을 현릉원이라 이름짓고(장조로 추존된 뒤에 융륭으로 변경) 틈만나면 이곳을 찾았다. 재위 24년간 능관리를 위해 부근 화산일대 13개 마을에 영을 내려 집집마다 재 한 삼태기씩을 모아 뿌리게 하고 솔밭에 송충이 극성이면 손수 나가 송충이를 잡고 송충이구제를 독려 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자신도 부친곁에 묻힌다.

그렇게 정성을 쏟은 탓인지 융·건릉은 조선조 왕릉중 어느 능보다 규모와 조성미, 특히 소나무가 울창하며 주변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정조의 능행은 단순히 사도세자의 능에 참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능행자체가 왕실의 위엄을 드높이는 수단이었다. 정조가 현륭원에 행차를 할때 따르는 인원이 약 6000명이 넘으며 동원된 말도 1천4백여필이었다. 이나라 곳곳을 장악하고 잇는 노론이라도 국왕의 이란 위용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정조의 능행은 백성과 직접 만나는 수단이기도 했다. 정조가 행차 할때면 백성들이 앞다투어 격쟁을 했다. 격쟁이란 백성들이 임금에게 직접 원통함을 호소하는 것을 말한다.   

▲ 화성행궁 정문 신풍루 ⓒ 2008 한국의산천  

정조는 현륭원이 있는 수원에 행궁을 설치하고 재위 17년에는 수원을 유수부로 승격시키며 화성행궁을 건립했다. 수원 유수부를 겸했던 화성행궁은 정전 21칸 외에 모두 555칸이 있는 최대규모의 행궁이었다. 이것은 정조의 행궁이자 사도세자의 행궁이었다. 정조는 재위 18년 2월부터 20년 9월 상순까지 현륭원과 행궁을 보호하기 위해 화성을 축성했다.   


▲ 수원 화성의  야경 ⓒ 2008 한국의산천  

새로운 도시 화성과 규장각을 지으며 정조의 꿈은 무르익어갔다. 화성을 중심으로 노론의 나라가 아닌 왕권이 강화된 제왕의 나라, 백성의 나라 , 못이룬 사도세자의 꿈을 담은 나라를 만들어 갔다. 그러나 기대와 좌절의 시간이 흐르며 몸은 불편해지고 병세가 악화되었다. 언제나 몸을 단정히 하며 학문수련과 삶은 수도자를 연상시킬 만큼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잘하였으나 그의 뜻대로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의 큰 뜻은 이루지는 못했다.

정조의 개혁 실패는 조선의 개혁 실패였고, 정조의 죽음은 조선의 죽음이었다. 정조의 죽음으로 조선의 방황은 멈추고 국망(國亡)의 길로 치달았다. 1800년 6월 49세가 되던 해에 24년 3개월간의 재위기간을 마치고 미완(未完)의 군주는 승하하셨다.

정조가 죽고 조선이 망하는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100년이었다.  

 

 

▲ 위의 글 내용의 일부는 조선왕조실록, 사도세자의 고백, 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 영조와 정조의 나라. 참고 했습니다. 쌀쌀한 일요일을 맞아 집에서 책을 읽으며, 안주 만들어서 한잔하고 둥글거리며, 취하면 잠자는 한가로운 휴일이었습니다.ⓒ 2008 한국의산천  

ⓒ 2008 한국의산천 

단종 또는 사도세자에 관한 책을 읽고 나면 

무언가에 억눌린 듯한 무게감에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눈이 내릴듯한 희뿌연 잿빛하늘 탓인가 보다. -한국의산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