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산천

거친 호흡 몰아쉬며 바람 저편 굽이치는 산맥 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28 심도기행 안파루 남장대 첨화루 강화향교 선원비각 연무당 민진원송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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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치는 바람

2019. 5. 18.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스물 여덟번째이야기 1

5월 18일 하늘은 파랗고 바람이 시원한 토요일


지금부터 백십년전

이곳 강화를 답사하고 아름다운 시를 문집으로 남기신 선비 고재형 선생의 뒤를 따라서 길을 찾아갑니다

미천한 저의 답사이지만 즐겁고 행복하고 가슴 설레는 나들이입니다   


강화도

가면 갈수록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더 찾게 되는 매력있는 곳


오늘 답사코스

김포 대명항 ~ 초지대교 ~ 광성보 ~ 오두돈대 ~화도돈대 ~ 용진진 ~ 가리포 ~ 강화풍물시장 ~강화산성 남문 ~ 강화산성 서문 ~ 조양방직 카페 ~ 연무정 ~ 강화향교 ~ 선원비각 ~ 고려궁지(외규장각) ~ 강화산성 북문 ~ 용흥궁 ~ 강화산성 동문 ~ 편의점 휴식 ~ 초지진 ~ 대명리 원점회기 ( 샤방 샤방 때론 빡세게 왕복 53km)



강화산성

강화내성 사대문의 이름을 살펴보면

동문 망한루 ​(望漢樓) / 서문 첨화루(瞻華樓) /  남문 안파루(晏波樓) / 북문 진송루(鎭松樓)와 2개소의 수문, 2개소의 성문장청이 있었다.


동문은 '한양을 바라본다'라는 뜻의 망한루 ​(望漢樓)

서문은 '서문으로 아름다움을 본다'는 첨화루(瞻華樓)

남문은 '물결(파도)이 늦게 온다'는 안파루(晏波樓)

북문은 '소나무'가 많은 곳이라해서 진송루(鎭松樓)인가? 유추해본다.



▲ 세상의 모든것을 사랑하며 즐겁게 살자.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 박 용 재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향기로운 꽃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을 사랑한 만큼 산다
외로움에 젖은 낮 달을 사랑한 만큼 산다.
밤하늘의 별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홀로 저문 길을 아스라이 걸어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그네를 사랑한 만큼 산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 만큼이 인생이다


출처 박용재 시집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中에서


▲ 김포 대명리에서 초지대교를 향하여 출발


▲ 초지대교 진입하기 


▲ 초지대교 중간에서 바라본 초지진

강화에는 5진 7보 53돈대가 있었다. (광성보의 용두돈대와 김포 문수진 제외)


진·보 돈대(鎭堡墩臺)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百里封疆地勢雄  백리 강도는 지세가 웅장하고,
山靑水白四環中  푸른 산 맑은 물이 사방에 둘러 있네.
十三鎭與諸墩堡  열세 개의 진보(鎭堡)와 수많은 돈대는,
制勝當年凜凜風  승리하던 당시의 늠름한 풍모네.


○ 강화[沁]에는 13개의 진이 있는데

월곶진(月串鎭), 제물진(濟物鎭), 용진진(龍津鎭), 광성진(廣城鎭), 덕진진(德津鎭), 초지진(草芝鎭), 선두진(船頭鎭), 장곶진(長串鎭), 정포진(井浦鎭), 철곶진(鐵串鎭), 인화진(寅火鎭), 승천진(昇天鎭), 문수진(文殊鎭)이다.


