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산천

거친 호흡 몰아쉬며 바람 저편 굽이치는 산맥 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

사도세자의 고백

댓글 32

문화문학음악

2008. 1. 30.

다시 돌아보는 사도세자  [2008.1.29.(수요일한국의산천]

 

무릇 임금이 배라면, 신민은 물과 같다(夫君者舟也 人者水也)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백성을 생각하는 그의 철학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세자가 과연 미치광이였나? 붕파에 휩쓸리지 않으며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다가 스러져간 사도세자.(영조 →사도세자 → 정조)

 

영조의 아들,(사도)세자는 1735년(영조 11)에 태어나서 1762년(영조 39), 28세를 일기로 뒤주에 갇혀 죽었다.'뒤주 속의 죽음' 이 사건은 조선왕조 사상 왕위계승권자와 국왕 사이에서 붕당정치로 일어난 최악의 사태이다.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후 훗날 문득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어릴 때 (사도)세자는 실로 성인의 자질이 있었다"  

 

붕당정치 붕당이란 남송의 진붕(眞朋) 위붕(僞朋)에서 비롯된 말로 구양수는, 군자들의 당은 진붕, 소인배들의 당은 위붕이라고 일컬은데서 비롯되었으나 항상 자신들의 당은 진붕이고 상대당은 언제나 위붕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자신이 몸담은 당이 정통당이라고...

 

▲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봄. 오산 독산성 세마대 ⓒ 2008. 한국의산천

 

조선 역대 임금중에서 이성계와 효종을 잇는 무왕의 자질을 가진 사도세자 세자는 조선시대 북벌을 꿈꾼 마지막 군주였다.

 

정조는 재위 14년 (1794년 2월 10일) 화성 행차시 독산성에 올랐다가 운주당(運籌堂)에 이르러 산성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모았다. " 그대들중에 경진년에 어가(임금의 가마 : 사도세자)가 머물렀을 때 구경한 사람이 많겠구나".  경진년은 사도세자가 종기로 인하여 온양 행궁에 행차한 때였다.

 

"그때 일을 기억하는냐?"  부로(父老)들은 일제히 대답하였다.

 

" 어가가 머무른 날에는 친히 백성들의 고충을 물어보시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내어 주셨으며 진남루에 올라 과녘을 쏘아 연거푸 네발을 맞추셨습니다.  부친의 행적을 직접듣는 정조의 가슴은 떨렸다.

 

" 지금 내가 31년만에 이 산성에 오르고, 이곳에서 예전일을 묻노라니 슬픈 감회를 누를수 없다. 뜰안에 들어 온 부로 가운데 온천 행차때 은전을 입은 사람은, 승려이건 속인이건 나이를 따지지 말고 한자급(資級)씩 올려주고, 성안의 민가에는 집마다 쌀 한섬씩을 주어 이날의 감회가 깊은 뜻을 표시하라" 고 일렀다.
 
돌아오는 길에 정조는 활터가 있는 득중정(得中亭)에 들러 신하들과 활을 쏘았다. 정조는 다섯발을 쏘아 일부러 네발을 �췄다.

 

" 오늘 활을 쏜것은 경진년의 옛일과 똑 같으니, 마땅히 뜻을 보이는 일이 있어야 하겠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덕일著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중에서]  정조는 아버지를 죽인 정파와 20년 이상을 함께 정사를 논의 할수밖에 없었던 심정은 어떠 하였을까.  
참아야 했다.

 

영조는 죽기 한달 전 세손과 대신들에게 사도세자에 대하여 유언을 했다.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제기하지 못하고, 차마 말 할 수 없다." 이와 함께 영조는 앞으로 사도세자 사건의 잘잘못을 언급하는자는 역률로 처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영조는 '나의 통석(慟惜)한 마음' 이란 표현으로 그 때의 일을 아픔으로 후회했다.

 

 

지난 봄 눈이 시리도록 하얗게 핀 벚꽃과 파란 하늘이 펼쳐진 융건릉(사도세자와 정조의 릉) 입구 ⓒ 2008 한국의산천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큰 아들 경의군이 영조 4년 10 세로 사망하자, 세자로 책봉되었다. 15세 때 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맡기도 하였다. 사도 세자는 조숙하고 총명한 데다가, 영조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언행에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호기심이 많아 지난날의 정쟁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기존 질서에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영조의 후궁 문숙의와 노론의 강경파들은 질투심과 두려움으로 견제하던 중, 그의 비행을 내세워 모함하였다.   마침내 1761년 임금도 모르게 관서 지방을 순행하고 돌아오자, 반대파들은 왕세자의 체통을 잃게 했다 해서 공격하여 서인(庶人)으로 폐하게 하고, 드디어는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게 하였다. 종래 사도 세자의 죽음을 나쁜 병과 미친 행동으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보아 왔으나,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 붕당 사이의 정치적 갈등에 희생되었다.
 사도세자 (1735년. 영조11년~ 1762년 영조39년)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선(李煊),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이다. 장조(莊祖, 1735년 - 1762년)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조선의 추존왕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나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이름은 선(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이다. 조선 역사상 가장 비운의 세자로 단연 손꼽히는 인물이 사도세자다. 지금도 성균관대학교 입구에는 8세가 된 사도세자의 태학 입학과 함께 때를 같이하여 세운 탕평비가 있다.(세자는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이 '세자시강원'에서 교육을 별도 시켰으므로 태학에 실제 입학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유학을 중시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탕평비는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으로 인하여 기념비가 아닌 추모비가 되어버렸다.    이전에 쓴 정조에 대한 관련글  과인은 정조의 아들이다 => http://blog.daum.net/koreasan/13691642
지지대비와 정조의 효심 => http://blog.daum.net/koreasan/13675557

 

 

▲  사도세자가 태학에 입학하며(상징적인 입학) 영조께서 친서한 탕평비(성균관 대학교 정문에 있음) ⓒ 2008.1.28  한국의산천 

  

 

영조는 세조를 불렀다. "유복(儒服)을 입고 오게하라" 세자 나이 여덟살. 영조는 유복, 즉 학생복을 입은 세자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유복을 입은 세자의 모습을 본 영조는 15년전인 정미년(1727년) 효장세자가 태학에 입학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토록 가슴 뿌듯했는데 그만 그 다음해 죽고 말았다. 이제 그 공백을 메워줄 유일한 아들이 당당히 태학에 입학한 것이다.   

