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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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사순 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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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한국 공동체/강론방

2013. 3. 3.

 

사순 제3주일 다해 2013-03-03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다 하느님의 소유, 하느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표현대로라면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포도밭에 심겨진 무화과 나무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은 서로 다르죠. 마치 포도 나무와 무화과 나무가 서로 다른 것처럼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서로 다르다고 인간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시고 당신보다 격이 한참 떨어진다고 우리를 내팽개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 안으로 우리를 초대해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당신을 땅으로 내어주십니다. 그리고 지극한 관심과 애정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살펴주고 계십니다. 나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 이유는 당신의 것을 나에게 다 주시기 위함이고 나를 당신 안에 심으신 이유는 나를 당신처럼 만들어 주기 위함입니다. 포도밭에 심겨진 무화과 나무란 존재는 그런 존재입니다.

 

포도밭의 주인은 3년째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합니다. 그냥 건성으로 찾는 것도 아니고, ‘네가 그럼 그렇지하는 마음으로 찾는 것도 아닙니다. 그 나무에 열매가 맺어있기를 학수고대하는 마음으로, 행여 그 나무에 열매가 안 맺어있으면 어떻게 하나, 하며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무화과 나무를 살피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관대함은 끝이 없지만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시간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현세의 시간 동안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보내진 이유는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이 세상의 시간은 하느님께서 나를 살리시기 위해, 나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해 베풀어주시는 선물과도 같은 시간입니다. 축복 받은 시간이고 감사해야 할 시간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끝이 날 시간이고 생각보다 그 끝은 빨리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화과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란 존재가 그만큼 무지하고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란 열매가 얼마나 좋고 귀한 것인지 모를 만큼 무지하고, 하느님의 땅에 심겨져서도 하느님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란 껍질이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뿌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거부하고 있기에 하느님을 열매 맺지 못하고 있는 거고 이렇게 하느님을 거절하는 이유는 하느님이란 열매보다 다른 열매들에게 내가 더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이란 열매를 맺고 싶어하고 남을 지배하고 장악할 수 있는 의 열매를 추구하고 남들로부터 칭찬 받고 인정 받을 수 있는 명예의 열매를 원하고 있는 한 하느님이란 열매는 맛없어 보이고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늘 차선의 선택이 되고 필수가 아닌 옵션으로 있는 한 우리는 하느님을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땅에 심겨지고 하느님으로부터 각별한 보살핌을 받는다고 다 자동적으로 하느님을 열매 맺는 것이 아니죠.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사람들에게 말한 것처럼 그들의 조상들은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와 하나가 되었고, 모두 똑같이 영적 음식을 먹고 영적 음료를 마셨는데도 그들은 생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례 받고 성당에 다니고 수도원에 머물고 여러 단체에서 봉사하고 수도생활하고 미사에 참여해 영적 음식과 영적 음료를 먹고 마신다 해도 그 자체가 우리에게 하느님의 열매를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겉모습은 하느님 소속으로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뿌리가 하느님 안에 뿌리내리지 않고 세상에 뿌리내리고 있다면 당연히 우리는 세상의 열매만을 거둘 뿐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좋은 얘기 많이 듣고 신자 생활 열심히 해도 내 마음의 뿌리 저 깊은 곳으로부터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의 삶을 거절하고 있다면 우리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로 남을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삶으로 초대해주시고 당신의 것을 아낌없이 주신다 해도 그 초대에 응답하고 하느님 안에 뿌리내리는 일, 하느님을 뿌리깊게 받아들이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 각자의 결정과 결심에 달린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의 조건과 기회들을 마련해주실 수는 있지만 회개하고 말고는 우리 각자에게 달려있고 그 결과 역시 우리 각자가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을 하기를 결정하고 결심해야만 합니다. 마음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가만 있는데 그냥 마음이 불러 일으켜지지는 않습니다. 마음을 불러 일으켜야만 할 이유가 생기고 그러한 이유들에게 대해 내가 내적으로 마음 깊이 동의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일으킬만한 이유는 내가 무엇인가를 보았을 때 생깁니다.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서야 보았을 때, 그간 건성으로 보던 것을 이제서야 제대로 보게 될 때 마음을 고쳐먹을 이유들이 생기게 되는 거죠. 바라 봄 <성찰> <통찰>입니다. <성찰> <통찰>이 얼마나 진지하고 얼마나 절절한가에 따라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힘이 달라지고 그 행함이 좌우됩니다.

 

나에게 주워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나는 어떤 나무이고 내가 맺고 있는 열매는 과연 무엇일까? 열매가 맺어있기는 한가? 나는 <하느님> <세상> 사이에서 어디에 진짜 뿌리를 두고 있는가? 세상 논리보다 하느님의 삶이 정말로 더 가치 있고 옳다고 믿고 있나?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축복 받은 삶이 아니라 손해 보는 삶이라고 억울해 하고 있지는 않나? 나는 정말로 하느님을 열매 맺고 싶어 하는가?

 

이런 것들을 얼마나 솔직하고 선명하게 대면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마음 일으키기>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또 바라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노심초사하시고 안달복달하시고 고분 분투하시는 <하느님>이시죠. 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애가 타서 매일매일 나를 위해 죽어 거름이 되어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를 열매 맺는 무화과 나무가 되게 하시려는 거죠. <하느님>이 보이는 만큼, 딱 그 만큼만 우리는 회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