그리고 53개의 돈대가 있는데

적북돈(赤北墩), 휴암돈(鵂巖墩), 월곶돈(月串墩), 옥창돈(玉倉墩), 망해돈(望海墩), 제승돈(制勝墩), 염주돈(念珠墩), 갑곶돈(甲串墩), 가리돈(加里墩), 좌강돈(左岡墩), 용당돈(龍堂墩), 화도돈(花島墩), 오두돈(鰲頭墩), 광성돈(廣城墩), 손석항돈(孫石項墩), 덕진돈(德津墩), 초지돈(草芝墩), 장자평돈(長者坪墩), 섬암돈(蟾巖墩), 택지돈(宅只墩), 동검북돈(東檢北墩), 후애돈(後崖墩), 양암돈(陽巖墩), 갈진돈(葛津墩), 분오리돈(分五里墩), 송곶돈(松串墩), 미곶돈(彌串墩), 북일곶돈(北一串墩), 장곶돈(長串墩), 검암돈(黔巖墩), 송강돈(松岡墩), 굴암돈(屈巖墩), 건평돈(乾坪墩), 망양돈(望洋墩), 삼삼암돈(三三巖墩), 석각돈(石角墩), 계룡돈(鷄龍墩), 망월돈(望月墩), 무태돈(無殆墩), 인화돈(寅火墩), 광암돈(廣巖墩), 구등돈(龜登墩), 작성돈(鵲城墩), 초루돈(譙樓墩), 불장돈(佛藏墩), 의두돈(蟻頭墩), 철북돈(鐵北墩), 천진돈(天津墩), 석우돈(石隅墩), 빙현돈(氷峴墩), 소우돈(疎雨墩), 숙룡돈(宿龍墩), 낙성돈(樂城墩)이다. 이것은 모두 한 고을의 관방(關防)이다.
올라서 사방을 바라보고는 개연히 예전에 돈대를 세운 뜻을 생각해 보았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 길상산 산림을 베어내고 만든 강화 씨사이드 리조트 루지


길상산(吉祥山)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吉祥山色碧如藍  길상산의 산색은 쪽빛처럼 푸르고,
磅礴奇形鎭海南  기이한 모습 가득하여 남쪽 바다를 진압하네.
萬里風濤來去舶  만리 길 파도 위를 오고가는 선박들은,
鳧胸雁背影兩三  오리 가슴 기러기 등 모습으로 두세 척씩 지나 가네.


○ 길상산(吉祥山)은 관아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남쪽이 바닷가이다. 동쪽과 서쪽에는 배들이 왕래하는 것이 끊이지 않아서 오리들이 같이 떠가는 것 같고, 산에 오르면 경관이 매우 훌륭하다.


▲ 전등사를 감싸고 있는 정족산과 삼랑성이 보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 유한준(兪漢雋, 1732 - 1811. 정조 때의 문장가)


▲ 토요일이라 그런지 강화도 입장하는 차가 엄청 많습니다  


▲ 초지진을 둘러보고 계속해서 초지항으로 이동



▲ 나들길과 53돈대 개념도


▲ 초지항


초지동(草芝洞)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息波亭下草芝城  식파정 아래에 초지성이 있는데,
半是漁鹽半是耕  절반은 어염이요 절반은 농경이라.
姜翁何年來寓此  강흥업공 어느 때에 여기 와서 살았는가,
炳然楣上一紅旌  빛나도다 문 이마의 붉은 정려문 글씨.


○ 초지동(草芝洞)은 옛날에 진관(鎭關)이 있던 곳이다. 계미년(1763)에 유수 정실(鄭宲)502)이 첨사 겸 감목관으로 승격하게 하였다.
○ 그 위에는 식파정(息波亭)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지되었다.


▲ 나들길 호국돈대길을 따라서 이동



▲ 광성보


광성진(廣城津)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春風來到廣城樓 광성보 누각에 봄바람 불어오는데,
津吏迎吾指海洲 나루지기 나를 맞으며 바다섬을 가리키네.
三兎三龍三蛇字 묘시 진시 사시의 삼자시가 있으니,
知潮有信可行舟 물때를 잘 알아야 배가 갈 수 있다네.


○ 효종 무술년(1658)에 유수 서원리(徐元履)가 광성진(廣城鎭)을 창설하였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 황상 신미년(1871) 4월에 서양의 오랑캐가 강화를 침입하였을 때에 병사(兵使) 어재연(魚在淵)이 강화부의 중군(中軍)으로서 광성보를 지키며 힘써 전투하다가 죽었다.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洵[淳]) 마침 군중에 와 있었는데 동시에 순절하였다.


