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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원곡 김기승(原谷 金基昇,1909-2000)‥생활과 실용 서예의 현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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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7. 13.

4-1.원곡 김기승(原谷 金基昇,1909-2000)‥생활과 실용 서예의 현대화

- 1970년대 초 독창적 ‘원곡체’ 완성 및 ‘한국서예사’ 집필

원곡 김기승<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원곡 김기승(原谷 金基昇, 1909-2000)은 충남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에서 출생했다. 공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전학, 졸업하였다.

중국 만주에 있는 봉천문회고급중학(奉天文會高級中學)에 1928년 20세에 졸업하고 이후 상해에 있는 중국공학대학(中國工學大學)경제과에 입학, 1932년 24세에 졸업을 한다.

원곡은 일제시기~현대를 거치는 90여 평생을 저명한 인사들과 교유관계를 맺어왔다. 사승관계로 소전 손재형, 안창호를 비롯해 서예가로 김돈희, 최중길, 정현복, 고봉주 등 또 예술계는 김영기, 변관식, 박래현, 김기창, 이응노 등 수많은 저명인사들과 교유했다.

로마서12장9~12절-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253×64×(2)㎝<국립현대미술관소장>.

특유의 한글 서체로 굵고 힘찬 서체의 큰 글자와 가늘고 연한 서체의 작은 글자가 교대로 조화를 이루게 배자하였다.

1956년 ‘대성서예원’을 창설, 후진을 양성했고 국전심사 및 운영위원 역임하고 서예가연합회 회장과 미술협회고문 등을 지내면서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원곡서예상 제도를 1978년에 창설하였고 서거한 해 원곡문화재단을 설립했다. 2000년 92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박병천 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는

“원곡은 5세부터 24세까지 신-구학문을 19년 동안 익힌, 당시로는 대단한 학력의 엘리트였다. 이렇게 외국유학을 하는 등 고학력의 수학경력이 서예가로 대성하는데 깊고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본다.”라고 논평했다.

정월십이지(正月十二支), 128.5×65×(12)㎝ 종이에 먹, 1983<국립현대미술관>.

특이하게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탁본 위에 각 동물에 관한 설명을 고전에서 따와 한문으로 옮겨 적었다. 원곡이 75세 되던 계해년(1983) 정월 입추에 쓴 작품이다.

◇한글-한자 혼용의 서체미

원곡은 고향에서 형인 기문(基文)과 지방의 명필 산정 신익선(山庭 辛翊善)으로부터 사사를 했고 1936년부터 1957년 49세까지는 소전 손재형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서예 학습을 본격적으로 했다. 이후 1970년대 초부터는 ‘원곡체’를 정착시켰다.

“독창적인 ‘원곡체’ 완성은 그가 지닌 예술적 기질을 반영한 것으로서 그의 학문 세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원곡은 최초로 ‘한국서예사’를 집필했으며, 서예가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문화로 거듭나기 위해 묵영(墨映), 책의 제자(題字), 컴퓨터 서체(폰트) 등 새로운 모색에 앞장섰다.

90년대 간판 글씨와 유명한 성경책 글씨 등이 모두 원곡체에 기반 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서체를 대중들이 좋아했고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국립현대미술관 배원정 학예연구사(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Curator Bae Wonjung,裵原正,미술사학 박사)>

염선회염(鹽善懷鹽), 75×59.5㎝, 목각<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예서풍이 담긴 전서로 쓴 뒤 나무판에 양각으로 새겨 표현한 서각(書刻)작품이다. 종이에 쓴 이 작품의 원작은 서강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원곡체는 한글과 한자 서예체의 구분 없이 기본획형 표현을 동일하게 하여 한글-한자 혼용작품의 서체미가 조화롭게 나타난다.

원곡체는 문자 세로획의 경우에 대담하게 낙필하고 이어 끊어질듯하게 운필하고 다시 굵어지게 하는 운필로 특이한 획형을 기운 생동하게 나타낸다.

가로획은 아주 가늘게 물결치는 듯 표현하여 문자 전체를 행서도 아니고 해서도 아닌 절충된 해행체(楷行體)를 종합적으로 구현하되 필력이 넘치고 물결치는 것 같은 유연성을 나타낸다.

