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 : VIEW/아티스트를 만나다

    아리스테_artiste 2014. 12. 3. 18:45


    INTER:VIEW with 그래픽 디자이너 칼 나브로 Karl Nawrot  

    본 글은 인터뷰어가 그래픽 디자이너 칼 나브로(Karl Nawrot)를 실제로 인터뷰한 후에 기억과 녹취에 의존해서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본격 인터뷰 소설   

    14시에 시나브로 칼 나브로에게로


     

     

    1. 11월 25일 화요일 14시 경

     

    서점 직원 K는 경복궁역에 도착했다. 갤러리 팩토리에 갈 참이었다. 그래픽 디자이너 칼 나브로(Karl Nawrot)의  ‘마음의 산책2’라는 전시 중이었다. 갤러리 팩토리에 첫 방문인 그는 네이버 지도를 참고하여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 얗게 칠해진 벽이 먼저 K를 맞이했다. 바닥엔 검정 카페트가 깔려있었고, 사방에 칼 나브로의 흑백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괴기한 취향을 가진 정식분석가의 방에 온 것 같기도, 시니컬한 과학자의 실험실에 온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마음의 산책’이라는 제목과 그럴 싸하게 어울렸다. 별안간 K를  놀라게 한 것은 전시된 도구들이었다. 독특하고 암시적인 모양의 도구들. 언뜻 보기에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영역과 무관한 듯한 그것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는 서서히 전시 공간 안으로 빠져 들어갔다. K는 공책을 꺼내서 떠오르는 느낌들을 짧게 메모했다. '집, 무의식, 꿈, 장치, 부품, 기계, 흐물거리는 것, 연결되는 것, 끊어지는 것, 육체.’ 공간이 복잡하게 엉켜있는, 외부와 차단된 듯한 집 그림을 봤을 때는 왠지 모르게 쓸쓸했다. 그는 2층으로 올라가서 부클릿을 사고 다시 한 번 작품들을 둘러본 후 그곳을 떠났다. 

     


    Mind Walk II ⓒ박정훈

     


     

    2. 11월 26일 수요일 14시 경

     

    K 는 합정역 3번 출구 앞에서 칼 나브로(Karl Nawrot)를 만났다. 그는 멀리서도 칼 나브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회색 코트를 입고 검정 선글래스를 낀 그는 어딘가 관조하는 듯한 모습으로, 2도 정도 세상과 다른 온도를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아무렇게나 넘긴 머리카락과 피곤한 듯 듬성듬성 자라있는 수염이 묘한 유쾌함을 발산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인근의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K: 뭐 드시겠어요? 주문하고 올게요. 

     

    칼 나브로(Karl Nawrot, 이하: 칼): 음. 카푸치노로 할게요. 

     

    K: 뜨거운 거죠?

     

    칼: 중간으로 할게요. 

     

    K: 중간이요?

     

    칼: 뜨거운 것도 차가운 것도 싫어해서요. 안 되면 그냥 뜨거운 걸로 마실게요

     

     

    K는 그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뜨거운 카푸치노 한 잔과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돌아갔다. 

     

     

    K: 칼 나브로는 어떤 사람인가요? 

     

    칼: (웃음)

     

    K: 질문이 좀 그렇죠?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나이’, ‘성별’, ‘직업’, ‘학력’, ‘국적’, 이 다섯 가지를 언급하지 않고 자신을 소개한다면요?

     

    칼: ‘길을 잃은.’(Perdu, Lost)

     

    K: 재밌군요. 조금 더 설명해 주시겠어요?

     

    칼: 말씀하신 다섯 가지를 제외하고 사실 제 자신에 대해 말하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분명 그 다섯 가지가 설명할 수 없는 제 감정은 남겠죠. 저는 뭔가 길을 잃은 듯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어요. 길을 잃었다고 해서 꼭 부정적인 뉘앙스로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뭔가를 찾고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있겠군요. 그게 뭘까요? 집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방? 