▲ 광성보의 광성돈


광성보(江華廣城堡 : 사적 제227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강화 12진보(鎭堡)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천도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축조하였다.

효종 9년(1658)에 강화유수 서원리가 설치하였다.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오두돈대(鰲頭墩臺)·화도돈대(花島墩臺)·광성돈대(廣城墩臺)를 관할하였다.

오두돈대는 둘레가 80보(步) 33첩(堞)이었고, 화도돈대는 둘레 92보 42첩이었으며, 광성돈대는 88보 38첩이었다.


영조 21년(1745)에 석성으로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하였는데, 이를 안해루(按海樓)라 하였다. 그 후 1769년에 완전한 석성으로 축조하였다.
이곳에는 군선 5척과 별장 아래에 군관 29인, 군병 100명, 돈군 18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고려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로 1871년 신미양요 때는 최대의 격전지였고, 1874년 만든 오두정 포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 해에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한 미국 함대가 강화 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광성(廣城)·초지(草芝)·덕진(德津)·덕포(德浦) 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하여 물리쳤으나, 4월 23일에 450명의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여 진을 점령하였다.


이튿날 미국이 북상하여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미국 극동 함대는 9인치 포와 8인치 포 등 약 80문의 함포로 지원사격을 하였으며,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장(中軍葬) 어재연(魚在淵)을 위시하여 그의 아우 어재순(魚在淳)·군관(軍官) 이현학(李玄學)·어영초관(禦營硝官) 유풍로(柳豊魯)·천총(千摠) 김현경(金玄暻)·광성별장(廣城別將) 박치성(朴致誠) 이하 49인의 장사와 200여명의 군사가 전사하고 20여명이 부상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형편없이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중상으로 기동이 어려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이 싸움에서 미국은 맥키 중위를 위시하여 3명이 전사하고 10여명이 부상하였다.


1976년 성첩과 문루가 파괴된 것을 복원하는 동시에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쌍충비각(雙忠碑閣)을 보수·정비하였다.

이곳에는 어재연장군의 전적비와 약 50여 명의 순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 있다.



광성동(廣城洞)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東風東望廣城墩  동풍 맞으며 동쪽으로 광성돈을 바라보니,
殘堞危譙海雨昏  허물어진 치첩과 높은 초루는 비에 젖어 밤을 맞네.
窃想堂堂魚節制  당당했던 어재연 절제사를 생각하노니,
弟兄同日作忠魂  형제가 같은 날에 충성 영혼 되셨네.


-불은면 넙성리 광성 마을이다.



오두동(鰲頭洞)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一村花樹列成庄  꽃나무로 동산 이룬 오두리 마을에선,
於讀於耕日月長  글 읽기와 농사일로 세월을 보내네.
最愛此中丹桂籍  그 중에서 소중한 일은 과거에 급제한 일이니,
永承雨露放餘光  나라 은혜 길이 이어 큰 빛을 발하리.



▲ 오두돈대


오두어화(鰲頭漁火)-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碧鰲頭上白鷗翩  오두리 푸른 하늘에 백구가 날아오르고,
漁火如星海色鮮  고기잡이불 별처럼 빛나니 바다색이 선명하네.
認是權公開別墅  권율 장군 세운 별장 있음을 알게 하니,
疎松晩翠舊堂前  만취당 앞에는 큰 소나무가 서있네.


○ 도원수 권율(權慄)530)의 별장이 오두정(鰲頭亭)에 있었는데 그 당의 이름을 만취당(晩翠堂)이라고 하였다.
○ 오두의 고기잡이불도 강화부 10경(景)의 하나이다.



▲ 고잔마을 입구


고잔동(高盞洞)-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草堂村裡竹農家  초당촌 안에 있는 죽농 선생 댁에서,
話舊談新日欲斜  옛 이야기 요즘 이야기 하면서 해가 저물어가네.
早識眞工傳世世  참된 공부 일찍 알아 대대로 전하니,
滿架書香摠是花  서가에 가득한 책이 모두가 꽃이로세.





