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산천

거친 호흡 몰아쉬며 바람 저편 굽이치는 산맥 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

정조의 못다이룬 꿈과 효심이 가득한 수원화성

댓글 29

MTB등산여행

2011. 5. 2.

자징구를 타고 가며 바람처럼 스치는 풍경을 이곳에 담는다  [2011 · 5 · 2  · 황사 가득한 월요일 · 한국의산천(平山  禹 官東) ]

 

아버지(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보며 살얼음판을 딛듯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세손(정조).

왕위에 올라 노론과 소론의 나라가 아닌 진정한 백성의 나라이기를 바라고 선정을 베풀고자 고뇌했던 그 아픔을 조금만이라도 이해 할수있다면... 

 

정조의 못 다 이룬 꿈

아버지에 대한 효심,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수원 화성 

 

정조(正祖,이산 1752년 ~ 1800년)
조선의 제 22대 임금.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묘호는 정조(正祖),

시호와 존호는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렬성인장효대왕(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대한제국 때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 추존되었다.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수원의 화성에서 나그네는 그저 못다 이룬 사랑의 기억만 가지고 갈 뿐이다 

 

아름다운 풍경이 내 마음이고

아름다운 꽃 또한 내 마음이다

아름다운 음악도 내 마음과 같다.

 

※ 자전거를 타고 화서문과 팔달문 사이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부터 성곽을 사진 촬영하며 한바퀴 도는데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됩니다. 수원화성의 최고봉인 팔달산 화성장대에 오르는 길은 신풍루 옆에 있는 주차장을 지나 양호한 조금은 빡센 업힐 구간을 오르면 됩니다.

 

▲ 수원 화성 팔달산 서장대 옆에 서있는 세계 문화유산 화성 기념입석에서 ⓒ 2011 한국의산천

황사가 심하여 자전거 타고 달리기에는 그닥 좋은 날은 아니었지만... 달렸습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 3호로서 조선조 제 22대 정조께서 재위시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년 1월)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 9월에 완공하였으며 축성시 51개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시가지 조성, 전란등 으로 인하여 일부 소실되고 41개의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1997년 12월유네스코 총회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 의왕시에서 수원을 향해 오르는 길 고개. 지지대 전각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 2011 한국의산천

  정조께서는 아버지이신 사도세자를 모신 현륭원(現 융·건릉)을 참배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 갈때 이곳에 이르면 말씀하셨다. 이제 이 고개를 넘어가면 선왕(아버지·사도세자)께서 잠들어 계신 화산(花山)이 보이지 않는다. 천천이 가거라. 아주 천천히...

 

하마비(下馬碑)가 서있는 지지대 고개 - 이 앞을 지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馬)에서 내려야 한다 - 저 역시 고개를 올라와 이곳에서 잠시 자전거에서 내렸습니다 

정조대왕의 효심이 느껴지는 지지대(遲遲臺) 고개는 수원과 의왕 경계를 이룬 곳이다. 예전 명칭은 사근현(沙斤峴)이었으며 또는 미륵댕이 또는 미륵당 고개로 불렸으나 지금은 '지지대 고개'로 불린다.

 

서울에서 국도를 타고 수원 오산방향으로 가다보면 안양,의왕을 지나서 수원과의 경계인 고개를 넘게 된다. 지금은 넓은 도로에 자동차가 빠르게 지나지만 예전에는 이곳이 넓은 도로가 아니었고 지금보다도 더 높은곳에 굽이 굽이 이어지는 길이 있었을 것이다. 고개의 제일 높은 마루턱 이곳이 사근현이었으며 지금은 지지대고개라고 부른다.   

 

▲ 교통방송을 듣다보면 도로 체증 구간중에 꼭 나오는 지지대고개 (의왕~수원 사이의 고개) ⓒ 2011 한국의산천

 

지지대비(遲遲臺碑)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 24호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 47-2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비. 비의 높이 150㎝, 너비 60㎝.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 비문을 통하여 정조(正祖)의 부왕에 대한 사모의 정을 엿볼 수 있다.

지지대비는 조선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의 능인 화성 현륭원의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능이 있는 화산을 볼 수 없었기에 으레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고 능이 있는 방향을 뒤돌아 보며 떠나기를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하였다고 하여 한자의 느릴지(遲) 두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의 비문은 홍문관 제학 서영보가 짓고 윤사국이 글씨를 썼으며, 화성 유수 홍명호가 전액을 썼다.   

  

비문의 내용 중 "우리 전하께서 능원을 살피시고 해마다 이 대를 지나며 슬퍼하시고 느낌이 있어 마치 선왕을 뵙는 듯 하시어 효심을 나타내시어 여기에 새기게 하시니, 선왕께서 조상의 근본에 보답하고 너그러운 교훈을 내리시는 정성과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뜻과 일을 이어 받으시는 아름다움을 여기에 그 만의 하나로 상고했도다."라는 사실에서 정조의 애틋한 심정이 드러난다.

 

비의 비문은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서영보(徐榮輔)가 짓고, 전판돈녕부사겸판의금부사(前判敦寧府使兼判義禁府使) 윤사국(尹師國)이 글씨를 쓰고, 수원부유수겸총리사(水原府留守兼總理使) 홍명호(洪明浩)가 비의 상단 전자(篆字)를 썼다.