“그의 서체가 책표지, 비문, 현판, 간판 등에 가장 많이 쓰인 기록을 남겨 생활-실용 서예분야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서예가로 평가된다. 이러한 글씨의 생활화는 그의 문집에서 나타낸 ‘서예의 생활화다’라는 말을 생전에 실천한 증거라고 평가할 수 있다.”

<박병천 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특유의 서풍을 창안하고 응용하다’ 中>

한편 원곡 김기승은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윤범모)덕수궁관에서 4~7월 전시 중인 ‘미술관에 書:한국 근현대 서예전(The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Writing)’의 두 번째 주제 ‘글씨가 그 사람이다(書如其人)-한국근현대서예가1세대들’ 12인 중 예술가이다.

[출처]: 권동철 데일리한국 미술전문기자 : <한국근현대서예가1세대들> - 4.원곡 김기승‥생활과 실용 서예의 현대화 - 1970년대 초 독창적 ‘원곡체’ 완성 및 ‘한국서예사’ 집필 /데일리 한국, 2020. 6. 12.

4-2.원곡 김기승

대지예찬(1960년대 작품) 21c부여신문

'원곡체(原谷體)’라는 글씨체가 있다. ‘찬송가’ 표지글씨체라고 하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들이라도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충현교회’ ‘새문안교회’ 등의 간판, ‘성경전서’ ‘국어대사전’ 등의 표지글씨도 원곡체이다.

서예체로는 드물게 출판디자인용 한글서예체(산돌체 폰트)로도 수용되었다. 한 마디로 대담하고 끊어질 듯 하면서도 힘 있는 글씨체이다.

그는 역대 서예 고전과 법첩을 통해 한글 및 한문 전·예·해·행·초서의 각체 수련과 혼융 실험을 거쳐 독자적인 원곡체를 완성했다. 한글의 예술 글자화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원곡체를 서예계에서는 추사 김정희 이후 유일하게 독특한 필체라고 평가한다. 이 원곡체의 창시자가 바로 부여 출신 원곡 김기승(1909~2000)이다.

묵영(그림)을 발표해 1960년대 서예계에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는 근현대 한국 서예계의 최고 거목이었다. 이동국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는 “원곡 선생은 62세 되던 1971년 원곡체를 완성했다”라고 말한다.

(묵영-서예그림)眞空妙有(좌), 詩情畵意(1978년 작품)(우) 21c부여신문

원곡 선생은 1909년 5월 홍산면 조현리(일명 윗새재)에서 태어났다. 경주 김씨인 김정환 옹의 차남이었다. 집안이 5백석을 추수할 정도로 부자였다. 참봉 벼슬을 지낸 조부 연당(蓮堂) 김동효 옹이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원곡 선생은 네 살 때부터 조부가 세운 한문서당 ‘삼언재(三焉齋)’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통감, 논어, 맹자 등을 배웠다. 망국의 슬픔 속에서 조부는 그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원곡 선생은 1983년 펴낸 <원곡서문집>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글방에선 훈장의 말을 잘 지켰고 가정에선 어른들 말을 잘 들었다. 그리고 글방에서 글 읽고 외우기와 글씨 공부를 잘하였다.”

소년 시절부터 백일장에 나가면 장원을 했고 힘이 세서 장사로 불렸고, 글씨 공부를 해도 대(大)자를 힘써 익혔다. 당대의 서예가였던 일중 김충현 선생도 언젠가 “나는 항상 원곡의 글씨는 大字가 가장 좋을뿐더러 누구도 따르기 어려우리라 일컫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12세 되던 해 원곡 선생은 신학문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고 홍산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한다. 조부는 머리를 빡빡 깎고 돌아온 손자를 호되게 혼냈으나 결국 보통학교 입학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뒤 월반을 하여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 4학년을 수료한다.

입학은 공주고등보통학교에 했으나 졸업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했다. 그가 전학을 했던 데에는 사연이 있다. 어려서 3·1운동을 겪은 원곡 선생은 당시 일본인의 만행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항상 울분에 차 있었다.