▲ 화도 돈대 바로 앞에 있는 운치있는 중국음식점

옛날 짜장면과 홍합 짬뽕이 일품입니다. 완전 강추합니다  


▲ 아카시 꽃 향기 가득한 용당돈대 입구


용당사(龍堂寺)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龍堂寺北卽龍津  용당사 북쪽이 곧바로 용진인데,
地古人稀草自新  옛 터엔 사람 드물고 풀만이 무성하네.
却憶當年桑下夢  그 옛날 이 절에서 자던 일을 생각하니,
已過三十七年春  어느 덧 37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


○ 용당사(龍堂寺)는 선원(仙源)의 동쪽 성(城) 바닷가에 있다. 그 북쪽에 있는 용진진(龍津鎭)48)과 용진돈(龍津墩)은 예전의 방어 시설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지되었다.


▲ 용진진과 좌강돈대


▲ 왼쪽에 보이는 산위에 가리산 돈대(터)가 있다


▲ 선원면 신정리 더리미 마을 가리포


가리포(加里浦)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加里浦頭鷺欲眠  가리포 입구에는 백로가 졸고 있고,
背簑何老釣城邊  도롱이 쓴 어떤 노인 성둑에서 낚시하네.
李公亭築君知否  이공(李公)이 정자 세운 일 그대는 아는가,
一小峯前四水田  작은 봉우리 앞에는 사방이 논이네.


○ 가리포(加里浦)는 용진(龍津)의 서북쪽에 있다. 양성(陽城) 이씨(李氏)가 일찍이 풍천(豊川) 군수를 지내고 은퇴하여 이곳에서 살면서 이 가리포의 위에 정자를 지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이 작은 봉우리에 오르면 사방에 논이 보이기 때문에 이렇게 읊었다.










▲ 가을 단풍이라면 더욱 아름다운 풍경일듯




▲ 왼쪽 남장대가 있는 산봉우리부터 오른쪽 북문있는 능선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 나들길 6코스 입구에서


▲ 강화 나들길 6코스 시작점. 강화 풍물시장


강화산성

1233년(고려고종20)에 고려가 강화로 천도하면서 ​현재 강화읍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북쪽 북산(126m), 남쪽 남산(463m) 동쪽 견자산(75m), 서쪽은 북산과 고려산(436m)의 산줄기가 이어지는 능선을 이용하여 축성하였다.


강화산성 (사적 132호)

고려와 대몽항쟁을 위해 고종 19년( 1232년)에 도읍을 강화로 옮기고 궁궐을 지을 때 도성도 함께 쌓았는데

개성성곽과 비슷하게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졌으며 1232년부터 축조되었다

외성은 강화 동쪽 해협을 따라 1만 1,232m를 쌓았는데 

고려는 1270년 다시 개경으로 천도한 후 몽골의 요청으로 헐어버렸다.

이중 내성에 해당하는것이 지금의 강화산성이다

원래는 흙으로 쌓았으나 숙종3년(1677년) 강화유수 허질이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돌성으로 쌓으며 현재와 같은 석성을 이루었다


성 둘레는 7,122m이며

4개의 대문이 있으며

강화내성 사대문의 이름을 살펴보면 ​ : 동문 망한루 ​(望漢樓), 서문 첨화루(瞻華樓). 남문 안파루(晏波樓) , 북문 진송루(鎭松樓)와

2개소의 수문, 2개소의 성문장청이 있었다.


동문은 '한양을 바라본다'라는 뜻의 망한루 ​(望漢樓)

서문은 '서문으로 아름다움을 본다'는 첨화루(瞻華樓)

남문은 '물결이 늦게 오는  성곽'이라는 안파루(晏波樓)

북문은 '소나무'가 많은 곳이라해서 진송루(鎭松樓)인가? 유추해본다.


▲ 강화읍내로 들어서는 첫 관문인 강화 남문(안파루) 입니다


가면 갈수록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아름다운 강화입니다








▲ 남문의 편액 안파루

파도? 물결이 늦게 들이닥친다는 뜻의 안파루.