숭정기원후일백팔십년정묘십이월일입(崇禎紀元後一百八十年丁卯十二月日立)이라는 사실로 1807년(순조 7) 12월에 건립됨을 알 수 있다. 

 

▲ 의왕을 지나서 지지대고개를 넘어서 수원 화성을 향하여 ⓒ 2011 한국의산천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이후 영조가 83세로 승하한후 뒤를 이은 22대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직접보았기에 더욱 극진한 효심을 보인다. 

정조대왕께서는 1776년 3월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면서 12년 넘게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라고 선포한 뒤 사도세자 추숭작업에 나섰다. 이때 많은 신하들은 기겁을 했다 죽은 사도세자가 살아온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백성들에게는 효를 강조하는 왕으로서 내 아버님께는 효도 한 번 못하다니..."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늘 가슴 아파했다.

 

어릴 때 목격한 당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오를 때마다 정조는 부친의 영혼이 구천을 맴돌 것만 같았다.  

정조가 즉위하자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열고 다시 염을 한다음 궁중으로 모시고 국장처럼 성대하게 장을 치룬 후 지금의 능자리인 경기도 화성군 화산(花山)으로 옮겼다.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영구를 파내니 광중(壙中)에 물이 한자 남짓이나 고여 있었다. 부친이 물속에서 신음하는것을 본 정조가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사도세자의 영구는 새로운 안식처인 화성으로 향했는데 임금을 상징히는 황룡기를 비롯하여 사방을 표시하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등의 수많은 깃발을 펄럭이며 영원한 안식처인 화산(現 융건릉)에 도착했다.   

 

정조는 보여(步與)를 타고 산능성이를 한바퀴 빙 돈 다음 하교하여 "이산의 이름이 화산(花山)이니 꽃나무를 많이 심는것이 좋겠다."고 하여 이후 화산은 지극한 정성으로 나무가 울창하고 사시사철 꽃이 수를 놓은 꽃산이 되었다.

 

정조는 이곳을 현릉원이라 이름짓고(장조로 추존된 뒤에 융륭으로 변경) 틈만나면 이곳을 찾았다. 재위 24년간 능관리를 위해 부근 화산일대 13개 마을에 영을 내려 집집마다 재 한 삼태기씩을 모아 뿌리게 하고 솔밭에 송충이 극성이면 손수 나가 송충이를 잡고 송충이구제를 독려 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자신도 부친곁에 묻힌다.

그렇게 정성을 쏟은 탓인지 융·건릉은 조선조 왕릉중 어느 능보다 규모와 조성미, 특히 소나무가 울창하며 주변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또 어느날 40대의 정조는 능행차 길에 70대의 영의정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아버지가 계시는 현륭원 근처 언덕에 묻어 주시오."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세상에서 하지 못한 효도를 죽어서라도 해야 겠다는 비장한 유언이었던 것이다.

 

▲ 화사하게 핀 꽃. 배꽃인가? 벚꽃인가? 진달래인가? 목련인가? 꽃이름을 잘 모르겠네 ⓒ 2011 한국의산천

 

정조의 선친인 사도세자는 어찌하여 죽게 되었는가?

 

1762년 김한구와 그의 일파인 홍계희, 윤급 , 세자의 장인 영의정 홍봉한이 세자(사도세자)를 폐위시키고자 윤급의 종 나경언을 시켜 세자의 비행 10여 가지를 들어 상소케 하게 하였다. 

 

나경언의 상변 (羅景彦 上變)
1762년(영조 38) 나경언이 장헌세자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변한 사건.

나경언은 액정국별감(掖庭局別監) 나상언의 형으로,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다. 그는 장헌세자가 그의 빈 혜경궁 홍씨를 죽이려 했고, 비구니를 궁중에 끌어들여 풍기를 어지럽혔으며, 부왕의 허락도 없이 평양으로 몰래 놀러다녔고, 북성에 마음대로 나가 돌아다닌 일 등 10여 가지 비행을 들어 형조에 고변하였다. 이 고변으로 영조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세자의 비행을 알게 되자, 세자에게는 물론 세자의 비행을 알면서도 왕에게 고하지 않은 신하들에 대해서까지 격노하고 문책하였다. 

이에 대해 세자는 석고대죄하고 나경언과의 면질을 요구했으나 부왕의 꾸지람만 받았을 뿐이다. 나중에 세자가 포도청을 통해 나경언의 가족을 심문해 본 결과, 나경언은 우의정 윤동도의 아들 광유의 사주를 받아서 고변한 것임이 드러났다. 당시 영조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파, 벽파의 싸움이 있었고, 그 중에 벽파는 세자를 배척하는 파였다. 그러므로 나경언의 고변의 배후에는 벽파의 작용이 있었던 것이다. 
영조는 자신이 모르는 세자의 비행을 알려준 나경언을 충직한 사람으로 보아 그를 살려주려 했으나, 남태제,홍낙순 등이 나경언을 세자를 모함한 대역죄인으로 극론했기 때문에 결국 처형하고 말았다. 그러나 세자의 비행 문제는 그것으로 종결되지 않았고 다시 확대되어 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게 되는 사건으로 진전되었다.

