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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루트] 조선 숙종은 왜 북한산에 '성(城)'을 쌓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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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 23.

[코리아루트] 조선 숙종은 왜 북한산에 '성(城)'을 쌓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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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2022.01.23 07:00 기사입력 2022.01.23 07:00

 

숙종시대 최대의 국가 프로젝트‥ 산성 둘레 약 13km
37년간의 축성 찬·반 논쟁‥ '도성 수축' vs '산성 축성'
산성 품은 성곽 지대‥ 도읍의 진산(鎭山) 북한산

 

북한성도 세부 관성소 [고양시]

[아시아경제 라영철 기자] 북한산은 삼국시대 이래, 군사 요충지로서 수도 방어기지의 면모를 갖춘 도읍을 품은 산이다.
도성을 방어하고 왕실과 도성 안 백성을 지켜 줄 명실공히 도읍의 진산(鎭山)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의 제19대 국왕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은 왜 수십 년간 논쟁을 벌여 가면서까지 북한산에 산성을 쌓기로 결정한 것일까.
요약하자면 숙종 재위 당시 청나라 해역에 출몰한 대규모 해적 무리의 침입에 한양 도성이 늘 위험에 노출됐기 때문이다.

더구나 1637년,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재위: 1623~1649)가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음으로써 전쟁은 끝났지만, 봉림대군(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굴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짐작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끊임없는 북핵 위협이 진행형이듯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의 정세는 예측불허다.
기록에 의하면 북한산성 축성은 단순히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외세로부터 왕실과 조정(朝廷), 도성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숙종은 북한산성 축성이 외세로부터 도성을 지키는 대비책의 하나라고 마음속 깊이 굳혔다.

그는 당시 강화도와 남한산성은 유사시 오래 머물지 못하는 곳인데 비해 북한산성은 이동이 쉽고, 산세가 험준해 적의 접근이 어려우니 충분히 방어가 가능한 천연의 요새로 판단했다.

사실 북한산성 축성 계획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재위: 1567~1608) 때도 제기된 바 있다. 의주로 피난했던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한양으로 돌아온 뒤 전란 시 방비책으로 북한산에 산성을 쌓자는 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축성의 장·단점을 논의했지만, 당시 국방 요충지 여러 곳에서 보수 중이던 성곽 공사를 끝내지 못하는 실정에다 재정과 인력마저 부족한 상태여서 선조 대의 축성은 더는 진척하지 못했다.

이후 효종(재위: 1649~1659) 때도 국방강화책으로 북한산성 축성이 제기됐다. 굴욕적인 볼모 생활을 겪은 효종은 북벌 정책을 추진했으나, 역시 재정난과 집권층의 반대에 부딪혀 북한산성 축성 계획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북한산성 축성은 현종(재위: 1659~1674) 대를 지나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표면으로 떠오른다. 그 무렵 중국대륙의 정세가 조선에 미칠 영향을 고려한 데다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컸다.
그래서 북한산성 축성이 제기됐던 것이다.

북한산성 성곽과 시설물 [고양시]

■ 북한산성 '축성 논쟁'

숙종과 조정 대신(大臣)들은 북한산성 축성을 두고 연일 의견을 주고받으며 공론화했다.
축성 논쟁의 발단은 청나라 해역에 출몰한 해적 떼가 조선으로 향했다는 정보가 입수되면서부터다.

강화도와 인천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 경비를 강화하고 조총과 화약, 산성 전투용 수레 등 무기 확보에 총력을 쏟았다.
지역별 방어 전략과 효율적인 군사 운용 안까지 제시됐는데 그중 하나가 북한산성 축성이었다.
조정에서는 조속히 북한산성을 쌓자는 의견과 축성보다는 도성 방비에 힘써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가 상소(上疏)했다. "북한산에 성을 쌓는다면 내성(內城)을 조성해 (유사시) 종묘와 사직을 옮길 수 있습니다. 또한 인근 조지서(造紙署: 조선시대 종이 제조를 관할하던 관청) 어귀를 막아 한강 변의 세곡(稅穀) 창고를 옮겨 설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공사(公私)의 비축 물량을 모두 옮겨 들여갈 수 있습니다." 『숙종실록』 숙종 36년(1710년) 10월 26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윤지완이 의견을 제시했다. "의논하는 자들은 북한산에 성을 쌓는 것이 도성을 보전하고 지키는 바탕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성을 지키려면 북한산에 성을 쌓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 북한산에 성을 쌓는다면 도성은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숙종실록』 숙종 36년(1710년) 11월 10일

또 다른 절충안도 나왔다. ‘도읍 지역의 축성과 수성(守成) 방안을 서두를 필요 없으며, 군사 조련과 요충지역 방비가 우선’이라는 의견과 ‘도성 정비와 함께 북한산성을 새로 쌓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결정은 쉽지 않았다.