▲ 전면에는 강화의 예 명칭인 강도의 남쪽문이라는 강도남문이라고 쓰여있다



▲ 남문 안쪽에 서있는 강화유수 민진원(閔鎭遠) 송덕비

민진원은 조선 숙종때 강화유수로 재임시 고려시대 이래의 토성인 강화산성(내성)을 보수하여 현재 규모의 석성으로 확장 수축하였고  마리산 정수사 쪽  바닷가 해안에 있는  선두포구 앞으로 둑을 쌓아 막은 그의 공을 기려 송덕비를 세운것이다.


민진원 [1664년(현종 5)∼1736년(영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세심(洗心).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유중(維重)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자 우참찬 진후(鎭厚)의 동생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1689년의 기사환국 이후 인현왕후가 유폐되고 노론 일파가 크게 탄압을 받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등용되지 못하다가, 1694년 갑술옥사로 장희빈(張嬉嬪)이 강봉(降封)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어 노론이 집권하자 이듬해 예문관검열로 기용되었다.


1696년 세자시강원 겸설서(世子侍講院兼說書)가 된 뒤 사서에 올랐으나 척신(戚臣)이라는 이유로 면직되었다가 이듬해 이광좌(李光佐) 등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뽑히고 수찬(修撰)에 재등용되었으며, 그해 중시(重試)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98년 병조좌랑이 된 뒤 사헌부의 지평·부수찬 등을 역임하고 1701년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이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
1703년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하였는데, 이때 서원의 남설(濫設)이 지방재정을 한층 곤궁하게 하며 당쟁을 더욱 치열하게 하는 것을 보고, 서원건립을 억제하고 그 수를 줄일 것을 상소하였다.


1705년 공조참의가 되고 장희빈사건으로 부처(付處)된 남구만(南九萬)의 감형을 상소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이듬해 강화부유수를 지내고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지내던 중 1712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5년 대사성이 되었는데 《가례원류(家禮源流)》의 간행을 둘러싸고 노론·소론간에 당론이 치열해지자 노론 정호(鄭澔)를 두둔하다가 파직, 문외출송(門外黜送)당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노론이 득세하자 다시 등용되어 평안도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1718년 예조판서가 되어 양전구관당상(量田勾管堂上)을 겸하였다. 그해 주청사(奏請使)로 다시 연경(燕京)에 다녀왔고, 이듬해 강화구관당상(江華勾管堂上)을 역임하였다.
이조판서·호조판서에 이어 1721년(경종 1) 공조판서로 있으면서 실록청총재관(實錄廳總裁管)을 겸하여 《숙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또한 왕세제(王世弟: 후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건의하여 실현하게 하는 등 정계의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이듬해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매 성주(星州)로 유배되었으나 1724년 영조의 즉위와 더불어 노론이 집권하게 되자 풀려나 우의정에 오르고, 이어서 실록청총재관으로 《경종실록》 편찬을 주관하였다.


1725년(영조 1) 소론의 영수로 영조의 탕평책에 따라 좌의정의 직에 있던 유봉휘(柳鳳輝)를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라 하여 탄핵, 유배시켰으며, 송시열의 증직(贈職)을 상소하고 그해에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었으나, 1727년 당색이 강한 자를 제거하여 탕평하려는 영조의 정책으로 정미환국이 일어나자 파직되어 순안(順安)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으며, 1729년 중추부판사가 되어 《가족제복론(加足帝腹論)》을 찬진(撰進)하였다.


그뒤 당쟁을 종식시키려는 영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소론과 타협하지 않고 소론을 배격하는 노론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1730년 기로소에 들고 173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특히, 글씨를 잘 쓰고 문장에 능하여 강릉의 송담서원비(松潭書院碑), 선산의 고려예의판서농암선생신도비(高麗禮儀判書籠巖先生神道碑), 여주의 여양부원군민유중신도비전액(驪陽府院君閔維重神道碑篆額) 등을 썼다.


저서로는 《단암주의 丹巖奏議》·《연행록 燕行錄》·《단암만록 丹巖漫錄》·《민문충공주의(閔文忠公奏議)》 등이 전한다.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전망 좋은 곳에 빼어난 자태로 서있는 남장대

수원에있는 화성의 수어장대와 모양이 비슷한 강화 남장대


강화산성 남쪽 정상부에 있으며 조선 시대 서해안 방어를 담당했던 진무영에 속한 군사시설로

감시와 지휘소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허물어진 것을 2010년 복원했다.