원곡 선생이 어렸을 때 일본인 경찰이 동네 주모를 사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주민들 사이에 반일 의식이 높아졌고 것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공주고보에 입학한 그는 2학년 때 학생을 난폭하게 폭행한 일본인 체조 교사를 배척하는 동맹 휴학을 주도한다. 퇴학 처분을 당할 위기에서 그를 잘 봐준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휘문고보로 전학한 것이다.

휘문고보 4학년을 수료한 그는 청운의 꿈을 품고 중국으로 가 봉천에 있는 문회고급중학 3학년으로 편입했다. 이 학교는 감리교에서 운영하는 학교였다. 이런 영향으로 원곡 선생은 이때부터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때 이후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삶을 지탱해 온 중요한 축이 되었다. 새문안교회 평신도로 지냈다. 그는 “붓 끝에 써지는 글씨가 내 혈관에서 나오는 혈서인 양 붉은 꽃송이로 착각을 느낄 때(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는) 예수님을 떠올린다”라고 회고하곤 했다.

문회고급중학을 졸업한 원곡은 상해로 가 중국공학대학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교장으로 중국 당대 최고의 초서 작가인 우우임이 취임해 문화사를 그로부터 배우며 감화를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인생의 큰 스승을 만나게 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해 도산 선생과 친교를 맺은 것이다.

원곡 선생은 도산 안창호에 대해 “우리가 민족적 위인으로 숭배하는 인물 중에서 사생활이나, 공생활이나 지사의 절의를 완수하는 등 세 가지를 완벽하게 갖춘 분은 도산이 유일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존경심이 깊었다.

매주 토요일이면 흥사단에 나가 도산을 만나고 청년 단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독립운동에 힘썼다. 백범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에도 입당했다.

대학을 마친 뒤 23세 때인 1932년 고향 홍산으로 돌아온 그는 사업을 모색하다가 작은 아버지가 글씨 공부를 하는 것을 보고 크게 깨친 바 있어 서예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홍산 본가에서 산정 신익선 선생으로부터 서예를 배웠다. 하루 종일 쓰면 그 종이가 마당에 꽉 찰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열심히 글씨 공부를 했는지 짐작이 간다.

26세 때 조선일보 군산지국장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그는 일본 경찰의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올라 있어 감시가 심했다. 자유롭게 사업 등을 벌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군산물산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신통치 않았다.

중국에서 귀국한 직후 홍산 자택에서의 모습(좌). 중국 상해에서 태화약품을 경영할 때 모습(우).

다시 상해로 건너 간 그는 약종상을 하며 서예 공부를 계속했다. 1939년에 조선서도진흥회 주최전에서 2등상을 받았고 1942년에는 중일문화협회 주최 전중국 서도전에서 입선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서울에 태화약품주식회사를 설립한 그는 사옥 일부를 서화실로 이용했다. 이때는 소전 손재형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원곡 선생은 “신익선 선생에게 1년 간 배운 것이 예과 과정이었단 소전 선생으로부터 배운 것은 본과 과정이었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해방 후 열린 최초의 서도전인 조선서화동연회 주최 전람회에서 2등상을 받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연속 4회 특선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예가로서 활동을 펼치게 된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때는 가솔을 이끌고 고향 홍산으로 피난했다.

원곡은 1955년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 비문을 썼고 1956년에는 수원 화서문, 남한산성 영일정 현판을 등을 썼다. 이 해에 서예 관련 최초의 개인의숙인 대성서예원을 종로구 적선동에 내 수많은 후학들을 양성했다. 서울대, 숙명여대, 덕성여대 등 각 대학에도 출강했다. 문교부 문화재보존위원, 국전 심사위원, 국전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그가 평소 가슴에 새기고 실천했던 경구는 ‘밥 먹을 때도 글씨 사랑, 잠 잘 때도 글씨 사랑’이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소 ‘밥 먹을 때도 나라 사랑, 잠 잘 때도 나라 사랑’이라고 했던 것을 본받은 것이다.