진사(進士) 허극이 상소해 도성 수축을 청했다. 이에 숙종이 "(도성은) 넓고 큰데다가 견고하지 못한 결점이 있어 그곳에서 지키고자 한다면 위태로울 수 있다. 그래서 이제 밤낮으로 (성 쌓을 곳을) 생각하고 있다. 여러 신하들과 논의해 특별한 곳을 정하면 백성과 함께 들어가 지킬 것이다."라고 했다. 『숙종실록』 숙종 36년(1710년) 10월 20일

시간이 흐를수록 해적 침입의 가능성을 낮았지만, 해적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시설을 보완한다는 구실로 성을 쌓는다면 청나라의 간섭을 피해 갈 수 있다는 게 숙종의 생각이다. 성을 쌓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37년,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병자호란)에 패한 뒤 강화를 맺으면서 “성곽 수축과 축성을 금한다”는 규약을 맺은 바 있기 때문이다.

북한산성 축성 반대파는 도성 주민 대부분이 도성 지키기를 원하며, 10만 명의 장정이 구역을 나눠 성곽을 방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도성을 근거로 삼아 군량미와 무기 보급을 하는 게 더 유리하며, 도성을 버리면 종묘과 사직도 옮겨야 하는 굴욕을 또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 배치도 [고양시]

숙종이 북한산성 축성을 결정내린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때는 북한산 지형의 단점으로 물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제기됐다.

북한산 성곽 공사로 도읍인 한양의 지맥(地脈)이 손상되며, 청나라와의 조약을 어겨 외교관계 악화를 부르고, 남한산성과 강화성을 소홀히 하게 돼 수도권 방어에 허점이 노출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밖에 굶주린 백성이 많고 도적이 횡행하는 시기에 대규모 인력을 동원해야 하는 축성 공사는 무리라는 의견도 나왔다.

반면, 북한산성 축성 찬성파는 국가 위기 시 도성을 방어하기에는 도성이 너무 넓기 때문에 북한산성을 축성하면 도성 백성이 함께 들어가 지키기에도 용이하며, 기존의 남한산성은 강을 건너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했다.

축성에 쌀 1만석과 면포 1천 동(同), 역군(役軍) 1만 여 명이면 2~3개월 안에 공사를 마칠 수 있다며 축성 방안을 제시했다.

중앙의 군사를 교대로 투입하고 빈민을 축성인력으로 동원하는 인력 활용 방안까지 내놨다. 특히 남한산성과 강화성은 병자호란 때 함락된 전례가 있어 새로운 보장 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축성 논쟁은 해적 침입 방어보다는 국가 전란 시 방비책으로 무게가 실리고 있었다.

부응교(副應敎) 이세최가 숙종에 아뢰길 "만약 북한산에 성을 쌓고 겸해서 도성을 지키는 것이 참으로 좋으나, 북한산성을 쌓은 뒤에 도성을 지킬 수 없다면 이는 적절한 계책이 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숙종은 "북한산성을 쌓자는 지금의 의논이 청나라에서 해적을 주의하라는 문서가 전달된 뒤에 나왔기 때문에 이 축성 안을 이들 해적을 막으려는 계책으로 여기는데, 나의 뜻은 천혜의 지세를 이용한 성을 쌓아 장래의 구원(久遠)한 계책을 도모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숙종실록』 숙종 36년(1710년) 12월 1일

숙종은 임진왜란 때 조정이 의주로 피난해야 했던 사실에 주목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북한산성을 축성하고 군수품과 물자를 비축해 전란 때 도성 백성들이 함께 들어가 항전 지로 삼겠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산은 산세가 험해 지형지물을 이용하면 축성에도 공력이 덜 들 것으로 판단했다.