 

▲ 지지대고개는 의왕시에서 동수원으로 가기위해 넘는 고개로서 광교산에서 수리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가로지르는 고개이다.ⓒ 2011 한국의산천

 

사도세자 (장조 · 장헌세자) 

장조(장헌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이복형인 맏아들 진종(효장세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 출생한 탓으로 영조 12년(1736년)에 두살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 되었으며 10세 때 홍봉한의 딸 혜빈 홍씨와 가례를 올렸다.그는 매우 영특하였으며 글씨를 좋아하고 시를 잘 썼다고 전한다. 3세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웠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으며 7세때 동몽선습을 독파했다. 또한 서예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눠줬으며, 또한 일찍이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어서 1743년(영조19) 관례(冠禮)를 행하고 나서 부왕이 당론(黨論)을 없앨 방법을 묻자 "여러 당인을 한결로 보아 함께 기용하면 된다" 고 대답하여 칭찬을 받았으며, 궁관과 더불어 신임사화를 논하여 의리의 근원을 분명히 가려내기도 했다. 세자 시절에는 소론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10세 때는 경종 때 발생한 신임옥사(辛壬獄事) 사건을 노론들이 잘못 처결하였다고 비판하여 일찍부터 노론의 미움을 받을 빌미를 제공하였다.
1749년(영조25) 15세가 되던 해 건강상의 이유로 영조의 명을 받고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게 되었다.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여러 지방의 환곡에 대하여 덜어내고 더 받는 '부다익과'(芬多益寡)의 정사를 베풀고, 영세민을 괴롭히는 대동(大同)·군포(軍布)의 대전(代錢)·방납(防納)을 금지시켰다. 또한 영조 즉위의 의리와 명분에 관련된 신임사화와 같은 중요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부왕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아 대립이 심화되었다.
 

영조는 조선조 후기 학문과 정치 사회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다. 그러나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일념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장조는 1749년 15세때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을 대리하였는데, 이때 그를 싫어하던 노른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그를 무고하였다. 성격이 과격하고 급하던 영조는 수시로 그를 불러 꾸짖었고, 이로 인해 그는 정신 질환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거나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관서 지역을 유람하기도 했다.(한중록 恨中錄'에도 이때 세자는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내왕하는 등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고 나온다).


장인 홍봉한은 그의 병증에 대해 무엇이라고 꼭 꼬집어서 말할 수 없고,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하였다. .

그러나 "무릇 임금이 배라면 신민은 물과 같다"고 세자는 말했다. 어찌 세자가 미치광이였는가?

 

그의 돌발적인 행동이 계속되자 1762년 후궁 문숙의(文淑儀)의 질투심 어린 참소와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의 일파인 홍계희, 윤급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윤급의 종)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에 영조는 장헌세자의 호탕한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겨오던차에 분개하여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으로 불러 자결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그가 부왕의 명을 거부하자 세자를 서민으로 폐하고 쌀 뒤주속에 가두어 창경궁 선인문앞에 내놓고 큰돌을 올려놓는 공개처형의 형벌을 내렸다. 

왕세손이었던 정조 나이 11세 때, 할아버지 영조는 신하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어서 뒤주속에 놓지 않고 무얼 주저하느냐?" 이때 어린 왕세손(정조)은 울며 할아버지께 아버지의 용서를 빌었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영조는 뒤주에 못을 박고 큰 돌을 얹게 한 후 붓을 들어 서인을 만들어 죽음을 내린다는 교서를 발표했다.그리고 쌀을 담아두는 나무 상자인 뒤주속에 갇혀있던 세자는8일째 되던 날 목마름과 더위, 허기에 지쳐 질식사하는 끔찍한 궁중 참극이 벌어진다. 이때 그의 나이 28세의 젊은 나이였다. (지금으로부터 246년전의 일이다)  

 

혜경궁 홍씨와 홍봉한 홍인한 형제, 김상로, 홍계회 등 집권 노론 인사들은 모두 세자의 반대편에 서서 말하고 행동했다. 반면 이종성, 조현명, 조재호 같은 소론 인사들은 시종 세자의 편에 서서 말하고 행동했다. 일련의 이러한 행동은 결국 세자가 홍봉한이 준비한 뒤주속에 갇혀 찌는 삼복더위에 물 한방울 못마시고 굶어죽는 궁중 참극을 낳았다.

 

'1762년 윤 5월 13일 영조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이 준비한 뒤주에 (사도)세자를 가둔다.'

'여드레 후인 윤 5월 21일 세자가 사망한다.’( 세자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 하고 뒤주에 갇혀있던 8일간엔 복날이 끼여 있었다.)

 

국가 기강확립차원에서 형벌을 내렸지만 부모로서 애통함을 금할수없었던 영조는 곧 뉘우쳐 사도(思: 생각할 사, 悼: 서러워할 도)의 시호를 내려 혼을 위로하고 서울 배봉산 아래에서 장례를 지냈다.  

  

▲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성문인 장안문. 성문앞에 반원형태의 옹성을 지어 놓은 것이 이채롭다 ⓒ 2011 한국의산천

 

장안문(長安門)

장안문은 화성의 4대문중 북쪽대문으로 정문이라 할 수 있다. 1974년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완공하였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의 안녕을 상징하는 의미이다.

