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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인물열전 (38) 정도전에게 살해당한 배열부전의 작자 이숭인(李崇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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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인물열전

2009. 7. 17.

경북 인물열전 (38)

  정도전에게 살해당한 배열부전의 작자 이숭인(李崇仁)

경북 인물열전 (38) 정도전에게 살해당한 배.hwp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8. 慶尙道 星州牧 人物 條]

                                                                                        이  웅  재


 이숭인(李崇仁:1349~1392)은 자를 자안(子安), 호를 도은(陶隱)이라 하고,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흔히 여말(麗末) 3은(三隱)이라고 할 때,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그리고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말하는데, 길재 대신 도은 이숭인을 넣기도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고려 말기의 대학자일 뿐만 아니라, 세세토록 빛나는 충신이기도 한 때문이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숙옹부승(肅雍府丞)을 제수받은 후, 여러 번 옮겨져서 장흥부사(長興府使) 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다.

 공민왕이 성균관을 개창(改創)한 뒤 정몽주 등과 함께 학관(學館)을 겸했다. 고려 문사(文士)를 뽑아 명나라에 보낼 때 1등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어려 가지 못했다. 나이 25세가 되기 전에 벌써 예의산랑(禮儀散郞), 예문응교(藝文應敎), 문하사인(門下舍人) 등을 역임했다.

 신우(辛禑) 때에 정도전 등과 함께 원나라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귀양을 가고 삭직(削職)당했다가 얼마 안 되어 용서받고 다시 성균사성(成均司成)에 기용되어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옮겨졌다. 이때 동료들과 함께, “임금은 마땅히 신하가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성인의 도를 행해야 한다.”고 상소하기도 했다.

 얼마 후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몽주와 함께 실록을 편찬했다. 다시 동지사사(同知司事)가 되었는데, 이인임(李仁任)과 인척이 된다고 해서 통주(通州: 通川)로 귀양을 갔다가 풀려 나와서 이색, 김사안(金士安)과 함께 하정사(賀正使)로 중국엘 다녀와서 예문관 제학(提學)이 되었다. 이때 하륜(河崙) 등과 같이 영흥군(永興君) 환(環)을 변명하다가 무고에 연좌되어 헌사(憲司)에서 극형으로 다스리고자 함에 도망을 쳤는데, 그 아들 차약(次若)을 잡아다가 등에서 피가 흐르도록 매질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본 이성계(李成桂)가 애써 구원하여 다시 경연(經筵)에 나가게 되었다. 이에 다시 남재(南在), 심인봉(沈仁鳳) 등이 이숭인을 탄핵하였으나, 이번에는 권근(權近)이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요새 대성(臺省: 요즘의 감찰기관 즉 검찰이나 감사원)에서 숭인의 죄상을 말했사오나 전하께서는 이를 용서해 주시고 그 벼슬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온데 의론하는 자들은 더욱 고집하여, ‘숭인이 불충・불효하니 전하께서는 이를 내쫓아 공변된(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평한) 처사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대체로 숭인이 불효하다고 하는 것은, 그의 어미가 죽은 지 3년 안에 시원(試員)이 되었다고 해서입니다. 하오나 당시에 그의 아비 원구(元具)는 늙고 병들어 목숨이 조석에 달려 있어, 급급히 그 아들이 장시(掌試: 시험을 관장함)하는 영화를 살아서 보고 싶어했고, 또 국가에서는 숭인의 재주를 소중히 여기고 원구의 뜻을 민망하게 여겨서 데려다가 감시(監試)를 맡게 했던 것입니다.…

 또 숭인을 가리켜 불충하다 하는 것은, 그가 영흥군의 진위(眞僞)를 변론하다가 이미 전하의 명을 받았으면 마땅히 스스로 나가 뵈었어야 할 것인데,… 해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 국가가 명나라를 섬겨온 이래로 표전사명(表箋詞命)이 모두 숭인의 손에서 나왔사오며, 공민왕이 상왕의 시호(諡號)를 얻고 습작(襲爵: 작위를 물려받음)을 받은 것도 숭인의 문장의 힘이오며, 세공(歲貢: 해마다 지방에서 나라에 바치던 공물, 여기서는 중국으로 바치던 공물을 가리킴)을 면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숭인의 힘이었습니다. 또 중국 황제가 그 문장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여 우리나라에 인물이 있다고 한 것도 역시 숭인의 공이었습니다. 숭인은 문장이 간결하고 고고(高古: 세속을 초월하여 고상하고 예스럽다.)해서 가령 중국에 태어났더라도 국가의 사명(詞命: 사신이 외교 무대에서 응대하는 말)은 불가불 이 사람을 시켜 맡게 했을 것입니다. 하온데 이런 것은 살피지 않으시고, 도리어 소인들의 헐뜯는 말을 믿으셔서 감히 대악(大惡)의 죄를 뒤집어 씌우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

 이러한 변호가 있었으나 그는 결국 사헌부의 탄핵으로 경산부(京山府)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이초(彛初: 尹彛, 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색, 권근과 함께 청주(淸州) 옥에 갇혔다가 풀려나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었으나, 정몽주가 살해되자 같은 무리로 몰려 남평(南平;羅州市)으로 유배되었다. 조선이 개국되자 정도전은 자신의 정치노선을 따르지 않았다 하여 심복 황거정(黃居正)을 시켜 유배지에서 그를 살해하였다.

 저서로는『도은집(陶隱集)』, 작품으로는『동문선(東文選)』제101권에 전하는 사전(史傳) 형식의「배열부전(裴烈婦傳)」이 있다. 그 경개(梗槪: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열부의 성은 배씨요, 이름은 아무[某]인데 15세가 지나서 사족인 이동교(李東郊)에게 출가하여 잘 지내고 있었는데, 경신년 가을 7월에, 경산에 왜적이 쳐들어왔다. 이때에 동교는 합포(合浦)에 있는 원수(元帥)의 막하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적은 열부가 사는 마을로 왔다. 열부가 젖먹이 아들을 안고 달아나니 적은 그를 쫓아 강에 이르렀다. 강물이 한창 불어오르는 판이었으나, 열부는 화를 면하지 못할 줄을 짐작하고 젖먹이 아이를 강둑에 놓아두고 강으로 뛰어 들어 빠져 죽었다. 적이 물러간 뒤에 집안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찾아서 장사를 치렀다.’

죽음으로써 정절(貞節)을 지킨 행적(行績)을 기록한 전기라 하겠는데, 그는 끝문장을 다음과 같이 마감하였다.

 “아, 장렬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