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산천

거친 호흡 몰아쉬며 바람 저편 굽이치는 산맥 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

화남 고재형 심도기행 해설 1

댓글 0

심도기행 해설

2019. 5. 15.

화남 고재형 심도기행 해설


이 책이 나온지 올해로 꼭 110년이 되었다.


심도기행 발간사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의 『심도기행(沁都紀行)』이 김형우 박사에 의해 완역되었다.

심도는 강화(江華)의 별칭이다.


『심도기행(沁都紀行)』에 수록된 한시 작품들은 강화의 오랜 역사와 수려한 자연,

그리고 강화가 길러낸 수많은 의인과 지사들의 행적에 바치는 아낌없는 찬가(讚歌)이다.


이 기행시문은 강화도 선비 화남 선생이 지은것으로 모두 256 수의 7언 절구가 수록되어 있는데,

당시 강화군 17개면 100여 마을을 필마(匹馬)에 의지하여 빠짐없이 섭렵하시고 쓰신 기행시집으로

대부분 강화의 마을 유래와 풍경, 주민의 생활상을 소재로 삼고 있다. - 2008년 12월  인천학연구원장 이 갑 영


▲ 심도기행 옛 표지와 본문. 심도기행은 목판본으로 간행되지 않았고 현재 필사본 2종이 남아 있다.


100년 전 강화기행 한시 256수

≪沁 都 紀 行≫

 

저자 : 高在亨(1846-1916)

일시 : 1906년 봄

수록 : 華南集 한시 7언절구 256수

1906년(광무10) 봄에 화남재에서 짓고, 1909년(융희 3)에 학산산방에서 베껴 쓰다.

(光武十年春 抄于華南齋, 聖上卽位隆熙三年 謹謄于鶴山山房)


▲ 화남 선생의 심도기행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강화 나들길 20코스  


심도기행 따라가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6880


▲ 화남 고재형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강화 나들이


「심도기행(沁都紀行)」은 1906년에 강화도 선비 고재형(高在亨)이 지은 기행시문집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강화도의 거의 모든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각 마을을 주제로 256수의 한시(漢詩)를 지었고, 그 아래에 각 마을의 유래와 풍광, 인물, 생활상, 관습 등을 산문으로 설명하였다.


고재형은 1846년 선대로부터 대대로 살아온 고향 마을인 두운리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과거시험에 합격은 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1916년에 71세의 나이로 별세하였고, 지금도 그 마을에 직계 후손들이 살고 있다.


당시는 일제와 서구 문명이 물밀듯이 들어와 커다란 시대적 변화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점차 사라져가는 전통과 풍습을 아쉽게 생각하며 이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의도로 강화도 전 마을을 기행하고 시문집을 쓴 것이다.


「심도기행(沁都紀行)」은 목판본으로 간행되지 못하고 현재 2종의 필사본이 전해온다. 저자가 살던 두두미동을 시작으로 하여 다시 두두미동에 돌아오기까지 지은 256수의 한시를 배열하고 있는데, 이 배열순서는 기행순서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크게 볼 대 강화도의 당시17개 면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한 바퀴 도는 일정이었다. 당시 강화도의 모든 자연 마을을 거의 다 방문하고, 각 마을을 주제로 삼아 한시를 지었다. 지금은 잘 사용하고 있지 않은 마을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마을 사정을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당시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소개는 직접 이름이 거론되면서 구체적이고 심도 있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60여 성씨(姓 氏)에 약 250여 명의 이름이 확인되고 있다.


「심도기행(沁都紀行)」은 20세기 초 강화도 각 마을의 모습을 매우 구체적이고 심도 있게 묘사하고 있는 적지 않은 분량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문집으로서 문학작품일 뿐 아니라, 20세기 초 강화도의 ‘민속지’이자 ‘지리지’로서도 손색이 없다. - 출처(글쓴이) : 초록



▲ 두두촌 마을 입구에 서있는 장승과 두두촌 시


▲ 인천대학교

인천학 연구원


譯註 沁都紀行
초판인쇄 2008년 12월 26일
초판발행 2008년 12월 31일
저 자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역 자 김형우ㆍ강신엽
발 행 인 이갑영
발 행 처 인천학연구원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편집·인쇄 도서출판 아진


❚발간사 ❚일러두기


발간사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의 『심도기행(沁都紀行)』이 김형우 박사에 의해 완역되었다.

심도는 강화(江華)의 별칭이다.

『심도기행(沁都紀行)』에 수록된 한시 작품들은 강화의 오랜 역사와 수려한 자연,

그리고 강화가 길러낸 수많은 의인과 지사들의 행적에 바치는 아낌없는 찬가(讚歌)이다.

이 기행시문은 강화도 선비 화남 선생이 지은것으로 모두 256 수의 7언 절구가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강화의 마을 유래와 풍경, 주민의 생활상을 소재로 삼고 있다.


고재형은 1846년 강화군 두운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이며 1888년(고종25년)에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은 선비였다.

그는 “평소 충의와 대의를 쫓은 인물들을 흠모하였으며 전통이 급속히 사라져가는 풍속을 개탄하였다”고 한다.

고재형은 자신이 태어난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두두미 마을에서 출발하여

당시 강화군 17개면 100여 마을을 필마(匹馬)에 의지하여 빠짐없이 섭렵하였다.


저자가 “강화부 전체의 산천과 고적을 다시 탐방하기 위해” 단신으로 강화기행을 떠난 것은 1906년 봄이었는데

강화 기행을 감행한 동기는 무엇보다 자신의 삶터인 강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이었을 터이다.


한편 그가 강화순례를 떠난 해가 서구문명이 물밀듯 밀려들어 전통과 유풍이 점차 사라져 가는 때였으며,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운명이 기울어 가던 암울한 시대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재형이 순례자가 되어 강화의 땅 구석구석을 밟으며 걸어갈 때의 심정은

훗날 이상화 시인이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을) 다리를 절며 걷고 싶다”고 토로했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심도기행(沁都紀行)』은 독특한 구조와 내용을 지닌 기행시문이다.

우선 기존의 기행문학이 출발지와 목적지라는 두 점을 잇는 선형적 구조의 플롯을 취하고 있음에 비해

이 작품은 강화도의 모든 마을을 샅샅이 탐방해가는 공간적 구조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심도기행(沁都紀行)』의 문체는 시와 산문이 병치되고 서로 조응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한편의 서사시처럼 읽힌다.


256수의 7언시를 골격으로 삼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저자의 생각은 한시 작품과 관련되는 주석이나 해설을 통해서도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특히 산문으로 기술된 강화의 역사적 유산이나 자연경관, 풍속과 생활상, 성씨와 인물에 대한 서술은 그 자체로 지지(地誌)를 이룰 만큼 풍부하고 자세하다.


한편 『심도기행(沁都紀行)』은 저자 자신이 나고 자라고 생활한 고향땅을 기행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보통의 기행문학은 주체가 먼 이방 지대로 여행하는 과정에서 접하는 이색적 풍물이나 감흥을 기록한 산물이다.

자신의 삶터가 성찰의 대상으로 바뀌었다면 거기에는 주체나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일 터이다.

친숙한 장소가 낯선 공간으로 현현(顯現)했을 때 주체의 대응 방식은 낯선 공간을 다시 자신의 영토로 전환하기 위한 시도를 감행하는 것이다.

즉 이 책은 전통사회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낯선 공간으로 떨어진 향토를 재발견하여 전유(專有)하기 위한 주체의 대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근대전환기 향토문학 가운데 선편에 놓을 수 있겠다.


『심도기행(沁都紀行)』의 입체적 성격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 텍스트를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ʻ권리ʼ를 허락해준다.

문학적 텍스트로, 그리고 민속지로, 지리지로도 손색이 없다.


이 책을 읽는 분들께 화남 선생이 100년 전에 노래하며 홀로 걸었던 강화의 땅을 밟으며,

강도(江都)가 겪어 온 기나긴 수난의 역사를 반추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돌아보고,

그 땅이 길러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ʻ新 심도기행ʼ을 떠나보자고 권유하고 싶다.


2008년 12월
인천학연구원장 이 갑 영


일러두기


1. 이 책은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이 1906년 강화도의 각 마을 명소를 직접 방문하여 256수의 한시(漢詩)를 짓고,

그 마을의 유래와 풍광, 인물, 생활상을 설명한 산문을 곁들인 기행문집 『심도기행(沁都紀行)』을 번역한 것이다.
2. 『심도기행(沁都紀行)』은 필사본 2종이 조사되었으며, 그 중 종손 고승국이 소장하고 있는 ʻ고승국소장본ʼ을 저본으로 삼았고,

구창서의 발문이 있는 ʻ구창서발문본ʼ을 부본으로 삼아 대조하며 번역하였다. 번역문 뒤에 저본으로 삼은 ʻ고승국소장본ʼ을 영인본으로 수록하였다.
3. 원문의 수록 순서대로 한시 256수와 해설문을 배열하되, 당시의 면(面) 별로 묶어서 편집하였다.
4. 제목이 없는 한시는 바로 앞의 제목을 따르거나, 내용 중에서 주제어를 뽑아 제목으로 삼고 끝에 ʻ*ʼ를 붙여 구별하였다.
5. 지명의 주석은 ≪강화지명지≫(강화문화원, 2002)와 ≪한국지명총람-강화군≫(한글학회, 1986) 등을 참고하고, 현지 주민들의 증언으로 보완하였다.
6. 인물의 주석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시스템의 자료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주로활용하였다.
7. 이 책의 각주는 모두 역자가 단 것이며, 저자의 주는 본문 속에 포함시켰다.
8. ʻ구창서발문본ʼ에만 있는 구창서의 발문은 번역문 맨 뒤에실었다.
9. 이 역주본은 2005년 3월부터 12월까지 강화역사문화연구소의 강독회 회원들의 강독이 출발점이 되었다.

