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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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기】/▦ 좋은 시 ▦

2011. 1. 23.

어느새

 

              김혜수

 

골반 교정기를 끼고

성형물품안내서 넘겨보다 내다본

대로변 정육점 앞

비상등 켜고 하역 작업 중인 냉동차 안에

고깃덩어리들이 외투처럼

가지런히 걸려있다

누가 벗어놓은 것일까

어떻게 다시 입을 수 있을까

황성옛터를 구성지게 풀어놓던 레코드판

지지적거리고

화장실 문 활짝 열어놓고 일 보시던 할머니

오락가락하다 꽃 피는 지난봄

정신 아주 놓아버리고

이제

페허의 설운 회포는 누가 풀어주나

느닷없이 몇 해 만에 날아든 옛 애인의 메일처럼

창틀에 앉아 있던 작은 새

치골 치골 치골 치골 하면서

뜻 모를 노래 부르다

날아가고

어느새

 

해설 /이혜원

시간의 덧없음에 대한 자각은 순간이고 느닷없이 틈임한다. 고반 교정기를 끼고 생협물품안내서를 넘겨보는 상황에선 더욱 그러하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건강에 자신이 없어질 때삶은 내 것이 아닌 듯 낯설게 다가온다. 냉동차의 안에 고깃덩어리들처럼 누군가 벗어놓은 적나라한 육신. 페허의 설운 회포 마저 잊고 정신을 놓은 치매 할머니는 시간의 무자비한 횡포를 입증한다. 옛 애인의 메일처럼 뜬금없이 날아든 새의 소리도 망가진 치골을 비웃듯 치골 치골 울어댄다. 어느 새 의 뜻 모를 노래처럼 “어느새” 알 수 없어 흐른 무상감이 절실하게 그려진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