원곡은 평소 잘 따르는 후배들에게 “죽더라도 거짓말하지 말라”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사적인 감정을 떠나 모든 사람이 동포고 동료이고 이웃이라는 사해동포주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역시 도산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원곡이 심사위원으로 있는 대회에서는 제자들이 상을 타기가 더 어려웠을 정도로 매사에 공정한 태도를 견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 시간 약속을 잘 지키기로 유명했다. 너무 빨리 가면 “시간이 남아도느냐”라고, 너무 늦게 가면 “왜 시간을 안 지키냐”라면서 시간을 엄수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속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해 제자들에게도 “가정에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꽃이라도 한 송이 꽂는 버릇을 들여라”라고 말하곤 했다. 원곡은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글씨와 추사 김정희의 글씨 등 귀중한 문화재들을 국립현대미술관과 연세대 등에 기증했다.

원곡 선생은 서도와 서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서예하는 사람은 붓을 들고 참된 인간의 본질을 찾는 것이다. 아름답게 얼마 동안 써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도와 예는 자기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실천하는데 있는 것이지 일정한 기한은 없다.

서예는 크게 말하여 지상 인간의 문화를 계승시켜 왔으며 작게는 한 인간을 완성시키는 수양, 수도에 높은 차원의 역할을 해왔다.

서예는 동양만이 가진 독특한 예술이다. 이는 자기의 심정을 그리는 그림이요, 자기 인격의 표현이요, 자기 정신의 발로이다. 붓으로 成字시키는 경지는 글씨를 잘 쓰거나 못 쓰거나 무아, 무심으로 청아한 심리 상태로 돌아가게 한다”

원곡의 10년 후배이자 서예계의 양대 쌍벽으로 불리던 일중 김충현 선생은 원곡 선생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세상 사람들이 원곡을 서예가로만 안다. 그렇다면 이는 원곡을 잘 아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상가요,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자이기도 하다. 또한 해박한 학식을 겸하여 그의 문장에는 심오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가 쓴 <한국서예사>는 내용이나 분량으로 보아 아직 없었던 대저작임에 틀림 없다. 특히 그가 고희를 맞아(1978) 제정한 원곡서예상은 우리 서예계에 처음 있는 盛事로서 원곡의 숭고한 창안을 칭송도 하려니와 후진의 면학 의욕을 북돋는데도 공헌이 크다”

원곡 선생의 수제자인 무림 김영기 국제서법연맹 회장은

“원곡체는 추사체 이후 거의 유일한 우리 글씨체이다. 원곡 선생은 늘 글씨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드러나는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인격을 잘 닦아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스승의 뜻을 받들어 나도 독자적인 글씨체를 만들기 위해 40여 년 동안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원곡 김기승은 한국 서단의 거목이었다. 21c부여신문

1909년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 출생

1926년 휘문고보 수료

1927년 중국 봉천 문회고급중학교 졸업

1929년 도산 안창호 선생 지도로 흥사단 입단

1934년 조선일보 군산지국장

1946년 전국 서화전 이등상

1949~1955년 연 4회 특선 문교부장관상 수상

1956년 대성서예원 창설

1958년 제1회 원곡서예개인전 개최

1964년 이준열사 동상문(장충단 공원), 부여 영일루 현액, 포병장교 충혼비문

1966년 계백장군 동상문(부여), <한국서예사> 출간

1970년 퇴계 이황 선생 동상문(남산)

1971년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탑명(남산)

1973년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명(도산공원)

1978년 제1회 원곡서예상 시상

1984년 은관문화훈장 수훈

1993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받음, 대한민국 기독교 미술상 수상

1995년 서울 정도 600년 기념 ‘자랑스런 서울시민’으로 선정 타임캡슐에 수록됨

2000년 91세로 별세

[출처 ] : 소종섭 시사저널 편집장 :<원곡 김기승> / 부여신문, 2012, 2, 2.