 

영조는 세자와 함께 태학에서 공부하는 여러 집사의 입시를 명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훈시했다.

"당습하지 말라"

영조는 어린 세자의 주위에 당습이 머물것을 염려했다. 영조는 이 때 어필로 글씨를 써 대사성에게 전하며 비로 새겨 성균관 반수교((泮水橋) 에 새우라고 명했다.

 

周而不比乃君子之公心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는것은 군자의 공심이요
比而不周寡小人之私意
편당하면서 보편적이지 않는 것은 진실로 소인의 마음이다.
 탕평비(蕩平碑)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 대학교內 )
시대 : 조선 1742년 . 크기 : 155×62cm, 두께 30cm 
탕평비는 조선 후기인 1742년(영조 18년)에 영조가 공정한 정치를 하는 탕평책을 널리 알려서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선비들에게 교훈으로 삼도록 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축복속에 태어난 (사도)세자.
영조 11년 (1735년)1월 21일 창경궁에는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혔다.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 통화문 근처 집복헌에서 아이의 울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가 산통 끝에 세자를 출산했다.

영조의 나이 마흔 둘, 이미 손자를 봐야 할 나이지만 아들조차 없었다. 왕조국가에서 아들이 없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안요소였고 대신들은 누구를 추대할것인가에 대해 은연중에 암투를 벌이고 극심한 정쟁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세자의 부재는 선왕인 경종때도 심각한 문제였고 극심한 정쟁이 벌어졌으며 영조 자신도 그 정쟁의 한가운데 있지 않았는가... 이런 사태를 막는 길은 하루속히 아들을 보는 일 뿐이었다.

인정문에는 시.원임대신은 물론 6조와 3사의 장관들, 그리고 무관까지 전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모여 있었다. 영조가 옥좌에 오르마자 대소 신료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신령이 종사를 굽어 3백년 가업을 잇게 하신것입니다"
영조도 활짝 웃었다
"고맙소 '삼종의 혈맥'이 장차 끊어지려다 비로서 이어지게 되었으니 다행히 돌아가서 여러 성조(聖祖)들을 배알할 면목이 서게 되었소 즐겁고 기쁘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그 감회 또한 깊소"

효종이래 조선왕가의 혈통은 그야말로 외아들에서 외아들로 이어져 내려왔다. 이렇듯 귀하디 귀한 손이 삼종혈맥이었다. 영조도 삼종혈맥답게 손이 귀했다. 효장세자가 죽은 후 조선 천지의 삼종혈맥이라고는 오로자 영조 자신 밖에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가 7년이나 지속되었다.
만약 이 상태에서 영조가 죽는다면 삼종의 혈맥이 아닌 다른 종친이 후사를 이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불안한 시대에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았겠는가.

 

왕자가 태어난 날 영조 11년 (1735년) 1월 21일
영조는 왕자가 태어난 집복헌(集福軒 :복이 모이는 집)으로 갔다. 배냇저고리에 싸여있는 아이는 이목구비가 뚜렸했다.
눈물 많은 영조가 이때 흘린 눈물은 어머니 숙빈최씨를 회상하는 눈물이었으리라. 영조의 어머니 무수리 출신인 숙빈최씨와 이제 세자를 낳은 영빈 이씨는 궁녀들의 업신을 받던 천인 출신.모두가 한과 눈물의 여인들이었기에....
그러나 훗날 이 아이를 둘러싸고 이변이 일어나니... 영조가 주역을 맞고 생모 영빈이씨가 주요 배역을 맡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이때는 영조가 탕평책을 표방한 뒤라 당색이 표면화 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있었다. 두 정파를 따져보면 뿌리가 같은 서인이었다. 그러나 경종시절 남인에 대한 입장차이로 분열을 한 이래 목호령의 고변이라고 부르는 임인옥사(1722년)을 겪으며 완전히 정적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붕당정치... 붕당이란 남송의 진붕(眞朋)·위붕(僞朋)에서 비롯된 말로 구양수는, 군자들의 당은 진붕, 소인배들의 당은 위붕이라고 일컬은데서 비롯되었으나 항상 자신들의 당은 진붕이고 상대당은 언제나 위붕이었다.    

 

 

▲ 18개의 품계석 ⓒ 2008 한국의산천
왕자는 태어난 당일로 원자로 책봉되었고 이름은 너그럽다는 뜻의 선(李煊)으로 정해졌다. 세자 책봉식은 다음해 영조 12년(1736년)3월 15일 생후 14개월만에 전 당파를 막론하고 모두의 지지속에 국조오례의에 따라 창덕궁 인정전에서 북이 울리고 아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세자로 책봉되었다. 광화문의 큰북이 둥둥 울리고 병조에서는 여러 부대를 동원하여 의장을 진열했고 문무백관은 인정전 마당 18개의 품계석 앞에 자신의 관등에 따라 늘어섰다. "왕은 말하노니 왕세자를 세우는 것은 나라를 튼튼히 하는데 제일 먼저 힘써야 할일이며.. 중략..세자는 의절을 힘써 닦아 백성들의 마음에 순응해 대인의 학문에 나가도록하라" 책봉식을 진행하며 바라보는 영조는 감회가 새로웠다. 그 자신도 무수한 시련끝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니 말이다.   
 