남장대에 오르면 일망무제로 막힘없이 시야가 탁 트여 강화읍은 물론 북한과 영종도까지 거침없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 겨울 사진이다)



남대제월(南臺霽月)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南山臺上久踟躕  남산대 위에 올라 오래토록 머뭇대는데,
霽月浮來太極圖  맑은 달 떠오르는 모습 태극도와 같구나.
流峙如看金鏡裡  흘러내린 산줄기는 금거울을 보는 듯하니,
昭昭十景一江都  밝고 밝은 그 모습은 강화 10경의 하나로다.
○ 강화부의 남산은 화산(花山)이라고도 하는데 위에 장대(將坮)가 있었다.


▲ 조양방직 카페를 잠시 지나면서 둘러보고



▲ 강화 진무영의 병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자 열병식을 하던 곳이다.


강화산성 서문 건너편에 있는 연무당은 강화산성 서문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종 7년에 창건된 연무당은 지금의 시장 군 농협 자리 서쪽에 있었는데, 비좁아 동소문 밖으로 옮겼다가 내성서문 남쪽에 당을 세우고 그 전면에 조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강화 진무영의 병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자 열병식을 하던 곳이다.


그러나 1876년 이곳에서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불평등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곳이기도 하다.

강화도 조약은 1876년 2월 3일에 체결된 조약으로 조일수호조규 혹은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에서 강화도조약이 최종 조인됨으로서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치외법권을 인정해주며 부산, 인천, 원산을 일본에게 개항하였으며. 이로인하여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발판이 되었다.

또한 이 조약은 개방을 찬성하는 개화 세력과 반대하는 척사위정 세력 사이의 대립을 하는 정치적 계기가 되었다.


연무당 옛터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역사는 간단없이 흘러가되 교훈은 남는 것이니 이곳 연무당은 그 역사의 교훈을 듣는 데다 일찍이 여기에서 강화부의 군사들을 훈련했었고 최근에 1876년 고종 13년 2월 26일 이른바 병자년 한일수호조약을 체결했던 집이다. 이미 그 전년에 일본의 군함 운양호가 들어와 침략적인 야욕을 품고 초지진 포대를 공격하고 영종도에 내려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고 갔었다.

  이듬해 봄 다시 군함과 수송선을 이끌고 와서 한국과 일본이 수호조약을 체결하자고 강요하자 우리는 거기 따라 부산 원산 인천을 개항하여 그로 인해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마는 실상은 도둑에게 문을 열어 주었던 것과 같아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침략이 시작되어 마침내 망국의 쓰린 역사를 맛보고야 말았었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께서 친히 돌아보시고 이 연무당 터야말로 민족의 역사적 시련장이며 자주적 역량만이 사는 길임을 보여준 곳이므로 이곳을 길이 보존하도록 하라는 분부를 내려 문화공보부와 경기도가 그 깊은 뜻을 받들어서 폐허를 쓸고 이같이 깨끗하게 꾸며 놓았거니와 우리는 여기에 와서 스스로 깨닫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오직 제 힘을 키우고 기른 다음에라야 어떤 고난이든지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이기에 그 뜻을 돌에 새겨 자손만대에 길이 전한다.


1977년 8월   이은상 짓고 김충현 쓰다


 




서문동(西門洞157)) 서문루(西門樓)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瞻華樓頭倚夕陽  첨화루 지붕 위에 석양이 걸렸고,
山腰川帶共縈蒼  산허리 두른 내는 함께 얽혀 푸르다.
萋萋鍊武堂前草  연무당 앞의 풀은 무성하게 자랐는데,
幾度春秋大操場  봄가을 큰 훈련을 몇 번이나 치렀을까.


