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공식 누리집 입니다.

안토니오 다 바르가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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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베르나르도 똘로메이/몬테 올리베또 연합회 영성

2013. 2. 22.

Antonio da Barga, CHRONICON MONTIS OLIVETI (抄譯)


 

 

저자의 머리말

1. 수도승 안토니오다 바르가가 그리스도 안에 한량없이사랑하는 아들 요한 데 마르카 노바에게 인사합니다.

 

작년에 제가 아빠스님을 수행하여 (수도원) 방문차 베네토 지방에 갈 때, 플라미니아 지방에서 그대를 위해 제가 쓴 책 한 권을 들고 갔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토스카나 사람들의 출신지인 토스카나 지방의 길이와 넓이에 대해 묘사해 보았습니다. 토스카나 사람들의 풍속과 그들의 전쟁 - 이 때문에 이들을 토스카나 사람들이라고 부르거니와 -, 그리고 그들의 종교 의례에 대한 책이었지요. 그리고 배운 데 없고 경험도 부족한 제가 펴낸 이 책은 그대와 요한 데 프라토의 (정신의) 위대함의 후의를 입었습니다. 요한 데 프라토는, 그대도 아시듯이, 파도바 시에 도착하여 민법을 가르쳤고, 그대도 거기서 철학을 읽었습니다(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두분 다 제게 우리 수도회의 기원이 어디 있는지를 물어 왔지요. (그런데 같은 것을) 우리 수도회의여러 어른들과 형제들(도)patres et fratres 알고 싶어 했습니다.

 

이리하여, 그대와 다른 여러 친구들을 위해, 순시자visitator의 소임에서 물러나 다시 사랑하는 프라토의 고독으로 돌아온 이제, 우리(회의) 거룩한 수도 생활의 기원이 어떠했으며, 어떤 분이 첫번째 창설자였고, 또 그러한 수행의 생활을 착수하도록 (성령의) 거룩한 바람이 그에게(창설자에게) 동료로 붙여준 이들이 어떤 분들인가를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quam alma nostra religio, habuit originem, quisve huius primus extitit fundator, quosque ei socios ad tanti exercitii opus incoandum, divina concessit afflatio,intimare censuimus. 방금 말씀드린분들은 (한편으로) 놀라운 환시를 겪은 분들이어서, 우리는 (이 환시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지나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들은 또한 아레쪼의 주교에 의해 흰 수도복을 받아 입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수도원을 지었던 장소가 이 주교의 교구 관할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뒤에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 시기에 교회를 이끌던 각 교황님들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교황께서 우리 수도회(의 인준을) 확인해 주셨는지에 대해서도 (이 책에서) 썼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들의 기억을 영구히 이어가기 위해, 지금 우리 수도회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밝혀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 시대까지의 (총)아빠스들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 그 가장 중요한 행적들과함께 이야기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쓴 것은, 일부는 몬떼 올리베또의 문서실에서 (그 근거를) 얻은 것이고, 또 일부는 노수사(老修士)님들에게서 얻어 들은 것이며, 다른 어떤 것들은 눈으로 직접 본 것들입니다.

만일 삶이 따라 준다면(충분히 살 시간이 허락된다면si vita nobis comes fuerit) 우리는 분명히 다른 책을 한 권 더 써서, 우리 수도회가 키워낸 유명한 인물들의 행장(行狀)과 그들이 행한 기적들에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펴낸 지혜로 풍부한 책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 참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plicit epistola vel prologus.

 

 

 

연대기

 

몬떼 올리베또 수도회의 발전에 대해 같은 회의 서원자인 안토니오 다 바르가 형제가 편찬한 책 혹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narrationis sermo의 시작.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2. 토스카나 지방 시에나 시에 베르나르도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다 바르가의 연대기(이하 ChBa로 약칭)는 여기서 시에나를 떠난 후에 요한에서 베르나르도로 개명(改名)한 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상서관 연대기 A>(이하 ChCa로 약칭) 19와 각주 1, ROCHER p.368 참조. 삶으로(가문으로) 고귀하였으나 그 행실로 더욱 고귀하였던 그는 똘로메이 가문 똘로메이 가문은 시에나에서 가장 부유하고 세력이 큰 귀족 문중들 중 하나였다. 주로 프랑스와의 무역에서재산을 일으켰을 것으로 짐작된다. 의 미노 님의 자제였으며, 두말 할 나위 없이 뛰어난 기사요 박사 miles atque doctor eximus였다.

 

성령의 영감으로divino afflatus Spiritu, 그리고 격렬한 내적 열정에 사로잡혀 시에나 사람들인 고귀한(귀족 가문의) 친구들 빠뜨리찌가의 빠뜨리찌오 빠뜨리찌오의 부친은 1288년 시에나 공국의 최고위직에서 다스렸다. 및 프란체스코 안토니오 다 바르가 만이 베르나르도와 같이 시에나를 떠난 사람으로 프란체스코를 다른 두 동료와 함께 거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출신 가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올리베따노 전통은 이후 이분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이분이 다른 두분 처럼 총 아빠스가되지 않으셔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암브로지오 암브로시오는 13세기에 매우 세력을 떨쳤던 ‘삐꼴로미니’ (상업 회사)의 경영주이던 삐꼴로미니 가문 출신.와 함께 살면서 밤낮으로 천상 것을 열망하였다. 그들은 함께 세상의 하찮음(하찮은 것들nugis secularibus)에 – 하찮은 세상사에 – 등을 돌리고alienantes 뇌성벽력의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전심 전력을 다 하였다 이렇듯 몬떼 올리베또의 창설자들은 연대기의 시작에서부터 이후로도 줄곧 함께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올리베따노 영성의 한 큰 특징인 ‘친교의 의지’의 첫번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cf. ChF p.52의 각주 4와 <신뢰 서약서AdC> p.101이하. 한편, "뇌성 벽력의 하느님Deo tonanti"이란 표현은 욥기 37,5의 tonavit Dominus in voce sua mirabiliter의 암시이다. .

 

그러나 이러한 항구한 노력을 하면서 같은 시민들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에, 그들은 한적한 곳으로 물러났다. 뱀과 함께 사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귀족인 베르나르도는 시에나의 들판에 매우 아름다운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시로부터 약 15마일 떨어진 이곳에는 통상 아꼬나라고 불리는 아주 작은 촌락이 있었는데, 물론 아레쪼 교구에 소속되어 있었다. 여기서 그는 흙집을 하나 세웠는데 이것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아꼬나에서의 수도승 생활의 시작