장안문 누각의 지붕은 우진각 지붕으로 웅장한 위엄을 나타내고 있으며 서울에 자리한 국보1호인 숭례문보다 더 큰 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다. 성문 바깥에는 반원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마치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것과 같다고해서 붙인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 팔달문은 현재 보수공사중이므로 2008년에 촬영한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 2011 한국의산천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화성을 완공한 후 펴낸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팔달문 옹성 중앙의 출입문은 사통팔달하는 화성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은 수원의 상징이며 중심이다. 서울의 남대문 격인데 옹성까지 갖추고 있어 훨씬 더 크고 웅장한 느낌이다. 장안문은 한국전쟁 때 무너진 것을 다시 복원했고, 팔달문은 창건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화성을 남과 북으로 가로지르는 장안문~팔달문 길은 경제도시 수원의 중요 통행로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시전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18세기 조선 상인들의 분주한 생활을 상상하며 종로삼거리 쪽을 둘러봐도 좋다. 본래 십자로였던 곳이지만 지금은 화성행궁으로 난 길을 막아 종로삼거리가 됐다.

 

영남 유생들이 '무신창의록'을 정조에게 올린 다음 해인 정조 13년(1789) 7월. 정조는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양주 배봉산에 묻힌 아버지 장헌세자(한 여름날 뒤주속에 갇혀 비운에 떠난 사도세자) 의 묘를 이장 하기로 한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는 정조 자신이 할아버지인 영조와 비운에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뒤를 이은 임금임을 분병히 하기 위한 조치였다. 즉 조선이 노론의 국가가 아니며 뱃성들의 국가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픈 심정이었을것이다. 조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조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 개국 초 태조가 수도 서울을 개경에서 현재의 한양으로 옮긴 까닭은 개경이 신흥 사대부의 정적인 권문세족들의 세력 기반이었기 때문이듯이... 

 

정조는 노론의 서울이 아닌 백성의 서울, 사도세자의 서울, 국왕의 서울을 만들려고 노력하였기에 규장각 설치와 장용영 강화와 새로운 신도시 서울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지로 손 꼽은 곳이 수원면 용복면에 있는 '지극히 길하고 모든것이 완전한 묏자리' 화산(花山) 이었다.

 

▲ 화서문에서 팔달문 구간을 달리며 스치는 풍경 ⓒ 2011 한국의산천

 

▲ 수원에 자리한 북쪽의 정문인 장안문 ⓒ 2011한국의산천

중국의 번화가 장안을 생각하며 정조께서 지으신 이름. 장안문

화성에는 팔달문,창룡문,장안문,화서문 등 4대문이 있다. 남북의 정문인 팔달문과 장안문의 위용이 눈길을 끈다. 봉돈(비상사태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통신시설),치성(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군을 공격하기 위해 성곽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한 구조물),공심돈(적을 살피는 망루의 일종),암문(군수물자를 성 안으로 공급하는 곳) 등을 볼 수 있다.

 

▲ 장안문 옹성 안에서 바라본 장안문 ⓒ 2011 한국의산천

 수원에 자리한 화성(華城). 그의 이상향으로 꿈꾸던 곳인데...노론과 소론의 갈등속에 이상향을 꿈꾸전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바라던 그 뜻을 이루고 못하고 역시나 아쉬운 죽음을 맞는다.  

  정조께서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現 융,건릉)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정조 14∼19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화성은 정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던 실학의 대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 화성은 정조 재위 13년만인 1789년 10월 7일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을 지금의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그곳에 있던 관아와 민가를 지금의 수원시 중심부에 있는 팔달산 동쪽 기슭으로 옮겼다. 이후 1793년 수원도호부가 화성유수부로 승격되고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까지 화성이 축조되었다. 화성의 규모는 둘레가 약 6km 성벽 높이는 약 5m 이다. 화성 성역은 정조의 사도세자 효심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당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정조를 정점으로 관료, 학자, 기술자, 백성들이 함께 만든 근대적 신도시이며 실학의 총체적 결정체이다.

  화성은 정약용의 기본설계서인 성설(城說)에 기초하여 조선, 중국, 일본의 축성법중에서 장점을 택하였으며 거중기, 녹로와 유형거 및 각종 수레등 각종 과학기기를 사용한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화성축성에 대한 모든 내용은 화성성역의괘라는 공사보고서를 통해 상세히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 저것이 정자인지 초소인지 구분이 안가는 매우 아름다운 방화수류정 ⓒ 2011한국의산천

수원 화성의 성벽에서 쓰임새는 드러남 속에 숨어있고 드러남은 쓰임새속에 숨어있다. 쓰임새와 드러남이 서로 숨고 또 숨겨서 함께 드러나는것은 아름다움의 강력함과 강력함의 아름다움이다.

  수원 화성에서는 아름다움은 강력함으로 발현되고 강력함은 아름다움으로 발현된다. 아름다움과 강력함이 다르지 않고 삶과 꿈이 다르지 않다. 수원 화성은 땅위의 성곽이고, 마음속의 왕도이다. 

 

▲ 정면에는 화홍문 그리고 그 오른쪽 성곽 높은 곳에는 방화수류정이 아름다운 자태로 서있습니다 ⓒ 2011 한국의산천

 

화홍문 그리고 그 옆 능선에 서있는 방화수류정 (訪花隨柳亭)  

방화수류정은 화홍문 옆 작은 언덕에 세워진 정자다. 방화수류정이란 '꽃을 쫓고 버드나무를 따라가는 아름다운 정자'라는 뜻이다. 동서로 세 간인데 가운데는 온돌을 놓았고 북쪽으로 한 간을 붙이고 남쪽은 반 간(半間)을 물리었으며, 서쪽의 한 간은 또 길게 두 간을 늘리었다. 남쪽을 밖으로 물린 것은 마치 곡척(曲尺)처럼 생겨 있는데 평난간을 둘러쳤다. 그리고 위에 만(卍)자 쇄창(蔘)을 갖추었다. 온돌 4면에는 또 다시 만(卍)자 장자(障子)를 갖추었는데, 온돌의 면과 판자를 깐 면은 서로 판판하게 만들었다.

