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의 바람

Kay 2019. 12. 1. 10:11

 

매우 매우 오래 전에 아프리카 대륙의 중부에서 발생하였다는 사람은 어떠한 이유인지 세상의 방

방곡곡으로 퍼졌고, 지금부터 약 10년 후에는 80억 명 이상이 되리라 한다.

 

그러한 사람들의 이동과 확산은 1.5만 년 ~ 2.5만 년 한반도의 북부에 까지 이르렀고, 나름의 (농경)

문화를 이루며 사회화되어 부족 또는 씨족사회로 정착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그렇게 이

동한 사람들의 일부가, 한반도의 남부에서 각 사회들의 연맹체로 구성/발전되었다 한다. (삼한 :

, 변한, 진한)

 

마한은 왕권이 강화되며 백제로 발전되었고, 진한은 신라라는 왕국이 되었는데, 변한은 가야로 되

었음에도 연맹체제를 강화하였을 뿐 단일 왕국으로 변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각체제의 영역을 구분하는 방법들 중의 하나가 강()이나 산맥(山脈)에 의하여 구분하는 것이다.

가야는 낙동강 유역의 서부애서 영산강 유역의 동부, 그리고 북으로는 남한강의 상류를 영역으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 (광주시 광산구 월계동의 가야 고분도, 영산강 영역이 가야의 영역에 속하였던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이웃의 여러 문화들이 교류되었는데, 20세기 초 일본은 일본의 문화가 한반도에 역류하

였을 가능성을 가설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한다, 강력한

일본의 막부가 한반도(가야)에 통치기관을 두고 다스렸다는 설)’을 제기하고, 일본 문화가 가야에

어떻게 영향하였는지를 알기 위하여 많은 고분들을 마구 파헤쳤고, 매장되어 있던 유품(문화재)

은 반출하였다 한다. (두 문화들간의 상관성은 입증되지 못하였다.)

 

이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한반도는 해방되고,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

였고, ‘재건운동이나 새마을운동만으로 피폐해진 삶을 부흥시키기는 어려웠고, 일부의 사람들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분들은 도굴하고, 그에서 얻어진 문화재를 밀반출하여 돈을 벌고, 삶을

유지하였는데, 그 주요 대상이 관리가 소홀한 가야(伽倻)의 고분들이었다고 한다.

 

20191128일 경남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古墳)군 내에서 도굴의 화를 입지 않았으리라 생각되는

63호분 덮개돌을 개방하자, 안쪽에 도굴꾼들이 사용하던 빨간 고무 버킷(속칭 바케쓰)’이 버젓이 드러

나 있었고, 무덤 입구 쪽에는 역시 흙이 묻은 빨간 고무대야빵 봉지(1960년대 말 ~ 1970년대 초

추정)’가 있었다고 한다.

 

부끄럽지만, 부인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나는, 이제라도 남아있는 소중한 문화재를 보호하고, 뿌리에 근거하여, 문제없이 잘 지켜지고, 건강

하게 발전하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함께 힘을 모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가야의 고분 _ 도굴.pptx


인류의 이동 _ 191130.pptx


 
 
 

서북의 바람

Kay 2019. 11. 28. 00:46

 

나는 오래 전 가야(伽倻)를 너무 듬성듬성 이해하였나 보다. 15백 년 전에 만들어진 술잔은,

부분으로 나뉘어 제작되었으며, 각 부분이 제작된 후에 접합/조립되었음을,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

재보존과학센터는 X선 컴퓨터단층촬영(CT)으로 살펴 알아내었다니 그렇다.

 

사업도 각 부분으로 나뉘고, 다시 조립하는 것이 일반적 방식이다.


어떤 한국출신 일본인은, ‘네마와시 (根回, ねまわし, Nemawashi)‘를 말하기도 한다. ‘네마와시 (根回, ねま

わし, Nemawashi)’, 큰 나무의 이식(移植)의 풍습에 기원한다고 하는데, 나무의 이식을 결정하면 그

나무를 이식하기 전 반년 또는 일년 전부터 이식할 곳의 나무의 주변에 웅덩이를 파고, 이식할 곳

의 토양을 채워 그에 적응하도록 하는 등 세세히 준비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후에 어떠한 변화를

추진하려고 할 때, 사전에 그와 관련한 여건을 사전에 세세하게 (조심스럽게) 준비하는 것을 뜻한다

고 한다.

 

조고(趙高, Chao Kao, BC209년 경)의 지록위마(指鹿爲馬)도 그러한 네마와시 (根回, ねまわし,

Nemawashi)’에 속하는 것일까?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사슴모양뿔잔이 그렇게 세세하게 (조심스럽게) 준비되

, 원통형 뿔잔·몸체 상부·몸체 하부·굽다리를 개별적으로 제작되어 접합/조립되었음을 알게 되었

다는 것이다.

 

영어 표현에 ‘Haste makes Waste’ 라는 것이 있다. ‘잘 나누고, 잘 붙여 하듯서두르지 말고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보천리(牛步千里)’ ‘호시우보(虎視牛步)’

 

가야의 유적.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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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유적.pptx  
   

 
 
 

서북의 바람

Kay 2019. 3. 25. 11:40

 

나는 역사(국사)학자가 아니다. 오래 전 가야(伽倻, 서기 1세기 경부터 6세기말 정도까지 존속)’라는 집단체가 있었다고 한다. 내가 그것을 나라라 부르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소국들의 동맹의 형태였다는 많은 설들 때문이다.

 

그것은 낙동강 西部(김해지역)로부터 점차 영역을 넓혔으며, 요즈음 발견되고 발굴되는 유적들로 미룬다면, 文化섬진강을 넘고, ‘영산강지역 (서해(西海)) 까지 도달한 것 같다.

 

그러한 영역의 확장에 대하여 임라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한반도의 남해안지역이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가야가 쇠퇴하는 시기)까지 일본에 의해 통치된 한 영역이었다는 설, 혹자는 그것을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이라 하기도 한다)’을 주장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은 그 시대의 지역(중국, 한국, 일본)내 활발한 문화교류였을 뿐, 지배/통치와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대마도를 경유하여 현재의 큐수(九州)의 후쿠오카(福岡, Fukuoka)지역에 존재하던 야마토 왜(大和倭, 3세기말 또는 4세기 초에서 7세기 초까지 번창)’를 경유하여 당시의 일본 수도권인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 까지 파급되어, 한국의 문화들은 교토(京都, Kyoto) 오사카(大阪) 등 관서지방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한편, 일본의 문화들은 한반도의 남부지방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하여튼,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나는 근접한 지역 내에서 상호 대립하기보다는 교류와 협력이 더 필요하리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 상대가 대립과 투쟁을 원한다면, 구태여 그것을 피할 필요는 없다. 교류와 협력은 상호 존중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상호존중이 없으면, 그것은 굴종(屈從)이 되기 때문이다.

 

 

문화의 교류.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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