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

노란잠수함 2013. 9. 25. 01:57

 

1912년부터 북한산성 행궁을 대여해서 여름 휴양소로 사용하던 대한성공회의

3대 주교인 마크 트롤로프(Mark Trollope, 한국이름 ‘조마가’) 주교가

1915년 모닝캄(MORNING CALM) 146호에 기고한 글로,

행궁의 구조와 규모를 설명하고 1915년 여름 대홍수로 인한 북한산성의 피해상황과

행궁이 파괴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행궁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다.

(행궁사진과 함께 실린 사진은 -문루가 없는- 중성문(中城門) 사진이다)

 

*****

 

 

주교의 편지

(‘조용한 아침의 나라’ 독자에게)

 

친애하는 여러분,

곳의 여름 달은 항상 특별한 일이 없기 때문에 그저 우리가 장마의 더위와 끈끈함을 견디며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에 이때를 휴가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전에 서울에서 10마일( 16km) 북쪽에 위치한 북한산 언덕 위에 버려지고 폐허가 "행궁" 더위를 피할 목적으로 리스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월세 내는 것을 대신해서 행궁을 수리 보존하기로 하였고, 매년 여름 곳은 더위를 피하는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북한산에서 끔직한 "사건" 일어났는데, 편지에서 그것을 밝히기 전에 우선 행궁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조선 행궁은 서울보다 1,500피트 (457미터) 높은 곳에 위치해 있고 중앙 계곡을 향하고 있으며 측면 골짜기 중에 곳에 자리를 잡고 북한산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궁은 3개의 정원으로 꾸며져 있는데 계곡 측면의 완만하게 경사진 바닥을 잘라서 계단 형식으로 지어졌고 계단을 거칠게 잘린 커다랗고 네모난 대리석으로 장식했습니다.

내전 후면에서 정문까지 행궁의 대지 크기는 가로 100피트(30미터) 세로 250피트(76미터) 입니다. 가장 아래 부분 정원에는 정문이 있고 신하들이 거쳐 하는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여기서부터 계단을 지나서 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대문을 지나면 다음 정원으로 향하게 됩니다. 정원 역시 신하들이 머무는 낮은 건물로 둘러 싸여져 있고 중심에는 넓이 50피트(15미터) 높이 25피트(7.5미터) 아름답지만 오래된 조선식 건물이 있습니다. 건물(외전) 정원은 거의 위어 박사(Dr. Weir) 전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대리석 계단을 올라 3개의 문으로 대문을 지나면 건물(내전)이나 다른 모든 것들이 아래의 것을 거의 유사한 가장 높은 정원에 이르게 됩니다. 위어 박사(Dr. Weir)가 아래 외전에서 그다지 손님을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 가장 높은 정원과 건물(내전) 선교사들이 사용하였습니다.

내전 바로 뒤에는 날카롭고 깎아진 듯한 커다란 바위가 솟아있고, 내전 양쪽에는 나무와 꽃으로 덮인 넓고 얕은 분지가 있습니다. 분지에는 산꼭대기에서부터 건물들 양쪽 밖을 지나 아래의 중앙 계곡 하부의 개천으로 향하는 아름다운 실개천 흐릅니다.

올해 제임스 데이 (7/25)전야, 그러니까 7 24 행궁에는 조선인 주민 , 그의 부인과 3명의 아이들이 바깥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고, 7 26 월요일에 있을 파티를 위해 장소를 청소하러 보낸 사람이 다른 방 하나를 사용하는 외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습니다.

장마철에 폭풍과 폭우에는 익숙해 있었지만 1915 7 23()부터 24() 사이에 퍼부은 비와 폭풍은 여태껏 한국에서는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36시간 동안 폭풍과 번개가 계속 되었고 비는 무차별하게 쏟아졌습니다. 북한산 위에 "집중호우" 왔고 일요일 밤에 피해가 발생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나는 단순히 과장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726() 심슨 신부와 더위를 무릅쓰고 올라가서 광경은 결코 잊을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양쪽 계곡은 마치 폭탄을 맞은 것처럼 보였고 식물과 , (커다란 크기의 것도 포함한)바위, 등이 모두 쓸려 내려가 언덕 위에는 암반만 남아있었습니다. 쓸려 내려간 것들은 중앙 계곡에 모두 쌓여 있었고 폭풍우 중에 광경은 말로 표현 없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습니다. 아래 작은 마을의 집과 나무는 모두 휩쓸려 내려갔으며 (30 이상이 익사하였음) 남아있는 것은 급류 바닥에 떨어진 바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행궁으로 가보니, 위의 내전을 제외하고는 정말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내전은 뒤의 바위가 피해를 막아준 했습니다. 양쪽 분지는 있던 실개천은 40에서 50피트(12~15미터) 넓이의 개의 급류로 변해서 내전 앞에서 (그래서 내전은 무사할 있었던 같음) 진흙과 바위와 물로 산사태를 일으켜 모든 것을 밀고 내려간 같습니다. 건물에 있었던 관리인과 그의 가족 모두가 살았던 집은 기초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모두 익사하였고 시체는 1마일(1.5킬로)이상 떨어진 급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청소하러 보낸 사람은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크게 다쳐 지금도 병원에 있습니다. 이런 일에도 불구하고 작년 이맘때 모였던 선교사와 그의 친구들이 다행히 올해는 건물에 없었다는 것에 감사 드립니다. 참사로 휴가를 망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참사를 기적적으로 피할 있었던 것에 감사해야 것입니다. 신께 경배를!

마크,

조선에서 주교로부터.

 

(한수당연구원 블로그(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hahnsudang) 스크랩 사진)

 

 

*******

 

(행궁의 마지막을 알 수 있는 훌륭한 자료를 소개해 준 '한수당연구원'에 감사드립니다)

(번역을 도와준 도성길라잡이 임영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투지는 항상 어둠속에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