전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이 머물만한 장소가 있어 북한산성이 왕실의 안녕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이며, 도성 백성들의 안전을 담보하는 요새로 여겼다.

축성 논쟁 한 때 도성 수축론에 힘이 실려 실제 공사를 수년에 걸쳐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연재해와 인력 동원의 어려움으로 여러 차례 공사가 중단되면서 도성 수축은 마무리도 못한 채 사실상 실패 수순으로 접어들었다.

숙종 즉위년인 1674년에 처음 북한산성 축성 제안이 나온 이후 세 번 씩의 축성 논쟁 끝에 1711년 2월, 숙종은 마침내 북한산성 축성을 결정했다.

"그러나 사람의 소견은 사람의 얼굴이 같지 않음과 같아서 만일 여러 의논이 반드시 합치되기를 기다려 일을 일으키려 한다면 성취할 날이 없을 것이다. 이는 이른바 ‘너희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리자면 적은 이미 강을 건너게 된다’라고 하는 말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비변사등록』 숙종 37년(1711년) 2월 9일

대청터 현황(2020년 시굴조사) [고양시]

■ 37년간의 결실 '북한산성' 축성

숙종은 북한산성 축성을 결정하고 책임자를 임명해 구체적 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축성은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 등 삼군문(三軍門)에서 구역을 나눠 맡기로 했다.

축성 기술자를 전국에 공모하고, 일반 역부는 도성 주민을 동원하기로 했다. 재원 마련은 삼군문에서 맡았지만, 비변사(備邊司)·호조(戶曹)·병조(兵曹)·진휼청(賑恤廳) 등 중앙기관에서도 지원하도록 했다.
성곽 공사는 1711년 4월에 시작해 그해 10월에 마무리했다. 산성 전체 둘레는 약 13km에 달했다.

성 내부 시설 공사를 거쳐 1714년에 내성(內城)에 해당하는 중성(重城) 축조를 마쳤다. 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성문(城門)을 설치했으며, 동서남북에 대문을 뒀다.

행궁(行宮)과 내전(內殿)과 업무공간인 외전(外殿)을 중심으로 모두 124칸이다. 비밀 출입구와 물을 외부로 내보내는 수문(水門), 병사들의 초소이자, 거처인 성랑(城廊) 143채를 지었다.
산성 관리를 맡은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산성 내 지휘부인 유영(留營) 3개소도 마련했다.

무기와 군량미, 관리용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倉庫) 8개와 우물(井) 99개소와 저수지(池) 26개소를 조성했다. 그 외 누각(樓閣) 3개, 다리(橋梁) 7개, 11개의 사찰 등이다.
이로써 북한산은 대규모 산성을 품은 성곽 지대로 거듭나게 됐다.

조선 개국 이래 300년이 흐른 뒤 도성을 방어하고 왕실과 도성 백성을 지켜줄 도읍의 진산(鎭山)으로 자리 잡았다.

참고·인용: 『성(城)과 왕국』, 조윤민, -주류성-
사진: 문화재청·경기도 박물관·고양시

 

[코리아루트] '북한산성 행궁'‥ 권력다툼의 중심에 내몰렸던 '군주(君主)의 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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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2022.01.09 10:28 기사입력 2022.01.09 10:28


외침 (外侵)으로부터 도성 지킬 방비책·피난처, 북한산성
부왕(父王)에 대한 후궁(後宮) 아들의 그리움 깃든 행궁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 '경기도 기념물' 지정


[아시아경제 라영철 기자] 북한산은 서울 근교의 산 중에서 가장 높고 산세가 웅장하다.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묘항산과 함께 오악(五嶽)으로 꼽히기도 한다.

서울 서북부와 경기도 고양·양주시의 경계 지역에 위치하며 최고 높은 백운대(836.5m)를 비롯해 400m~800m에 이르는 수십 개의 봉우리가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다.

산봉우리가 하나의 거대한 바위로 돼 있고 가파른 기암절벽이 형성돼 만경대, 원효대, 소요대, 영취봉, 노적봉, 인수봉 등 전망 좋은 바위 봉우리도 많다.
이런 봉우리가 모여 '큰 산'을 이루고, 험준한 능선과 암벽은 북한산을 하나의 성이자, 천연 요새로 만든다.
깊은 계곡에 절경을 갖춘 중흥동, 옥류동, 은선동으로 불리는 골짜기도 있다.