C O N T E N T S

❚인정면(仁政面) ····································································· 15
1. 두두미동(斗頭尾洞) 2. 백운동(白雲洞)① 

3. 백운동(白雲洞)②  4. 삼동암동(三同岩洞)

5. 서문동(西門洞) 6. 마장동(馬場洞)

7. 석성동(石城洞) 8. 대청교(大淸橋)


❚선원면(仙源面) ····································································· 24
9. 거말동(巨末洞) 10. 연동(烟洞)

11. 송공촌(宋公村) 12. 독정촌(獨政村)

13. 남산동(南山洞) 14. 용당사(龍堂寺)

15. 참경루(斬鯨樓) 16. 가리포(加里浦)

17. 신당동(神堂洞) 18. 신지동(神智洞)

19. 대문동(大門洞) 20. 염씨산영(廉氏山塋)
21. 냉정동(冷井洞) 22. 선행동(仙杏洞) 충렬사(忠烈祠)

23. 안동인 김상용 24. 벽진인 이상길 

25. 청송인 심현 26. 파평인 윤전

27. 남양인 홍명형 28. 남양인 홍익한 

29. 남원인 윤계 30. 창원인 황일호

31. 연안인 이시직 32. 은진인 송시영
33. 진주인 강위빙 34. 연안인 이돈오

35. 평해인 황선신 36. 능성인 구원일

37. 진주인 강흥업 38. 안동인 권순장
39. 광산인 김익겸 40. 김수남

41. 여흥인 민재  42. 강화수신(江華守臣)

43. 충의혼백(忠義魂魄) 44. 열녀절부(烈女節婦)

45. 선원사(禪源寺) 46. 고성인 이암(李嵒)

47. 경주정씨 48. 진주유씨

49. 창동(倉洞) 50. 이정(梨井)

51. 조산평(造山坪)


❚부내면(府內面) ····································································· 77
52. 남산동(南山洞) 53. 구춘당(九春堂)

54. 청송심씨(靑松沈氏) 55. 부내12동(府內12洞)

56. 진보 돈대 57. 충신 이춘일(李春一)
58. 남대제월(南臺霽月) 59. 서문동(西門洞)

60. 국정동(國淨洞) 61. 맥현제단(麥峴祭壇)

62. 사직단(社稷壇) 63. 문묘(文廟)
64. 명륜당(明倫堂) 65. 강당(講堂) 안연재(安燕齋)

66. 북문(北門) 67. 여제단(厲祭壇)

68. 당주동(唐州洞) 69. 북장대(北將臺)
70. 북장춘목(北場春牧) 71. 기우청단(祈雨晴壇)

72. 행궁 궁아제단(宮娥祭壇) 73. 척천정(尺天亭)

74. 장녕전(長寧殿) 75. 세심재(洗心齋)
76. 연초헌(燕超軒) 77. 규장외각(奎章外閣)

78. 상아(上衙) 79. 객사(客舍) 

80. 민풍시(民風詩) 81. 도과(道科)
82. 공도회(公都會) 83. 이아(貳衙) 

84. 중영(中營) 85. 진무영(鎭撫營) 열무당(閱武堂)

86. 선원비각(仙源碑閣) 87. 시장(市場)
88. 용흥궁(龍興宮) 89. 육궁(六宮)

90. 부내 심부윤(沈府尹) 91. 부내 최판서(崔判書)

92. 부내 김효자(金孝子) 93. 성황단(城隍壇)
94. 고려궁지(高麗宮址) 95. 동문(東門)

96. 강화부성(江華府城)


❚장령면(長嶺面) ··································································· 138
97. 장동(長洞) 98. 묵사동(墨寺洞)

99. 갑곶동(甲串洞) 100. 갑성열초(甲城列譙)

101. 이섭정(利涉亭) 102. 진해사(鎭海寺)
103. 제승곶(濟勝串) 104. 오종도비(吳宗道碑)

105. 삼충단(三忠壇) 106. 용정동(龍井洞) 

107. 용정동 남궁공 108. 용정동 황공
109. 장승동(長承洞) 110. 성정(星井) 

111. 왕림동(旺林洞) 112. 추포영당(秋浦影堂) 

113. 옥포동(玉浦洞) 114. 옥포동 황공
115. 범위리(範圍里) 116. 월곶동(月串洞)

117. 연미조범(燕尾漕帆) 118. 대묘동(大廟洞)

119. 고성당동(高聖堂洞) 120. 양양곡(襄陽谷)
121. 선학곡(仙鶴谷) 122. 소산리동(小山里洞)


❚송정면(松亭面) ··································································· 162
123. 낙성동(樂城洞) 124. 솔정동(率亭洞)

125. 숙룡교(宿龍橋) 126. 뇌곶동(雷串洞)

127. 숭릉동(崇陵洞) 128. 포촌동(浦村洞)


❚삼해면(三海面) ··································································· 166
129. 당산동(堂山洞) 130. 승천포(昇天浦)

131. 긍곡(矜谷)  132. 상도동(上道洞)

133. 하도동(下道洞)


❚하음면(河陰面) ··································································· 172
134. 하음면(河陰面) 135. 신촌동(新村洞)

136. 봉가지(奉哥池) 137. 부근동(富近洞)

138. 장정동(長井洞) 139. 양오리(陽五里)

❚북사면(北寺面) ··································································· 176
140. 산이포동(山里浦洞) 141. 철곶동(鐵串洞)

142. 덕현동(德峴洞) 143. 삼성동(三省洞)

144. 군하동(羣下洞) 145. 냉정동(冷井洞)


❚서사면(西寺面) ··································································· 180
146. 증산동(甑山洞) 147. 교항동(橋項洞)

148. 송산동(松山洞) 149. 인화동(寅火洞)


❚간점면(艮岾面) ··································································· 183
150. 별립산(別立山) 151. 창교동(倉橋洞)

152. 강후동(江後洞) 153. 이현동(梨峴洞)

154. 이현동 덕수이씨 155. 삼거동(三巨洞)
156. 신성동(新成洞)


❚외가면(外可面) ··································································· 189
157. 삼거동(三巨洞) 158. 망월동(望月洞)


❚내가면(內可面) ··································································· 190
159. 산곶동(山串洞) 160. 고산동(孤山洞)

161. 구주동(鳩洲洞) 162. 구하동(鳩下洞)

163. 황청동(黃淸洞) 164. 구포촌동(舊浦村洞)
165. 옥계(玉溪) 166. 조계동(皂溪洞)

167. 백씨산소(伯氏山所) 168. 창원황씨

169. 동래정씨


❚고려산(高麗山)과 매음도(媒音島) ····································· 196
170. 고려산(高麗山) 171. 청련사(靑蓮寺)

172. 백련사(白蓮寺) 173. 적련사(赤蓮寺)

174. 흥릉(洪陵) 175. 보문사(普門寺)


❚위량면(位良面) ··································································· 205
176. 정포동(井浦洞) 177. 외주동(外州洞)

178. 항주동(項州洞) 179. 낙인동(樂仁洞)

180. 흥천동(興川洞) 181. 산문동(山門洞)
182. 존강동(存江洞) 183. 건평동(乾坪洞)

184. 장지포(長池浦) 185. 진강산(鎭江山)

186. 목장(牧場)


❚상도면(上道面) ··································································· 213
187. 하일동(霞逸洞) 188. 하촌(霞村)

189. 묵와선생(黙窩先生) 190. 능내동(陵內洞)

191. 가릉(嘉陵) 192. 조산동(造山洞)
193. 장하동(場下洞) 194. 장하동 청주한씨

195. 장하동 평해황씨 196. 석릉(碩陵)

197. 장두동(場頭洞) 198. 추포정(秋浦亭)
199. 가릉포(嘉陵浦)


❚하도면(下道面) ··································································· 222
200. 문산동(文山洞) 201. 상방리(上坊里)

202. 내동(內洞) 203. 마니산(摩尼山)

204. 천재암(天齋庵) 205. 성단청조(星壇淸眺)
206. 망도서(望島嶼) 207. 장곶동(長串洞)

208. 여차동(如此洞) 209. 흥왕동(興旺洞)

210. 화포지(花浦址) 211. 동막동(東幕洞)
212. 해산정(海山亭) 213. 정수사(淨水寺)

214. 사기동(沙器洞) 215. 덕포동(德浦洞)

216. 선평만가(船坪晩稼)


❚길상면(吉祥面) ··································································· 238
217. 선두동(船頭洞) 218. 장흥동(長興洞)

219. 산후(山後)  220. 전등사(傳燈寺)

221. 삼랑성(三郞城) 222. 장사각(藏史閣)
223. 취향당(翠香堂) 224. 양공비(梁公碑)

225. 애창(艾倉)  226. 온수동(溫水洞)

227. 초지동(草芝洞) 228. 초지동 대구서씨
229. 직하동(稷下洞) 230. 직산동(稷山洞)①

231. 직산동(稷山洞)② 232. 직산동 제주고씨

233. 정하동(亭下洞) 234. 정두동(亭頭洞)
235. 곤릉(坤陵) 236. 길상산(吉祥山)

237. 굴곶포(屈串浦)


❚불은면(佛恩面) ·································································· 252
238. 덕진동(德津洞) 239. 대모산(大母山)

240. 손석항(孫石項) 241. 손석항 손장군(孫將軍)

242. 광성동(廣城洞) 243. 광성나루[廣城津]
244. 신현동(新峴洞) 245. 넙성동(芿城洞)

246. 둔랑촌(芚浪村) 247. 오두동(鰲頭洞)

248. 오두어화(鰲頭漁火) 249. 오두동 평양조씨
250. 사복포(司僕浦) 251. 능촌동(陵村洞)

252. 능촌(陵村) 253. 고잔동(高盞洞)

254. 지천(芝川) 255. 곶내동(串內洞)
256. 두두미(斗頭尾)


❚沁都紀行 원문 ··································································· 269



강화도 인정면(仁政面1)


1. 두두미동(斗頭尾洞2)


斗頭我步帶春風  봄바람 맞으며 두두미를 걷노라니,
一府山川兩眼中  온 마을의 산과 내가 한 눈에 들어오네.
明月綠楊諸具榻  밝은 달 푸른 버들 여러 구(具)씨 탁상에서,
滿杯麯味使人雄  잔 가득한 술맛이 힘을 내게 하는구나.


