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산천

거친 호흡 몰아쉬며 바람 저편 굽이치는 산맥 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

추석 다음날 삼성산 삼막사 라이딩

댓글 0

MTB등산여행

2019. 9. 14.

추석을 지내고 다음날 천천히 길을 나섰다 

[2019 · 9 · 14 · 흐리고 비 내리는 토요일]


부평에서 출발하여 친구집을 거쳐서 안양 삼막사에 오르고 이어서 삼성산 정상까지 올랐다

안개비가 내리며 더욱 비가 거세어졌지만 가을비를 맞으며 열심히 땀나게 달렸다

내려와서 식사를 하고 왕복 라이딩으로 귀가를 했다.

※ 비가 거세지면서 카메라는 배낭에 넣고 폰으로 촬영.



안양 삼성산 일원에는 3대업힐로 정평나있는 삼막사코스와 염불암 망해암 코스가 있다.

그중 난이도는 단연 삼막사코스가 빡세고 어려운 곳이다

오랫만에 우리는 오늘 그곳으로 간다









▲ 기형도 시인이 머물렀던 광명 그리고 샛강을 넘어서 안양으로 이동하기


안개  - 기 형 도

 

1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邑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江을 건너야 한다.

앞서간 一行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空中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은 샛江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食口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는,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空氣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 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正午 가까이

工場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發水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邑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저녁으로 샛江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邑의 名物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기형도 시인  

1960년 2월 16일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 4녀중 막내로 출생.
1979년 연세대학교에 입학. 교내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 입회하여 문학수업을 시작
1980년 대학문학상 박영준 문학상에 <영하의 바람> 가작 입선
1982년 대학문학상 윤동주문학상(시부문)에 <식목제> 당선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 당선
1989년 3월 7일 새벽 뇌졸증으로 사망.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 <짧은 여행의 기록>, 추모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전집 <기형도 전집> 등


▲ 기형도 시비 ⓒ2006. 6. 20 촬영 한국의산천 

 

시인 기형도(1960~1989)가 살았던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흐르던 샛강의 아침은 종종 안개에 휘감겼다.

이곳엔 외지의 수몰민과 이재민들이 새 터전 삼아 몰려왔다.

데뷔작 ‘안개’는 70년대의 산업화가 안개처럼 퍼지며 수도권을 잠식했던 시기와 그때 성장했던 시인의 내면 풍경을 모사(模寫)했다.




▲ 안양유원지 입구을 지나고 유서깊은 유적 만안교 다리 아래 통과하기

만안교....이곳을 지날때면 정조의 지극한 효심이 생각난다


7개의 아름다운 홍예가 있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만안교 

 

효성이 지극하시고 성군이셨던 정조

아버지(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보며 살얼음판을 딛듯 고립무원의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세손(정조).

이 아름다운 다리를 보니 정조에 관한 글이 떠오른다. 잠시 정조에 대해 돌아보고자 한다.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2동에 위치한 만안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38호 지정되었다.

만안교는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제22대 정조가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갈때,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하기 위해 축조하였다.

길이 31.2m, 너비 7m에 7개의 갑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화강암 판석과 장대석을 깔아 축조하였으며, 축조 양식이 정교하여 조선후기 대표적인 홍예석교이다

 

▲ 정조대왕의 효심이 어려있는 만안교


만안교(萬安橋)는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제22대 정조(1776~1800 재위)가 당파싸움 사이에 끼어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生父)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 하러 갈 때,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축조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楊洲)에서 화산으로 이장한 후, 자주 능을 참배하며 부친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한다.

 

당초의 참배행렬은 궁궐을 떠나 노량진, 과천, 수원을 경유하게 되어 있었으나, 그 노변에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한 김상로의 형 약로의 묘가 있으므로 불길하다하여 시흥쪽으로 행로를 바꾸면서 이곳 안양천을 경유하게 되었다.

정조가 만안교를 지난 것은 7번째 능행부터이다. 이 다리는 처음에는 나무로 다리를 놓아 왕의 행렬이 지날 수 있도록 하였으나 경기관찰사 서용보에 의해 돌로 이를 대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795년(정조 19)에 당시 경기관찰사 서유방이 왕명을 받들어 3개월의 공역 끝에 길이 31.2m, 너비 8m에 7개의 갑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화강암 판석과 장대석(長臺石)을 깔아 축조하였다. 축조양식이 정교하여 조선후기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받고 있다.

 

원래 위치는 남쪽 200m 지점의 안양천에 있었으나 국도확장사업으로 1980년 8월에 이곳 만안구 석수2동의 삼막천으로 이전하였으며, 다리 앞에는 서유방이 글을 짓고 조윤형이 쓴 만안교비가 있어 이 다리의 연혁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안양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만안교 다리밟기가 펼쳐진다.


▲ 차단기가 있는 삼성산 삼막사 입구

이제부터 평지가 없는 업힐의 연속이다


▲ 삼막사를 오가는 차량도 숨가쁘게 오르내리는 경사가 있는 산악도로


▲ 허벅지는 땡기고 호흡은 거칠어지지만 도중에 서면 오르기 힘들기에 오직 쉬지않고 꾸준한 페달링뿐이 할일이다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



지친 듯 피곤한 듯 달려온 그대는 거울에 비추어진 내 모습 같았오
바람부는 비탈에서 마주친 그대는 평온한 휴식을 줄것만 같았지
그대 그대 그대가 아니면 땅도 하늘도 의미를 잃어 이젠 더 멀고 험한 길을 둘이서 가겠네





▲ 삼막사 도착





▲ 삼막사에서 계속해서 삼성산 정상을 향하여 고고쓍~


산으로 오를수록 운무(GAS)는 더욱 짙어졌다.