북한산성 내 관성소 위치 [동국여도 19세기 초,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북한산성 '행궁(行宮)'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왕실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필요했고, 1711년(숙종 37)에 이곳 북한산에 성을 축조한다.
그리고 피난 시 왕이 머물 수 있는 '행궁(行宮)'을 산성을 축성한 다음 해인 1712년에 건립한다.

남한산성에도 행궁이 있지만, 한강 포구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을 때는 방어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행궁’은 글자 그대로 임금이 행차해 머무는 임시 궁궐인데, 북한산성의 행궁은 임시 궁궐보다는 피난용 궁궐로 만들어졌다.
기록에는 왕실을 상징하는 종묘와 사직을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남한산성 행궁에는 종묘와 사직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좌전과 우실이 갖춰져 있다.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 및 상창지 [노베르트베버 신부와 독일 총영사 크루거 박사 일행, 성 베네딕토 왜관수도원 소장 자료. 1911.6.5]

북한산성 행궁은 임금이 신하들과 정사(政事)를 보는 외전(外殿)을 앞에 두고, 뒤에는 임금과 왕실 일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인 내전(內殿)을 배치했다. 건물 주변으로는 담장을 둘러 전통적인 궁궐 건축물의 형태를 나타냈다.
규모는 내전 28칸, 외전 28칸, 부속건물 68칸 등 총 124칸으로 구성됐다.

행궁 관리는 1712년 산성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설치된 경리청(經理廳) 소속의 관성장(管城將) 1인이 담당했다. 행궁의 수직은 관성소(管城所) 소속의 행궁 군사 2인이 맡았다.

세월이 흘러 북한행궁에는 왕실 족보를 보관하기 위한 보각(譜閣)을 두게 된다. 고종대에 이르면 사고(史庫)로 쓰이면서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왕실의 어제나 어보, 어책, 의궤 등 중요 물품들을 보관하게 된다.
이렇듯 북한행궁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피난처였다.

북한도 중 관성소 및 상창 위치(1745년) [고양시]

■ 37년 간의 논쟁, 종지부 찍다

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 통치 당시 조선은 외침의 위협을 계속 받았다. 국방과 영토 방어 문제는 최대의 현안이었다.

울릉도에는 왜인들이 침입해 영토를 어지럽혔고, 북방에선 청나라가 국경을 확실히 정하자며 압력을 가했다. 그래서 조선은 군사력을 키워야 했고, 외적 침입에 대비해 도성을 지킬 방비책과 피난처가 필요했다.

1711년 2월 초순, 마침내 숙종은 결단을 내린다. 즉위년에 시작해 37년을 끌어온 북한산성 축성 논쟁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임금이 말했다. "도성은 넓고 커서 수비하기가 어렵고 남한산성은 나루를 건너기가 어려우며, 강화도는 바다로 침입해 들어오는 도둑 무리에 취약해 얼음이 녹아버리면 믿을만한 곳이 못된다. 오직 북한산만은 극히 가까워 백성과 함께 들어가 지키려고 한다. 군량을 마련하는 등의 조치는 이들 먼 지역과는 달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의견이 같아지기만을 기다린다면 어찌 이룰 수 있는 날이 있겠는가?" - 『숙종실록』 권50, 숙종 37년(1711년) 2월 5일 -

숙종 어필 (칠언시) [경기도 박물관 소장]

축성 결정이 나자 공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1711년 4월에 축성을 시작해 그해 10월에 성곽 공사를 끝냈다. 숙종이 연잉군(영조)과 함께 북한산성에 행차한 1712년 4월 무렵에는 행궁과 군사시설물 조성이 진행되고 있었다.

배수시설인 수문(水門)까지 살펴본 숙종은 이어 행궁을 찾았다.
"도성 10리 거리 행궁에 이르니 높고 험한 시단봉(柴丹峯)이 바로 동쪽에 있네. 노적봉(露積峯) 머리엔 아직 구름 걷히지 않았고 백운대(白雲臺) 위에는 안개 자욱하네." - 숙종(肅宗) 어제시(御製詩) 「북한산성」 『열성어제(列聖御製)』 -
행궁을 나온 숙종은 동장대(東將臺)에 서서 말없이 능선과 골짜기가 띠를 두른 성곽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해가 뉘엿해지며 성곽 그림자가 길어지자, 산성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숙종은 환궁(還宮)을 서둘렀다.