○ 첨화루(瞻華樓)는 심도부성(沁都府城) 서문(西門)의 편액이다. 그 안에는 대조장(大操場)과 연무당(鍊武堂)이 있으니 곧 옛날 서장대(西將臺)의 옆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국정동(國淨洞)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府內西連國淨村  강화부 서쪽에는 국정촌이 이어져서,
辛韓兩姓闢山門  신씨와 한씨가 산문을 열었네.
桃梨柿栗幽幽谷  복숭아 배 감과 밤이 골짜기에 그윽하고,

耕讀生涯永不諼  밭 갈고 책 읽는 삶이 영원토록 변치 않네.


○ 국정동(國淨洞)은 강화읍 국화2리 옛 국정사(國淨寺) 어귀에 있는 큰 마을이다.
○ 영월 신씨(寧越辛氏)와 청주 한씨(淸州韓氏) 현감 한상부(韓相阜)의 증손 한성모(韓聖謩)가 이 국정동 동네에 처음 살기 시작했고 그 자손이 계속 거주하고 있다.






▲ 강화 석수문












강당 안연재(講堂 安燕齋)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數仞墻東一講堂  높은 담장 동쪽에는 큰 강당이 있으니,
故來絃誦振江鄕  예로부터 학업하는 소리 강화 고을 진동했네.
笙篁金石鏗鏘處  생황이며 금석 악기 낭랑하게 울리는 곳,
抱玉諸生共躋蹌 옥을 품은 여러 학생 다함께 예를 갖추네.
○ 지금은 안연재(安燕齋)라고 부르는데, 정전(正殿)의 안쪽 담장 동쪽에 있으니, 바깥 담장의 안쪽이다.




강화향교 [江華鄕校]

시대 : 고려 

문화재 지정 : 인천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34호 

건립시기 : 1127년 

성격 : 교육기관, 향교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향교길 58(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938-2)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위치한 향교

1127년(인종 5) 3월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고려산(高麗山) 남쪽 기슭에 창건되었다.

1232년(고종 19)에 지금의 갑곶리(甲串里)로 옮겼다가 몽고군의 침입으로 다시 서도면(西島面)으로 이건하였다. 그 뒤 강화군으로 옮겨왔으며, 1624년(인조 2)에 강화유수 심열(沈悅)이 소동문(小東門) 밖의 송악산(松岳山) 옆에 복원하였다.

1629년에는 강화부윤 이안눌(李安訥)이 명륜당(明倫堂)을 중건하였으며, 1688년(숙종 14)에 유수 민시중(閔蓍重)이 남문 근처로 이건하였다. 1731년(영조 7)에는 유수 유척기(兪拓基)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66년에 유수 이은(李溵)이 중수함과 동시에 소동문 밖에 있던 비석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1985년 9월 20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2호로 지정된 바 있으며, 1995년 11월 14일에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大成殿)·명륜당·동무(東廡)·서무(西廡)·제기고(祭器庫)·주방(廚房) 등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에는 5성(五聖),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 교육적 기능은 없어졌다.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며, 1명의 전교(典校)와 수명의 장의(掌議)가 운영을 맡고 있다.



명륜당(明倫堂)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萬古明倫屹一堂  만고의 명륜당이 큰 집으로 솟아있고,
槐風杏雨入淸凉  느티 바람 은행 비는 청량함이 들게 한다.
敬推東岳經營意  동악 선생 경영한 뜻 미루어 생각하니,
牖我靑衿趣向方  우리 유생 나아갈 방향을 열어 주었네.






선원비각(仙源碑閣)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舊南門址閣丹靑  옛적 남문 있던 터의 단청한 비각에,
一石嵬然紀丙丁  비석하나 우뚝하니 병자·정축년 일 적혀 있네.
硝火聲中金相國  화약 폭발 소리 속에 김상국이 있었으니,
萬古貞忠貫日明  만고의 충정은 해를 뚫고 밝았다네.


○ 옛 남문의 누각은 곧 상국(相國)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이 순절한 터이고 후에 비각을 세워서 진무영 외삼문(外三門) 동쪽에 두었다.




▲용흥궁 주차장 뒤편 언덕에 보이는 한국 최초 한옥 성당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한옥과 바실리카식의 조화가 아름다운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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