 

 

삼종혈맥
실로 인조반정(1623) 이후 조선 후기 왕조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삼종의 혈맥'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삼종'이란 앞서 효종.현종.숙종 세 임금을 뜻하며, '삼종의 혈맥'이란 그 세 임금의 피를 이은 아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삼종의 혈맥'이라는 이 말에는 그 세 임금의 왕위 계승이 정당하다는 자기 방어 논리가 숨어 있었다. 이는 곧 왕위 계승에 대한 자기 변명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바꿔 말하면 그들의 왕위 계승이 정당한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왕조 국가에서 왕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은 목이 열 개라도 살아 남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이를 둘러싸고 한바탕 죽고 죽이는 피바람이 몰아쳤다. 이후 효종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것은 스스로를 죽음의 길로 내모는 일이 되었고 이런 과정에서 생겨난 성역이 바로 '삼종의 혈맥'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세자를 교육시키기 위한 교육원이 있었다. 세자시강원에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사부로 임명되었다.
세자는 교육중에 사치할 치(侈)자가 나오면 자줏빛 비단 옷과 구슬꾸러미를 한 모자를 던져 버리고 이렇게 말했다
" 이것은 사치한 것입니다'

영조 역시 평생 검소함을 몸소 실천한 군주였다. 그의 침전에는 명주 이불 한채와 요하나가 전부였고 사대부집에 잇는 그 흔한 병풍조차 없었다. 장식있는 자기류도 사용하지 않았다. 궁중생활은 검소함 그 자체였다.

영조는 가끔 세자의 검소함을 부추키기위해 질문을 던졌다.
"비단과 무명중에 어느것이 더 나은가?"
"무명이 더 낫습니다" 
세자 대답에 영조가 흡족한 웃음을 띄며 또 물었다.
"너는 비단 옷과 무명옷중에서 무었을 입겠느냐?"
무명옷을 입겠습니다.
영조는 세자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했다.  
 "범이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이는구나."이 시는 세자 나이 열네 살 때 지은 시였다. 대단한 기상이 깃들인 시다. 영조는 이런 성품이 걱정이었다. 세자에게는 말타고 활 쏘느는 무인 기질이 강했다.  당시 조선은 효종이 사망한 후 청나라와 평화 관계가 정착되자 '북벌의 기상은 사라지고 현실과 동 떨어진 '소중화(小中華)사상'이 팽배하고 정치사상도 '예론'으로 기울고 있었다. 조선의 지배층들은 무(武)에 대해서 일개 병사나 추구하는 것이라고 멸시하는 시기에 세자는 문물을 등한시 하지 않으며 무를 겸비했다. 이것 또한 영조와의 갈등이었다.    세자는 무예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 였고 조선에 맞는 '무기신식'이라는 책을 만든다. 무관들이 무예에 익숙하지 못한 이유는 무술서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혜경궁은 이를 세자를 키운 한상궁의 탓으로 돌렸지만 사실 이는 세자의 천성이었고 비난 받을 일도 아니었다. 제왕은 문무를 다 겸비해야 하는 법. 이런점에서 세자는 문무의 자질을 타고난 임금이었다. '우리나라는 좁아서 군사를 쓸땅이 없다. 하지만 동쪽으로 왜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오랑캐와 접하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면 중원이다." 라고 외치며 왜검과 중국에서 사용하는 교전월도등도 추가했다.

 

영조때에는 북벌이 집권노론의 성격에는 전혀 맞지 않는 정책이었다. 또한 세자는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 사건을 통해 자신의 입장이 반 노론임을 분명히 밝히고 이 후 노론과 세자는 정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노론은 당의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자를 끌어내리기 위해 각종 공작을 본격화 했다.  이런 와중에 사도세자의 법적이 어머니 정성왕후 서씨와 법적인 할머니 인원황후 세상을 떠나며  예순여섯의 나이네 열다섯의 어린 신부를 맞아들인 영조의 재혼은 이후 왕실의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홍봉한과 세자빈 홍씨마저 자신을 꺼꾸러 쓰러트리려는 세력들과 결탁하자 세자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사도세자 자신의 길을 가다세자가 자신의 세계관을 갖게되면서 각 당파에 대한 시각을 명확히 하면서 영조와의 갈등이 시작되었다.노론이 세자를 모함하면서 영조의 세자에 대한 신뢰 또한 무너져 내렸다.하지만 세자는 뚜렷한 정치관을 갖고 았었다. 하지만 함부로 표명하지 않았다 게다가 세자는 기골이 장대하고 무인의 기질까지 지니고 있기에노론은 이런 세자가 무서웠다 세자가 즉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영조 25년 (1749) 1월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밤 영조는 갑자기 승정원에 봉서를 내렸다. 전격적으로 세자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 줄것을 선포한 것이다.이 때 나이 세자 나이 만 열다섯살. 비가 퍼붓는 밤에 임금이 세자에게 전위하겠다고 나서면 전위 전교가 진심인지 신하들의 충성심을 더보기 위한 것인지 모르기에 무조간 뜰에 정청을 채려놓고 울부짖어야 했다. 당사자인 세자도 거적을 깔고 명을 거두기를 빌어야 했다.  영조는 여러 이유를 대며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왕세자로 책봉 받은 후 갑진년에 즉위했는데 즉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 주어야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에서 자유로워 질것이라는 뜻이었다.  세자는 울면서 간청했다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왕위를 받을 수 없다고 했고 세자와 백관이 입이 닳도록 간쟁하니 영조가 물러서며 말했다."부득히 하다면 대리청정은 어떻겠느냐" 이로서 열 다섯살의 세자는 국정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영조는 사람을 쓰는것과 군사(국방)를 동원하는 것, 사형에 관한 것 이 세가지만 자신에게 품의하고 나머지는 세자에게 아뢰라고 명하였다. 이것이 진정한 영조의 뜻이 관철되는 순간이었다. 영조 20년 (1744)1월 9일
안국동의 안국동의 풍산 홍씨가는 아침부터 술렁거렸다. 왕세자빈으로 책봉받는 부절과 예물을 받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세자빈을 간택된 홍씨는 친정이 아닌 별궁에서 소학과 어제훈서등을 배우고 있었다. 훗날 혜빈, 혜경궁으로 불리는 여인이 바로 그녀다. 눈물을 훌리는 홍씨는 지금은 과거와는 다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제는 자신으로 인해 가문이 일어날수있다는 사실에 기뻣기 때문이다.  
  