 

정조께서 사도세자의 묘(현륭원)를 방문한 뒤 찾아와 활을 쏘고 직접 시를 지어 읊었다고 전해진다. 워낙 풍광이 뛰어나 정조의 심정이 이해가 갈 정도다. 아래쪽의 작은 연못인 용연과 하나로 어우러진 모습이 일품이다. 용연은 용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가운데에 버드나무가 심어진 자그마한 섬이 있다. 이 인근의 길은 성벽 안쪽도 바깥쪽도 호젓하고 한가롭다. 

 

▲ 수원천 위에 지어진 화홍문(華虹門) ⓒ 2011 한국의산천

 

칠간수문마다 오색의 전등을 설치하여 불빛이 아름답다. 청계천의 수문이 다섯 간(五間水門)이었던 반면, 수원천은 그보다 폭이 넓어 칠간수문(七間水門)을 만들었다. 화홍문은 그 칠간수문 위에 자리 잡은 누각이다. 수원천을 따라 인근에 사는 시민들이 가벼운 산책이나 운동을 즐긴다.

 

화홍문(華虹門) : 화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자는 무지개를 뜻하는 화홍문은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을 넘쳐나는 경치가 장관이라 화홍관창이라 하묘 수원 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성모퉁이에 방화수류정이 있고, 정자 아래에 있는 바위는 옛날부터 용머리라 하여 낚시터로 삼을 만하다. 못의 서쪽에 석각 이두(石刻頭)를 설치하였는데, 물이 많이 차면 이 이두로 물을 화홍문 밖으로 뿜어 내게 되어 있다. 

  

북수문은 편액에 화홍문'사인(士人) 유한지(兪漢芝)가 썼다'이라 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44보 되는 곳에 있다. 광교(光敎) 언덕을 대천(大川)이 가로로 자르며 흐르고 있어,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하였다. 넓혀서 소통을 시키고 7간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하천 위에 걸쳐서 설치하였다. 7개의 안팎 홍예 사이에는 각각 좌우에 돌기둥 4개를 세웠다. 홍예가 서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잠자리 무사를 붙였다. 중앙에는 장군형 무사를 덧붙였다. 거기에 다리 놓을 돌을 깔고 다리 위 바깥 쪽에는 장대석(長臺石)을 설치하였다. 

아래에는 방안 대포 구멍(사방 각 1척)을 뚫었다. 위에는 소포 구멍 14개(사방 각 7촌)를 뚫었다. 안쪽은 장대만을 두고 누혈(漏穴) 6개를 뚫었다. 동서 양끝에는 8면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를 새겼다.

 

 

▲ 오색 불빛으로 아름다움을 더하는 화홍문 ⓒ 2011 한국의산천

 

 

▲ 화홍문에서 바라보는 방화수류정과 성벽은 화성의 가장 아름다운 구간으로 손꼽는다.ⓒ 2011 한국의산천

성벽위의 초소이자 아름다운 정자인 방화수류정의 그 아름다운 공간구성은 한참이나 시선을 잡게 만든다.  

▲동북공심돈 ⓒ 2011 한국의산천

 

▲ 바로 위 사진은 어느해 가을에 촬영한 사진입니다 ⓒ 2011 한국의산천

▲ 봉홧불을 피우던 봉돈 ⓒ 2011 한국의산천

 

봉돈은 일자문성의 위에, 동2포(東二鋪)와 동2치(東二稚)의 사이에 있는데 행궁을 안조(案照)한다. 4성을 쌓고 나서 파수를 설치하여 정찰할 임무를 맡긴 것은 척후의 의미를 가진 것이니, 멀리 육지나 바다에 대한 경보를 알리는 것을 더욱이 소홀히 해서는 안되기에 철성(凸城)의 제도에 의거하여 비로소 봉돈을 설치하였다. 

벽돌로 쌓아올려 성의 몸체 위에다가 벽돌로 다시 높게 쌓았으며, 성 밖으로 18척이나 튀어 나오게 하여 마치 치(雉)처럼 생겼으면서도 그 보다 크다. 내면은 굴곡이 지게 하여 3층으로 만들었다.

양쪽 가장자리의 층계 끝에는 벽돌로 지은 집이 이어졌고, 용마루 없이 기와로 덮었다. 남북에 각각 한 간씩 있는데, 남쪽에 있는 것은 온돌로서 지키는 군졸이 거처하는 곳이고, 북쪽 것은 판자를 깔았는데 기계 따위를 넣어둔다.