○ 두두미동(斗頭尾洞)은 강화부 관아로부터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인정면(仁政面)에 속한다.

우리 집안이 대대로 살아 온 곳이다. 병오년(1906) 봄에 내가 비록 병이 있는 몸이지만 강화부 전체의 산천을 다시 관람하면서 고적을 살펴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3)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를 따라 걸음을 옮겼으니, 두두미를 출발하여 다시 두두미로 돌아오려는 계획이었다.

오랫동안 사귄 친구 구(具) 씨 집에서 술을 몇 잔 마신 후에 서쪽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 구씨 친구는 능성(綾城)의 세족(世族)으로, 문과(文科)를 거쳐 한림 전랑과 대각을 역임한 강암공(江菴公) 구강(具綱)4)의 후손이다.

강암공은 판안동공(判安東公) 구성량(具成亮)5)의 아들이다.


1) 인정면(仁政面)은 두두미동을 비롯하여 백운동, 삼동암동, 서문동, 마장동, 석성동 등이 속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불은면에 통합되었다.
2) 두두미동(斗頭尾洞)은 현재의 두운1리이다. 두두미동의 ʻ두ʼ자와 백운동의 ʻ운ʼ자를 합하여 1914년부터 두운리라 하였다. 두도미라고도 한다.
3) 저자 고재형(高在亨 1846∼1916)은 제주고씨로 1888년(고종25)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에 합격하였으며 관직에 나아가지는 못했다.

아버지 고창환(高昶煥)은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 대대로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두두미 마을에 살았다.


2. 백운동(白雲洞6)①


西指白雲山上橫  서쪽으로 산위에 비낀 흰 구름을 가리키며,
居人尙說李先生  마을 사람 아직도 이규보 선생 말을 하네.
漠然舊址今何辨  옛터가 막연하니 지금 어찌 알아볼까,
數谷桃花數谷櫻  이 골짝엔 복숭아꽃 저 골짝엔 앵두꽃이네.


○ 고려 고종 때의 집현전태학사 이규보(李奎報)7)의 집터가 이 동네에 있다.

그를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불렸기에 후세 사람들이 동네 이름을 백운동(白雲洞)이라 붙였는데, 그 집터를 분명히 분별하기는 어렵다.
○ 어떤 사람은 이규보의 집터가 장령(長岺)8) 왕림동(旺林洞)9)에있다고도 하였다.

○ 이규보는 본관이 여흥(驪興)인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고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4)구강(생몰년 미상) : 본관은 능성(綾城). 1408년(태종 8) 식년시 동진사(同進士)를 거쳐 집의(執義),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5) 구성량(?∼1425) : 본관은 능성(綾城). 충청도경차관·예조전서를 거쳐, 강원도병마도절제사, 충청도병마도절제사, 판안동대도호부사 등을 지냈다.
6) 백운동(白雲洞)은 현재 불은면 두운1리에 있다.
7) 이규보(1168∼1241) : 고려의 문신·재상. 본관은 황려(黃驪).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만년에는 시·거문고·술을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불렸다 한다.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문한(文翰)의 관직자였다.
문집으로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이 있다. 시호는 문순(文順)이고, 묘는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다.
8) 장령(長嶺)은 본래 1개 면(面)이었으며, 현재의 갑곶리 용정리 옥림리 월곶리 대산리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1914년에 부내면에 병합되었다가 오늘날 강화읍으로 명칭이 바꿨다.
9) 현재 강화읍 옥림2리이다. 1914년 옥포동와 왕림동이 합하여 옥림리가 되었다.


3. 백운동(白雲洞)②


遲遲更向水南涯  천천히 다시금 남쪽 물가로 향해 가니,
具閔庭前列植花  구씨 민씨네 정원에 즐비하게 꽃이 심겼네.
文學承承猶不墜  학문이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았으니,
曾年皆是上庠家  옛날에 모두가 성균관 다니던 집안이라네.


○ 강암(江菴)의 후손인 진사 구원영(具元永)10)의 손자·사촌·집안의 조카들이 살고 있다.

여흥 민씨 노봉(老峯)의 후손 민창현(閔昌顯)11)의 손자·증손이 살고 있다.


4. 삼동암동(三同巖洞)


三巖同立德庄東  덕장산 동쪽에 세 바위가 나란히 섰고,
谷谷幽居與野通  골골마다 숨은 집들 들판과 통해 있네.
因遇諸君終日語  여러 사람 만나자 종일토록 하는 말,
誦傳一峴朴公風  박공(朴公)의 풍모 담긴 고개전설 전해주네.


○ 덕장산(德庄山) 동쪽에 세 바위가 똑같이 서있다고 해서 삼동암동(三同巖洞)이라고 하였다.

박공은 언제 때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일찍이 이곳에 살면서 많은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지명을 박공현(朴公峴)이라고 하였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예스런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 본관이 남양(南陽)인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12)의 후손으로,

좌랑을 지낸 홍응항(洪應恒)13)의 아들인 홍경문(洪景文)과 그 동생 홍경익(洪景翼)이 이곳에 와서 살았고, 그 후손들도 뒤를 이었다.
○ 세마 벼슬을 지낸 청성군(靑城君)의 후손인 청송 심씨들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 장수 황씨인 방촌(厖村) 황희(黃喜)14)의 후손으로서 진사였던 황복(黃馥)15)의 아우와 친척들이 거주하고 있다.
○함열 남궁씨인 송암(松菴) 남궁찬(南宮璨)16)의 후손인 구춘당(九春堂) 남궁수(南宮樇)의 9대손이 거주하고 있다.
○ 능성 구씨인 강암공의 후손으로서 진사였던 구득희(具得喜)17)의 아들과 아우가 거주하고 있다.
○ 청주 한씨인 삼괴정(三槐亭) 한경린(韓景麟)18)의 후손 한준석(韓俊錫)이 살고 있다. 여러 벗들과 밤새도록 얘기하였다.


11) 민창현(1801년 출생) 1855(철종 6) 식년시 생원(生員) 3등 35위로 합격하였다. <사마방목>

12) 홍서봉(1572∼1645) 본관은 남양(南陽). 강원도관찰사·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화의(和議)를 위한 실무를 수행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3) 홍응항(1699년 출생) 1735(영조 11)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19위로합격하였다. <사마방목>
14) 황희(1363∼145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구부(懼夫),호는 방촌(厖村).
15) 황복(1834년 출생) 1894(고종 31) 식년시 진사(進士) 3등 149위로 합격하였다.
16) 남궁찬(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여헌(汝獻), 호는 창랑(滄浪).
17) 구득희(1824년 출생) 자는 사능(士能). 1873(고종10) 식년시 진사(進士) 3등 194위로 합격하였다.

18) 한경린(1544년 출생) 자는 중진(仲振). 1582년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6위로 합격하였다. 강원도사(江原都事)를 지냈다.
19) 불은면 삼성2리 서문안 마을이다.
20) 불은면 삼성1리 매재이 마을이다.


5. 서문동(西門洞19)


地古西門倚路傍  옛날의 서문은 길가에 있는데,
盆烟點點繞耕庄  옹기 굽는 연기 올라 농장을 싸고 있네.
一平草色閑空地  평평하게 풀 우거진 널따란 빈터가,
認是當年習陣場  당시의 훈련장이었음을 알게 해주네.


○ 서문동(西門洞)은 혈구산(穴口山) 남쪽에 있다. 고려 고종이 정자산(亭子山) 아래로 천도하였을 때 이곳을 서문현(西門峴)이라고 하였다.

습진원(習陣原)은 곧 고려 때 군진(軍陣)을 연습하던 곳인데, 오래전부터 그릇가게[盆店]를 내서 생활하는 자가 많았다.
○ 이하의 세 동네는 물과 토양이 척박하기 때문에 잠깐 거주하다가 바로 이사하는 사람이 많아 모든 것이 자세하지 않다.


6. 마장동(馬場洞20)


馬城西北馬場村  마성의 서북쪽에 마장촌이 있는데,
隔水居人各樹藩  개울 건너 주민들은 나무 심어 울 삼았네.

野霧山雲簷影裡  들안개와 산구름이 처마 안으로 비춰들고
咳嘶何老戱兒孫  한 노인이 기침하며 손자와 놀고 있네.


 ○ 마장동(馬場洞)은 곧 혈구산 남쪽에 있다. 진강산 마성(馬城)의 서북쪽 시냇물 양쪽에 마을이 있는데, 마장과 가까운 곳이어서 그런 이름이 지어졌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물과 토양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해수병(咳嗽病)이 있는데 노인과 아이들이 모두 그러하다.

비록 거주하려 마음먹고 왔어도, 모두 바로 이사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서 자세하지가 않다.