홍씨는 이곳에 오기 1년전 아버지 홍봉한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그 때 아버지의 나이 서른한살 동년배중에는 종6품이상 참상관이 수두룩했고 빠른 사람은 당상관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 홍봉한은 출사도 못하고 그나마 작년에 특별히 실시한 알성시에서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때만해도 홍봉한의 집은 가난했다. 세자빈으로 간택된데 필요한 의복조차 마련할 돈 조차 없어 홍씨 언니의 혼수로 준비해둔 옷감으로 치마를 만들고 낡은 천으로 속옷을 만들며 빚을 얻어 겨우 치러냈을 정도였다. 
그러나 가문마저 미천한것은 아니었다. 선조들의 벼슬로 따지자면 쟁쟁한 집안이었다. 안동 풍산현이 본관인 풍산 홍씨의 시조는 고려의 국학 직학(直學)인 홍지경이며 조선조에 많은 현관을 배출했다.  그리고 대사헌 홍이상과 선조의 딸인 정명공주의 부군 영안위 홍주원이 그 직계 조상이다. 또한 홍씨의 고모부 홍만용은 예조판서를, 증조부 홍중기는 사복시 첨정을  할아버지 홍현보는 예조판서를 역임한 쟁쟁한 가문이었다. 

 

 

▲ 영괴대비 ⓒ 2008 한국의산천

영괴대는 1760년(영조236) 8월에 영조가 온양의 온궁에 행차했을 때 장헌세자, 즉 사도세자가 따라와 무술을 연마하던 사장이다. 당시에 장헌세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온양군수 윤염에게 명하여 사장에 3그루의 느티나무를 심게 하였으며, 정조19년(1795)에는 온양군수 변위진과 충청도 관찰사 이형원에 의해 나무 둘레에 길이 15척 너비 12척 5촌, 높이 3척 1촌 크기의 대가 만들어 졌다. 공사가 끝난후 관찰사가 조정에 장계하자 정조는 대의 옆에 비석을 세워 그 사적을 기록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영괴대비다. 비는 정면에 영괴대비라고 정조가 어필하였으며, 후면에는 어제 영괴대명을 윤염의 아들 윤행임이 글을 썼다.

 

영조 36년 세자는 종기 치료차 온양의 온궁을 찾았고 그곳에서 세자의 덕행으로 부로(父老)나 서인들 치고 세자의 덕을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무더운 여름날 긴 행차 후에도 앓는 사람이 없어 완벽하게 행차를 다녀오자, 온양행차는 세자의 위의를 만찬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한 탁월한 지휘 능력을 가진 세자를 보고 다급해진것은 노론이었다.    자는 영조37년 4월초2일에 관서행을 결행한다. 이미 이때는 세자와 노론사이에 팽팽한 긴장감 속에 자신을 죄어오는 음모에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홍계희 역시 세자가 서울에 없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노론계 관학 유생들을 움직여 승정원으로 떼지어 몰려왔다.  이때 영조는 유생들을 거느리고 세자를 입대하라고 이른다. 홍계희와 노론은 쾌재를 부르며 관학 유생 안형,이헌,원계하 등이 세자궁에 가서 세자 면대를 요청했다. 세자는 완벽한 함정에 빠졌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세자가 버젓이 덕성합에 나타난 것이다.  세자는 하루만에 관서에서 서울까지 말을 달린것이다. 가히 신마(神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일로 유생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노론은 경악하고 그만큼 세자는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세자는 신속한 정보망과 밤새 말을 달린 기동력에 무사히 위기를 넘겼지만 항간에는 세가가 동궁을 떠나 유람을 다닌다는 말이 계속 떠돌았다.놀랍도록 신속한 세자의 대응이었지만 이번일로 경악한 노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자를 끌어내리려고 했다. 세자의 움직임 하나하나 시시콜콜 모든일이 세자의 부인인 혜경궁의 입을 통하여 노론인 친정쪽 홍봉한에게 전해졌으니 세자는 영조와 영조의 여인들 그리고 노론뿐만 아니라 부인까지 따돌리고 생존을 도모해야만 하는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계속해서 조직적으로 관서행에 대한 뒷말을 퍼트렸고 주로 여자와 관련된 세자의 비행이었다. 김귀주가 비밀문서를 올려 세자의 관서행을 알리는 등 모함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도 영조는 모른척하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어느날 세조가 관서행에 대해 솔직히 말했다. 4월 2일초 떠나서 22일 돌아왔다고..."그리고 거적을 깔고 단식을 하며 사죄를 했다. 그리고 관서행을 계기로 세자를 제거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자 노론은 초조해졌다.  

