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큰 구두

댓글 0

【시 읽기】/▦ 좋은 시 ▦

2011. 7. 6.

너무 큰 구두

조경희

  

투두둑 실밥이 터지는 구두
걸음이 헐렁해졌다
느릿느릿 길을 재며 체면구긴 걸음을 걷는데
그가 구두를 벗어 내민다

내 발에 너무 큰 구두를 신고 걷는다
콧대 높고 도도했던 길이
엿가락처럼 늘어나 질질 끌려온다
벗겨질듯 말듯 안에서 벗어나려는
발의 반발심리 주저앉히며, 앉히며 걷는다
내 발에 맞지 않는다고 투덜거려 보지만
모르는 체 발을 감싼다
내가 그의 구두를 신는 건
어쩌면 그를 신는 일
그의 생의 크기를 재보는 일
그에게 온몸을 싣고 그를 잰다
한발 두발 발맞춰 걷는다
길이 휘청거리자 꽃들이 어머, 어머, 길을 일으킨다
구름신발을 신은 새들은 뭉게뭉게 발자국을 찍으며 하늘높이 날아간다
걷다보면 멍들고 부르트기도 하리라
걷다보면 넘어지기도 하리라
그러나 바닥이 닳도록 둘이 한짝이 되어 가야 할
길, 지도처럼 펼쳐진다
걸음을 뗄 때마다 그의 가슴에 내 족적이 찍힌다
걸어온 길은 그의 발자국을 기억하고
그의 구두는 내 발을 기억하리라
문득 발바닥이 따스하다
별들이 어둠의 발자국을 지우며 하나 둘 빛나고
밟혀서 껍데기뿐인 그가 나를 데리고 뚜벅뚜벅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