7. 석성동(石城洞21)


穴口山南號石城  혈구산 남쪽은 돌성이라 부르는데,
長原草色一郊程  풀 덮인 넓은 벌판 마을을 에워 쌓았네.
居人誇說田之廣  마을 사람 밭 넓다고 자랑하며 말을 하니,
豆麥相連上下平  콩밭과 보리밭이 아래 위에 이어졌네.


○ 석성동(石城洞) 역시 혈구산 남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 때에 이곳에 성을 쌓은 돌이 많았는데, 그 돌을 옮겨 놓고 흙으로 메워 들판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곳에는 밭이 많아 밭농사로 생활하는 주민들이 많다.

21) 불은면 삼성1리 돌성 마을이다.


8. 대청교(大淸橋22)


溪流東走大淸橋  시냇물은 동쪽으로 흘러 대청교를 지나는데,
十里相通花島湖  십리나 떨어져 있는 화도호와 통하네.
滿月一坪瀦水濶  만월평의 저수지는 넓기도 넓으니,
年年穡23)事奏豊謠 해마다 농사 잘 되어 풍년가를 부르네.


○ 혈구산 이남의 시냇물은 모두 대청교(大淸橋)로 흘러가는데, 화도(花島) 사이의 조수와 서로 통하였기에

주민들이 제방을 쌓아 대청포(大淸浦)·만월포(滿月浦)를 만들어서 가뭄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화도 갑문의 위에는 하나의 돈대가 있으니 ʻ화도돈대(花島墩臺)ʼ이다. 그 형상이 마치 꽃핀 가지가 물에 떠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 현종 갑진년(1664)에 유수 조복양(趙復陽)24)이 제방 등 수문을 쌓았다. 그 후에 유수 이은(李溵)25)이 수문을 수리하고 기문을 지었다.

그 기문은 다음과 같다.

“화도수문은 심부(沁府) 남쪽 20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광성보의 북쪽에 있다. 수문의 이름이 화도(花島)인 것은 화도돈대의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문의 외부에는 오두양(鼇頭洋)이 있으며 바다 안쪽으로는 대청포(大淸浦)가 있다.

이 섬의 여러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은 바다와 포구의 좌우로 모이고 또 수백 결의 민전이 있어서 ʻ만월평(滿月坪)ʼ이라고 하는데

선원면·인정면·불은면 3면의 백성들이 이곳에 의지해서 생활하고 있다.

1백년 전 갑진년(1664,현종 5)에 조복양(趙復陽)이 유수로 재직할 때에 연변에 수십 리나 되는 긴 제방을 쌓아서 태풍에 대비하고

조수가 전지(田地)에 침범하는 것을 막았으므로 ʻ포구ʼ라고 하였으며,

3개의 수문을 설치해서 안쪽의 물을 밖으로 빼냈으므로 ʻ화도 수문ʼ이라고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문을 설치한 것이 어찌 절실하다 하지 않겠는가?

수문을 삼가지 않으면 내지의 물이 넘칠 뿐만 아니라 바다의 조수가 침범하게 되어 큰 제방이 무너지면

바다를 지키는 일이 허망해지고 국가의 유사시를 대비하는 일도 말할 수가 없으며

또한 3면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생명도 매우 위태롭게 되므로 국가를 위해서나 백성을 위해서나 폐할 수 없는 것이다.

수문을 지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일이다.

최초로 설치할 때에는 바위를 깎아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는 큰 돌로 덮어서 너비가 십여 보,높이가 한 장쯤 되었다.

그 공력이 매우 컸으며 그 규모와 제도 또한 장엄하였다. 그러나 안으로는 포구이고 밖으로는 조수가 있어서 서로 충돌하여 그 위치가 매우 험하며,

문의 곁으로는 또 흙이 있어서 흙에 물이 스며들어 틈이 생겼다. 이 때문에 1백년 전에 처음으로 수리했을 때에는 그 기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알 수가 없다.

북쪽의 한 문에서 물길이 무너졌고 여름 장마에 막혀 성안으로 범람해서 경작지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러 오래도록 폐기될까 우려해서

거주하는 백성들이 수리를 요청한 것이 여러 번이었지만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유수로 부임한 처음에 그 형편을 살펴보았더니 공력이 클 뿐만 아니라 썰물 후에야 비로소 공사를 시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조수가 하루에도 여섯 번 드나드는데 공사 시각이 매우 제한적이어서 그럭저럭 세월만 가고 오래도록 복구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관방이 중요하고 백성들의 생업이 걸려있는 만큼 이대로 둘 수 없어서 재물을 모아 성 수축 시기에 맞추어 한꺼번에 공사를 하게되었다.

그러나 붕괴 위험은 북문 옆의 흙에 물이 스며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전에 쌓았던 것을 모조리 걷어내고 물길을 터놓고서 돌을 많이 가져다가 옛것과 새것을 섞어 좌우의 무사석(武砂石)과 훤선(楦墠) 등은 두꺼운 장방형의 돌받침으로 길게 엇갈려 쌓고 위에는 다듬은 돌을 사용해서 홍예(虹霓)를 만들어 흙이 무너지는 병폐를 방지하고 너비를 약간 넓게 해서 물의 출입을 편리하게 하자 일몰 후에도 물이 넘쳐 붕괴되는 근심을 면하게 하였다.


공사를 시작하자 백성들이 스스로 와서 공사에 참여하겠다고 한 자들 중에서는 단지 하루만 일할 것을 허락하였으므로

백성들을 위한 정사가 매우 절실하고 급했음을 알 수가 있다.

병술년(1766,영조 4) 4월 13일에 공사를 시작해서 6월 10일에 공사를 마쳤다.

공사가 끝나갈 즈음 감독·장교·공장 등을 모아 공사 장소에서 회식을 시켜주었다.


아!조공이 처음 공사할 때 수십 리나 되는 긴 제방을 3개의 수문과 동시에 시행하였으니 그 비용이 많이 들었음을 알 수 있다.

수문에 돌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재력이 부족해서이다. 내가 쌓은 것은 옛 제방 중에서 무너진 곳을 보수했으므로 수리한 곳은 한 개의 수문뿐이다.

공력이 매우 적게 들었고 이미 망가진 곳을 보아서 돌홍예를 설치하였으며 남쪽의 두 문은 망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돌을 덮는 제도를 따랐다.

후에 개수할 대에도 이 제도에 따라 3문을 모두 돌로된 홍예문을 완성한다면 해안 방어와 백성들의 생업은 영원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것을 기록하는 것은 공사 완료 뿐만 아니라 장차 후인에게도 알리고 싶어서이다.”


23) 구창서발문본에는 ʻ穡ʼ이 ʻ稼ʼ로 되어 있다.
24) 조복양(1609∼1671)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중초(仲初), 호는 송곡(松谷).강화유수로는 1664(현종5) 1월에 부임하여 1665년 2월에 이임하였다.
25) 이은(1722∼1781)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치호(稚浩), 호는 첨재(瞻齋). 1766~1767년 강화유수로 재직했다.


▲ 화도수문 개축기사비 


선원면(仙源面)


9. 거말동(巨末洞26)


巨末洞前野水橫  거말동 앞에는 시냇물이 비껴 흐르고,
拍崖列屋夕烟生  뚝 가에 늘어선 집에서 저녁연기 피어오르네.
南望雲谷西廉坂  남쪽엔 ʻ백운곡ʼ 보이고 서쪽엔 ʻ염씨산판ʼ 있는데,
一浦農謳卽大淸  농요 부르는 이 포구가 대청포라네.


○ 거말동(巨末洞)은 선원면(仙源面)에 있으니 곧 강화부 관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남쪽은 백운곡(白雲谷)으로 이규보 공의 집터가 있고, 서쪽은 염씨(廉氏)의 산판(山坂)27)이 있으니 조선 철종(哲宗)의 외가의 묘소이다. 모두 다 대청포에서 농사를 짓는다. 지금은 금월동(錦月洞)이라고 한다.


10. 연동(烟洞28)


烟洞村中最一門  연동 마을에는 훌륭한 가문이 있으니,
權都元帥奉祠孫  권율(權慄) 도원수의 봉사손(奉祠孫)이라네.
楣前敬讀丹旌字  문 이마의 정려 글자 경건하게 읽어보니,

世世風聲海岳尊  대를 이은 가풍 명성이 산과 바다만큼 존귀하네


○ 강정공(康定公) 권철의 아들 권개(權愷)32)는 관직이 호조좌랑에 문과에 급제해서 일찍이 한림으로 재직하다가

김안로(金安老)와 맞지 않아서 벼슬을 버리고 연동(烟洞)에 들어와 살았는데 강화부(江華府)가 처가였기 때문이다. 관직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강정(康定)이다.

그 아들 권율(權慄)30)은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년(1592, 선조 25)에 광주목사(光州牧使)로서 군대를 일으켜 외적을 웅치(熊峙)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또 군대를 거느리고 북상하여 고양의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적을 격파해서 도원수(都元帥)가 된 중흥명장이다. 관직은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만년에 선원면에 우거하면서 불은면 오두산(鰲頭山)에 만취당(晩翠堂)을 짓고 쉬었다. 선무(宣武) 원훈(元勳) 공신에 올랐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그 아들 권익경(權益慶)31)은 승지로서 충성을 다하였다. 후손들도 계속 벼슬해서 7대손 권태형(權泰亨)은 일찍이 용천부사(龍川府使)를 역임하고 이곳에 와서 살았다.
○ 강정공(康定公) 권철의 아들 권개(權愷)32)는 관직이 호조좌랑에 이르렀으며 그 후손도 역시 대부분 이곳에서 살았다.


28) 선원면 연리이다.
27) 선원면 냉정리 철종외가 서편에 철종의 외숙부인 염성화(廉星華)·염덕석(廉德碩)·염상임(廉尙任)의 묘가 있다.
28) 선원면 연리이다.

