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산천

거친 호흡 몰아쉬며 바람 저편 굽이치는 산맥 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

수원의 걷기길 역사탐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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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B등산여행

2012. 10. 25.

그대 가슴이 떨릴 때 여행을 떠나라

 

여행이란

가슴이 떨릴 때 떠나는것이지 다리가 떨릴 때 떠나는것이 아니다.

 

[Study]의왕시 경계 지지대에서 서호와 수원 화성을 거쳐서 융건릉까지 

 

'정조의 도시' 수원에 걷기길인 역사탐방로가 생겼다. 영조(재위 1724~1776년 52년간)와 정조(재위 1776~1800년 24년간) 시대는 조선 600여 년 역사 중 가장 태평성대를 구가한 시기로 평가받는다. 할아버지 영조에 이어 즉위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면서 행궁을 만들고 화성 성곽을 축성한 뒤 건설한 도시가 수원 화성이다. 상업시장인 시전과 국영 농장인 둔전을 설치하고, 농업기반시설인 물의 확보를 위해 몇 개의 저수지를 축조했다. 요즘 말로 신도시를 건설해서 화성을 포함한 수원 일대를 자급자족 도시로 육성하고자 했다. 따라서 수원 화성은 정조에 의해서, 정조를 위해 만든, 즉 '정조의 도시'였던 것이다.

 

그 나아감과 멈춤이 오직 한 몸의 일이어서, 자전거는 땅 위의 일엽편주(一葉片舟)처럼 외롭고 새롭다. 

이 가을이 다 가기전 날씨 좋은날 달려야겠다.

 

▲ 의왕시에서 수원을 향해 오르는 고갯마루. 지지대 고개 전각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 2012 한국의산천

 

  정조께서는 아버지이신 사도세자를 모신 현륭원(現 융·건릉)을 참배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 갈때 이곳에 이르면 말씀하셨다.

《이제 이 고개를 넘어가면 선왕(아버지·사도세자)께서 잠들어 계신 화산(花山)이 보이지 않는다. 천천이 가거라. 아주 천천히...》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하였다고 하여 한자의 느릴지(遲) 두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정조의 효심이 느껴지는 지지대(遲遲臺) 고개는 수원과 의왕 경계를 이룬 곳이다. 예전 명칭은 사근현(沙斤峴)이었으며 또는 미륵댕이 또는 미륵당 고개로 불렸으나 지금은 '지지대 고개'로 불린다.

 

불행과 불운의 학자 군주 정조

 

노론의 나라가 아닌 왕의 나라 백성의 나라를 꿈꾸었던 정조

정조의 죽음은 실로 조선의 죽음이었다. 정조의 개혁 실패는 조선의 개혁 실패였다. 그는 전환기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의 방황은 조선의 방황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조선의 방황은 멈추었다. 그것은 쇠락의 길이었고 國亡의 길이었다. 조선의 혼이었던 정조가 죽고 조선이 망하는데 걸린 시간은 100년이었다.

 

▲ 정자인지 초소인지 구분이 안가는 매우 아름다운 방화수류정 ⓒ 2012한국의산천

 

 수원 화성의 성벽에서 쓰임새는 드러남 속에 숨어있고 드러남은 쓰임새속에 숨어있다. 쓰임새와 드러남이 서로 숨고 또 숨겨서 함께 드러나는것은 아름다움의 강력함과 강력함의 아름다움이다.

  수원 화성에서는 아름다움은 강력함으로 발현되고 강력함은 아름다움으로 발현된다. 아름다움과 강력함이 다르지 않고 삶과 꿈이 다르지 않다. 수원 화성은 땅위의 성곽이고, 마음속의 왕도이다. 

 

▲ 수원천 위에 지어진 화홍문의 야경(몇해전 겨울에 촬영한 사진이기에 물가에 하얀눈이 쌓여있다) ⓒ 2012 한국의산천

몇해전 그해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다. 그래도 삼각대를 거치하고 언손을 호호불며 녹이고 셔터를 눌렀다. 추운날이기에 빛은 더욱 선명히 빛나는 모양이다.