[출처] 『한국근현대서예가1세대들』 -▣素荃 손재형▣石峯 고봉주▣素菴 현중화▣原谷 김기승▣劍如 유희강▣剛庵 송성용▣是菴 배길기▣갈물 이철경▣一中 김충현▣鐵農 이기우▣如初 김응현▣平步 서희환|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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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여 유희강(劍如 柳熙綱,1911-1976)‥불굴의지 원융의 서풍

-4시간 내리 먹을 갈고, 그 먹물을 다시 하루 동안 숙성시켜 글씨를 쓰다

검여 유희강. 1976 검여 유희강 서예집(일지사. 1983) 재촬영 ⓒ 일지사

검여 유희강(劍如 柳熙綱,1911-1976)은 경술국치 다음 해 인천시 시천동의 진주 유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24세라는 늦은 나이에 명륜학원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28세에 중국유학길에 올라 8년간 체류했는데 중국서화 및 금석학연구와 상하이미술연구소 자유양화연구소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그의 아호 ‘검여(劍如,칼과 같다)’처럼 그의 글씨는 검을 휘두르듯 찌르고, 자르고, 세우고, 막고, 멈추는 모든 동작에 숨이 막힐 듯하며 갈필을 응용한 화려하면서도 강한 필획을 구사한다.

“이는 칼과 같은 준엄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검여의 글씨는 어디까지나 중봉(中鋒)을 지키며 행서를 주로 쓰지만 또한 예서와 전서에도 격조가 높은 작품들이 많다. 행서와 초서의 운필이 전서와 예서에 근거를 둠으로써 그 내재적인 굳셈이 돌과 같다.

또 그의 글씨가 겉으로 보기에는 기이하고 준엄하고 웅건하며 용이 날고 호랑이가 뛰는 기세가 있지만 언제나 원융(圓融)한 운치를 잃지 않았다.”<전상모 경기대학교 초빙교수>

그러나 안타깝게도 검여가 화경(化境)의 경지로 내달음치고 있던 1968년, 그의 나이 58세에 오른쪽 반신 마비라는 치명적인 난관을 맞았다. 오른쪽 마비로 필사적인 노력 끝에 좌수서(左手書)로 재기하여 새로운 서예 인생을 펼쳤다.

‘검여 좌수서’란 별칭도 붙었다. 1969년 이후 투병 생활 7년간 심신의 장애가 도리어 그의 서예를 최고의 경지로 이끌었던 것이다.

검여는 소탈하고 과묵하며 겸허한 사람으로 교유의 폭도 매우 넓었다. 배길기(1917-1999), 김충현(1921-2006), 김응현(1927-2007), 배렴(1911-1968), 이마동(1906-1980), 박종화(1901-1981), 조지훈(1920-1968), 최인욱(1920-1972), 이흥우(1928-2003), 이경성(1919-2009), 임창순(1914-1999), 안춘근(1926-1993), 이춘희(1928-2018) 등 서예가, 화가, 시인, 소설가 등이 있다.

◇특유의 회화성

“미술평론가 이경성(1919-2009)은 ‘검여 유희강의 예술은 겸허한 인간성 위에 자리 잡고 있기에 옥같이 은은한 빛을 발한다.’고 말했다.

통상 검여는 4시간 내리 먹을 갈고, 그 먹물을 다시 하룻 동안 숙성시켜 글씨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검여 글씨의 먹빛은 진하고 영롱하다. 과정을 중시하는 태도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검여 작품에서 풍겨 나오는 먹의 내음과 향기는 묵직하다.”

<국립현대미술관 배원정 학예연구사(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Curator Bae Wonjung,裵原正,미술사학 박사)>

나무아미타불_완당정게, 종이에 먹, 64×43㎝, 1965<성균관대학교박물관소장>,<국립현대미술관제공>

작품 ‘나무아미타불_완당정게(阮堂靜偈)’는 시대를 초월한 스승 완당의 자취를 밟고자 하는 검여 유희강의 서예정신이 담겨있다. 55세에 쓴 작품으로 유희강의 우수서가 완숙할 경지에 들었을 때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정중앙을 종으로 흐르는 원주형 꼴의 탑신모양을 북조 서풍이 묻어나는 예서체 “나무아미타불‘로 추상화하고 양 옆으로 빼곡히 완당의 시를 장식하였다. 검여 유희강 특유의 회화성이 묻어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양소백 칠언대련, 60×130㎝ 종이에 먹, 1975<국립현대미술관제공>

 ‘양소백(楊少白)의 칠언대련’작품은 유희강이 65세 되던 해 치명적인 병마를 극복하고 좌수서로 쓴 대표적인 예서다.