조선 영조 초상화 [국립고궁박물관]

■ 군주(君主)의 울음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는 권신(權臣)들의 의견들을 조정하고 붕당(朋黨) 간의 암투를 조율해온 강한 왕, 경제를 일으키고 문물을 정비해 문화 조선의 기틀을 다진 임금, 신중하면서도 과감하게 정책을 추진해온 결기 있는 군주였다.

이런 영조가 북한산성 행궁을 찾아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울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1760년 8월 영조는 북한산성 행궁 외전에서 선왕(先王)의 자취를 찾으려는 듯 한참 동안 포진(鋪陳, 방석)을 만지며 울음을 삼키기를 반복했다.

이날 북한산성 행궁에서 부왕의 온기를 느끼는 순간, 영조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다.
숙종이 48년 전(1712년) 이곳 북한산성 행궁에 행차했을 때 앉았던 그 포진이었다. 영조의 모습을 바라보던 대신들도 숙연해했다.
영조는 왜 그토록 감정이 북받쳐 울었을까?

총관(摠管)의 지위로 부왕(父王)인 숙종을 모시고 이 행궁을 찾았던 당시 연잉군(延?君)으로 불렸던 영조의 나이는 열아홉.

영조에게 부왕 숙종은 아버지이자, 스승이었다. 영조는 연잉군 시절, 국왕 중심의 지배질서를 세우고 강한 나라를 일으키는데 필요한 안목과 통치술을 부왕 숙종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배웠다.
이날 영조의 울음은 그런 선왕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던 것으로 문헌에는 기록됐다.

고양 관성소지 및 상창지 기단 [고양시]

하루하루가 위태로웠던 연잉군 시절의 절박함과 아픔에 대한 기억 때문이기도 했다고 한다.
연잉군은 비록 왕자의 신분이었지만, 또한 궁녀의 하인으로까지 취급받던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1718)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은근한 멸시의 눈길과 목숨을 걸어야 했던 왕위 승계 다툼을 딛고 오른 왕좌였기에 부왕에 대한 그리움은 더 했다.

부왕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1701)의 아들로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붕당 세력과 연계된 후계 다툼은 그치지 않았다.
연잉군은 나이가 들면서 권력다툼의 중심으로 내몰리면서 다음 군주 자리를 두고 생존을 걸어야 하는 위치에 서 있었던 것이다.

부왕은 승하하기 3년 전에 "연잉군의 앞날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더 큰 빌미가 돼 왕세자가 경종(景宗, 1688~1724, 재위: 1720∼1724)으로 왕위에 오른 뒤에도 다음 왕권을 두고 목숨을 건 권력투쟁이 이어졌다.
결국 연잉군은 살아남았고, 경종이 후사 없이 재위 4년 만에 승하하지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그렇게 36년 군주의 세월이 흐르고, 이제 부왕과 함께 올랐던 그 북한산성을 다시 찾은 것이다.

슬픔을 가라 앉힌 영조는 선왕의 포진을 궤(櫃)에 넣어 간직하라고 이른 뒤, 성곽 관리와 군량미 보관 등 북한산성 관련 업무를 지시하고 처리해나갔다.
영조는 다시 강한 군주로 돌아왔고, 숙종의 뒤를 잇는 조선의 강한 군주로 기록됐다.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 경기도 기념물 제229호 지정 [일본 가큐슈인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소장 자료]

■ '경기도 기념물' 지정

고양시 덕양구 북한산성 내에 소재한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는 지난해 12월 경기도 기념물 제229호로 지정됐다.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는 북한산성이 축성된 다음 해인 1712년(숙종 38) 관성장(管城將)이 배치돼 산성을 비롯해 행궁, 3군영(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창고(호조창, 상창, 중창, 하창), 승영사찰(僧營寺刹) 등에 대한 관리와 운영을 전담했던 중앙의 관아시설이다.
국가 사적인 '북한산성 행궁지'와도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그동안 문화재 보호법 상 보존·관리받지 못했다가 2020년 6월에 공모사업을 통해 문화재청의 국비 100%를 지원받아 유적에 대한 시굴조사를 하게 됐다.