29) 권철(1503∼157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유(景由), 호는 쌍취헌(雙翠軒). 아버지는 강화부사 권적(權勣)이며, 권율(權慄)의 아버지이다. 병조판서·우의정·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30) 권율(1537∼1599) 조선 중기의 문신·명장.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호는 만취당(晚翠堂)
31) 권익경(1572∼1637) 본관은 안동. 초명은 태경(泰慶), 자는 성길(成吉). 아버지는 권순(權恂)이며, 임진왜란 때의 명장 권율(權慄)에게 입양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강화도에 들어갔는데, 적병이 세자를 해하려 하자 돌벼루로 적병 여러 사람을 격살하고 크게 꾸짖다가 살해당하였다.
32) 권개(1530~1568) 강화부사였던 권적의 손자이며 영의정을 지낸 권철의 아들이고, 임진왜란 때 명장 권율의 형이다. 의금부도사·호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1. 송공촌(宋公村*)


徘徊因問宋公村  송연(宋淵) 선생 살던 마을 물어물어 찾아오니,
古木斜陽鳥自喧해  저무는 고목 위에 새들이 지즐대네.
唯有墳塋知舊蹟 오로지 묘소만이 옛 자취를 알게 하니,
短碑半臥綠蕪原 작은 비석 반쯤 누워 풀 속에 묻혀 있네.


○ 서산 송씨 송대립(宋大立)33)은 학행이 있었고 호는 외암(畏菴)이다. 선조 때 지평(持平)에 제수되었으며 배천군수(白川郡守)까지 올랐다. 고조 집의공(執義公) 송거(宋秬) 때부터 이곳 연동(烟洞)에 살기 시작하였다. 외암의 아들 송연(宋淵)34)은 호가 둔암(芚菴)인데 문장과 학행이 있었다. 집안의 명성을 능히 계승해서 당시의 명유(名儒)가 되었다. 동 시대의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35) 등이 모두 그를 인정하였고, 석주(石洲) 권필(權鞸)36)과 교유하여 시와 술로써 스스로 즐겼으며 관직은 진산군수(珍山郡守)에 이르렀다. 연곡(烟谷)에 옛 집터가 있는데 지금은 그의 자손들이 다른 동네에 살고 있으며, 옛터엔 오직 비갈(碑碣)이 보일 뿐이다.


33) 송대립(1542∼1583)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사강(士强), 호는 외암(畏庵).학행이 뛰어나 이이(李珥)의 천거로 지평에 올랐고, 배천군수를 역임하였다.
34) 송연(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사인. 본관은 여산(礪山). 호는 둔암(芚菴).권필(權鞸)의 조카사위이며 성혼(成渾)에게서 수업하였다. 문장과 덕망이 뛰어났으며, 이안눌(李安訥)과 교류하였다. 인조 때 중추부경력을 거쳐 진산현감(珍山縣監)을 지냈다. 선원면 연리(煙里)에 살았고, 묘소도 연리에 있다.그의 글이≪강도고금시선(江都古今詩選)≫에 여러 편 전한다.
35) 이안눌(1571∼163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저서로는≪동악집≫26권이 있다.
36) 권필(1569∼161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벽(擘)의 다섯째아들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저서로 ≪석주집≫이 있다.


12. 독정촌(獨政村37)*


獨政村幽一谷回  한 골짜기 돌아들어 그윽한 독정촌엔,
鄭公去後孰爲臺  정유성(鄭維城) 공 가신 뒤에 그 누가 대를 삼았나.
趙翁白髮欣迎我  백발의 조옹이 흔쾌히 나를 맞아,
云是遊人少往來  놀러오는 사람 왕래가 드물다고 말해주네.


○ 연일이 본관인 포은(圃隱)의 후손 정유성(鄭維城)38)은 강정공(康定公) 권철(權轍)39)의 외예(外裔)였다.

40) 유복자로41) 연동(烟洞) 독정촌(獨政村)에서 태어났는데, 감사 황치경(黃致敬)42)의 외손자였으므로 일찍이 연미정(鷰尾亭)43)으로 와서 살았다. 정묘년(1627년)에 강화의 과거에서 이종사촌 윤계(尹棨)44)와 함께 합격해서 우의정까지 지냈다. 시호가 충정(忠貞)이고 호가 도촌(陶村)이다.
○ 지금 그 터에는 평양의 세족인 조희구(趙羲龜)가 살고 있다. 이 지역은 봉우리가 낮고 계곡이 구불구불해서 지세가 매우 협착하여 인적이 드물다.


37) 강화군 선원면 지산1리 독재이 마을이다.
38) 정유성(1596∼1664)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덕기(德基), 호는 도촌(陶村). 강화 출신. 정몽주(鄭夢周)의 9대손으로, 정구응(鄭龜應)의 손자이고, 박사 정근(鄭謹)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황치경(黃致敬)의 딸이다. 10세 때 외할아버지 황치경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 학문을 닦은 뒤 1627년 강화도에서 열린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황해도관찰사로 나간 뒤 승지·전라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지냈으며, 이어 대사간·대사성·도승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어 호조판서·예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고, 뒤이어 이조판서·형조판서가 되었다. 그가 이조판서에 재직할 때는 오직 공도(公道)로써 관리들의 임명을 결정, 이를 정확하게 처리하여 인사관리에 조금도 부정이 없게 하였다. 한성판윤과 호조판서를 지내는 동안에는 낭비를 막아 국고를 윤택하게 하였다. 1660년 우의정으로 고부사(告訃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품성은 온량(溫良)하였으나 판단력이 뛰어나면서 공사처리에는 명석하고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다. 군왕의 실정이나 불의를 보면 대세의 이해에 관계없이 직간을 서슴지 않아 효종대에는 중용되지 않았으나 그를 이해한 현종대에는 경상(卿相)의 자리까지 올랐다. 가정에서도 겸허하고 근신하였으며, 청빈(淸貧)을 가훈으로 하는 선비다운 생활을 즐겼다. 저서로 ≪은대일기(銀臺日記)≫가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3. 남산동(南山洞45))


欲尋花樹到南山  우리 일가 찾으려고 남산동에 이르니,
山下列茅流水間  산 아래 시냇물 사이 초가집이 늘어섰네.

沈益安兄須共酌  심형과 안형이 술잔을 나누며,
舒談終日却忘還  종일토록 한가하게 얘기하며 돌아가길 잊었네.



○ 남산동(南山洞)은 고려 때에 신지동(神智洞)에 가궐(假闕)을 창설하였을 때46) 이곳을 남산이라고 하였다.

나의 친척들이 이곳에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서 화수(花樹)로 말을 한 것이다.

풍산(豊山)을 본관으로 하는 청천(聽泉) 후손 심씨(沈氏)와 강진(康津)의 세족 안씨(安氏)들이 이 이웃에 살았기 때문에 방문해서 회포를 풀었다.


39) 권철(1503∼157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유(景由), 호는 쌍취헌(雙翠軒). 병조판서·우의정·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40) 권철의 외손자가 정근이고 정근의 아들이 정유성이다. 즉 정유성은 권철의 딸의 손자였다.
41) 정유성이 1596년에 태어났고, 아버지 정근은 1598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유복자는 아니며, 어머니 창원황씨는 남편이 죽자 3살 아들을 데리고 친정인 월곶리 연미정 마을로 와서 양육하였다.
42) 황치경(1554∼1627)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이직(而直), 호는 몽죽(夢竹).호조와 공조의 참의를 지냈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경기호소사(京畿號召使)로 의병을 초모(招募)하여 적에 대비하다가 그해 겨울에 죽었다.
43) 강화읍 월곶리에 있으며, 이 일대에 창원황씨 장무공 황형(黃衡)의 후손들이 많이 살았다.
44) 윤계(1583∼1636)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신백(信伯), 호는 신곡(薪谷). 병자호란 때 청병에게 잡혀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가 죽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45) 강화군 선원면 지산2리의 남산마을이다. 신지동의 ʻ지(智)ʼ와 남산동의 ʻ산(山)ʼ이 합해져 지산리가 되었다.


14. 용당사(龍堂寺47)*)


龍堂寺北卽龍津  용당사 북쪽이 곧바로 용진인데,
地古人稀草自新  옛 터엔 사람 드물고 풀만이 무성하네.
却憶當年桑下夢  그 옛날 이 절에서 자던 일을 생각하니,
已過三十七年春  어느 덧 37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


○ 용당사(龍堂寺)는 선원(仙源)의 동쪽 성(城) 바닷가에 있다.

그 북쪽에 있는 용진진(龍津鎭)48)과 용진돈(龍津墩)은 예전의 방어 시설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지되었다.

내가 일찍이 기사년(1869) 봄 이 절에서 유숙하였기 때문에 글귀 끝에 이렇게 표현하였다


46) 1264년(원종5)에 신니동(神泥洞) 가궐에서 대불정오성도량(大佛頂五星道場)을 열렸다. 고려 때의 신니동은 오늘날 신지동(神智洞)으로 불린다.
47) 용진진 남쪽 바닷가에 있던 절
48) 용진진은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215번지에 소재하며, 인천시기념물 제42호이다.

1656년(효종 7)에 축조되었으며, 가리산돈대·좌강돈대·용당돈대 등 3개의 돈대를 관리하였다.


15. 참경루(斬鯨樓49)*)


斬鯨樓下水聲多 참경루 아래에는 물소리가 요란한데,
操習千軍摠去何 훈련하던 많은 군사 모두다 어디 갔나.
申使關防誰不憶 신(申) 통어사 나라 지킨 일 그 누가 잊으리,
斜陽撫釰一高歌 석양에 칼 어루만지며 한바탕 크게 노래하노라.