두보 시 백부행, 93.5×129.5㎝ 종이에 먹, 1966<국립현대미술관제공>

‘두보(杜甫) 시 백부행(白鳧行)’은 해서와 행서 그리고 초서가 마구 뒤섞여 있는데 한 글자 한 글자를 뜯어보면 잘 썼다거나 예쁘다거나 하는 느낌은 하나도 없지만 조금도 어색하거나 거슬리지 않는다.

◇검여 서예의 특질

전상모 경기대학교 초빙교수는 자신의 글 ‘불굴의 예술혼을 펼치다’논평에서 검여 서예의 특질을 썼다.

“검여의 서예에는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가 있다. 검여는 가학과 신학문으로 쌓은 교양을 바탕으로 여러 문헌에서 제재를 들추어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글씨와 함께 글을 음미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제발이나 서찰 등의 한문 문장도 매우 훌륭해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였다.

또 대교약졸(大巧若拙)의 경지이다. 검여가 흥취가 일어 붓을 휘두른 것은 마치 높은 산이 무너지고 천둥벼락이 친 듯하여 참으로 호쾌하고 장엄하다. 이는 학문과 수양, 어질고 너그러운 품성이 붓끝과 어우러진 경지이다.

어진 선비의 내심으로 혼신의 전력만이 가능한 그런 경지였다. 해서와 행서, 초서가 마구 어우러져 있는데 한 글자 한 글자를 뜯어보면 잘 썼다거나 예쁘다거나 하는 느낌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조금도 어색하거나 거슬리지 않는다. 검여는 우리나라 근세의 묵보(墨寶)이다. 검여의 서예는 웅혼하고 졸박한 풍격으로 귀결된다.”

한편 검여 유희강은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윤범모)덕수궁관에서 4~7월 전시 중인 ‘미술관에 書:한국 근현대 서예전(The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Writing)’의 두 번째 주제 ‘글씨가 그 사람이다(書如其人)-한국근현대서예가1세대들’ 12인 중 예술가이다.

[출처]: 권동철 데일리한국 미술전문기자 : <한국근현대서예가1세대들> - 5.검여 유희강‥불굴의지 원융의 서풍-4시간 내리 먹을 갈고, 그 먹물을 다시 하루 동안 숙성시켜 글씨를 쓰다 /데일리 한국, 2020. 6. 15.

5-2.서예가 검여 유희강의 법고창신

- 한쪽 손이 마비된 서예가는 어떻게 이름을 남겼을까

조선후기 예원에 독보적인 서화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있었다면, 근현대 서단에는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1911-1976)이 있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두 사람은 120년 이상의 세대 차이가 있으나 미술을 대하는 마음은 평행을 이룰 만큼 비슷한 면이 많다. 두 사람에게 가장 공통되는 일면은 옛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노력, 곧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다.

실제 서예가 유희강은 예술가로서 다른 이들과 차별화되는 특별한 점이 많았다. 그는 옛 것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예술 세계를 찾으려 부단히 노력하였다.

당대 서예가들 중 일부는 옛 것을 답습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다른 일군의 서예가는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여 인격적으로 존경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비해 유희강은 예술가로서 창조적인 정신을 가졌고, 인생살이에서도 큰 흠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유희강의 존재는 한국 서예사의 보석과 같은 존재이다.

유희강의 극적인 삶의 역정

▲ 국내에 묻혀있는 희귀한 소동파의 육필서를 펼쳐보이는 서도가 검여 유희강. /연합뉴스

 

인천 출신 유희강은 가학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이를 바탕으로 명륜전문학원(지금의 성균관대학교)에 들어가 1937년에 졸업하였다. 1938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동방문화학원'에서 서양화를 배우는 한편 중국어를 공부하고 서예와 금석학을 연구하였다.

공부를 마친 후 그는 한커우(漢口)에서 광고회사를 운영하며, 때때로 시간이 날 때마다 난창(南昌), 상하이(上海) 등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그때 같은 지역에서 서양화가 임군홍(林群鴻)도 광고회사를 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오가며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유희강은 중국에 있으며 상하이에 자주 머물렀는데, 이는 상해 임시정부와의 소통을 위한 것이었다. 1945년 경 해방 즈음이 되어서는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 주호지대장의 비서로 일하였다.