3. 이리하여 사람이 되신 말씀의 탄생 이후 제 1313년에위에서 말한 하느님께 사랑받는 세 사람은 필요한 물품과 책들을 들고서 하느님을 열심히 섬기기 위해 위에서 말한 장소로 갔던 것이다 쟝 르끌레르는 수도승들이 제 손으로 일하여 먹고 산 이유가 "정확히 그들의 삶이 엄격하게관상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여러 (중세) 수도승 성인전들이 강조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Cf. Etude sur le vocqbulqire ,onqstiaue duAge, Roma 1961, p.105.. 그들은 또한 사도의 모범을 따라(cf. 1고린 4,12) 손수 일하여 필요한 먹거리를 장만하였다. 그런데 세련된 사람들이요 또 에집트에서 갓 나온 것과도 같았던 이들에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한편으로는 베르나르도의 작은 소유물(지)들로부터 얻어 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손 노동으로 얻어 내었던 것이다. 조금 지난 후에는 세속의 복장을 벗어 버리고 더 품위있는 옷을 (수도복을) 입었다. 신발도 벗어 버리고 나막신을 신었다. 이렇게 가난을 더 잘 실천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들은 열심히 기도했으며 대단히 깊은 침묵을 지키면서 하느님께 찬양 드리는 일에 열정적이었다. 그들은 몸소 건축한 경당에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훌륭히 경신례cultum divinum를 거행하였다 하느님의 일Opus Dei의 거행에 대한 배려는 올리베따노 초기 문헌들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 중 하나로서, 깊은 ‘전례적 영성’의 표현이다. Cf. ChF의 해제 p.38-43과 ChBa 21.. 사실상 하느님께 사랑받던 베르나르도는 보통 학식을 지닌 분이 아니셨고, 영성적이고 인문적인 지식의 향을 풍기는 그분의 편지들은 아직 그 수도원에 보관되어있다 이 편지들의 친저성(親箸性)은 B. Mattoscio, "The Letters of Blessed Bernard Tolomei : a study", in Saggi e ricerche nel VII centenario della nascita del B. Bernardo Tolomei(1272-1972), Monte Oliveto Maggiore 1972, p.85-105에서 확인된 바 있다. 복자 편지에 대해서는 이 외에도 다음의 글들을 참조할 것 : J. Leclercq, "pour un portrait spirituel du Bx. Bernard Toloméi", ibidem, 11-12 ; E. Porcelloni, "Testimonianza monastica nell’epistolario del Beato Bernardo", in L’Ulivo 9(1979) n.2 12-18 ; G. Palmerini, "Brevi note sulle lettere de B. Bernardo Tolomei", in L’Ulivo 8(1978) n. 3, 43-45 ; 이태리어 번역으로 A. Donatelli, Giovanni Bernardo Tolomei Padre e Maestro dei monaci, Siena 1977, 93-181이 있다.

 

 그분은 자신들을 위해, 알고 지내고 열심하던 사제들로 하여금, 내가 눈으로 직접 본 그 경당에서 거룩한 신비들(미사)을 거행하게 하였다. 이분들의 경건한 생활에 대한 평판은 즉시 도처로 퍼져 나갔기에, 귀족 출신이나 그렇지 못하거나를 막론하고 많은 토스카나 사람들이 이 세상의 즐거움을 모두 버리고 그들의 어려운 삶을 애써 본받으려고 (그들과) 합류하였다 몬떼 올리베또의 창설자들의 이러한 공동체 생활에 대한 기록은, 후대의 복자 전기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이 은수생활이라는 최초 단계를 거쳤다는 이야기가근거없다는 점을 일러 준다..

 

조사

4. 이어서, (당시의) 요한 교황께서, (교회법으로) 인준된 장엄 서원을 하지 않은 채로는 누구라도 수도복을 입고 모여서 살지 못하도록 조사를 하도록 명하여 (그 조사가) 시에나 지역에 이르렀을 때, 삶의 형태로 고귀하지만 신앙과 거룩함으로 더 고귀한 (어떤) 베르나르도와 그 동료들이 살고 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을 본 이 조사관은 그들에게 경의를 표했고, 가톨릭 교회의 으뜸이신 분의 명에 순명할 것을 호의로써 권장하였다.

 

첫번째 주교 방문

5. 위에 말한 사부들은 해야 할 일에 대해 상의하기위해 가능한 한 빨리 아레쪼의 주교를 방문했다. 주교는 그들의 열망을 (알고)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이제 여러분은세상에 등을 돌렸으니, 분별에 뛰어나고표현에 명쾌한 공경하올 사부 베네딕도의 규칙서보다 더 경건한 열망에 맞갖으며 더 거룩하고 더 실증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출신 시의 시민들이 동정녀의 보호와 깃발 아래 (유달리 구별되어) 있음을 자랑하고 있으므로et cum vestri concives titulo Virginis insigniti glorientur, 이 영광스런어머니의 지극히 순결한 동정성 때문에, 여러분들이 내면에서 내면에 비밀스레) 즐기고 있는 순결함이 외양으로도 드러나도록 하기 위하여, 흰 수도복을 입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사료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의심할 수 없는 <창설 인가서Charta Fundationis>에서 명확히 보듯, 성 베네딕도의 규칙서와 흰 수도복을 채택한 것은 복자 베르나르도와 그 동료들이며, 주교는 이를 허락해 주었을 따름이다. Intr,ChF p.34와 각주 2, p.246을 보라. 그리고 그들을 흰 옷으로 장엄하게 입히고 규칙서를 부여한 후, 주교는 자신의 대표자들로 하여금 몬떼 올리베또에서 성당 건축을 위한 첫 (머리)돌이 서도록 하고 (이것이) 공증인을 통하여 문서로 기록되도록 명하였다.

 

계단의 환시

6. 그런데 (이런 일이 있기) 조금 전에, (우리에게) 거룩한 기억으로 남아 계신bone memorie prelibatus Bernardus 베르나르도께서는, 현재 성당이 있는 곳에서 기도하시던 중에 하느님의 계시로 은으로 된 계단을 보셨다.

 

이 계단은 동쪽으로 향해 있었으며하늘에 닿아 있었다. 그 꼭데기에는 주 예수님께서 당신 모친이신 복되신 마리아님과 함께 빛나는 흰 옷을 입고 서 계신 것이 보였다. 마리아님은 가슴에 놀랄 만큼 아름다운 별을 달고 계셨다. 많은 수도자들이 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천사들은 또 내려오고 있었는데, 이들 모두 흰 옷을 입고 있었다.

 

베르나르도께서는 이를 보시고 즉시 형제들을부르시어 이 환시를 보여 주셨다. 형제들은 이를 보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다. 사료들이 이 환시에 대해 일관된 증언을 해 주고 있음은 이 사건의 진정성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안토니오는 다른 형제들도 이 환시의 증인으로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것이 다른 사료와 다른 점이다. 복자의 편지 하나에도(7) 그가 한 또다른 환시의 체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A. Donatelli, ibidem, 107 참조). 안토니오의 엄격한 서술 방식이나 특이한 일들에 대한 극히 절제된 표현 등을 감안한다면, 그가 근거도 확인하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 환시가 미래의 일들에 대한 큰 전조(前兆)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사실, 후에 사실로 확인된 바이거니와, 많은 이들이 같은 계단을 통하여 하늘로 올라갔던 것이다. 하느님의 천사들이라는 말은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도우심이라고 해석함이 옳을 것이요, 계단은 아름다운 삶의 무구(無垢)함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거룩히 살진대, (이런 우리에게) 이승의 삶이 하늘로 딛고 올라가는 계단과 같은 것이 아니라면 또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주님께서도 계단의 꼭데기에 서 계신 것으로 나타나신 것이니, 이는 그분께서하늘 나라를 위해 분투하는 이들을 돕기 위한 준비를 늘 갖추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서있다 함은 싸우는 이나 돕는 이 특유의 자세이다. 그리고 싸우는 이는 끊임없이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환시의 상징이나 흰 수도복의 상징에 대한 설명은 사실 베르나르도 자신의 강론이 반영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Intr.ChBa 222이하를 보라.