▲ 용진진 참경루


○ 수군 훈련장은 용진진(龍津津)과 제물진(濟物津) 앞쪽 바다에 있었는데, 매년 봄·가을에 한 번씩 훈련하였다.

참경루(斬鯨樓)는 용진진 남쪽에 있는 문루인데, 숙종 신미년(1691)에 유수(留守) 겸 진무사(鎭撫使) 신후재(申厚載)50)가 처음 세워 대장의 좌기소(坐起所)로 삼았다.
○ 정조 계묘년(1783)에 유수 김노진(金魯鎭)51)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그 기문은 다음과 같다. “누각의 이름을 ʻ참경ʼ이라 한 것은 장차 뜻을 두려는 것이다. 뜻을 두는 것은 하늘의 질서와 사람의 규범이 세워지는 것이다. 병자 정축년의 호란을 당하여 저 어리석은 자들이 교만하게 굴면서 국사를 그르친 원인은 뜻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뜻이 없었기 때문에 나태했고 탄환을 가지고도 쏘지 않았고 배를 타고 도망하였으니, 그렇다면 어떻게 고래의 발을 자르려하는 뜻을 둘 수 있었겠는가?




참경루는 강화부 관아 남쪽 9리 되는 곳에 있으니, 즉 용당돈(龍堂墩) 있는 곳이다.

돈대가 있으면 반드시 첩(堞)이 있고, 첩이 있으면 반드시 문(門)이 있고, 문이 있으면 반드시 누(樓)가 있는 것은 전쟁의 방어를 갖추기 위함이니 하나라도 부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 누각이 허물어졌다. 이에 내가 재물을 모으고 장인을 모집하고, 사찰의 목재를 거두어서 도움이 되게 하였다.

이에 10일 지나지 않아 옛날의 모습이 선명하게 회복되었다. 이제 전쟁이 그친지 수백 년이 지나 대해의 파도는 높지 않고, 배를 삼킬만한 고기도 다니지 아니하니 ʻ확연히 일이 없다ʼ고 할만하다. 그러나 이것에 힘쓰는 것은 그 뜻을 헤아리기 위해서이다. 더구나 조정에서 통어영을 이곳에 옮긴 것은 용당의 앞바다를 수군의 조련소로 삼은 까닭이다. 대체로 대장의 깃발을 세우고 북을 두드리며 삼도의 함선을 영도하여 바람을 타고 돛을 올리며 개연히 노를 저어 파도를 깨뜨리는 뜻이 있어서였다. 그렇다면 이 땅에 이러한 참경루가 없어서는 안된다.


▲ 용당돈(龍堂墩)


아! 이 일대를 빙 둘러 해안과 포구를 따라서 돈대는 몇이며 첩은 몇이고 문은 몇 개이며 누는 몇 개이던가?

그러나 고래를 참하는데 뜻을 둔 것은 한결같다. 이 누각에 올라 참경이란 이름을 되돌아보니 후대에 반드시 나의 뜻과 같이 하여 기록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 지금은 모두 폐허되었기 때문에 탄식할 뿐이다.


49) 용진진의 문루로, 1999년 복원되었다.
50) 신후재(1636∼1699)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덕부(德夫), 호는 규정(葵亭)· 서암(恕庵). 강화유수·개성유수·한성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강화유수로는 1690년 3월부터 1692년 2월까지 재임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집≪규정집≫7권이 있다.
51) 김노진(1735∼1788) 본관은 강릉. 자는 성첨(聖瞻). 강화유수·형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편서로 ≪강화부지 江華府志≫가 있다.



▲ 가리산 돈대


16. 가리포(加里浦52)*)


加里浦頭鷺欲眠  가리포 입구에는 백로가 졸고 있고,

背簑何老釣城邊  도롱이 쓴 어떤 노인 성둑에서 낚시하네.
李公亭築君知否  이공(李公)이 정자 세운 일 그대는 아는가,
一小峯前四水田  작은 봉우리 앞에는 사방이 논이네.


○ 가리포(加里浦)는 용진(龍津)의 서북쪽에 있다. 양성(陽城) 이씨(李氏)가 일찍이 풍천(豊川) 군수를 지내고 은퇴하여 이곳에서 살면서 이 가리포의 위에 정자를 지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이 작은 봉우리에 오르면 사방에 논이 보이기 때문에 이렇게 읊었다.


52) 선원면 신정리 더리미 마을이다.



17. 신당동(神堂洞53))


神堂村口立移時  신당촌 입구에서 한참동안 서있는데,
柿葉桃花左右籬  감나무와 복숭아나무로 울타리 둘러쳤네.
知我禹翁今白髮  나를 아는 우공(禹公)은 백발이 되었으니,
十年面目却生疑  10년만에 만난 얼굴 그가 맞나 의심 가네.


○ 신당(神堂)은 곧 고려 때 축리신당(祝釐神堂)이 있던 터이다. 단양(丹陽) 세족 우씨(禹氏)들이 이 마을에 많이 살고 있다.

53) 선원면 신정2리의 신당동으로 속칭 신대이 마을이라고 한다.


18. 신지동(神智洞54))


今之神智古神泥지금의 신지동은 옛적의 신니동인데,

暮年緋玉謝雲梯만년엔 승진을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네.
都監又何經劫火도감은 또 어찌하여 화재를 겪었는가,
行人下馬意凄凄말에서 내린 나그네 처연한 생각 드네.


○ 고려 원종이 술사(術士) 백승현(白勝賢)55)의 말에 따라 신니동(神泥洞)에 가궐(假闕)을 짓고 이곳에서 대일왕도량(大日王道場)56)을 설행하였으니 곧 지금의 신지동(神智洞)이다. 또 정자산(亭子山) 아래로 도읍을 옮겼을 때 도감(都監)을 설치하였으므로 지명을 통칭 ʻ도감ʼ이라 하였다. 조선에 와서 훈련도감(訓練都監)의 창고를 이곳에 설치했었는데 병인양요 때 모두 불타 없어졌다.

54) 선원면 지산2리의 신지동 마을이다.


19. 대문동(大門洞57))


大門峴下路東西  대문고개 아래에는 동서로 길이 있고,
有屋相連傍碧溪  집들이 시냇가에 서로서로 이어있네.
最是具公登桂籍  대단하도다 구공(具公)의 과거 시험 합격한 일,
暮年緋玉謝雲梯  만년엔 승진을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네.


○ 대문현(大門峴)은 곧 고려 고종 때 정자산 아래에 도읍하였을 때 남대문(南大門)이 있던 곳이다. 고개 남쪽의 길 동서에 동네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능성 구씨인 강암공(江菴公)의 후손인 석촌(石村) 구성희(具星喜)58)는 이름을 용희(用喜)라고 바꿨는데, 일찍이 문과에 급제해서 대각(臺閣)의 청직(淸職)을 여러 번 거쳤고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고서 후에 비옥(緋玉)59)으로 은퇴하였다. 호를 창사(滄史)라고 하였다.


55) 백승현(생몰년 미상) 고려 고종 때의 풍수지리가·도참사상가. 강화 천도 당시에 삼랑성(三郞城)과 신니동(神尼洞)에 가궐(假闕)을 짓고 도량을 열면, 8개월 안에 친조(親朝)문제가 해결되고 주위의 대국들이 조공을 바치러 올것이라고 주장하였다.
56) ≪고려사≫에는 대불정오성도량(大佛頂五星道場)을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57) 선원면 금월1리 대문이 마을이다. 이 마을 북쪽에 강화도읍기 강화중성의 큰 문이 있었다고 한다.


20. 염씨산영(廉氏山塋60)*)


廉氏山塋野水邊  염씨네 선영은 개울가에 있는데,
短松鬱鬱草芊芊  소나무 울창하고 풀들이 무성하네.
瑞雲北入龍興殿  상서로운 구름이 북쪽에서 용흥전에 들어오니,
世世宜承雨露天  하늘의 은혜가 대대로 이어지리.


○ 염씨산(廉氏山)은 곧 우리 철종의 외가의 묘소이다. 용흥전(龍興殿)은 부성(府城)의 안에 있으니 곧 철종의 잠저(潛邸)61)이다.


58) 구성희(1832년 출생) 1874년(고종11)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합격했다. 아버지는 구진화(具震和)이다.
59) 붉은 비단옷과 옥관자라는 뜻으로 당상관(堂上官)을 이른다.
60) 선원면 냉정리 산70번지 일대에 철종의 외가와 외숙들의 묘소가 있다.
61) 임금이 등극하기 전에 살던 집이다.


21. 냉정동(冷井洞62)) 충렬사(忠烈祠)


壽嶺東南冷井流  숫고개(壽嶺)의 동남쪽엔 찬우물이 흐르는데,
居人於此闢田疇  주민들 이곳에서 전답을 개간했네.
鄭金二雅知幽趣  정씨와 김씨가 고상함을 알아서,
時與前村野老遊  수시로 앞마을 노인들과 교유하며 지냈네.


○ 고개의 길가에 우물이 있는데 매우 차가왔기 때문에 동네 이름이 냉정(冷井)이 되었다. 경주(慶州) 정(鄭)씨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63) 후손인 참의공(參議公)의 손자와 안동(安東) 김씨 선원(仙源)김상용(金尙容)의 후손 김씨가 거주하고 있다.


22. 선행동(仙杏洞64))


環州百水盡東之  고을을 휘감는 모든 물이 동쪽으로 흐르는 곳에,
砥柱屹然忠烈祠  큰 주초 높은 기둥 여기가 충렬사네.
二十一公無限恨  스물한 분 충신들의 끝없는 회한은,
鴨江西北卽燕支  압록강 서북쪽의 청나라를 향해 있네.