해방이 되고 임정 요원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앞장서 주도적으로 일했다. 이를 보면 유희강은 당시 미술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에 관여한 기개 있는 인물이었다.

1946년 귀국한 유희강은 인천시립박물관장과 인천시립도서관장 등을 역임하고, 여러 학교에서 글씨를 가르친다. 1962년부터는 서울 관훈동 '통문관(通文館)' 건너편에 '검여서원(劍如書院)'을 열어 서예 연구와 후학지도에 힘썼다. 현재의 통문관 건물의 제자(題字)도 통문관 주인과 가까이 지내던 유희강이 1967년에 쓴 것이다.

통문관 이름을 쓴 이듬해 1968년, 유희강은 친구인 화가 배렴(裵濂)의 만장을 쓰고 귀가하던 중 뇌출혈이 일어나 오른쪽 반신 마비가 되어 서예를 할 수 없게 된다.

그의 애주벽(愛酒癖)이 초래한 불상사였다. 서예가에게 글씨 쓰는 손 마비는 예술가로서는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유희강은 불굴의 의지로 남은 왼손으로 글씨 연습을 계속해 십 개월 만에 오른손 못지않은 글씨를 쓸 수 있게 된다.

서예는 필획의 움직임에 따라 글씨의 구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손이 바뀌면 새로이 본래의 글씨 수준을 이루어내기 어렵다. 그런데 유희강은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좌수서(左手書)' 세계를 열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그의 서예 세계는 '우수서(右手書)' 시대와 '좌수서' 시대로 나누기 시작한다. 이러한 재기는 세계 서예 역사에서도 찾기 힘든 불굴의 인간승리라 아니할 수 없다.

유희강의 미술 세계

▲ 유희강 ‘금문(金文)’ 검여 유희강 서예집(일지사. 1983) 재촬영 ⓒ 일지사

 

유희강 예술의 본령은 서예에 있다. 그의 글씨는 전서·예서·해서·행서에 두루 능하였으나 특히 전서와 행서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그에 비해 초서는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그의 전서와 예서는 청나라 등석여(鄧石如, 1743-1805)를 주로 본받았으나 그에 머물지 않고 수많은 노력 끝에 자신만의 독특한 필체를 만들었다.

또한 전서를 쓸 때 갑골문과 화상석의 문양을 사용한 것이 많은데, 이러한 것은 글씨라기보다는 그림이라 하는 것이 나을 정도로 창조적 모습을 보인다.

그는 이러한 문양을 서예 작품 바탕에 자주 배경 그림으로 그려 넣었다. 이러한 혼성적인 모습은 현대 미술에서 서로 다른 갈래를 혼성하는 것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 유희강 ‘다반향초’ 1975년 ⓒ 황정수

 

해서와 행서는 처음에는 중국의 서예가 황정견(黃庭堅)과 유용(劉鏞)을 바탕으로 하여 유연하면서도 단정한 면이 많았다. 그러나 점차 이에 만족하지 않고 웅혼한 기운이 담긴 북위(北魏)시대의 글씨체를 더해 필획의 힘이 강한 서풍을 만들었다.

이런 노력이 더해져 그의 서풍은 당대 서예가들 중 특히 남성적인 면이 강하고, 대륙적 분위기가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 유희강 ‘홍매’ 1966년, 검여 유희강 서예집(일지사. 1983) 재촬영 ⓒ 일지사

 

유희강은 서예뿐만 아니라 그림과 전각에도 능하였다. 그의 그림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먹으로 유희하듯 빠른 필치로 그린 문인화인데, 구성 감각이 전문화가 못지않다.

특히 매화 그림에 매우 능했는데, 그의 강한 서예 필획이 매화 가지를 치는데 어울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유학 초기에 서양화를 공부하며 습득한 소묘 실력도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전각(篆刻)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중국에서 공부하며 각고의 노력으로 연마한 것이다. 자신이 쓰던 인장은 대부분 스스로 전각한 것이다. 전각 솜씨에 있어서도 글씨체처럼 작은 것에 연연치 않고 시원스레 각한 특징이 있다.