 

대청터 남쪽 측면 기단렬 (2020년 시굴조사) [고양시]

지난해 3월에는 보다 체계적인 보존·관리·활용 정책을 세우기 위해 경기도 문화재 지정을 추진해 약 8개월 만에 기념물로 새로 지정됐다.

김수현 고양시 학예사는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는 현재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서울)에 3군영 유적이 잔존하지 않는 상태에서 원형이 남아 있는 유일한 군영지(관아 및 창고지)"라며 "역사적·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며 북한산성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해 유산의 완전성을 증명해주는 자료로도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참고·인용: 『성(城)과 왕국』, 조윤민, -주류성-
사진: 문화재청·경기도 박물관·고양시
아시아 경제 라영철 기자


[한국의 명승명산] 백제 건국의 땅… 한국 등산의 메카 ‘북한산’
글·사진 박정원 선임기자기사 스크랩 이메일로 기사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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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1.11.30 09:31


[‘한국의 명승’ 명산 <11> 북한산]
조선시대 최고의 명산… 단위 면적당 등산객 세계 최고 기록도

삼각산이란 지명을 낳은 형상인 백운대(오론쪽)와 만경봉(중간), 그리고 인수봉(왼쪽)이 마치 삼각점처럼 우뚝 솟아 있다.

 

북한산北漢山(836.5m)은 역사적, 기록적, 현대적 의미로 한국 최고의 명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무 접근성이 좋아 사람들이 가끔 북한산의 무궁무진한 가치를 잊어버릴 때가 많은 것 같다.


먼저, 역사적으로는 일찌감치 〈삼국사기〉부터 등장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전국의 명산대천을 삼산오악으로 전략적으로 나눠 국가의 중요 제사를 지낼 때 금강산霜岳, 설악산 등과 함께 소사小祀 부아악負兒岳으로 지정됐다. 

 

삼국의 격전지는 주지의 사실이다. 백제가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가 끊임없이 침입을 하고, 신라가 영토 확장을 위해 호시탐탐 노린 삼국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려시대에는 개성으로 중심을 옮겼으나 한때 삼각산으로 천도를 검토했을 정도로 국가적 논란의 핵심에 있기도 했다.


〈고려사〉열전 우왕편에 ‘남경의 진산 삼각산은 화산으로서 목성을 가진 나라의 수도가 될 땅이니, 그곳을 수도로 삼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이 그 사실을 그대로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도읍으로 천하의 명당과 명산으로 자리매김했다.

서울의 서쪽을 남북으로 가르는 북한산(왼쪽 능선)과 도봉산 능선이 길게 펼쳐져 있다.

 

여러 문헌에 가장 많이 등장한 명산
기록적으로 삼각산은 문헌이나 고지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산으로 꼽힌다. 그만큼 기록할 가치가 많았다는 얘기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에는 풍수적으로, 국행제로, 명산 지정 등 다양한 주제로 소개된다.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지〉에 소개된 내용도 다른 명산의 분량을 압도한다. 조선 선비들의 〈유산록〉 중 북한산이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편에 속한다. 또한 고대부터 이름도 가장 많이 가진 산이다. 역사적으로 명산일수록 여러 지명을 가진 것으로 확인된다.


현대적 의미로는 한국 등산의 메카로 꼽힐 만큼 근대에는 산악인들이 암벽 루트를 개척했고, 현대 들어서는 인수봉과 더불어 주변 암봉들을 암벽 등반의 필수코스로 여겨 왔다. 지금까지 가장 많은 암벽루트명을 가진 봉우리가 바로 인수봉이다. 뿐만 아니라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산으로 1990년대부터 일찌감치 기네스북에 등재된 세계 기록을 보유한 명산이다. 또한 수도권 2,000만 시민들의 건강과 여가를 책임지고 해소하는 허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물론 많은 사람이 찾는 만큼 환경훼손도 심하지만 국립공원공단의 관리와 시민의식수준의 향상으로 보존상태가 날로 개선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산을 찾는 이유는 서울 어디서나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뛰어난 접근성과 더불어 산의 형세도 한반도 여느 산 못지않기 때문이다. 정상 백운대에 올라서면 확 트인 조망과 함께 사방팔방으로 늘어선 능선들의 빼어난 풍광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2020년에는 코로나가 전 세계를 뒤흔들 때 코로나블루에 빠진 사람들의 위안처로서 큰 역할을 했다. 모든 사람들이 여행을 가지 못하고 갑갑해할 때 북한산이 그나마 사람들의 탈출구가 됐다. 