 

▲ 온양 온천내에있는 영괴대 ⓒ 2008 한국의산천  

영괴대(靈槐臺)온양호텔의 한쪽에 사도세자의 흔적이 남아있다. 정조가 세운 영괴대(靈槐臺)가 그것이다. 사도세자가 주기 2년 전 온양의 행궁인 온궁에 요양하러 왔을 때 기념하여 세운것이다. 전하는 기록에는 '그때 마굿간을 뛰쳐나간 군마의 주인 위사(衛士)를 처벌하고 밭주인에게 후히 보상하라고 명령한 인물이 사도세자'였다고 전한다. 또한 온양 읍내의 부로(父老)들과 이름없는 선비들을 불러모아 도타운 말로 학문에 힘쓸것을 권한 이도 사도세자 였다.    사도세자의 성품영조와 궁녀 출신 선희궁(영빈 이씨)의 아들로 태어난 사도세자는 천성이 어질고 너그러웠다고 한다 기골이 장대한데다가 장난감 무기를 가지고 전쟁놀이를 즐겨할 만큼 어려서부터 풍부한 무사적 기질을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배우지 않고도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다는 부왕을 닳아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자라면서는 한상궁이 만들어준 칼과 활을 가지고 논 탓인지 칼쓰기와 활쏘기를 위시한 기예에 특히 뛰어났고, 유교경전보다는 점복을 비롯한 잡서들을 즐겨 읽곤 하였다. 부왕의 강한성격에 눌려 지내서인지 소심한 측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우스갯소리를 곧잘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5세 이전에는 부왕이 능행 등의 바깥나들이에 데려가지 않아서 궁궐 안에서만 갇혀 지냈다. 그러다가 1749년(영조 25) 15세부터 대리청정을 했다 15세밖에 안 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것은 영조가 체력이 약해져서 정양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중요한 이유였던 것 같지는 않다. 영조의 의도는 탕평정치 규모를 빨리 익히게 하려는 데 있었다. 이는 대리청정중인 사도세자에게 늘상 당론을 타파해야 한다는 탕평의 뜻을 가르친 데서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리청정이 화근이 되어, 결국에는 '뒤주 속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사도세자는 당시 정국을주도한 외척당 계열과 별로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외척당을 견제한 청류당 계열 대신들에게 많이 의지했다. 곧 정치적으로는 외척당과의 갈등이 비극의 가장 큰 이유였다. '한중록'에서는 영조와사도세자의 성품이 다른 것도 화근이라고 지적했다. 영조는 세밀하고 민첩한 데 비해, 사도세자는 말치 적고 민첩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조가 물어볼 때 머뭇거리는 일이많았고, 자기 견해를 명확히 표현하지 못해 영조가 늘상 답답하게 여겼다고 한다 또한 공무를 집행하는 스타일도 달랐다. 사도세자는 말솜씨와 얼굴빛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려 하지 않아 과묵하고 위엄이 있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부왕인 영조보다 사도세자를 더 어려워했다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이런 성격은 대리청정중에 정사를 처리하면서 영조와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들을 일으키는 소지로 작용하였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했다고 하지만 실무적으로 중요한 사안은 대체로 비변사의 논의를 거쳐 처리했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안은 언제나 영조의 재가를 얻어서 결정했다. 그러므로 이런 데서 사단이 발생할 여지는 적다. 문제는 당론에 관계된 상소문 처리에서부터 벌어진 것 같다.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을 때는 불호령이 떨어졌고, 세자에 대한 영조의 꾸중과 격노가 심했다고 한다.
대리청정을 시작한 후 3∼4년간은 그런 대로 무사히 넘어갔다. 그러다 정조가 출생하던 1752년 겨울, 사도세자는 당론을 잘못 처리했다 하여, 홍역이라는 열병을 앓는 상태에서 눈 위에 엎드려 대죄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영조가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는 선위소동을 잇달아 일으켜 또다시 며칠 동안 얼음 위에서 석고대죄까지 해야 했다. 그 결과 사도세자는 정신병을 얻었고, 이것이 화병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후 사도세자는 부왕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데 맛을 들여 행동이 난폭하게 거칠어졌고, 이윽고 법적 어머니인 정성왕후와 할머니 인원왕후가사망한 다음해인 1758년에는 세자폐위 전교가내려지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 폐위 전교는 당시 도승지였던 남인 채제공이 끝까지 만류하여 심각한 상황으로까지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로부터 4년 뒤인 1761년 봄 석 달에 걸친 평안도 여행이 빌미가 되어 (내란에 관련된 소문이 난무하였음) 사도세자는 다음해에 부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사도세자의 비행 10여 조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건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 사건의 전말을 기록해놓았기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이 사건은 보통 혜경궁의 기록을 따라서 '임오화변'이라고 불린다.
사건은 한 달 전 나경언이 역적모의를 고발하는 고변의 형식을 빌려 영조에게 세자의 비행 10여 조를 올린 데서 비롯되었다. 나경언은 당시 액정서의 별감인 나상언의 형이었다. 액정서는 군주의 명령전달과 관련된 잡다한 업무, 이를테면 붓과 벼루를 공급하거나 열쇠를 보관하는 일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곧 왕실 내부의 사안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 수 있는 직책이었다.
  