 

▲ 황금빛으로 빛나는 봉돈 ⓒ 2011 한국의산천

 

수원 화상 성곽의 전체 길이는 5.52km이며 거기에 동쪽으로 창룡문, 서쪽으로 화서문, 남쪽으로 팔달문, 북쪽으로 장안문 등 4대문을 내고 앞문 4개, 수문 2개, 적대 4개, 공시미돈3개, 봉돈 1개, 포루 5개, 장대 2개, 각루 4개, 포루 5개 등의 다양한 구조물을 규모 있게 비치하였다. 그리고 팔달산 아래에는 행궁을 지어 현륭원에 행차하는 임금이 일시 머물 수 있게 제반 시설을 갖추었던 것이다

 

▲ 성의 안쪽을 걷거나 바깥쪽을 걷거나 어느길이던 다 통하는 길입니다 ⓒ 2011 한국의산천

자전거 또한 성의 안쪽이나 바깥쪽을 모두 다닐수있으며 매년 5월이면 자전거타고 화성 한바퀴타기 행사가 열립니다 올해로 12회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화성행궁

화성행궁은 1790년에 340칸이 완성되고 1796년 화성성역이 완성되면서 576칸으로 조성되었다. 현류원 참배의 목적 외에 정조께서 1804년 양의 후 장차 화성에 내려와 노후를 보낼 시설이었으므로 그 어떤 행궁보다도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으나 일제 강점기에 의도적으로 파괴된 후 1996년 부터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전체 600옄ㄴ중에서 482칸을 복원 완료하였으며 2007년 6월 사적 제 478호로 지정 되었다.

 

▲ 화성행궁의 정문 신풍루 ⓒ 2011 한국의산천

 

신풍루(新豊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끓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전배(展拜)하기 위하여 행행(幸行)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留守)가 집무하는 부아(府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왕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園行)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그뒤 순조·헌종·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다.

따라서 이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수많은 행궁 중 그 규모나 능행면에서 단연 으뜸이 될 만큼 건축물의 규모 뿐만 아니라 성곽과 더불어 정치적·군사적 면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화성행궁은 처음부터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일시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행궁과 수원부 신읍치의 관아건물을 확장·증측하는 가운데 조성되었다.

 

정문인 신풍루는 정조 13년 누문 6칸을 짓고, '진남루(鎭南樓)'라 편액했던 것을 정조 18년 남·북군영을 누대 좌우에 처음으로 설치하고, 좌우각간(左右閣間) 21칸을 추가하여 27칸의 규모를 이루었다. 이에 대하여 '화성성역의궤'는 "행궁 밖 3문의 윗층을 신풍루라 한다. 그 제도는 6칸으로 서쪽에서 동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기유년(정조 13)에 지은 것으로 처음 이름은 지남주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여기에서 '신풍'이란 이름은 한고조(漢高祖)의 발상지인 풍패(豊沛: 흔히 '豊沛之鄕'이라고 함)에서 유래된 것으로 '신풍'은 바로 정조의 새로운 고향이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 화성행궁 신풍루앞의 노거수 느티나무 ⓒ 2011 한국의산천

 

"봉수당은 곧 나의 자궁(慈宮)을 받들어 잔으로 수(壽)를 드리는 곳이며, 장락당은 대개 한(漢)나라의 궁실 이름에서 취한 것이지만, 내가 곧 머무는 곳이니라."

장남헌은 정조 19년 혜경궁 홍씨의 주갑년(周甲年)을 맞아 회갑연을 이곳에서 베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다시 '봉수당'으로 편액했다. 내외의 행각은 정조 13년에 건축한 정당, 정조 13년에 건축한 정당 21칸, 행각 43칸이던 것을 정조 18년에 북각도(北閣道) 등 48칸을 새로이 추가하여 모두 11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조선 22대 왕 정조가 정조19년(1795년) 윤2월9일~16일까지 8일간 어머니 경의왕후(敬懿王后: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 : 사도세자) 가 묻힌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를 하였다. 본래의 목적은 사갑(死甲)을 맞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 참배였지만 어머니 혜경궁 홍씨 환갑을 맞아 잔치를 열었다.

화성으로 가는 도중 비가 내렸다. 조금이라도 험한 길이 나오면 정조는 매번 말에서 내려 혜경궁의 가마 앞으로 나가 안부를 물었다. 어의가 비에 젖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화성에 도착하여 여러 예식을 차례로 치루면서 정조가 의식에 따라 절을 마치자 정조가 지은 어제 장락장(長樂章)을 부르고 어머니에게 머리를 세번 조아리고 천천세를 불렀다.

"긴긴 봄날 장락궁에서 술잔을 올리며, 세차례의 축원을 올리옵니다. 자손에게 끼쳐주신 어머님 은혜, 그 무엇이 이보다 높으리까. 복록이 풍성하게 넘쳐흐르며 찬란하게 빛나옵니다.함지(咸池)의 북소리에 운문(雲門)의 거문고,신선주 따라 올리며 해마다 축원하오리다. 

 

정조가 머리를 세번 조아리자 다시 여집사가 외쳤다.

"천세(千歲)를 불러야 합니다".

정조가 손을 마주잡고 이마위에 올리며 '천세'를 축원했다.

여집사가 또 '천세를 불러야 합니다'라고 외치자, 다시 천세를 축원했고, 또 '거듭 천세를 불러야 합니다'라고 외치자 정조가 '천천세'를 외쳤다.

정조가 천세를 부를 때마다 내,외명부와 여관들이 모두 선자리에서 일제히 소리쳐 호응하고 악대가 낙양춘곡을 연주했다.

여민락의 환환곡과 청평악,오운개서조곡등이 연주되는 가운데 음식상과 술상이 차려졌다.계속이어지는 가무속에 정조가 연회의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자궁(慈宮)의 덕 순일함이여. 대지와 같아 표현하기 어려워라 ... 아 어머니의 덕 아름다워라, 이번에 회갑을 맞으셨도다. 화창한 이 시절의 완상(玩賞)함이여, 만물이 어울려 화락하도다. 새로지은 고을에서 기쁨을 누림이여, 집집마다 노랫소리 울려 퍼지도다. 떠오르는 저 해와 달처럼 천년토록 오래 사소서". 

