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2021년 04월

02

《시 곶간채》 봄밤에

봄밤에 죽기 딱 좋은 날인데 엄숙한 죽음은 사라지고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죽음에 날을 보고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고 그저 꺼졌다 깨어나고 밭고랑에 남은 풀잎처럼 자기가 부활하는 것을 알 수 없듯이 움직이는 죽음은 내가 밟고 가야 하는 찌거기였지 죽음의 비애도 모르는 봄 스치듯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을 저렇게 조용해지다니 저렇게 조용해지는 것을 보고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눈은 이유 없이 감기고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설렜지 그렇게 비스듬히 비켜서 첫 번째 죽음을 맞이하였지.

12 2021년 03월

12

《시 곶간채》 네가 보이던 날

네가 보이던 날 오랫동안 처박아둔 들깨 한 자루 내던지듯 묵정밭에 쏟았지 무심코 그곳을 지나다 보니 버림받은 씨앗들 무더기로 피었다 졌는지 거대한 뿌리에 매달린 무덤 같은 시선들 모조리 넋이 나가 있었지! 너의 모가지를 꺾어 열아홉 순정도 담아 꽃이 넘실거리는 바람의 집을 지을까, 합니다 부릅뜬 까만 눈 바람이 불 때마다 눈 안을 쿡쿡 찔러 되고 그럴 때마다 다소곳이 꽃을 심겠습니다 씨를 아무렇게 버리면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는 걸 진작 알았다면 울컥, 명치 끝에 걸린 씨앗 하나 토해 내겠습니다.

27 2021년 02월

27

《시 곶간채》 감나무를 일으켜 새우다

감나무를 일으켜 세우다 경사진 감나무 아래 노인회장이 벌렁 누워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운 좋게 작은 가지가 살려 줬다 감나무에서 떨어지면 약도 없다는데 약이 먼저 풀썩 주저앉았다. 죽은 껍질 벗어 던지고 나면 다시 움이 트는 감나무 아래서 백 년의 가부좌로 새로운 생을 굽어볼 수 있을까? 한 마을에 수장으로 늠름할 수 있을까? 조금만 위험하다 싶으면 헛디딘 발보다 잽싸게 떨어진 붉은 살점으로 가득하다. 오래전 약속인 듯 감나무 묵은 가지를 쳐 내는 것은 새 가지에만 싹이 꽃이 만발하기 때문이다 슬쩍, 굵은 몸통에 원기 불어 준다

23 2021년 02월

23

《시 곶간채》 적막이 스며드는 동안

적막이 스며드는 동안 겨울이 나를 가두자 허술하게 닫은 몸속엔 우울함으로 가득 하였지 동구 밖 노송 한 그루처럼 적막으로 결박되어 아프게 울기도 하고 그사이 길은 막혀 버렸지 쉴새 없이 눈보라가 휘몰아쳤지 오다가다 쌓은 서낭당 돌탑은 무너지고 허공을 떠다니다 지친 저 바람은 근황을 부풀리며 천길 벼랑 끝으로 내몰았지 예보에도 없던 적막감이 주는 저 현기증 구부러진 산길 속에 내내 갇혀 있었지 푸른 하늘을 향해 치켜든 소나무를 단숨에 삼켜 버린 그 날들 아주 먼 거리를 조용히 왔다는 신호인데 내 안에 우울은 선뜻 현관문을 열어 주지 못하고 쌓였다 무너지며 그렇게 스며들었지.

08 2021년 02월

08

04 2021년 02월

04

《시 곶간채》 으르렁

으르렁 이옥순 너는 두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다가오다가 조금 위험하다 싶으면 선한 모습은 감추고 분노의 표출이랄까, 미처 제소리를 내기도 전에 으르렁이 천지를 진동한다. 지구 맞은편 으르렁은 극악의 테러이고 마른하늘에 으르렁은 핵미사일 부딪치는 소리다 숨겨둔 송곳니 드러내며 서로의 꼬리 치켜들면 체면의 으르렁이 숨어들어 심장 깊숙이 칼날을 밀어 넣고 있다 그렇게 내지르고 싶은 으르렁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다 반쯤 식어 버리면 문득 그 옛날 데려오지 못한 으르렁을 토해 놓는다 채 거둬오지 못한 으르렁은 꼴깍 삼키고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으르렁이 왈칵, 왈칵, 쏟아져 나온다.

29 2021년 01월

29

《시 곶간채》 눈빛

눈빛 이옥순 채식주의자였던 그 40이 되면 몽골 초원에서 풀을 찾아 헤매리라 물을 찾아 떠돌 것이라더니 약속은 뇌경색을 일으키는지 벼랑으로 내몰린 초원 빌라 2층에서 한 발짝도 나올 수가 없다 딱 3일 동안 한층 높아진 침대 위 푸른 식물처럼 누워있다. 풀린 듯 희미한 눈동자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는 듯 한 줄기 햇살을 바라보지만 이미 머리엔 기분 나쁜 울음에 저승 새가 앉아 있다 그는 전생에 별이었다고 굳게 믿고 별처럼 맑은 눈빛 조각을 잡으려 고비 사막을 건너간다 마지막 숨 몰아쉬며 반눈 사이를 비집고 나와 비틀거리는 눈빛 어린 딸의 눈물에 빠져 화석으로 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