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남침을 한 북한군은 1950년 6월 29일 서울을 함락시키고 계속 남침을 하여 한국이 부산의 근처(경상남도) 만을 유지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이에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은 그들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하여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하도록 작전을 펼치었고 (1950년 9월 15일부터 18일), 이에 연합군과 국군은 북한군을 좇으며 그 해 내에 전쟁을 마감 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북으로 전진하였다.
그러한 와중에 1950년 10월 25일 창설된 9사단(사단 : 서울, 28연대 : 대전, 29연대 : 공주, 30연대 : 청주)은 보급선이 차단되어 북으로 패주하는 북한군의 패잔병을 토벌하며 좇는 것을 주 임무로 활동하면서 태백산맥을 따라 강원도 인제군까지 이동하였는데, 창설된 9사단의 초기 표식은 원(圓)안에 어떤 형상을 가진 것 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 형상이 어떤 보석(루비)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 형상이 육군의 전투부대(연대)를 의미하는 (세 개의) ‘칼’이라고 말한다. 글쎄? 보석(寶石)과 군(軍)은 별로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9사단은 ‘인제(麟蹄)지구 전투’와 ‘현리(縣里) 전투’로 승패를 겪으며 결국 1952년 10월 6일에서 10월 15일 철원군 395고지(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중공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승전하였다. 1952년 10월 14일 백마고지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상승백마(常勝白馬 : 항상 이기는 백마)라는 표현으로 그 전투에 참여한 9사단을 치하하였고, 그로 인하여 그 부대는 백마부대라는 애칭(愛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전투가 치열해지면, 부상자도 늘고, 상이군인(傷痍軍人)도 늘어난다. 내가 어렸을 적 많은 상이군인들이 있었다. 야간열차를 탔을 때, 그들의 무용담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고, 내 국민학교 졸업반 담임선생님도 상이군인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