그렇게 몇해전까지만해도 사진 촬영에 열정적이었다.   

    

▲ 화성은 정조께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왕권을 강화할 의도로 축조한 성이다. 이곳에는 정조의 숨결이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 2012 한국의산천

 

  수원 화성에는 두 개의 옛길이 있다. 능행차로와 경기 삼남대로가 그것이다. 능행차로는 정조가 수원 화성을 건립한 뒤 화산(花山)에 있는 아버지의 능을 찾아 온 길이다.

지지대비에서 융·건릉까지 18.7㎞에 이른다.

경기 삼남대로는 지지대비에서 오산시 경계까지 약 45㎞에 이르는 길로, 삼남대로의 원래 구간인 땅끝마을 해남에서 한양까지를 경기지역만 따로 떼어내서 복원한 것이다.

충청·호남·영남의 삼남지방에서 풍부한 물산과 사람이 오가던 길이다. 두 길 모두 옛길이나, 조성 시기로 볼 때 1800년대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러 온 능행차로는 당시 성곽과 행궁 등을 새로 조성하면서 만든 길이라 반듯하게 잘 닦았다. 그 길이 지금은 더 확장되어 대부분 차가 다니는 도로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 도보길은 우회로를 만든다든지, 여의치 않으면 도로 옆 인도를 그대로 이용하게 되어 도보객들에게는 조금 불편을 준다. 반면 과거(科擧)를 보러가던 선비나 보부상, 유배지로 가던 관리들이 다녔던 길인 삼남대로는 아직 숲길이 그대로 보존된 구간이 많다.

 

▲ 아주 오래전 집사람과 연애할때 가끔 이곳 수원을 찾아 딸기밭이 넓었던 푸른지대에 갔다가 팔달산에도 올랐다. ⓒ 2012 한국의산천

 

1번국도를 사이에 두고 경기 삼남대로와 정조 능행차로가 마주보고 있다. 숲길 보존이 잘된 경기 삼남대로가 걷기엔 훨씬 좋다. 햇빛도 가려줄 숲이 있고, 쉬어갈 지지대쉼터도 있다. 하지만 맞은편엔 능행차로와 '춘향전'의 이몽룡이 지났던 길로 알려진 미륵당이 있다.

 

화성(華城)이라는 이름은 정조가 1793년(정조 17) 1월 12일에 수원 팔달산에 올라 팔달산 아래의 신도시를 '화성'이라 명명한 데서 유래했다. 화(華)자는 현륭원 뒤편에 있는 화산(花山)의 화(花)자를 따서 한자를 바꾼 것이라고 전한다.

 

 

▲ 서호 주변의 둔덕은 수원 시민들의 좋은 걷기길로 이용되고 있다. 노송과 어울린 둔덕이 매우 아름답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서울에 버금가는 대규모 신도시를 건설한 뒤,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과학적·실용적으로 쌓은 대규모 성이다.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해서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했다. 성곽의 둘레는 약 5.7㎞이며, 성인 걸음으로 한 바퀴 걷는 데 2시간가량 소요된다. 성벽의 높이는 4~6m에 달한다. 실학자인 정약용과 유형원이 설계를 맡았고, 거중기 등을 이용해 쌓았다.

 

▲ 웅장한 위용을 뽐내는 정말 잘 생긴 장안문 ⓒ 2012 한국의산천 

 

성 안팎으로의 출입은 4대문과 암문 다섯 곳을 통해 이뤄진다. 창룡·장안·화서·팔달문 4대문과 북암문·동암문·서암문·서남암문· 남암문이다. 수원 화성이 한양 도성의 남쪽에 있는 관계로 북문인 장안문이 사실상 정문이다. 장안(長安)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동시에 나라의 백성들이 행복하게 산다는 뜻이다. 이 문은 국보1호인 숭례문보다 크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다.

 

▲ 융·건릉 ⓒ 2012 한국의산천

정조는 눈을 감으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이 나라 조선은 노론 소론의 나라가 아닌 백성의 나라이기를 바랬다고....

그리고 비운에 죽움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옆에 영원한 안식처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