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의 바람

Kay 2021. 4. 6. 06:40

 

한적한 시골마을 대전(한밭)이 변모해서, 현재는 대전광역시가 되었다. 그 한적한 시골마을이 나름으로 번성(繁盛)하게 된 것에 대하여는 부동산은 만들어지는 것이다등 여러 설()이 있으나, 내가 아는 한 1905년 인가 철도의 발달에 의한 경주선 대전역()의 설립과 관련되었다는 유력하다. 이후, 1906년부터 초등학교가 설립되고, 1908대전우체국 전신취급소가 개소되었으며, 1914 호남선의 개통에 의해 서대전역(西大田驛) 설립되며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고, 1920 공장들이 늘어나며 점차 발전하며 1931년에는 중심에 수도(水道) 가로등이 설치되었다. 지금부터 100년전의 일인가?

 

그래서 나는 대전을 젊은 도시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곳에 조선말기(16~17세기,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에 정부의 관리(인조 시절)였다가 태자(광해군)가 청나라에 잡혀가는 상전도의 굴욕과 관련하여, ‘항전파였기에 16371차 은퇴한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 (1607 ~ 1689)’선생이 고향에 내려와 약 10년간 스스로를 다스리며(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치던 것을 기념하여 그 터(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지금의 대전광역시 가양동(대전IC 근처))1990년대 우암 사적공원(尤菴史蹟公園)’을 재현하였다고 한다. 삼배고구두례(三拜九叩頭禮)

 

삼배고구두례(三拜九叩頭禮) : 머리를 땅에 닿을 정도로 숙여서 세 번 절하는 것을 세 번 반복 즉 9번 절하는 항복의식

 

우암 사적공원(尤菴史蹟公園)’을 재현된 때가, 내가 차장(次長)인가 부장(部長)으로 한참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던 때로 생각되니, 제법 된 과거인 모양이다.

 

그런데, 2021329일 오후에 어느 승용차가 그 공원의 정문에 돌진하여 그것이 무너져 내렸으며, 승용차의 탑승자뿐 아니라 길가던 보행자도 다쳤다고 하니 안타깝기도 하다.

 

나는 우암 송시열 (1607 ~ 1689)’과 별다른 관계는 없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남한산성(南漢山城), 인조(仁祖), 정축하성((丁丑下城, 三田渡의 굴욕, 1637)50여년전 국사시간에 배운 단어들 이다.

대전광역시 _ 우암.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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