'영조실록'에는 나경언이 탕진해버린 가산을 회복하기 위해 세자의 비리를 고해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나경언은 당일로 사형당했고 집안은 풍비박산되었다 그러나 그 일로 어떻게 큰 돈을 벌 수 있었는지, 누구의 사주나 돈을 받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영조실록'에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 용주사(2005.6.5 촬영)ⓒ 2008 한국의산천 

 

신라 문성왕 16년 (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되고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 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하였다.   최근에 지어진 효행박물관에는 정조대왕이 하사한 부모은중경을 비롯하여 보물 1095호 봉림사 아마타불 복장유물, 정조대왕의 친필인 봉불기복게, 김홍도의 사곡병풍 등이 있다.

 

나경언의 고변나경언이 올린 10여 조는 전부 다 알려져 있지 않다. 기록에는 나경언이 단순히 비행만을 고발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가 고변한 대로 "변란이 곧 일어난다"는 내용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나경언의 상소는 곧바로 불태워져 영조와 홍봉한, 윤동도 3인만이 원본을 제대로 보았을 뿐이다. '승정원일기'의 기록도 이후 모두 불태워졌다. 따라서 지금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은  '영조실록' 기록뿐이다.
  
'영조실록'에 나타나 있는 새용은 영조가 세자에게 직접 사실여부를 확인한 5∼6가지 항목정도다. 세자의 아들인 인을 낳은 첩을 포함하여 여러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 여승을 궁으로 불러들였다는 것, 시전 상인의 재물을 빌려 쓰고 갚지 않았다는 것, 북성으로 나가 유람했다는 것, 평안도로 여행을 갔다는 것 등이다   사도세자의 평양행이 있던 그 해겨울 10세가 된 왕세손(정조)의 혼인이 추진되었고, 다음해 2월에 가례를 올렸다. 그리고 4개월 뒤인 윤5월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었다.'영조실록'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직전 세자를 낳은 선희궁이 영조에게 아들에 관해서 무언가 비밀리에 고해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영조는 그 내용을 가지고 사도세자를 질책하였다고 한다. 

   

14년간 대리청정했던 사도세자. 뒤주에 갇히기 직전 세자는 뒤주의 모서리를 잡고 "주부(主父)님 살려주시옵소서" 세자(사도세자)의 세손(정조)는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주소서" 하였을 뿐 세조가 복더위에 뒤주에서 여드레간 물한모금 입에 대지 못하고 신음하고 기력을 잃으며 죽어가는 동안  그 누구도 세자를 살려 달라고 영조에게 말한 대신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다. 사도세자가 긷힌 다음 날 좌의정 홍봉한은 영조에게 아뢴다. "한림(翰林) 윤숙(尹塾)은 어제 신(臣)들을 꾸짖었고 또 울부짖으며 거조를 잃었으니 인심을 안심시키고자 한다면 엄히 처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주청을 한다. 이어서 윤숙은 해남으로 유배를 떠난다.    

 

조는 칼끝을 두드리며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하라고 명하였다.  "네가 자결하면 조선 세자의 이름을 잃지 않을것이니 자결하라"  영조는 전에서 내려와 섬돌 위에 앉아 말했다. "내가 죽으면 3백년 종사가 망하고 네가 죽으면 3백년 종사는 보존 될것이니 네가 죽는 것이 옳다." 이말에 (사도)세자는 통곡했다.  세자는 말했다. "전하께서 칼로 찌르신다해도 신은 칼끝에 놀라지 않을것입니다. 지금 죽기를 청합니다." 이어 세자는 허리띠를 풀어 목을 맸고 곧이어 땅에 쓰러졌다.   모두가 (사도)세자를 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세손(정조)이 들어왔다. 당시 세손의 나이는 만 10살이었다. 세손은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관과 도포를 벗고 세자뒤에 엎드렸다.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주옵소서"

 

영조는 말했다. 누가 세손을 데려왔는가? 빨리 데리고 나가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사관(한림) 임덕제(林德蹄)는 최후의 수단으로 황급히 내전에 연락하여 당시 열한 살의 왕세손(훗날의 정조)을 업어 오게 한 뒤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아버지(사도세자)를 용서해 달라고 빌게 하였다. 세손의 눈물에도 영조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한림 임덕제가 세자 뒤에 엎드려 일어나지 않자 영조가 끌어내라고 명했고, 위사(衛士)들이 달려들자, "내 손은 사필(史筆)을 잡는 손이다. 이 손을 끊을지언정 나를 끌어낼 수는 없다"고 항의했지만... 이후 홍봉한이 준비한 뒤주에 (사도)세자를 들어가게 한다음 영조는 직접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잠근 후 큰못을 밖고 동아줄로 뒤주를 봉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렸다 "세자를 폐해 서인으로 삼는다." (廢世子爲庶人 自內嚴囚, 遂命世子幽囚 )

 

이 후 삼복더위에 물한모음 먹지 못하던 세자는 8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자가 죽던 그 날, 홍봉한은 한강에서 배를 듸우고 놀다가 세자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궁으로 들어왔다.

 

세자가 사망하자 바로 그날 세자의 호를 사도세자라고 직접 지어주었다. 영조가 남달리 눈물과 인정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권력은 눈물과 인정을 넘는것이었다. 이 후 두달 후 세자의 장례가 치러지고 영조는 배봉산에 친히 나서서 제주를 하였다. 친히 제주를 하면 훗날 노론이 사도세자의 신주를 땅에 묻어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예방책이었다. 

 

 

장례위원격인 예장도감 제조 홍봉한이 물었다. " 신들도 곡하는 예에 참석해야 합니까?"