 

흰 수도복

7. 이 (일이 있고난) 후 그들은, 회의를 거쳐서inito consilio, 흰 색의 수도복을 입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대로 실행하였다. 이 이야기와 위의 ChBa 5에서 한 이야기(주교가 RB와 흰 수도복을 권유했다는 이야기)는 서로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이것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 아마도, 다 바르가가 두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 이전부터 이 주제에 관해 입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이 두 가지였기 때문이라고 추정해야 하리라. 어떻든 이미 말했듯이 ChF가 우리로 하여금 어느 이야기가 맞는 것인지를 쉽게 가려낼 수 있도록 해 준다. 흰 색이라면 보통 순결을 뜻한다고 제대로 알아듣는다.

 

그래서 솔로몬도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 "언제나 네 옷을 희게(깨끗하게) (손질) 하라"(전도 9,8). 요한 역시 묵시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 "흰 옷을 입은 스물 네 장로를 보았다." 리까르두스(성 빅토르의)에 따르면 이들은 신구약의 아버지들(족장들, 사부들?)과 개선하며 싸우는 교회의 영광을 뜻한다. Cf. Richard de Saint Victor, In Apocalypsim, liv.2, ch.1. PL 196, 747B/749B. 또한 선택된 만 이천명을 두고도 "이들 모두는 흰 옷을 입고 손에 빨마 가지를 들고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흰 옷이 영혼의 순결이 아니라면다른 무엇을 뜻하겠는가? 한편 빨마라 함은 전장에서 승리하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이들에게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귀양살이의 전투를 끝내고 승리자로 조국에, 즉 천국에 돌아오는 이들은 주님께로부터 영원한 승리의 빨마를 얻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실상 사람의 이승 살이는 일종의 군복무에 비길 수 있다. 이런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 "승리한 이는 이런 옷을 입게 되리라."(묵시 3,5) 또 다른 곳에서는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걷게 되리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묵시 3,4) 사실 주님의 부활을 알리러 왔던 천사들 역시 흰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음을 상기하면 이는 더욱 믿을 만한 이야기이다. 뿐 아니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때에도 그분의 옷이 눈과 같이 희게 빛났다고 했다.

 

그러기에, 모든 점에서 공경할 시인 꼴루쵸 살루따띠 1331년에 태어나서 1406년에 죽은 이탈리아 인문주의 문필가로 당대 이탈리아 문화계에깊은 영향을 미쳤다. 까말돌리 수도승들을 두고 쓴 <세상과 수도원De seculo et religione>이란 시집 제 2권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던 것이다 : "너도 (나름으로) 이 흰 옷들에 대해 생각해 보라cogita tecum …. 이 (옷)들은 순결의 강한 끈으로 너를 동여 주지 않는가." 나는 나름대로 자주 이 흰 옷에 대해 생각하면서, 성모님께 돈독한 신심을 지니셨던지극히 거룩한 아버지 (성) 베르나르도와 그대의 성 로무알도께서 하늘스런 계시로 흰 옷을 입은 수도자들이 천국의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셨다는 사실에 경탄하게 된다. 안토니오 다 바르가는여기서 까말돌리 수족의 창설자 성 로무알도(+1027경)에게 생겼다고 은수자 예로니모가 전한 바 있는 일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느날 로무알도는 은수처를 찾으려 아펜니노 산으로 갔다가, 어떤 샘 옆에서 잠이 들었다. 꿈에서 그는 옛날 성조 야곱이 그랬듯이 바닥이 땅에 닿고 꼭데기가 하늘에 닿는 계단을 보았다. 그는 이 계단을 통해 흰 옷을 입은 그의 수도자들이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예로니모, <Vita S. Romunaldi>, AASS Febr., II, p.137A. 그레고리오 펭코의 한 아티클(수도승 전통에서 계단의 환시에 대한)도 참조할 것.

사실 흰 색은 수도 생활에 더없이 적합한 것이니, 그 얼마만한 순결무구함과 그 얼마만한 열심으로 우리가 우리 삶의 순간들을 보내야 할 것인지 늘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물론 검은 색 역시 큰 신비의 힘을 품고 있다. 그것은 사실 겸손과 포기의 상태뿐 만 아니라nec non humilitatis, abiectionisque statum prefigurat 사실 보속의 고통이나 우리 (이승의) 귀양살이의 슬픔을 예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흰 색은 이보다 좀 더 큰 무엇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이승의 삶과 저승에서 누릴 생명이 지닌 찬란한 빛을 동시에 상징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초대 교회에서 모든 새 영세자들이 흰 옷을 입었던 것이다. 흰 수도복의 상징이 지닌 풍요로운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겠다 : 1) 마음의 순결 2) 종말론적 의미(묵시록의 선택된 이들) 3) 거룩한 변모, 부활 그리고 승천의 신비를 상기시킨다 4) 성모님 공경 5) 세례의 삶

 

두번째 주교 방문. 창설 인가서

8. 이야기가 옆길로 좀 샜으니 이제 다시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수도복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저 하느님의 사람들은 위에 말한 아레쪼 시의 주교에게 다시 가서 정중하게 모셔졌다. 그들은 방문의 이유를 알리고 그들의 완전한 장엄 서원을 받아 줄 것을 간곡히 청원하였다.

 

 

그는 이 경건한 원의를 기꺼이 받아 들여 주교좌 성당에서 구세주의신비들을(미사를) 장엄하게 거행한 후, 아레쪼 교구 삿소(수도원)의 아빠스인 요한 이 수도승으로부터 흰 수도복을 받아 입었다는 기록이 올리베따노 수도승들과 까말돌리 수도승들 사이에 있었던 한때 떠들썩했던 논쟁의 시발점이다. 어떤 이는 사실, 이 요한이라는 이는 까말돌리 회원으로서 그가 올리베따노 창설자들에게 자기 수도회의 수도복을 입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을 보자면, 까말돌리 회원들은 1414년에나 가서야 사소 수도원을 접수했고, 그 이전에는흑의의 베네딕도 회원들이 거기 살았다. P. Lugano, Origini e primordi dell’Ordine di Monteoliveto 1313-1450, Abbazia Settignano, Firenze 1903, 93-94 참조.이라는 분을 불러와 그를 대신하여서원을 하도록 명하였다. 이것은 말씀의 강생 후 정확히 제 2 회계기의indictione secunda 1319년 3월 26일에 생긴 일이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일은 성 밖에 위치한 성 삼위일체 성당에서 생긴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다른 사료들을 종합하여 판단하건대, 정확한 장소는 "성밖의 성 삼위일체 성당"이었다. P. Lugano, 88이하 참조.

 

 

이때 교회를 다스리시던 이는 교황 요한 22세이셨다. 한편 위에 말한 주교는 피에트라말라의 귀도님 이었는데 마음이 넓고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었다. 이 일들이 있고 난 후 그는 우리 사부들이 거처하시던 곳으로 다시 돌아올 때 (그들과 함께) 아레쪼의 성 삼위일체 성당의 담당 사제cappellanus 레스타우로 신부를 함께 보내어 성당이 세워져야 할 장소를 정하게 하였다. 지혜로운 사람이었던 그는 기껍고도 충실히 명을 이행하여, 기초의 첫번째 돌을 몸소 놓고 강복할 때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그 충실한 증언으로, 이 모든 일들에 함께 있었던 아레쪼의 공증인 과르디노씨가 문서로 (공증을) 작성하였는데, 수도회(가 창설 때에 받은) 특전들이 보관되어 있는 궤 속에 아직 그 사본이 한부 남아 전한다.