 

한국의 모든 산에 등산객이 줄었지만 유독 북한산만 등산객이 오히려 증가했을 정도였다. 코로나가 없었던 2019년에 557만 명이 찾았지만 한창 극성이었던 2020년에는 전년보다 100만 명이나 증가한 656만 명이 찾은 것으로 집계됐다고 공단은 밝혔다. 역사적으로나, 기록적으로나, 명승적으로나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명불허전’ 명산 북한산이다.


조선시대 한반도의 경치가 뛰어난 명승지를 기록한 다섯 문헌 중 〈해좌명승〉을 제외한 〈동국산수기〉, 〈와유편〉, 〈팔선와유도〉, 〈청구남승도〉 네 문헌에서 삼각산을 명승지로 꼽을 정도였다.


현재 문화재보호법에서 ‘명승’을 ‘경치 좋은 곳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크고, 경관이 뛰어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명승을 지정하는 조건 가운데 하나가 ‘역사문화 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곳’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명승은 단순히 경치가 아름다운 장소를 넘어서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감상의 대상이 되어 역사문화적으로 정립된 승경지를 가리킨다.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비슷한 개념으로 명승으로 꼽았다.


따라서 북한산이 국가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건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지난 2003년 문화재청이 명승으로 지정하면서 밝힌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삼각산은 북한산의 중심으로 백운대白雲臺(836.5m), 인수봉仁壽峰(810.5m), 만경대萬鏡臺(787m)로 구성된다. 이들은 쥐라기에 생겨났으며, 여러 모양의 화강암 돔granite dome들이 수려하다. 산 사면의 경사는 70℃에 달하고, 백운대 정상에는 약 500㎡의 평평한 곳이 있어 등반객과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만경대의 옛 이름은 국망봉이며, 정상부의 산세가 불규칙하다. 고구려의 왕자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살펴본 곳이 삼각산이며, 무학대사가 조선의 수도 후보지를 찾아다닐 때 백운대와 만경대에 이르러 비봉에 오르니 비석에 “무학이 길을 잘못 들어 여기에 이른다”고 쓰여 있어 길을 바꾸어 내려가 궁성터(오늘의 경복궁)를 정하였던 곳이 바로 이 산이다. 

 

조선시대 김상헌이 병자호란 때 중국으로 끌려가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를 읊은 곳이기도 하다.’


산의 역사와 유래와 형승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만경봉(대)을 국망봉이라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북한산이란 지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북한산이란 지명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우뚝 솟은 인수봉과 주변 능선에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사진 C영상미디어


조선시대 명승 기록에도 가장 많이 언급
북한산에 대한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온다. 고구려본기에 ‘고구려 장군(왕이)이 말갈과 더불어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려고 횡악橫岳 아래에 나아가 주둔했는데 백제가 군사를 내어 역습하여 싸우므로 물러났다’는 내용이다. 북한산의 최초의 지명은 횡악이라는 얘기다. 왜 횡악이라고 했을까? 궁금해서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설명은 없었다.


얼마 전 아차산~용마산을 종주하면서 그 답을 어렴풋이 찾았다. 용마산 정상에 올라 북한산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래서 횡악이라고 했구나’가 바로 떠올랐다. 동쪽의 용마산에서 바라 본 북한산은 남북을 완전히 가로지르는 천혜의 요새 같았다. 당시 아차산과 용마산도 삼국의 격전지였다. 바로 한강을 지척에 두고 있기 때문에 최전방 방어와 공격의 진지였다. 아차산·용마산에서 발견되는 기와와 유물에서 ‘북한산성’이란 표기가 나와 일부 학자들은 당시 북한산은 현재 북한산이 아닌 아차산·용마산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단 다른 내용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만 요약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편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전략)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건대 이곳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니,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이 내려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비류는 듣지 않고… (후략)’

 

여기서 몇 가지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한산. 아직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지금의 북한산 일대, 즉 서울의 옛 지명이 한산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산의 유래도 여기서 나온다. 한산의 북쪽에 있는 산이라는 의미로 명명됐다는 설이다. 풍수적으로 산의 남쪽과 강의 북쪽은 양陽으로 봤다. 산과 강 사이에 있는 지역은 강을 우선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한수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한양이란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북한산과 한수가 한양이란 지명을 낳은 셈이다.