 

영조가 답했다."참여하라. 모든 문무백관은 참여하라!" 세종에 버금갈 만큼 수신(修身)과 제가(濟家)에 완벽했던 정조. 조가 83세로 승하한 후 뒤를 이은 22대 정조는 1776년 3월10일 영조가 세상을 떠난 지 엿세만에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했다. 그리고 임오년(사도세자가 죽은 해) 이후 하루도 잊지 않고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 아!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선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선대왕께서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하지 않는것(不貳本)'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즉위 일성(一聲)에 대신들은 경악했다. 특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물어넣었던 노론은 공포에 휩싸였다. 14년전 뒤주속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가 다시 살아난 듯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노론이 가장 두려워한것은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정조)이 즉위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어찌 그 아들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세손(정조)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서 희생되었듯이 항상 죽음의 위협속에서 세손시절을 보내며 고립무원의 길에서 살얼음을 밟듯 조심 조심 두렵게, 위태 위태하게 이때까지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왔다.

 

정조는 열흘 후인 3월 20일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이라 올리고 묘호는 영우원, 사당은 경모궁이라 높혔다. 그리고 그 5일 후 홍인한등과 결탁해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환완공주의 양아들 정후겸을 경원으로 귀향 보냈으며, 이어 정후겸의 양모이자 자신의 고모이기도한 화완옹주를 서녀로 강등시켰다. 화완은 이후 정치달의 부인을 뜻하는 '정처(鄭妻')라는 치욕적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정조가 선왕의 대를 이어 왕이되고 비운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릉을 화성으로 이장하게 된다. 아버지를 죽인 노론과 강화된 왕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사도세자의 뜻을 계승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날 사도세자의 영구는 열번 죽어도 씻을 수 없는 한을 지닌 시신이 27년만에 임금이된 자신의 아들 정조와 함께 새로운 안식처로 떠나는 날. 이날 이 행렬을 호위한 사람은 사도세자를 살리지 못했다고 꾸짖고 그 이유로 귀향을 떠났던 병조판서 윤숙이었다.  어가와 잉여가 함께 새로운 안식처인 화성으로 향했는데 떠나는 행렬은 웅장했다. 경기 관찰사가 선도하고 담당 신하들은 예법에 따라 좌우로 늘어섰다. 취타수 18명과 붉은 군복을 입은 4백여명의 군사들이 세줄로 늘어섰으며, 사도세자와 잉여 곁에는 호위군사 200여명이 겹줄로 늘어섰고 가가각 50여개의 만장이 앞뒤로 하늘을 수놓았다. 노제 장소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했으며, 수백리 밖에서 어가와 영가의 행렬을 보기위해 몰려 들었다. 이 행렬을 호위한 인물은 병조판서 윤숙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날 정승들에게 세자를 구하라고 명한죄로 홍봉한의 주청으로 인해 탄핵당해 해남으로 귀향길에 올랐던 한림 윤숙이었다.다시 사도세자를 구하려던 자의 호위를 받으며 안식처로 길을 떠나고 있다.  (젊은 사관이었던 윤숙은 해남으로, 영조의 명에도 물러가지 않고 세자를 지키고 세손 정조를 업고 들어와 할아버지에게 죄를 빌게 했던 사관(한림) 임덕제-'나의 손은 사필(史筆)을 잡는 손이다. 내 손이 짤릴 지언정 나를 끌어낼수는 없다'고 외쳤다-는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임금을 상징하는 황룡기를 비롯하여 사방을 표시하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등의 수많은 깃발을 펄럭이며 영원한 안식처인 화산(現 융건릉) 으로 가고 있었다.

 

'부주(父主)여 살려주소서!' 했던 아버지와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주시옵소서!' 라고 호소했던 세손이 왕이되어 함께 떠나는 길. 각영마다 늘어선 깃발, 그리고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북소리와 취타소리는 사도세자의 혼이 펄럭이고 울부짓는 소리였다. 

 

 

 역대 선왕의 릉 만큼 잘 꾸며진 파란 하늘이 펼쳐진 사도세자의 융릉 ⓒ 2008 한국의산천

 

한중록(閒中錄) 궁중 문학의 효시라고 말하는 한중록은 한을 담은 기록이라는 (恨中錄), 또는 피흘림으로 썼다는 읍혈록(泣血錄)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책이름은 '한가한 날의 기록'이라는 한중록(閒中錄)이다. 이런 제목이 붙은 이유는 혜경궁 홍씨가 정조의 지극한 효도를 받으며 살아가던 때 저술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보통 주부가 쓴 생활 기록이 아니다. 왕권계승자이면서 아버지와 친정세력에의해 죽은 지아비를 둔 부인이 쓴 정치적인 소설이다. 이 사실을 간과하지 않으면 한중록의 본뜻을 이해 할 수 가 없는것이다. 혜경궁은 회갑이 되던 1795년 (정조19년)에 국왕을 낳은 어머니로서 친정에 필적을 남기려는 일로 게획되었고 이때 친정 조카 홍수영에게 내려 준 책이 바로 한중록이다. 그런데 1801년 (순조1년) 혜경궁은 정순왕후에 의해 동기인 홍낙임이 죽고 친척들이 유배를 당했다.자신이 죽더라도 순조가 크면 다시 볼 수 있도록 다시 정리하였는데 순조의 생모인 가순궁에게 보관토록하였으며 그 때의 책이름이 '읍혈록'이라고 붙였다.  이때의 기록에는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고  또한 친정의 원수를 갚아 달라는 의도도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한중록을 쓸 당시 혜경궁은 사랑하는 남편의 비참한 죽음에 오열하는 20대 청상과부가 아니었다. 당시 혜경궁 홍씨는 구중궁궐 깊숙한 곳에서 영조,정조,순조 세임금의 치세 6,70년간을 지켜본 70대의 노회한 정객이었다.
혜경궁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은 사도세자가 죽은 후 승승장구하던 형제 정승의 지위를 누리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 였으나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혜경궁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직후 몰락을 길을 걷는다.
그 이유는 혜경궁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주범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이를 '병신처분'이라 한다) 세상의 시각 또한 혜경궁을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간 악처'로 의심했다. 아마 이 몰락이 없었다면 혜경궁은 한중록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경궁은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와 자신을 왕과 왕비로 추존해주기를 기대했지만, 정조는 사도세자가 못다 한 '큰 뜻' 을 잇는다는 표방으로 도덕성을 회복하고 통치권력의 정통성을 장악해갔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후 훗날 문득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어릴 때 (사도)세자는 실로 성인의 자질이 있었다" 라고.... 