 

요컨대 <연대기>에 따르면 우리 사부들은 다음과 같이 두 번에 걸쳐 주교를 방문했다 :

 

 

첫번째 방문 : ㄱ) 주교가 그들에게RB와 흰 수도복을 권유하면서 인준을 선포 ㄴ) 흰 수도복과 RB의 채택 ㄷ) 초석을 놓기 위해 몬떼 올리베또로 대리인을 보내다 ㄹ) 공증으로 남기다.

 

두번째 방문 : ㄱ) 사부들의 장엄 서원 ㄴ) 사쏘의 요한 아빠스가 주교의 이름으로 장엄 서원을 받다 ㄷ) 레스타우로 신부가 주교를 대리하여 몬떼 올리베또 성당 부지를 선정하고 초석을 놓도록 위임을 받다 ㄹ) 아레쪼의 공증인 과르디노가 이를 문서로 공증하다.

 

사실 우리는 <창설 인가서>를 통하여 흰 수도복을 입고 서원을 발한 것이 같은 날 같은 예식 중에 생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 몬떼 올리베또 성당 초석에 관한 이야기가 이중으로 등장하는 것도 눈길을 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 일들을 확인해 줄 사료는 <창설 인가서> 하나 뿐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주교 방문이 두번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을까? 아마도 안토니오는 주교가 규칙서와 흰 수도복을 선정해 주었다는한 전승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결국 첫번째 방문의 목적이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이 첫번 방문 중에 규칙서와 흰 수도복을 받아 들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보았듯, <창설 인가서>를 주의깊게분석해 보면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 결국, 두번째 방문 만이 역사적으로 확실한 것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 밖에 없다.

 

이 성당은 현재의 성당 가까운, 현재 형제들의 묘가 있는 곳에 기초되고 축조되었다. 우리는 아직 완전히 허물어 지기 전에 이 성당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았다.

 

장소의 묘사와 몬떼 올리베또라는 이름에 대한 설명

9. 이제 원하신다면 장소를 묘사해 볼까 한다. 이곳은 숲이 매우 깊은 곳이며, 주위가 커다란 바위와 절벽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더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오는 길이 아니면) 그곳으로 가는 길은 없다. 이 때문에 여기에 성채(요새)로 쓰일 수 있는 건물이 하나 있다. 이 건물을 통하지 않고서는 (수도원이 있는) 장소로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 이곳에는 필요한 모든 먹거리들이 보관되어 있는 작지 않은 규모의 광이 있다. 같은 이 장소에는 사실상 모든 종류의 과일과 채소가 풍성하다. 나무들과 숲들이 주위로 우거져서, 여기 사는 이들에게 많은 양의 땔감을 제공해 준다. 여기에는 올리브 밭도 넓은데, 이 (올리브라는) 말로부터 산의 이름이 유래하였다. 사실 (이곳을) 올리브 산Mons Oliveti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보통 기도에 열중하시고 앉으셔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정녕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다른 많은 신비들을 행하시던 그 (성서의) 올리브 산과는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산은 (성서의 올리브 산과 관계된) 그것들의 어떤 면을 자신 안에 갖추고 있는 듯 하다. 몬떼 올리베또라는 이름에 대해서는G. Picasso, "Il nome di Monte Oliveto", in Saggi e ricerche nel VII centenario…, Monte Oliveto Maggiore 1972, 107-111을 보라. 사실 많은 덕행들의 풍성함, 즉 겸손과 애덕, 순명과 정결 등, 지금으로서는 짧게 줄이기 위해 말하지 아니하고 지나갈 수 밖에 없는 다른 많은 덕행들이 있는 것이다. 사실상, 의심할 나위 없이, 주님께서는 한때 에집트와 테바이데에서 그러하셨듯이, 오늘날 당신의 종들에게 그러한 장소를 선사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께 영광을 드리고 당신을 섬기도록 하셨다고 믿어야 한다. (바로) 이 (장소) 한 가운데에서 우리 사부님들은 이마에 땀을 흘리시며 대단히 아름다운 수도원과 성당을 지으셨던 것이다.

 

초창기 수도승들의 수도승 규율 준수

10. 오늘날까지도 (그 곳에서) 얼마나 엄격하게규칙 준수가 실행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어떤 열정으로 좋은 수도승들이 덕행의 정상에 도달하려고 애썼는지에 대해서, 우리 이야기는 충분히 전해줄 수 없다.

 

사실 그들은 얼마나 기도에 열심했던지, 복된 마르띠노에 대해서 전하는 다음의 말을 비록 꼭 같은 모양으로는 아니지만 얼마든지 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 "그들은 기도로 불굴인 영혼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invictum ab oratione spiritum non relaxabant." Cf. Sulpice Sévère, Vie de saint Martin, ed. J. Fontaine, t. 342, Sources chrétiennes 133. 끝기도 후 ‘Ominpotens sempiterne Deus, qui vivorum dominaris…"로 계속되는 기도와 함께, "미세레레"나 "깊은 곳에서 주님께 부르짖사오니"를 낭송하는 데 걸리는 시간 만큼 그들은 편태로 육신을 괴롭혔다.

 

이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또한 밤기도의 모임 후에는 누구든 잠시라도 눈을 붙이지 못하는 관례도 도입하였다. 모두가 기도나 독서에 전념하는 것이다sed unusquisque aut orationi, aut lectioni vacabat. (이 시간에) 필요한 사람들은 열성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cf. RB 8,3). 이른 아침 제 일시경이 끝난 후, 미사를 거행하였다. 미사가 끝난 후 제 삼시경과 제 육시경을 정성되이devote 바쳤다. 그런 후 일하러 나가 제 구시경까지 침묵과 겸손으로, 불평없이, 그들에게 필요한 육체(손)노동을 하였다manibus suis operabantur, quod eis necessarium erat. (건물의) 기초 위에 가마를 지었는데 (그것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거기서 그들은 건축에 없어서는 안될 벽돌을 구워 내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인 그들은) 날마다 (거기서) 벽돌을 뽑아 내면서, 그들 자신이 (바로) 인욕(忍辱)의 불가마의in fornace humiliationis 금과 같이 정련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가장 엄격한 침묵을 지켜, 끝기도 후의 시간 뿐 아니라, 낮과 밤의 다른 시간에도 침묵을 깨지 못하도록하였다. 그리고 육체 노동의 시간과 식당에서, 안정원에서, 침실에서, 요컨대 모든 시간에 침묵을 지키게 하였다. 이리하여 공주 수도원이라기 보다는 은수 암자와도 같아 보였다. Silentii vero summam ita arripiebant, ut non solum post completorium, aliisque nocturnis atque diurnis horis, quibus nefasest infringere ; verum etiam in exercitio manuali, in refectorio, in claustro, et dormitorio ; omnibus videlicet horis, ut potius heremus, quam cenobium videretur. 당시의 관례를 (이렇게 여러분에게) 알려 드렸다 : 행여 누가 말삼감taciturnitas에 대한 이 규정을 어기면, 그날 그는 포도주를 한방울도마시지 못하였다. 그들은 결코 (이점을 완화해 주도록) 교황께 관면을 청하지 않았다.