     

    K: 그렇군요. 좋아하는 음식이 있나요? 

     

    칼: 없습니다. 

     

    K: 그럴 리가요. (잠시 고민한다.) 정말이세요?

     

    칼: 좀 지나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음식이라는 건 제게 다소간 기계를 작동시키기 위한 연료예요. 

     

    K: 오늘 점심엔 뭘 드셨는데요?

     

    칼: 밥 위에 구운 생선을 얹어 먹는 요리였는데, 아무튼 일식이었어요. 

     

    K: 맛있었나요?

     

    칼: 그렇습니다. 

     

    K: 그런 걸 물어본 겁니다. 

     

    칼: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건 시시각각 변하니까요. 고정된 무언가를 말하는 게 제겐 힘든 일입니다. 

     

    K: 알겠습니다. 칼 마르크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칼: (의아해 하며)칼 마르크스?

     

    K: 칼 나브로. 칼 마르크스……농담입니다. 하지만 말하고 보니 궁금해지네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칼: 아무런 견해도 없다고 해야겠군요.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K: ‘칼 나브로’는 당신의 본명인가요?

     

    칼: 네. 본명입니다. 프랑스 사람들도 실은 종종 제 이름이 발명된 거라고 생각해서 저에게 이름에 대해 묻곤 했어요. 특이한 이름이죠. 하지만 본명입니다. ‘폴 뉴먼(Paul Newman)’처럼요. 

     

    K: 우스운 질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은, 당신에게 있어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칼: (폭소 후에) 정말 대답해야 하나요? 저는 뭔가를 정의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K: 일종의 비유로써 얘기하는 건 어떠세요? ‘사랑’하면 떠오르는 느낌을요. 

     

    칼: 어찌됐든 뭔가를 정의한다는 건 그저 안심하기 위할 뿐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이요? 글쎄요. 많은 부분 감정적인 문제이기도 하지요. 유동적이고 다변적인 어떤 것이잖아요. 거기에 대해 설명하는 건 제겐 불가능합니다. 

     

    K: 알겠습니다. 한 가지 더 물어볼게요. 

     

    칼: 그러시죠. 

     

    K: 60대에 계획이 있으신가요? 막연한 거라도요. 

     

    칼: ‘집’. 집을 갖고 싶습니다.

     

    K: 은유적인 얘기인가요?

     

    칼: 어느 쪽이든요. 집을 갖고 싶어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곳이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또 마음껏 쉴 수 있는. 움직이는 일에 저는 이미 충분히 지쳐있습니다. 

     



    K 와 칼 나브로는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그런 얘기를 들어서인지 칼 나브로의 시선과 말투, 제스처 등이 K에게 새롭게 느껴졌다. 고정되지 않고 헤매는 듯한, 하지만 매 순간 거의 완전히 집중한 듯한 데에서 오는 경이로움. K는 담배를 빨아들이는 동안 점차 그 남자의 독특한 세계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K: 직업적인 정체성이랄까요. 그런 관점에서 당신은 누구입니까?

     

    칼: 칼 나브로입니다.

     

    K: 하하. 제 질문은, 그러니까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냐는 거였어요. 

     

    칼: 그래픽 디자이너입니다. 

     

    K: 이번엔 대답이 시원하시네요!?

     

    칼: 네. 그렇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생각합니다. 글쎄요. 저는 저를 아티스트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말 그대로 그래픽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K: 말씀대로라면 ‘디자인(design)’과 ‘아트(art)’는 구분되는, 혹은 구분되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칼: 저는 말씀하신 두 항목이 구분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확실히 최근의 경향은 다르긴 해요. 그래픽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예술을 하려고 한다고 생각합니다. 씁쓸하기도 해요. 저는 좀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픽 디자이너는 예술의 영역과는 다르게 클라이언트를 위해 일합니다. 그래픽 디자이너는 대중과 클라이언트 사이의 일종의 매개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자신의 작업을 책으로 내고 싶어하는 아티스트가 있다고 해보죠. 그럼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최상의 형태로 ‘전달하느냐’의 문제 앞에 있습니다. 제 전시에 있어서도 저는 ‘그래픽 디자인 전시’라는 표현을 고집합니다.