유배를 당하듯 온산이 짙은 운무에 감싸이고 있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이 생각났다.
 

『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 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 쌌고 먼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김승옥 '무진기행'중에서











▲ 자전거로 오를수 있는 삼성산 정상 마지막 지점 도착






그대 - 이연실


지친 듯 피곤한 듯 달려온 그대는 거울에 비추어진 내 모습 같았소
바람부는 비탈에서 마주친 그대는 평온한 휴식을 줄것만 같았지

그대 그대 그대가 아니면 땅도 하늘도 의미를 잃어

이젠 더 멀고 험한 길을 둘이서 가겠네

한세월 분주함도 서글픈 소외도 그대를 생각하며 다 잊고 말았소
작정도 없는 길을 헤매던 기억도 그대가 있으니 다 잊어지겠지

그대 그대 그대가 아니면 산도 바다도 의미를 잃어

이젠 꿈 같은 고운 길을 둘이서 가겠네


그대 그대 그대가 아니면 산도 바다도 의미를 잃어
이젠 꿈 같은 고운 길을 둘이서 가겠네



사과를 먹고 천천히 안전하게 딴힐하기






삼막사 입구를 지나서 오리고기집으로 이동



▲ 오리로스 주문




▲ 식사 후 아메리카노 한잔씩



▲ 다시 만안교를 지나서 귀가하기  


 ▲ 왔던 길을 되집어 귀가하며 68km의 라이딩을 마치다


만안교 다시보기


▲ 7개의 아름다운 홍예를 가지고 있는 다리 만안교  ⓒ 2012 한국의산천 

만백성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뜻에서 만안교라고 이름지어졌는가?

만안교는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제22대 정조가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갈때,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하기 위해 축조하였다


▲ 만안교 답사 2012 ⓒ 한국의산천    


▲ 만안교 답사 2012 ⓒ 한국의산천    


세종에 버금갈 만큼 수신(修身)과 제가(濟家)에 완벽했던 정조. 

 

조가 83세로 승하한 후 뒤를 이은 22대 정조는 1776년 3월10일 영조가 세상을 떠난 지 엿세만에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했다. 그리고 임오년(사도세자가 죽은 해) 이후 하루도 잊지 않고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 아!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선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선대왕께서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하지 않는것(不貳本)'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즉위 일성(一聲)에 대신들은 경악했다. 특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물어넣었던 노론은 공포에 휩싸였다. 14년전 뒤주속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가 다시 살아난 듯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노론이 가장 두려워한것은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정조)이 즉위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어찌 그 아들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세손(정조)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서 희생되었듯이 항상 죽음의 위협속에서 세손시절을 보내며 고립무원의 길에서 살얼음을 밟듯 조심 조심 두렵게, 위태 위태하게 이때까지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왔다.

 

정조는 열흘 후인 3월 20일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이라 올리고 묘호는 영우원, 사당은 경모궁이라 높혔다. 그리고 그 5일 후 홍인한등과 결탁해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환완공주의 양아들 정후겸을 경원으로 귀향 보냈으며, 이어 정후겸의 양모이자 자신의 고모이기도한 화완옹주를 서녀로 강등시켰다. 화완은 이후 정치달의 부인을 뜻하는 '정처(鄭妻')라는 치욕적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정조가 선왕의 대를 이어 왕이되고 비운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릉을 화성으로 이장하게 된다. 아버지를 죽인 노론과 강화된 왕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사도세자의 뜻을 계승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날 사도세자의 영구는 열번 죽어도 씻을 수 없는 한을 지닌 시신이 27년만에 임금이된 자신의 아들 정조와 함께 새로운 안식처로 떠나는 날. 이날 이 행렬을 호위한 사람은 사도세자를 살리지 못했다고 꾸짖고 그 이유로 귀향을 떠났던 병조판서 윤숙이었다.

 

어가와 잉여가 함께 새로운 안식처인 화성으로 향했는데 떠나는 행렬은 웅장했다. 경기 관찰사가 선도하고 담당 신하들은 예법에 따라 좌우로 늘어섰다.

취타수 18명과 붉은 군복을 입은 4백여명의 군사들이 세줄로 늘어섰으며, 사도세자와 잉여 곁에는 호위군사 200여명이 겹줄로 늘어섰고 가가각 50여개의 만장이 앞뒤로 하늘을 수놓았다.


노제 장소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했으며, 수백리 밖에서 어가와 영가의 행렬을 보기위해 몰려 들었다.

이 행렬을 호위한 인물은 병조판서 윤숙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날 정승들에게 세자를 구하라고 명한죄로 홍봉한의 주청으로 인해 탄핵당해 해남으로 귀향길에 올랐던 한림 윤숙이었다.

다시 사도세자를 구하려던 자의 호위를 받으며 안식처로 길을 떠나고 있다.  

<젊은 사관이었던 윤숙은 해남으로, 영조의 명에도 물러가지 않고 세자를 지키고 세손 정조를 업고 들어와 할아버지에게 죄를 빌게 했던 사관(한림) 임덕제-'나의 손은 사필(史筆)을 잡는 손이다. 내 손이 짤릴 지언정 나를 끌어낼수는 없다'고 외쳤다-는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임금을 상징하는 황룡기를 비롯하여 사방을 표시하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등의 수많은 깃발을 펄럭이며 영원한 안식처인 화산(現 융건릉) 으로 가고 있었다.

 

'부주(父主)여 살려주소서!' 했던 아버지와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주시옵소서!' 라고 호소했던 세손이 왕이되어 함께 떠나는 길. 

각영마다 늘어선 깃발, 그리고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북소리와 취타소리는 사도세자의 혼이 펄럭이고 울부짓는 소리였다. 

 

사도세자의 고백 / 클릭 >>> http://blog.daum.net/koreasan/13737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