 

가난

11. 그 누구도 감히 어떤 것이 자기 소유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우리의 거룩한 사부 성 베네딕도의 규칙에 따라, 모든 것은 우리의 공동 소유이다. 각자는 자기의 사용을 위해 두벌의 수도복을 한벌의 성의(聖衣, 스카풀라) 및 쿠쿨라와함께 가질 수 있었다. 사실 아주 초라한 (옷을 보관하는방)에는 낡은 것이긴 했지만 몇벌의 수도복이 있어서 (자기 수도복을) 세탁해야 할 수도자들이 (쓸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자기 옷을 빨아서 (다시 갈아 입은) 후에는 낡은 수도복을 다시 (옷 보관소에) 반환하였다. 이렇듯 그들은 가장 엄격하고 자발적인가난을 (실천하며) 살았다. 침대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는 침대 옆에 못으로 둘레를 죄다 고정시켜 놓은 (속을) 짚으로 꽉 채운 자루들을 가지고 (사용하고) 있다Pro lectulis autem sacculos paleis plenos habemus, ex omni parte lateribus lecti clavis affixos. 그 위에서 자면서 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부들은 양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 양털로 천을 짜게 해서 외투나 모포를 만들어 잘 때 덮었을 뿐 아니라, 수도원 안에서 다닐 때 혹은 식탁에서나 성당에 있을 때 걸쳤다. 그 천은 어두운 색깔로 촌스럽고 거친 것이어서 시골 사람들이나 쓰는 (천과) 비슷했다. 그러나 위에서 그들이 흰 옷을 입고 다녔다고 말했대서 (독자께서는) 놀라지 말기 바란다. 그들은 사실 복되신 베네딕도께서 그들에게 색깔에 대해 토를 달지 말라고 이르셨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런 색깔의 외투를 걸쳤던 것이다. 어떻게 (언제부터:佛譯) 그것들을 (어두운 색깔의 외투를) 입지 않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 (어쨌든) 현재 우리는 (이 색깔의 외투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단지 흰 색(의 수도복만을) 사용하고 있다.

 

음식에 관한 관습

12. 그들은 특히 먹고 마심에 절제가 있었다. (사실) 그들은 포도 수확 철에 포도 액을 (포도)송이로부터 짜낸 후 물을 (짜내고 남은 포도 송이의) 찌꺼기에 섞어, 옳다고 생각되는 바에 다라 한 사흘 고았다. 그런 다음 그것을 포도주 통에 가득 채워서 겨울 내내 사용하였다. 규칙서의 본문에 따라 우리는, 극심한 병에 걸려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이곳은 매우 고적한 곳에 자리잡고 있고in vasta solitudine situs habetur 강이나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에, 그들은 고기도 (드문 경우가 아니면 결코)raro aut numquam 먹지 않았다. 결국에는 목요일과 주일에만 각자에게 계란 두개를 주도록 (법으로) 정하였다. 교회에서 정한 축일들에도 그렇게 하였는데, 특히 더 큰 축일들에는, 단식 기간은 제외되지만, 각자는 점심 때 자기 몫의 식사로 계란 두개를 (더) 받았다. 여름철에는 저녁 식사에 (먹을 것으로ad cenam, pour la réfection), 위이 서 말한 날은 제외하고, 빵과 치즈만을 소금과 함께 먹었다. 교회에서 정한 성인들의 축일 전야 밤샘 기도(가 있는) 때에는 아무도 익힌 것을 먹지 않았다.

 

 

내가 몇몇 노 수사님들께 들은 바로는, 매년 사순절이 시작될 때 사순 첫째 주간의 첫날에는 모든 모든 (음식) 창고의 문을 폐쇄하기로 공동체적으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고대 교부들의 모범에 따라, 술은 수도승들에게는 결코 합당하지않은 (것이라는 말씀을) 확증하였던 것이다ita ut aclamarent exemplo antiquorum patrum.. (나아가) 사실 둘째날(도) 부엌의 문을 폐쇄하여 아무도 익힌 것을 먹을 수 없도록 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깨어있고 열심한 정신으로alacri devotaque mente 거룩한 부활절을 기다렸던것이다. 포도 수확철에는 포도주 통을 골짜기 절벽 밑으로 내던져 버렸다. 덧없고 무익한 이런 일들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예언자의 말씀을 열심히 곱씹었다 : "저를 위해 누가 하늘에 계시나이까! 당신과 함께라면, 이 세상에서 제가 바랄 것이 없나이다. 제 몸과 제 마음이 스러질지라도, 제 마음의 바위, 제 몫은 영원히 하느님이시나이다."(시 72,25-26)

 

몬떼 올리베또의 확산

13. 그러는 동안 평판과 (회원) 수에 있어 자라나면서 (그들의 명성은) 삽시간에(얼마 되지 않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시에나의) 시민들은 이 좋은 평판을 들으면서 이들에게 기꺼이 수도원들을 덧붙여 주었다archesteria contulebant. 자기 도시에 이런 수도승들의 공동체(이런 수도원을)를 두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선익)이라 믿었던 것이다ducentes pro maximo, si in sua civitate unusquisque talium mereretur habere congregationem. 사실 많은 귀족들과 평민들multi nobiles de genere atque mediocres이 고해의 풍파에서 벗어나려는 소망으로cupientes maris naufragium evadere 에집트를 빠져나와저러한 수도 생활의 고독을 찾아갔던것이다ad solitudinem religionis veniebant. 이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수가 늘어나 우리 수도회 안에 삼백명이 넘는 수도승의 수를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나(그렇게 수는 많아도) (그들 모두의) 마음과 뜻은 오직 하나일 따름이었다uno tamen animo et voluntate 여기서 강조점은 형제들 사이의 친교에 있다. 이러한 강조점은 벌써 1350/60년의 회헌 37,40.49에서 발견된다.

 

당대 수도 생활의 쇠락(衰落)상에 대하여

14. 이 시대에는, 프랑스Gallia와, 이탈리아 그리고 모든 로마(교회)권 세계에서, 즉 시토회와가말돌리회, 발롬브로사회 뿐 아니라 설교자회(도미니코회)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꼬회)를 막론하고, (수도 생활의) 규율 준수가 거의 모두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사라지고 없었다.

 

사실, 작은 형제회에서 현재 시행되고 있는 규율 준수는, 나와 깊은 교분을 맺고 있는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는 1380년에 태어나 1402년에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프란치스꼬회 안에서 이른바 ‘규율 준수의 개혁’의 선구자였는데, 이 개혁의 이상에 따라 많은 공동체를 설립하여 1438년에는 그 vicario generale가 되었다. 그는 아퀼라에서 1444년 5월 20일 귀천하였다.