그날 혜경궁 홍씨는 감격했다고 전한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몸소 실천하는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심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 화성행궁의 정문 신풍루 야경 ⓒ 2011 한국의산천

효성이 남달랐던 정조는 국사로 바쁜 중에도 부친의 능을 13차례 참배했으며 그 기간에는 행궁에 기거했다. 그래서 지방의 궁궐이라고는 해도 규모가 큰 편이다.

정조는 수원에서의 노후를 꿈꾸며 행궁에 노래당(老來堂)을 지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인기 드라마 '대장금'도 행궁에서 촬영됐다. 지금도 세트장 일부가 남아 있다. 

 

▲ 신풍루에서 화성의 최고봉 팔달산 서장대에 오르며 뒤돌아 본 풍경 ⓒ 2011 한국의산천

▲ 사방으로 수원이 막힘없이 보이는 화성장대에서 ⓒ 2011 한국의산천

▲ 서장대와 노대 ⓒ2011 한국의산천

서정대는 성안에서 가장 높고 조망이 넓은 지휘소이다. 서장대 옆에 있는 노대는 돌과 벽돌의 조화를 보여준다. 공격 지휘소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예술적 건축물로 보이는 곳이다.  

 

 

▲ 팔달산 화성장대에서 내려 본 화성행궁과 수원시내 ⓒ 2011 한국의산천

 

▲ 화성은 정조께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왕권을 강화할 의도로 축조한 성이다. 이곳 수원에는 정조의 숨결이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불행과 불운의 학자 군주 정조

노론의 나라가 아닌 왕의 나라 백성의 나라를 꿈꾸었던 정조

정조의 죽음은 실로 조선의 죽음이었다. 정조의 개혁 실패는 조선의 개혁 실패였다. 그는 전환기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의 방황은 조선의 방황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조선의 방황은 멈추었다. 그것은 쇠락의 길이었고 國亡의 길이었다. 조선의 혼이었던 정조가 죽고 조선이 망하는데 걸린 시간은 약 100년이었다.

 

▲ 팔달산 기슭에 세워진 정조대왕의 동상 ⓒ 2011 한국의산천

 

정조는 눈을 감으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이 나라 조선은 노론의 나라도 아니고 백성의 나라이기를 바랬다고....그리고 비운에 죽움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옆에 영원한 안식처를 잡았다

 

정조(正祖, 1752년 ~ 1800년)
조선의 제 22대 임금이다.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묘호는 정조(正祖), 시호와 존호는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렬성인장효대왕(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대한제국 때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 추존되었다.

 

할아버지인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장조 莊祖· 1735년 ~ 1762년, 장헌세자)와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8살에 왕세손에 임명되었다.

 

영조는 조선조 후기 학문과 정치 사회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다. 그러나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일념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왕세자로 책봉된 장헌세자의 호탕한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겨오던차에 후궁 문숙의(文淑儀)의 질투심 어린 참소와 신하였던 나경의 으로부터 세자의 비행을 적은 상소를 받고 대노하여 세자를 서민으로 폐하고 쌀뒤주속에 가두어 창경궁 선인문앞에 내놓고 큰돌을 올려놓는 공개처형의 형벌을 내렸다. 뒤주속에 갇혀있던 세자는8일째 되던 날 허기와 더위로 인해 질식사하는 끔찍한 궁중 참극이 벌어진다.

국가 기강확립차원에서 형벌을 내렸지만 부모로서 애통함을 금할수없었던 영조는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 혼을 위로하고 서울 배봉산 아래에서 장례를 지냈다. 

1762년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속에서 갇혀죽는 비극적인 죽임을 당하자, 11살에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되었다.

1776년에 영조가 83세로 승하하자 25살의 나이로 조선의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3월 정조는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면서 12년 넘게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라고 선포한 뒤 사도세자 추숭작업에 나섰으며 능력과 학식 있는 인물을 위조로 대거 등용하여 노론을 견제할 수 있는 친위 세력을 키워나갔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직접보았기에 더욱 극진한 효심을 보인다.

 

정조는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을 높여 왕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치와 경제 등에 대한 개혁을 진행시켰다. 또한 정조는 영조가 평생의 과제로 생각해 왔던 영조 이래의 기본 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여 당쟁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12년에 이르는 동안 외척 세력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 특히 노론 세력을 제거하거나 약화시켜 친정 체제를 구축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규장각 제도를 정비하고 문화 정치를 표방하는 동시에 붕당의 비대화를 방지하고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그는 또한 영조 때부터 시작된 문물 제도의 보완 및 정비 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인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정조는 우수한 인재를 뽑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매월 2차례씩 시험을 치루었으며 상과 벌을 직접 내리기도 했는데, 소외받던 영남계 인사들도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는 중인 이하 평민에게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조 시대는 양반은 물론, 중인, 서얼, 평민층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져 문화를 크게 꽃피웠던 시대였다.