     

    K: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010년에 당신은 <GRAPHIC>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서체 디자이너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실제로 ‘서체를 디자인’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서체 디자인 관련해서도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네요. 

     

    칼: (웃음) 네. 물어보세요. 

     

    K: 당시 인터뷰에서 '무엇에 영감을 받는가’라는 질문과 관련하여 당신은 '영감은 사물을 보는 방식이지 뭔가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사물을 보는 방식에서 벗어나 낯설게 사물을 바라보기 위해 하는 본인만의 방식이나 노력이 있습니까? 

     

    칼: (웃음) 모르겠습니다. 

     

    K: (웃음) 모르신다고요?

     

    칼: 음. 뭐랄까요. 우리가 자신이 하는 작업의 과정을 언제나 인식하고 분석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어려운 일이죠. 왜냐하면 내가 무언가를 집중해서 하고 있는 것과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건 확연히 다르니까요. 일단 인식을 하게 되면 더 이상 그것을 ‘할 수 없게’ 되거든요.

     

    K: 글자의 가독성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칼: 글자의 가독성이란 언제나 사람들의 지식이나 문화와 연결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무엇이 ‘읽을 수 있는’ 것이고 무엇이 ‘읽을 수 없는’ 것인지 얘기하는 건 언제나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건 가독성이 뛰어나네. 이건 그렇지 않네.’ 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가독성의 개념은 제겐 다소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가독성은 결국 독자의 지적 수준, 문화적인 성향과 떼어놓을 수 없는 문제니까요. 저 같은 경우에는 ‘형태’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 ‘글자’ 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경계에서 작업하는 걸 즐기는 편입니다. 내 눈 앞에 있는 것이 형태인지 글자인지 질문하게 되는 지점 말이죠. 하지만 그 경계를 단순히 ‘가독성’의 문제로 치환하거나 정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K: LIG문화재단과 협력해서 거의 1년 동안 LIG아트홀의 공연 포스터를 만드셨잖아요. 매 포스터마다 들어있는 일러스트가 독특해요. ‘칼 나브로’스럽달까요. 관람객들에게도 반응이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칼: 포스터 작업은 저도 처음이었습니다. 

     

    K: 처음이었다고요?

     

    칼: 네. 처음이었어요. 저에게도 의미있는 작업이었습니다. 

     

    K: 포스터의 특성 상, 작업을 공연 전에 하셔야 하잖아요. 공연을 보지 않고 어떻게 그 느낌을 담은 일러스트를 그릴 수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칼: 물론 포스터의 종류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포스터들은 오직 제목에만 의존하여 그 느낌을 가지고 제작되었습니다. 그 제목을 보고 떠오르는 최초의 느낌으로 일러스트를 만든 것이죠. 그리고 때때로는 LIG문화재단 관계자에게 공연을 설명하는 몇 가지 키워드를 요청합니다. 어떤 쪽이든 결국 ‘단어’의 느낌에 의존해서 포스터를 만든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유도> 의 포스터처럼 이미 제가 전부터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사용한 경우도 있고요. 

    재 밌는 건 이런 건데요. 만일 제가 포스터를 만들기 전에 공연을 봤다고 한다면 제가 가질 수 있는 느낌은 굉장히 제한적일 겁니다. 일종의 감옥처럼 사고와 느낌 안에 갇힐 겁니다. 또 만일 제가 공연을 보고 싫어하게 된다면요? 그럼 저는 포스터 작업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 못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저는 조각으로 흩어져 있는 느낌들을 저만의 관점으로 선택해서 하나의 건물을 짓는 방식으로 작업합니다. 