 

 안토니오 다 바르가가 여기서 베르나르디노에게 ‘성인’이란 호칭을 붙인 것은 <연대기>의 저작 연대를 알게 해 주는 귀중한 요소가 된다. 사실 베르나르디노의 시성식은 1450년 5월 24일에 있었다. 가 시작한 것이다. 물론 나는 수도 생활에 연륜이 깊으신 분들과 연로하신 어른들로부터ab expertis et antiquis patribus, 매우 엄격한 생활 속에서 오랫동안 지내기란 정녕 힘든 일이기에, 한 수도회가 그 규율 준수를 백년 이상 (그대로) 유지하는 일이 드물다고 들었다. 육체 노동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우리가 (잘) 보듯이, (누구라도) 어떤 일(기술ars)을 시작은 큰 열심으로 하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소홀히 하게 되면서는 결국 틀림없이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negligendo paulatim anullatur. 사실 우리는, 구세주의 특별한 은총의 도우심으로써 나날이 쇄신되지 않는 이상 (그 규율의) 무게(가 주는) 혐오감으로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도 "진리란 힘든 것들 속에 있다Virtutem in difficilibus consistere"고 잘라 말했던 것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II,9). 이리하여 갓 시작한 우리 수도회는 즉시 많은 수의 형제들을 얻게 되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당신의 영을 부어 주신 때문이기도 하고, 카르투시오회의 그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수도 규율도 지켜지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예언자와 함께 "우리를 돌이켜 세워 주십시오, 주님. 그리하면 우리가 (발길을 당신께로) 돌이키리이다. 우리의 날들을 예전처럼 (새롭게) 해 주십시오 Converte / nos, Domine, et convertemur : innova dies nostros sicut a principio"라고 기도해야 하겠다. 이제 (지금까지 말했던 바는 그대로) 남겨두고, 이어지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nunc itaque hiis pretermissis ad sequentia veniamus.

 

형제 베르나르도 아빠스님. 수도회의 confirmation

15. 위에서 말한 바 있는 베르나르도 형제frater Bernardus 는 삼년 후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그는 매년 사임할 수 있기를 간청했지만 (매번) 되풀이하여 재임(명) 되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27년을 아빠스로 지냈다. 하느님의 호의로Deo favente 그는 수도회를 수도원들과 수도승들로 커지게 했다 (많은 수도원들과 수도승들로써 수도원을 성장시켰다) Hic monasteriis ; et mona[ch]is, Deo favente, ampliavit ordinem.

 

사실 그는 모든 면에서 지극히 경탄스럽고 거룩한 사람이었다. 뿐 아니라 그는 (수도회의) 수도원들에 그의 모든 재산을 헌납했다. 그리고 수도회의인가를 얻기 위해 몸소 아비뇽에 갔다 당시 교황 클레멘스 6세(재위 1342-1352)는 베네딕도회 수도승 출신으로 프랑스의 아비뇽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베르나르도가 실제로 아비뇽으로 갔을 개연성은 희박하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그러하다.. 당시 아비뇽에 거주하고 있던 교황 클레멘스6세는 그의 소청을 기꺼이 들어 허락하였고, 아레쪼의 주교 귀도 다 피에트라말라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모든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의 선량함으로ex sui clementia 동정순교자 성녀 아녜스 축일인 1월 21일 우리 수도회를 인준하고 확인해 주었다approbavit atque confirmavit. (따라서) 이날을 우리는 매우 큰 축일로 지내고 있다.

 

베르나르도는 그의 아빠스직 제 27년이 되던 해 귀천(歸天)하였다. 그의 사후, 더 뒤에서 다루게 될 모든 아빠스들이 그의 뒤를 이었다 베르나르도의 죽음에 관해서는 더 뒤에(ChBa 28) 아빠스들의 연대기를 저술하면서 다른 소식을 더 전해 주고 있다.

 

다음은 ChBa 28의 본문이다 : "네번째 아빠스는 시에나 출신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였다. 총회가 별도로 소집되어서 매년 사임할 때마다 다시 선출될 수 있도록 정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아빠스로 선출되어서 27년간 재임하였다. 그는 자신이 그 첫번째 창설자가 된 수도회를 크게 성장시켰다. 그는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에자기 몫으로 돌아온 유산인 많은 재산을 증여하였다. 특히 그의 재임시에많은 수도원들을 얻었다(설립하였다). 시에나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 아레쪼의 성 베르나르도 수도원, 피렌체의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 캄프레나의 성 안나 수도원, 구비오의 성 도나또 수도원(먼 훗날 이 수도원을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구비오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과 맞바꾸었다), 폴리뇨의 성 니콜라 수도원(이곳은 주후 1432년 폐하였다), 볼테라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 산 지미냐노의 성 마리아 수도원,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폐한 다른 여러 수도원들이 (다 그의 임기 중에 얻은 것이다.)

 

그는 학문이 깊은 사람doctus vir이었다. 그는 아빠스 임기 중 주후1348년 큰 역병이 돌던 시절, 사망 수도승 명부가 말해 주듯, 82명의 우리 형제들이 죽을 때에 (같이) 귀천하였다. 그리고 (그 시신은) 시에나의 성 베네딕도수도원에 안장되었다."

 

15세기의 수도승 규율 준수 : 단식

16. 지금까지 쓴 것을 (이상의 글을) 쓴 이유는, (이 글을) 읽는 이가 서원자라면 그로 하여금 (그분들이) 지키셨던 규칙의 적어도 어떤 부분은 본받고 있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아직 서원하지 않은 경우라면, 만일 그가 그분들이 누리고 계시는 영광에 도달하기를 기꺼워 한다면, 그로 하여금 세속에 등을 돌리고 그분들을 본받도록 노력하게 하기 위함이다. 사실 9월 13일부터 주님의 부활절까지 우리는, 주님의 성탄 축일을 제외하고는 단 하루도 어김없이 매일 단식한다. 성탄 날은 그토록 큰 축제에 대한 존경으로 말미암아 (음식의) 극기가 전혀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어떤 visitator이나 혹은 총 아빠스가어떤 이의 필요나 기력회복을 위해 그에게 관면을 줄 때나 순례 중인 형제들이 도착했을 때는 단지 그들에게만 (관면이) 허용된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은 드물게 생긴다. 포도 수확 철에는, 단지 수확할 것이 있을 경우에만, 관례상 오늘날까지 관면을 준다. 이런 날들을 제외하고는, 원장이라 할지라도 총 아빠스나 visitator의 허락 없이는 관면을 줄 수 없다. (그런데 이 역시) 쉽게 생기는 일이 아니다. 부활절부터 성령강림절까지는 규칙이 명하는 바에 따라(RB 41,1) 단 하루도 단식하지 않는다. "신랑의 아들들은, 그들과 함께 신랑이 있는 동안에는단식할 수 없다"(마태 9,15 병행 참조)는 주님의 말씀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 강림절부터 거룩한 십자가 현양 축일 까지 형제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한다. 이는 여름철에더위가 지나칠 때가 아니면 결코 어기지 않는 규정이다(RB 41,2 참조).

 

대림절과 사순절, 그리고 교회가 정한 밤기도vigilia와 매주 금요일은 유제(乳劑) 식품도 계란도 먹지 않는다. 육식은, 극심한 병으로 인해 필요할 때가 아니면 결코 하지 않는다. 그리고 병자도 병세가 호전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즉시 육식을 끊고 자기 공동체의 관례로 돌아간다(RB 36,9 참조).