유희강의 대표작 '완당정게'

▲ 유희강 ‘완당정게’ 1965년 성균관대학교 ⓒ 성균관대학교

 

유희강이 남긴 수많은 작품 중에서 대표작으로 꼽는 것은 역시 '완당정게(阮堂靜偈)'이다. 이 작품은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준 정게(부처의 가르침 찬미)를 소재로 쓴 작품이다. 가운데에 불탑을 쌓듯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큰 글씨 여섯 자를 배치하고, 좌우에 잔글씨를 빼곡히 썼다.

가운데 글씨는 작은 글씨를 위로 하고 차례로 내려오며 커져 마지막 '불(佛)'자에서 마무리 되어 탑처럼 된다. 또한 좌우로 배치된 잔글씨는 글자 크기도, 행간의 제약도 없이 자유롭다. 마치 글씨들이 춤을 추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얽매이는 것 하나 없이 자연스럽다. 이 작품은 비록 작은 글씨이지만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고, 불교 사상과 같은 동양 사상의 축적 같기도 하다.

유희강은 '검여(劍如)'라는 강한 호를 쓰기도 했지만, 말년에는 주로 '소동파와 김정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소완재주인(蘇阮齋主人)'을 주로 썼다.

그가 왜 소동파와 김정희를 그렇게 좋아했는지 '완당정게'를 보면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또한 "며칠만 글씨를 생각하지 않으면 벌써 붓의 획이 무디어지는 것 같다"고 말하던 유희강의 서예에 대한 예술혼이 몰입해 완성되고 있음을 느낀다.

한 생애를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 성균관대학교에 전시 중인 ‘관서악부’ ⓒ 황정수

 

유희강의 작품은 세상에 흔하게 널려 있지 않다. 작가가 평소 작품 매매에 관심이 적어 파는데 신경을 쓰지 않은 까닭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볼 만한 곳이 없어 애호가들에게 늘 아쉬움을 주었다.

그런데 2019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유희강의 후손들이 부친의 모교인 성균관대학에 작품 일천여 점과 생전에 사용했던 벼루, 붓, 방명록, 사진 등 대부분의 자료를 어떤 조건도 없이 모두 기증한 것이다.

이 중에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단연 '관서악부(關西樂府)'이다. '관서악부'는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가 어린 시절부터 친구인 채제공(蔡濟恭)이 1774년 평안감사로 부임하자 평양 역사와 유적을 소재로 지은 108수 연작시이다.

신광수는 '관서악부'를 또 다른 친구이자 글씨에 능한 강세황(姜世晃)에게 써 달라고 부탁했으나,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다. 강세황은 글씨를 완성하여 신광수 아들에게 전한다.

유희강은 말년에 유독 '관서악부'를 쓰는 일에 집착한다. 그는 '관서악부'를 세 차례 썼다고 하는데, 마지막 작품은 생을 마감하기 전 6개월간 매진해 작업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친구인 한학자 임창순(任昌淳)에게 교정을 부탁한 사이에 숨을 거둬 발문을 쓰지 못한다. 결국 임창순은 유희강 사후에 발문을 넣어 완성시킨다.

'관서악부'는 34미터나 되는 대작일 뿐만 아니라 유희강 서예 예술의 기념비가 될 만한 작품이다. 이 대작은 유희강이 마치 서예가로서의 마지막 혼을 집어넣으려는 듯 온 정성을 기울여 어느 한 곳 흐트러짐 없는 절필이다.

어쩌면 그는 강세황이 신광수의 청을 들어 붓을 들었던 마음으로 글씨를 썼는지 모른다. 신광수와 강세황, 유희강과 임창순 이들은 '관서악부'라는 작품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하늘이 내린 인연이었던 것 같다.

[출처] : 황정수 : 미술평론가 :<황정수 서울미술기행 : 북촌·인사동편>-서예가 검여 유희강의 법고창신 - 한쪽 손이 마비된 서예가는 어떻게 이름을 남겼을까/ 오마이뉴스, 2019, 8. 22.

[출처] 『한국근현대서예가1세대들』 -▣素荃 손재형▣石峯 고봉주▣素菴 현중화▣原谷 김기승▣劍如 유희강▣剛庵 송성용▣是菴 배길기▣갈물 이철경▣一中 김충현▣鐵農 이기우▣如初 김응현▣平步 서희환|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