○ 충렬사(忠烈祠)는 선행동(仙杏洞)에 있는데 강화부 관아와의 거리가 7리이다. 이곳은 상공(相公) 김상용(金尙容)65)의 집터이다. 인조 임오년(1642)에 세워져 현충사(顯忠祠)라 이름하였는데, 효종 무술년(1658)에 사액하여 충렬사(忠烈祠)라고 하였다. 정축년(1637)에 순의한 21분을 제사지내고 있다.


62) 선원면 냉정리이다. 현재 찬우물이 있는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창리에 속하게 되었다.
63) 정지운(1509∼1561)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정이(靜而), 호는 추만(秋巒). <천명도설 天命圖說>을 지어 조화(造化)의 이(理)를 구명하였다.
64) 선원면 선행리 선행마을이다.


23. 충렬사 안동인 김상용(安東人 金尙容71))


捐身殉國金相公  육신 바쳐 순국하신 김상용 선생,
百世風聲鎭華東  백세토록 그 명성이 동방에 전해오네.
硝火南樓雷霆起  화약 쌓은 남문에서 우레 소리 일어나니,
穉孫微僕亦丹忠  어린 손자와 노비들까지 충성심을 보여줬네.


○ 병자년 난리에 상공(相公)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은 종묘사직을 모시고 강화도에 왔다. 성이 함락되자 가족과 결별하고 남문루에 올라가 초황(硝黃)을 쌓고는 그 위에 앉아 스스로 불질러 죽었다. 당시 손자 김수전(金壽全)은 나이가 13살이었는데 그 옆에 있었다. 종에게 명하여 끌고 나가게 하였으나 아이가 옷을 부여잡고 가지 않으며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다”고 해서 종도 어찌 하지 못하고 다함께 죽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충렬(忠烈)이라 표창하였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했으며, 사당을 옛 집터에 지어 제사지냈다.


○ 택당(澤堂) 이식(李植)은 축문을 지어 “조정의 문장이며 국가의 원로이네. 나라 위해 목숨 바치니 영원토록 그 이름 날리리”라고 하였다.


71) 김상용(1561∼1637) 조선 인조 때의 상신(相臣)이며, 병자호란 때의 순절인(殉節人). 본관은 안동.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 선원촌(仙源村)으로 피난했다가 양호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이 되어 왜군토벌과 명나라군사 접대에 공을 세워 승지에 발탁되었다. 병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서 서울을 지켰고 그 후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나 바로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묘사주(廟社主)를 받들고 빈궁·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에 피난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으로서 황신(黃愼)·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 등과 친밀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강화 충렬사,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 ≪선원유고≫ 7권이 전한다.


24. 충렬사 벽진인 이상길(碧珍人 李尙吉72))


金石貞心李晩沙  금석 같은 곧은 마음 만사 이상길 선생은,
耆英宿望著朝家  덕망 있는 원로로 조정에 이름이 높았는데,
西風一哭先生廟西風  속에 선생의 사당에서 한 바탕 곡을 하니,
手劍光中海日紅  손에 든 칼 광채 속에 바다 해가 붉도다.


○ 판서를 지낸 만사(晩沙) 이상길(李尙吉)은 묘사(廟社)를 따라와서 선원촌(仙源村)의 집에 우거하였다. 갑곶나루[甲津]가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가족에게 명하여 배를 갖추고 피하게 하면서 “종사가 망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 나라의 정경(正卿)이다. 나라가 무너지면 당연히 사직을 위하여 죽어야 한다.”고 하면서 재촉하여 몰아서 강화부로 와서 묘사(廟社)에 나아가 통곡하고 재배한 후에 자결하였다. 일이 알려지자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충숙(忠肅)이라 시호를 내렸고 본 사당에 배향되었다.


○ 택당 이식은 축문을 지어 “마음은 금석처럼 곧고 덕망은 기영(耆英)73)에 높았으니, 의리를 들어 충성을 바치고 어두운 곳에서 밝음을 찾았도다.”라고 하였다.


72) 이상길(1556∼1637)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사우(士祐), 호는 동천(東川). 병조참의·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노령에도 불구하고 묘사(廟社)를 받들고 강화도에 들어갔다. 청군이 강화도로 육박해오자 아들 경(坰)에게 뒷일을 부탁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강화도 충렬사에 배향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동천집≫이 있다.


73) 조선 시대에, 임금의 친척과 이품 이상 정일품 이하의 벼슬아치 및 경연당상(經筵堂上) 중에서 일흔 살 이상 된 사람들이 참석하던 경로회(敬老會)이다.


25. 충렬사 청송인 심현(靑松人 沈誢74))


沈公大義篤宗祊  심현 선생 큰 뜻이 종묘에 돈독하니,
一語從容婦效貞  남편 말씀 순응하며 부인도 본받았네.
萬古綱常由是賴  만고의 기강이 여기에 의지했으니,
疏中字字淚縱橫  상소문 글자마다 눈물로 얼룩졌네.


○ 도정(都正) 심현(沈誢)은 강화부에 있으면서 성이 함락될 때를 미쳐서 조카 심동구(沈東龜)가 배를 준비해 놓고 울면서 피하기를 청하니, 심공이 말하기를 “나라가 깨지고 집안이 망했는데 살아서 다시 어찌하겠는가. 나는 죽을 것을 결심하였다.”라고 하였다.


아내 송씨 (宋氏)가 옆에 있으면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저도 따르기를 청합니다. 고사에 ʻ충절로써 죽고 정조로써 죽어서 몸을 깨끗이 하여 같이 돌아가겠습니다.ʼ라고 하였습니다. 저도 이 고사를 조용히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기뻐하면서 “당신도 그렇게 하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조복을 갖추어 입고 행조(行朝)를 향해 네 번 절하고 유서를 써서 “신(臣) 현(誢)은 동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계시는 주상전하께 글을 올립니다. 신은 아내 송씨와 더불어 같은 날 자결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이미 외손 박장원(朴長遠)에게 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처와 더불어 상대하여 목매에 죽었다. 일이 알려지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존되고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이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 택당이 축문을 지어 “버슬을 지키는 몸이 아니었으되, 그 뜻은 종실에 독실하여 한 집안의 충절이요 만고의 강상(綱常)을 잡았도다.”라고 하였다.


74) 심현(1568∼1637)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화(士和). 여러 군현의 수령을 지내고 돈령부도정에 이르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사(宗社)를 따라 강화에 피난, 가묘의 위패를 땅에 묻고 국난의 비운을 통탄하는 유소(遺疏)를 쓰고 부인 송씨(宋氏)와 함께 진강(鎭江)에서 순절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강화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26. 충렬사 파평인 윤전(坡平人 尹烇75))


歷敭臺閣尹公心  대각(臺閣)을 역임한 윤전(尹烇) 공의 마음씨,
曾以風裁動有箴  일찍이 풍모로 선비들을 감동시켰네.
最恨短刀難刺虜  한스럽다 짧은 칼 적을 베기 어려우니,
臨危性命海天陰  생명이 위급함에 임하여 바다 하늘도 어두웠다네.


○ 후촌(後村) 윤전(尹烇)은 세자빈을 호위하고 강화에 왔다. 성이 락되던 때에 관리가 무리 중에서 원손을 데리고 나오면서 말하기를 “원손을 모시고 가지 않을 수 없다. 따르고자 하는 자는 따라와라.”라고 하였다. 태상 이시직(李時稷)76)이 윤공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가라. 가야만 한다. 내가 명을 받아 빈을 보호하고 오겠다. 지금 난리가 있는데 죽지 않는다면 비록 원손을 모시고 가더라도 구차히 면하는 것일 뿐, 가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라고 하였다.


오랑캐가 모두 달려오자 성중의 사람들이 뛰쳐나왔는데 윤공은 차고 있던 칼로 자신을 찔렀다. 오랑캐에게 분하여 욕을 하면서 “내 칼이 짧은 것이 한스럽구나. 어찌 너를 따라 빨리 나를 죽이겠는가.” 라고 하면서 마침내 해를 당하였다. 일이 알려지자 이조판서에 추존되고 충헌(忠憲)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이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 이공이 축문을 지어서 “대각의 벼슬을 거쳐 그 위풍을 지녔도다. 어려운 지경에 목숨을 바쳐 그 이름이 죽백(竹帛)에 남았도다.” 라 하였다.


75) 윤전(1575∼1637) 초명은 찬(燦).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정숙(靜叔), 호는 후촌(後村). 병자호란 때 필선으로 빈궁(嬪宮)을 배종하여 강화에 들어왔으나 성이 함락되자, 송시영(宋時榮)·이시직(李時稷) 등과 함께 자결하기로 결의, 두 번이나 목을 매었으나 구출되자 다시 패도(佩刀)로 찔렀는데 미처 절명하기 전에 적병을 크게 꾸짖고 죽었다. 사람됨이 돈후하고 신중하다는 평을 들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연산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76) 이시직(1572∼1637)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유(聖兪), 호는 죽창(竹窓). 병자호란 때 목을 매어 순절했다.


27. 충렬사 남양인 홍명형(南陽人 洪命亨77))


常行直道是洪公  떳하고 곧은 길이 홍명형 공이 가는 길,
殉節初心到海中  절의 초심으로 이 섬에 들어왔네,
南樓坐對仙源哭  문루에 마주 앉아 선원선생과 곡하고서,
一死同歸萬古忠  함께 죽어 같이 가니 만고의 충성이라.