 

의복

17. 옷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를, 보잘것없고 적은 (양의) 천을 사용하던 옛날의 사부님들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로바꾸스들과 닮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가 봐도 명백히 그럴 필요가 있을 때가, 즉 병 중에 있을 때가 아니면 작은 수도복tunichinum을 걸치고 다니지 않는다nam tunichinum penitus, sine evidenti necessitate, videlicet infirmitatis, tenemus. 우리는 면이나 아마로 짠 윗도리를 걸치지 않고 맨 살 위에 바로 수도복만 걸친다.

 

ROCHER의 불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 밑에 작은 수도복을 걸치고 다닌다고 해서, 우리가 기로바꾸스와 비슷하다고는 생각하지않는다. 병으로 인해 명백히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면이나 아마로 짠 윗도리를 걸치지 않고 단지 살가죽 위에 (바로) 수도복 한벌만 걸칠 따름이다." 우리 각자는 자기가 사용하기위해 세벌의 수도복을 쿠쿨라 한벌 및 스카풀라 한벌과 함께 지닌다. 각자에게 한켤레의 신발(샌들pedules)과 필요한 두건들이 주어진다. 사실 병이나 노쇄함으로, 혹은 명백한 이유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두가 주어지는일은 거의 없다.

 

규율 준수의 이모저모

18. 우리 각자는, 설혹 늙었거나 병약하다고 해도, 결코 (편한 데서 오는) 기쁨을 찾지 않는다deliciis omnino…non utitur. 목욕실의 사용은(을 위해서는) 필요한 경우에(RB 36,8 참조) 아빠스나 순시자들visitatores로부터 허락을 얻게 되어 있다. 수도승 각자는 자기 원장의 허락 없이는 먹거나 (포도주를) 마시지 못한다. 그리고 그 허락도 일년을 단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시간 얻어야 한다. 혹 누가 허락 없이 먹거나 마시면서이와 다르게 처신하면 그 사죄는 원장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이 경우 사죄의 권한은) 아빠스에게 유보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가 짐짓 음란한 마음으로아무리 작은 일에서라도 단정치 못한 처신을 하면qui autem contra honestatem, quid vel in minimo actu, impudico videlicet animo, 같은 벌을 받게 된다.

 

우리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규칙서의 규정에 따라(RB 8장-11장 참조) 밤기도 모임을 열심히 거행한다. 장상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아침기도 후에 자지 못한다(RB 8,3 참조). 이 때문에 어떤 아빠스는독방들의 문마다 구멍을 두개 뚫어서 – 어떤 수도원들에는, 구멍은 메워졌지만, 아직도 이 구멍들을 볼 수 있다 – 원로한 수사로 하여금 누가 자는지 아니면 깨어 있는지를 볼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순명

19. 따라서 세상의 염려 거리들로부터 등을 돌린 이들이 발한 서원들은 지금까지 우리 수도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더없이 잘 지켜지고있는 것이다Vota proinde, que profitentur hii, qui mundialibus curis dorsa vertentur, optime hucusque in nostro ordine, communiterque servantur. 모든 수도 생활의 힘과 기반이 되는 순명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매년 아빠스와 순시자들은 각자의 영혼의 구원에 가장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는 바에 따라 형제들을 한 수도원에서 다른 수도원으로 옮기도록 하면서 공동체들을 새로이 형성한다omni quidem anno ab abbate et visitatoribus, fiunt de novo familie, mutantesque fratres de loco ad locum, ut melius noverint saluti anime singulorum convenire. 그들은 매년 각 공동체에 (형제들의 이동이 적힌 공문을) 보내고, (각 공동체는) 장상이나 수하 수도자를 막론하고 마치 복음에 순명하듯 이에 순명한다. 그리고 한 수도원에서 다른 수도원으로 순명으로 옮기는 이들에게는 떠나는 수도원의 원장이 여행 중에 필요한 식비(경비)를pecunia, eorum victui necessaria, dum itinerantur 주었다.

 

가난

20. 우리는 복되신 사부들의 법에 따라 공동으로(공동 소유로) 살아가며 아무도 감히 무엇을 자기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사도 4,32 참조). 사실 순시자들은 적당한 때에 개인 소유에 관한 세심한 조사를 실시한다. 관습대로 그들이 정해준 사흘이라는 기한이 끝난 후, 장상들의 뜻에 어긋나게 누가 크든 작든 무엇을 소유하고(도) 자신의 허물을 자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그는 즉시 파문의 벌에 처해 진다. 그리고 순시자들은 방문한 수도원을 떠나기 전에 형제들의 독방들을 면밀히 검사하여 아무도 그처럼 크게 불경스런 죄 속에 있으면서도 알려지지 않고 (지나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ceterum visitatores, de monasterio quod visitaverunt, antequam recedant, soliciter scrutantur cellas fratrum, ne aliquis in tam gravi, nefandoque delicto iaceat ignotus. 과연 옛날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형제들은 절도있는 행실로써 규율을 준수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일

21. 하느님의 일Opus Dei의 낮과 밤에 걸친 의무는(낮과 밤의 성무일도는) 노래로나 낭송으로나 큰 정성으로 거행된다. 대부분의 수도원들에서 겨울 내내 아침기도는 노래로 바쳐진다. 특히 몬떼 올리베또의 경우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거의 모든 성무일도가 노래로 거행된다. 그들(몬떼 올리베또 수도승들) 중 어떤 이들은, 혹은 노래가 (너무) 길어서, 혹은 너무 길어지는 (기도의) 실행 자체로tum propter exercitium, quod nimis prolixe extenditur ROCHER의 불역은 "너무 힘을 쏟아서 기력이 쇠진한 나머지soit épuisés par une trop grande dépense de forces"라고 옮기고 있다., 혹은 단식과 철야로 말미암아, 노래하는 중이나 읽는 중에 (땅)바닥에 쓰러지기도 한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이야기가) 시시한 이야기처럼 비쳐지지 않도록 우리는 만토바의 바르톨로메오 형제라는, 얼마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떠난 한 훌륭했던 인물의 실례를 공공연히 들고자 한다. 그는 사실 독서대 앞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노래하면서 바닥에 쓰러져 버린 바 있다. 무슨 병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위에서 말한 대로, 기진맥진 해서였던 것이다.

 

몬떼 올리베또의 수도회

22. (지난 한) 총회에서는 수도회 안에 한마음으로 살고 있는existentes unanimiter 친교의 영성에 대한 강조를 다시 한번 주목할 것. 형제들의 수가 사백명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옛날 다윗이 제 백성의 수를 알고(세고) 난 후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그에게 "내가 너에게 세가지를 내보일 테니 너는 그 가운데서 하나를 골라라…"(2 사무 24,12)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큰 역병이 창궐했듯이, 지금 우리에게도 그 비슷하게되었다. 정녕 한때 많은 수의 형제들이 있었음을 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많은 숫자에 더 이상의 형제들을 보태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수를) 줄게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희망과 기쁨을 형제들의 많은 숫자에가아니라 하느님과 덕행들에 두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리하여 거의 온 이탈리아를 휩쓴 현재의 이 역병으로 말미암아 대략 오십명의 형제들이 죽었다.