 

이어 나오는 부아악은 북한산을 가리킨다. 삼각산의 앞선 봉우리 인수봉과 뒤편에 있는 또 하나의 바위, 즉 백운대가 마치 아이를 업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명명됐다는 유래다. 한수는 위에서 잠시 언급했다시피 지금 한강을 가리킨다. 다른 이름은 광개토왕비에 아리수阿利水라고 소개한다. 지금 한강을 정수해서 수돗물로 사용하고 있는 바로 그 이름이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삼각산은 한성부 북쪽 15리에 있고, 백제에서는 부아악이라 했다. 또 횡악, 화산이라고도 불렀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시대에는 삼각산이나 북한산이란 지명을 찾아볼 수 없다. 이로 미뤄볼 때 북한산은 삼국시대까지 주로 횡악이나 부아악, 화산으로 불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북한산의 옛 지명 부아악이란 이름을 낳은 인수봉(앞쪽 봉우리)과 그 뒤로 백운대가 나란히 연결돼 있다.


조선까지 삼각산, 현대 들어서 북한산 지명 사용한 듯
고려시대 들어서도 삼각산이란 지명이 대세를 이룬다. 〈고려사〉 여러 곳에서 삼각산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하지만 횡악, 부아악, 화산이 왜 삼각산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 없다. 단지 널리 알려진 대로 정상 백운대, 인수봉, 만장봉 세 봉우리가 우뚝 솟아 멀리서 보면 마치 세 개의 산으로 이뤄진 듯 보인다 해서 삼각산으로 명명됐다는 설명이 가장 설득력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 북한산은 천하의 명산과 명당으로 자리매김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삼각산은 도성 밖 정북에 있으며 일명 화산이다. 신라 때는 부아악이라 일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악’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그 외 〈국조보감〉, 〈동국여지지〉 등에는 중악으로 소개한다. 

 

〈동국여지지〉 한성부에 대한 형승을 ‘한양은 북쪽으로 화산에 의지하고, 남쪽으로 한강을 앞에 두고 있으며, 토지가 평탄하게 펼쳐져 있어 백성은 많고 부유하며 번화하다’고 극찬하고 있다. 천혜의 요새라는 내용까지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에 ‘삼각산은 화산이라고도 하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이라고 했다. 평강현의 분수령에서 잇닿은 봉우리와 겹겹한 산봉우리가 높고 낮음이 있다.(※한북정맥의 한 봉우리를 풀어서 설명) 빙빙 둘러서 양주 서남쪽에 이르러 도봉산이 되고, 또 삼각산이 되니, 실은 경성의 진산이다.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온조가 남쪽으로 와서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찾았으니 바로 이 산이다. (후략)’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외에도 〈연려실기술〉, 〈동국여지비고〉와 〈성호전집〉 등 숱한 개인문집에서 북한산에 대한 내용을 빠지지 않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까지 대부분의 문헌과 고지도에서 삼각산이란 지명을 사용하고 있다. 북한산이란 지명은 조선 숙종 때 승군도총섭(지금 총사령관)을 지낸 승려 승능이 북한산성 축성기록과 연혁을 자세히 기술한 〈북한지〉에 북한산군과 북한산이란 지명이 여러 차례 언급된다. 

일제가 한반도 행정구역을 정리한 〈조선지지자료〉에도 삼각산으로 기록돼 있는 것으로 봐서 현대 들어서 북한산이란 지명을 널리 사용하게 된 것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북한산 등산로는 접근로가 너무 많아 일일이 언급하기 사실상 지면낭비다. 단 한 가지, 종주하기 위해선 불광동에서 출발해서 우이동으로 하산하거나 그 역으로 하는 게 일반적이다.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으로 등산객이 지나고 있다.
본 기사는 월간산 1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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