○ 승지를 지낸 무적당(無適堂) 홍명형(洪命亨)이 관직을 그만두고 향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문득 “어가가 강화로 몽진한다.”라는 문을 듣고서 강화로 들어왔는데, 어가가 오지 않고 서쪽으로 갔다하자 탄식하기를 “명(命)이로구나. 이것은 필시 패할 조짐이다.”라고 하였다. 성이 함락될 때를 미쳐서 선원공에게 나아가 서로 붙잡고 통곡하고 분신자살하였다. 일이 알려져 좌찬성(左贊成)에 추존되고 의열(義烈)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이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78)가 축문을 지어서 “곧은 도는 항상 행해지고 초심으로 순절하였네. 대의가 이 때문에 곧아져서 백세토록 공경할지어다.”라고 하였다.


77) 홍명형(1581∼1636)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계통(季通), 호는 무적당(無適堂). 고부군수·승문원부제조 등을 역임했으며,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하여 나라의 형세를 한탄하다가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분신자살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강화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열(義烈)이다.


28. 충렬사 남양인 홍익한(南陽人 洪翼漢79))


洪學士居尼嶽幽   홍학사는 마니산의 깊은 곳에 살았는데,
尊周大義炳春秋  주(周)왕실을 존중하니 대의가 춘추의리에 빛났네.
瀋陽寒雪何堪說  심양의 눈보라를 어찌 차마 말하겠나.
赤日東方盪海流  동쪽의 붉은 해는 바다 물결에 출렁이네.


○ 학사(學士) 화포(花浦) 홍익한(洪翼漢)은 일찍이 벼슬을 그만두고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남쪽 산골 중에서도 바위가 많은 곳으로 들어가 살았다. 오랑캐가 참람되이 국호를 칭하자, 그때 마침 공이 대관으로서 상소하여 그들과의 관계를 끊고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병자년 난리에 오랑캐가 크게 이르자 공이 평양의 부윤으로 나갔다가 사람을 보내 옛 거처를 살피려 할 즈음이 이미 강도의 성이 함락되어 버렸다. 그때 그의 아내 허씨(許氏)와 두 아들 홍수원(洪晬元)과 홍수인(洪晬寅), 수원의 아내 이씨(李氏)가 모두 죽었다. 공도 적국에 끌려가서 죽었는데 조정에서는 안타깝게 여겨 그 모친에게 평생토록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는 영의정에 추존되었으며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받았고 이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 남한(南漢)의 현절사(顯節祠) 축문에 “오랑캐를 물리치니 영원한 본보기라네. 온 누리에 윤리 세우니 해와 달보다 충성 빛나네”라고 하였다


78) 정제두(1649∼1736)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79) 홍익한(1586∼1637)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습(霫).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화의론(和議論)을 극구 반대하였고, 화의가 성립된 후 청나라로 잡혀가 죽음을 당하였다. ʻ삼학사ʼ의 한 사람이다. 저서로 ≪화포집(花浦集)≫이 있고,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29. 충렬사 남원인(南原人) 윤계(尹棨)80)·윤집(尹集81)) 형제


高聖鄕中尹弟兄  고성골 마을에 윤씨 형제 살았는데,
春秋大義講平生  춘추의 대의를 평생토록 강의했네.
南州北塞堂堂節  남쪽 고을 북쪽 변방에서 당당한 절개 지켰으니.

同立常山萬古名  상산(常山)과 같이 서서 만고에 이름났네.


○ 부사인 백죽(白竹) 윤계(尹棨)가 두 아우 윤집(尹集)·윤유(尹柔)와 함께 장령(長嶺)의 고성향(高聖鄕)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후에 남양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병자년 난리에 절개를 지키다가 죽었다. 아우인 윤집은 교리(校理)로서 오랑캐와의 화친을 물리쳤다. 정축년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왔을 때에 오랑캐가 척화(斥和)의 신하들을 수색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윤집과 학사 오달제(吳達濟)·학생 홍익한(洪翼漢)으로 응답하였으며 심양에 들어가서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똑같이 해를 당하였다. 이들이 삼학사(三學士)이다. 후에 윤계를 좌찬성에 추존하고 충간(忠簡)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윤집을 의정부 영의정에 추존하였고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모두 이 충렬사에 배향하였다.
○ 부사가 축문을 지어서 “하늘이 상란(喪亂)을 내리사 선비들은 그 충간(衷肝)을 분발하였도다. 적은 군사로 의로운 성을 지켰으니. 그 의리 상산(常山)과 같도다.”라 하였다.
○ 교리가 축문을 지어서 “충정(忠正)을 돕고 충간(忠簡)을 숭상하니, 절의가 서로 빛나 영원토록 드리우리”라고 하였다.


80) 윤계(1583∼1636)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신백(信伯), 호는 신곡(薪谷).

1627년 강화에서 열린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교리·이조좌랑·남양부사를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다 청병에게 잡혀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가 몸에 난도질을 당하여 죽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81) 윤집(1606∼1637)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고산(高山). 1631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636년 교리로 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오달제 등과 함께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의 목을 벨것을 청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후 청병에게 끌려갈 때도 조금도 절개를 굽히지 않아 청병이 감복하였다고 한다.

청나라의 고문과 회유에 끝내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심양성 서문 밖에 끌려가 사형 당하였다. 오달제·홍익한과 더불어 삼학사라고 이른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廣州)의 절현사(節顯祠),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褒義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30. 충렬사 창원인 황일호(昌原人 黃一皓82))


念昔黃公按義州 황공이 옛적에 의주를 다스릴 때를 생각하니,
胡雲常入劍頭秋 오랑캐땅 구름 밀려들고 칼끝엔 가을기운 일었네.
崔車二士同心逝 최효일과 차예량이 한마음으로 죽었으니,
鴨水空如易水流압록강은 부질없이 역수(易水)처럼 흐르네.


○ 부사인 지소(芝所) 황일호(黃一皓)는 판서인 황신(黃愼)83)의 아들이다. 일찍이 의주(義州) 부윤이 되어 최(崔)·차(車) 두 역사(力士)를 명나라에 보내어 성이 함락된 수치를 설욕하려 하였다. 일이 발각되자 오랑캐에게 잡혀서 죽음에 처하게 되었다. 인조가 일천 금으로써 속바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좌찬성에 추존되었으며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받았고 이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 축문에 “주나라를 높이는 한결같은 마음이요, 나라 위해 죽는 평소의 뜻이네. 화가 참혹하여 저자에서 죽었으니 그 큰 뜻이 매우 열렬하네.”라고 하였다.


82) 황일호(1588∼1641)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익취(翼就), 호는 지소(芝所). 운봉현감·임천군수 등을 역임했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전공을 세웠고, 척화를 적극 주장하였다. 1638년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명나라를 도와 청나라를 치고자 최효일(崔孝一) 등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청나라 병사에게 피살되었다. 강화 충렬사, 부여 의열사(義烈祠) 등에 배향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83) 황신(1562∼1617)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 정랑 대수(大受)의 아들이다.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공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31. 충렬사 연안인 이시직(延安人 李時稷84))


質直好人李太常  성품 곧고 사람 좋은 이시직 선생은,
若柔心法是居剛  마음씀이 부드러웠지만 굳센 태도로 살았네.
從容一決秋霜凜  조용히 한번 결심하면 추상처럼 늠름했으니,
遺子書中摠義方 자손에 남긴 글에 의로운 말 모아 놓았네.


○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이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써 호종하여 왔다. 성이 함락되자 글을 써서 자식에게 주고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일이 알려지자 이조판서에 추존되었고 충목(忠穆)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 택당의 축문에 “질박하고 정직한 좋은 그 사람이여, 강하면서도 부드럽도다. 조용히 한 번 자결한 그 의리는 가을 서리처럼 늠름하도다.”라고 하였다.


84) 이시직(1572∼1637)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유(聖兪), 호는 죽창(竹窓). 병조좌랑·사간원정언·사복시정·봉상시정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에 들어갔다가, 강화가 함락되자 사복시주부 송시영(宋時榮)이 먼저 자결하자, 묘 둘을 파서 송시영을 매장하고 하나는 비워놓아 노복에게 자기를 그곳에 매장하도록 부탁한 다음 활끈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와 회덕의 숭현사(崇賢祠)의 별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32. 충렬사 은진인 송시영(恩津人 宋時榮85))


野隱宋公自漢城  야은 송시영 선생은 한성에서 왔는데,
下僚大義篤宗祊  하급관료로서 대의를 지키고 종묘제사 돈독했네.
惟魚其捨惟熊取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하였으니,
永訣書中字字明  유서에 남긴 글자 분명도 하여라.


○ 야은(野隱) 송시영(宋時榮)은 사복시의 주부로서 호종하여 왔다. 성이 함락될 때를 미쳐서 글을 써서 집사람에게 주고는 목매 죽었다. 그 조용하고 자세한 것이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과 같았다. 일이 알려지자 좌참찬에 추존되었으며 충현(忠顯)이란 시호를 받았고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 택당이 축문을 지어서 “비록 직급 낮은 관료였지만 그 의리는 나라를 위해 순절하였도다. 어(魚)를 버리고 웅장(熊掌)을 취한 격이니, 죽음에 나아가기를 삶과 같이 하였도다.”라 하였다.


85) 송시영(1588∼1637)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공선(公先) 혹은 무선(茂先),호는 야은(野隱). 좌랑 방조(邦祚)의 아들이며, 시열(時烈)의 종형이다. 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남에 왕명에 의해 강화도에 들어갔으나 이듬해 정월에 강화성이 적에 의하여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충현(忠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강화 충렬사,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1편 완료.

<심도기행>7언 절구 256수 중 오늘 32편 정리

다음 준비중 : 32(편) x 8(페이지) = 256(수)


이어지는 다음 Web 페이지 보기

http://blog.daum.net/koreasan/156068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