 

수도회의 제도

23. 한편 우리 수도회의 제도는 늘 (변함없이) 일정하였다(고 볼 수 있다)uniforme. 사실 어른들(선배 수도승들)에게 더 낫다고 여겨지는 대로 시기에 따라 자주 임시적으로 변경되었다nam crebro mutatum est pro tempore, ut melius maioribus visum fuit. 수도원들과 형제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그들의 원의들도 (그 수가) 늘어갔(던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애초에in principio 불역 : "수도회의 우두머리로" 단지 일년 임기의 아빠스를 세웠다. 뒤이어 아빠스로위에서 말한 베르나르도 형제를 세웠다. 그는 매년 사의를 표명했지만 (그때마다 그에게 형제들은) 새로이 이 최고 아빠스의 직무를ad eiusdem abbatiatus apicem 떠맡게 했다. 한때는 아빠스를네명의 장로들이 선출했는데, 이들은 아빠스의 협조자들socii abbatis이라 불렸다. 그리고 다른 네명의 형제들이 있어서 이들을 순시자visitatores들이라 불렀다. 이들은 온 수도회를 방문하고 다니며 아빠스에게 받은 큰 권한을 행사하였다. 그 후 로마 시에서, 훌륭하게 기억되고 있는 교황 마르티노(5세)가 형제들에게 조언하여, 순시자들의 수를 여섯으로 늘려 이태 동안 임무를 맡게 하며, 임무가 끝나면 적어도 뒤이은 이태 동안은 재임하지 않게 정하도록 해 주었다(Papa) concessit amonuitque fratres, ut fierent sex visitatores, qui durarent duobus annis, et absoluti, aliis ambobus annis, vacarent ad minus.

 

옛날에는 총회를 매년 개최하였다. 그래서 우리 수도원들의 모든 원장들은 발언권을 지닌 자기 공동체의 두 사람과 함께 이 총회에 참석하러 갔다. 이 규정은 대략 백년 동안 깨지지 않고 유지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법이 바뀌어서) 총회를 이태 만에 한번씩 개최하도록 하고, 또 이를 위한 (참석자의 수도) 수도회의 모든 장상들과 발언권을 지닌 (해당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줄였으며), 아빠스의 임기는 사년으로 (늘였다). 그리고 (아빠스) 임기가 끝나면, 적어도 팔년이 지난 후라야 같은 직무에 재선될 수 있도록 하였다. 아빠스가 수도회의 으뜸으로서 중심적 역할을 맡음과, 그의 권한으로부터 순시자들의 권한이 유래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것. 사실 최초의 올리베따노 법 규정은 아빠스를 수족의 일치를 보장하는기반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RB가 수도원 안에서의 아빠스가 가진다고가르치는 동일한 권위와 권한을 전 수족에 행사하는 것이다. (Cf. Intr.ChF 54; Intr.AdC 103) 그러나 후대의 올리베따노 법 규정은 이 권한을 약간 축소시켰다. 1350/60년의 회헌에는 아빠스의 "협조자들socii"이 조언자의 역할만을 맡았을 뿐이었음에 반해(48장), 1430년 이후에는 아빠스가 이들의 견해를 듣고 동의를 구할 의무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첫째 수족이 수도원과 수도승의 수의 증가와 함께 날로 커갔다는 것에서, 둘째 이미 15세기부터 아빠스직의 남용과 어려움이 많아지기 시작했다는 사실(ChBa 50참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결론

24. 위에서 우리 사부들이(선배 수도승들이) 자주 우리 수도회의 예식들ceremonias과 제도를 바꾸었노라고 말했다고 해서 이것이 곧 그들이 경솔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사실 그들이 선대 사부들의 제도들을 가끔씩 변경했던 것은 피치 못할 필요에 따라서였을 뿐이었다. 로마 교회 역시, 그리고 여러 민족들도 자주 그들의 법과 제도를 바꾸었다. 한편으로 우리 사부들은 규율 준수의 규정에는 결코 예외를 두지 않았다porro patres nostri regularis observantie normam dispensarunt numquam.. 사실 교황이나 교황이 허락한 이들에게가 아니면 – 이 경우에도 단지 꼭 그럴 필요가 있을 때에만 한정되거니와 – 아무도 성인들이 정해 놓은 법들을 관면해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교황 젤라시오도 "꼭 그럴 필요가 없다면, 거룩한 교부들의 법규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바뀌어서는 안된다ubi necessitas non est, inconvertibilia maneant sanctorum patrum decreta" GELASIUS, ep. IX ad episcopos Lucaniae, titulus decreti 2 : "Ut ubi nulla perurget necessitas, constituta patrum inviolata servantur." PL 59, 1005B; ep. 119, 1043A. 했고, 교황 레오도 "꼭 그럴 필요가 없다면, 거룩한 교부들이 제정한 바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어겨서는 안된다ubi necessitas non est,nullo modo violentur sanctorum patrum constituta"고 하면서 덧붙이기를, "그러나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필요할 때라면, 그럴 권한을 가진 이는 관면을 줄 것이다ubi ergo necessitas fuerit ad utilitatem Ecclesie, qui potestatem habet, ea dispenset"라 했다. LEO, PL 54, ep. XII, 651.663A; ep. XXII, 728; ep. XXVI, 743B; ep. CVI 1005B; ep. CXIX, 1043A.

 

복되신 성 베르나르도가 말하듯, 법의 변경은 필요에서 생기는 것이다. Cf. S. Bernardus, De precepto et dispensatione, 5. 여기서 보듯이 정녕 그래야만할 필요가 없을 때는 고위 성직자들조차 관면을 줄 수 없는 것이다nisi maxima necessitas aderit. 그리고 주님의 계명들은 그 어떠한 인간적 관면도 허락하지 않는다. 지극히 복되신 성 베르나르도께서 말씀하시듯, 오직 하느님만 원하실 때에 원하시는 이들에게(저러한 계명들로부터) 관면을 베푸실 수 있다Deus tantum …horum quod voluit, quando voluit, solvit. Cf. 출애 33,19 거룩한 교부들의 규정들이 때로 어쩔 수 없이 수정되거나 관면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뛰어난 박사 예로니모가 에우스토키오에게 보낸 규칙(편지)의 말미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 "미구에 수많은 결점을 지니게 되지도 않고, 그래서 어느날인가는 교정할 필요도 없을 만큼 완전히 거룩하고옳고 선견지명이 있는 규정이란 아무것도없다. 그러기에 사도적 삶과 수도 생활을 위한 이 작은 규칙에서 몇가지 점이 관면이나 수정, 혹 변경을 필요로 한다면 나는 이를 (으뜸으로 임명되고) 거룩한 사제인 우리 주교에게 일임하는 바이다. 그가 성령의 충만함에 따라서 관면하고 변경하며수정할 것이다Nulla enim tam sancta, tam iusta et diu provisa est constitutio, que in futurum plurimos non patiatur defectus, que aliquando correctione non egeat. Propterea si quid in hac normula apostolice vite et religionis, dispensatione, correctione, vel mutatione indiget, episcopo nostro, preposito viro presbitero sancto comitto, ut secundum plenitudinem Spiritus Sancti dispenset, mutet et corrigat." PL 30, 425-426 (이 성령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는 성부와 성자를 섬길 수 있으니, 성자께서는 같은 성령의 일치 안에서 영원히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