 

 

▲ 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著 휴머니스트 刊. 13,000원

 

▲ 윗글의 내용은 일부는 이덕일著 '사도세자의 고백'과 제가 읽은 위의 책에서 일부 참고 하였습니다.

 

2008년 1월의 마지막 주말. 쌀쌀한 아침 지지대 주차장에서. 글·사진 ⓒ 2008 한국의산천  누가 떠나고 누가 남는가?영조,사도세자(장조),정조에 관한 책을 다 읽고 덮으면 시원한 보다는 오히려 가슴을 무겁게 짖누르는 답답함으로 가득하다. -한국의산천-  

 

 

250년이 흐른 1999년 12월 1일에 국립중앙박물관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놀라운 묘지문을 공개했다.

영조가 직접 사도세자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어제사도세자묘지문(御製思悼世子墓誌文)」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영조 작성 사도세자묘지문 공개

입력 1999.12.01. 14:12 수정 1999.12.01. 14:12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조선 영조가 뒤주 속에 갇혀있다 비운의 생을 마감한 아들 사도세자를 위해 쓴 묘지문이 250년만에 공개됐다.

지금까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쓴 글로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 작품이 조선왕조실록과 정조 개인문집인 「홍재전서」에 전문이 실려 전해오고 있으나 영조가 쓴 사도세자 묘지명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고 박광용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는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2월 이달의 문화재 전시품목 중 하나로 지난 68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거주 이종만씨가 기증해 보관해오고 있던 영조의 `어제 사도세자묘지문'(御製思悼世子墓誌文)을 1일 공개했다.

 

어제란 임금,즉 영조가 썼다는 뜻이며 묘지문이란 죽은 이의 행적을 기록한 글로 보통 무덤에 함께 매장됐다.

이 묘지문은 가로 16.7㎝, 세로 21.8㎝, 두께 2.0㎝ 사각형 청화백자 5장에 쓰여있는 것으로 작성일자는 영조 38년(1762) 7월로 기록돼 있다.

임금이 쓴 묘지문은 통상 실제로는 문장이 뛰어난 학자가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묘지문은 "이것은 신하가 대신 쓰는 것은 아니며 내가 누워서 받아적게 하여 짐의 30년 의를 밝힌 것이니..."라며 영조가 직접 작성한 것임을 밝히고 있어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강서원에서 여러 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이 어찌 종묘와 사직을 위한 것이겠는가?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다. 때는 임오년 여름 윤5월 21일이라. 이에 다시 예전의 호를 회복하게 하고 시호를 특별히 하사하여 사도라 하겠노라.”라고 기록된 부분을 보면 영조의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영조가 사도세자가 죽자마자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것은 신하가 대신 쓰는 것이 아니며 내가 누워서 받아 적게 하여 짐의 30년 의리를 밝힌 것이니, 사도는 이 글월로 하여 내게 서운함을 갖지 말지어다.”라고 명시하여 영조자신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얼마나 후회하며 애태웠는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 묘지문에서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가 성군이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배워 타일렀으나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는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노라"면서 왜 아들을 뒤주에 가두게 되었는지를 토로하고 있다.

 

미치광이로 변한 아들을 탓하면서도 영조는 아들을 죽게 한 비통한 마음을 곳곳에서 토로하고 있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구술하노라. 때는 임오년 여름 윤5월하고도 21일이라"

이 묘지문에서 충격적인 내용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던 것이 정말아들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훈육하기 위해서였다는 고백.

즉 영조는 이 묘지문에서 "강서원에 여러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어찌 종묘와 사직을 위함이었겠는가...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며 원통해 하고 있다.

 

또한 <한중록>은 사도세자가 손톱이 빠질 정도로 뒤주를 긁어대며 자신의 다급함을 알렸다고 기록했는데, 그렇다면 사도세자가 힘이 빠져 죽어가는 동안 그 소리는 서서히 멈췄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들이 뒤주를 지키는 병사들에 의해 영조에게 모두 보고됐어야 했다. 하지만「어제사도세자묘지문」을 통해 영조가 아무런 보고를 듣지 못했다가 사도세자가 죽은 후에야 사망 소식을 들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이런 언급은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진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영조의 역할과관련,매우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사도세자 죽음을 둘러싼 학술 단행본으로는 지난해 푸른역사에서 나란히출간된 박광용 교수의 「영조와 정조의 나라」와 이덕일씨의 「사도세자의 고백」이 있다.

 

1905년 12월 8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젊은 청나라 혁명가 진천화(陳天華)가 바다에 투신자살했다.

그녀가 남긴 ‘절명서(絶命書)’ 부분이다. ‘우리가 망할 길을 걸은 것이지 어찌 남을 원망하는가. 우리가 망할 길이 없었다면 저들이 우리를 망하게 했겠는가. 조선이 망한 것은 조선 스스로 망한 것이지 일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