 

▲ 가을이면 은빛 억새가 장관을 이루던 화서장대~ 화서문으로 이어지는 구간 ⓒ 2011 한국의산천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매우 그리워하여 아버지의 묘소인 현륭원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고 정기적으로 참배하며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현륭원 주변인 수원에 과학적인 성채인 화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는 행궁을 만들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그 또한 어렵게 노론의 공세라는 역경을 헤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1800년 6월 49살의 나이에 병이 악화되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 새로운 도시 화성과 규장각 그리고 장용영을 통한 정조의 꿈은 차차 무르익어 가는듯 하였지만 끝내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속에 이상향을 꿈꾸전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그 뜻을 이루고 못하고 역시나 아쉬운 죽음을 맞는다. 수원에 자리한 화성. 그의 이상향으로 꿈꾸던 곳인데...

 

정조는 눈을 감으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이 나라 조선은 노론의 나라도 아니고 백성의 나라이기를 바랬다고....그리고 비운에 죽움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옆에 영원한 안식처를 잡았다.

 

 

 

▲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 ⓒ 2011 한국의산천

 

 

 

 

 

누가 떠나고 누가 남는가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바라볼 때
마음속 시기심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미인들의 묘비명을 읽을 때
무절제한 욕망은 덧없어진다.

아이들 비석에 새겨진 부모들의 슬픔을 읽을 때
내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부모들 자신의 무덤을 볼 때
곧 따라가 만나게 될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깨닫는다.

쫓겨난 왕들이 그들을 쫓아낸 사람들 옆에
묻혀있는것을 볼 때
또 온갖 논리와 주장으로 세상을 갈라놓던
학자와 논객들이 나란히 묻힌것을 볼 때
인간의 하잘것없는 다툼, 싸움, 논쟁에 대해
나는 슬픔과 놀라움에 젖는다. -조지프 에디슨. 웨스트 민스트 대성당에서 쓴 글- 

 

▲ 수원 화성 성벽옆에 카네이션을 연상시키는 겹벚꽃이 활짝 피었네 ⓒ 2011 한국의산천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그녀는 내게로 다가와 꽃이 되었다 ⓒ 2011 한국의산천


백성을 위한 올바른 정치를 행하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행하게 죽은 사도세자, 그리고 비참한 죽음을 맞은 아버지를 기리는 정조대왕 여러 행적의 효는 이 시대가 본 받아야 할 교범이다.

 

 

▲ 어둠속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수원화성 ⓒ 2011 한국의산천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강물이 생사(生死)가 명멸(明滅)하는 시간 속을 흐르면서 낡은 시간의 흔적을 물 위에 남기지 않듯이, 자전거를 저어갈 때 세상의 온갖 길은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몸 밖으로 흘러 나간다.

  흘러 오고 흘러 가는 길 위에서 몸은 한없이 열리고, 열린 몸이 다시 몸을 이끌고 나아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은 낡은 시간의 몸이 아니고 생사가 명멸하는 현재의 몸이다. 이끄는 몸과 이끌리는 몸이 현재의 몸 속에서 합쳐지면서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가고, 가려는 몸과 가지 못하는 몸이 화해하는 저녁 무렵의 산 속 오르막길 위에서 자전거는 멈춘다. 그 나아감과 멈춤이 오직 한 몸의 일이어서, 자전거는 땅 위의 일엽편주(一葉片舟)처럼 외롭고 새롭다. 

 

※ 조(祖)와 종(宗)의 호칭 차이.

 

조선시대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부터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 순종까지 27명의 임금들 중에 어떤 임금은 그 호칭에 '조' 가 어떤 임금은 '종' 이 붙는다.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우리가 조선의 왕을 부를 때 흔히 말하는 태종, 세조 등의 호칭을 묘호(廟號 )'라고 한다.

임금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이는 이름으로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쓴다. 유교의 경전 '예기' 에 공이 있는 자에게는 조(祖 ), 덕이 있는 자에게는 종( 宗 )을 붙인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라 나라를 세웠거나 전쟁이나 반란 등의 국난을 극복한 임금에게는 '조'를 수성을 이룬 임금에게는 '종'을 붙였다.

 

조선시대 27명의 왕들 중에 태조,세조, 선조,인조,영조,정조,순조 등 7명의 묘호에 '조'를. 나머지는 '종'을 붙였다. 태조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기에, 세조는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가 있다는 아들 예종의 주장에 따라 조를 붙였다.

선조와 인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위기를 극복한 임금이어서 영조와 정조는 조선의 중흥을 이룬 임금으로서  그 업적이 크다고 평가한 것이다. 순조는 처음에는 종이 붙였다가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였다는 이유 등을 들어 나중에 조로 묘호가 바뀐 것이고 세조,선조, 인조, 순조는 어찌보면 반정 등 비정상적 방법으로 왕이 되거나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임금들인데, 오히려 이들에게 큰 업적을 세운 임금에게 붙이는 '조'를 붙인 걸 보면, 조선시대에 묘호를 정하는 기준이 애매모호 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조선의 왕 중에서 묘호가 없는 임금도 있다.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이 그렇다. 군(君)은 왕자에게 붙이는 호칭이으로 중전이 낳은 왕자는 '대군' 후궁들이 낳은 왕자는 '군' 이라고 한다. 연산군의 어머니는 후궁이었다가 중전의 자리에 올랐지만 뒤에 폐위되었으며 광해군의 어머니는 선조의 후궁인 공빈이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왕위에 올랐지만 반정으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종묘에 신위를 모시지 않았고,왕에서 다시 후궁이 낳은 왕자의 신분으로 내려가 그냥 군이라고 불리며 묘호를 받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