     

    K: 그럼 1년 동안 했던 포스터 작업 중 실제 공연과 가장 느낌이 잘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게 있나요? 아. 물론 보신 공연들 중에서요. 

     

    칼: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김오키의 음악 대작전과 음, 그리고 김재덕의 <웃음>요. 

     

    K: 그렇군요.

     

    칼: ‘색’의 문제가 있습니다. 

     

    K: 색이요?

     

    칼: 특히 음악 공연이 저에겐 그런데요. 음악은 저에게 자연스럽게 ‘색(Color)’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지만 제 작업엔 색이 없죠. 흑백입니다. 그래서 다 담아내지 못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감정이라는 게 흑백으로 표현되기가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K: 당신의 작업이 흑백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걸 제가 지금에서야 깨달았다는 게 놀랍네요. 흑백으로만 작업하는 이유가 있나요?

     

    칼: 글쎄요. 음. 그냥 ‘색’을 사용하는 건 제겐 너무 어렵습니다. 이게 진짜 이유일 겁니다. 이렇게 얘길 해보죠. 극단적으로 말해서, 몇 가지 어휘만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쓰는 글은 그 몇 가지만을 사용해서 정확하고 간결하게 표현될 겁니다. 집중이랄까요. 저도 흑과 백만을 사용했을 때, 제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에 집중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Mind Walk I ⓒStuart Whipps

     


    K: 현재 갤러리 팩토리에서 전시 중인 <마음의 산책2> 이전에 <마음의 산책1>이라는 전시가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마음의 산책1>은 어떤 전시였습니까? 

     

    칼: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우선 제 전시가 ‘아트(art)’의 영역이 아닌 ‘그래픽 디자인(graphic design)’의 영역에 있다는 점을 밝혀두겠습니다. 그럼 그래픽 디자인 전시라는 것은 대체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이냐고 당신을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저에게 있어선 <마음의 산책1>은 ‘연습(practice) 과정’을 드러내는 작업이었습니다. 일종의 '흔적(trace)’ 혹은 ‘계보’로서의 연습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물론 어떤 이들은 작업의 목적이라든지 작업의 도달 지점을 중요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의 흥미를 끄는 것은 언제나 ‘목적지’가 아닌 ‘목적지까지의 여정’입니다. 저는 제 전시를 통해서 그 여정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마음의 산책1>과 <마음의 산책2> 사이의 차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마음의 산책1>은 훨씬 더 원시적이고 추상적이었습니다. 반면 <마음의 산책2>를 통해 저는 제 작업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사람들에게 열어보이고 싶었습니다. 

     

    K: <마음의 산책2>는 제게 보는 내내 어린 시절의 ‘과학 상자’(제일과학에서 제조한 어린이들의 장난감으로, 한국의 8-90년대를 풍미했다. 주어진 부품을 이용해 만들어보고 싶은 모형을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오래 가지고 놀 수 있으면서 창의력을 키우기에 제격이었다.)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과학적인 의도로 설계된 장치는 그 ‘유용성’에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면에 당신이 만든 장치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을까요? 

     

    칼: 우선 이렇게 말할게요. 저는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에 흥미가 있습니다. 제 작업들은 거기서부터 시작해 도구(tool)와 대상(object) 두 가지로 분류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도구들은 사실상 ‘사용되기(use)' 위해 고안됩니다. 즉, 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죠. 또한 그 말인즉슨 도구들은 단순히 ‘사용되기' 위해서 뿐 만 아니라 ‘설명하기(explain)’위해서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도구들)이 자신을 이용해서 어떤 그림을 그려내는지, 어떤 모양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지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것이죠.

    하 지만 최근 들어서 저는 이러한 장치들을 도구를 넘어선 일종의 ‘대상'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침묵에 대한 대상으로요. 그들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일종의 기억으로써, 그들이 예전에 무엇이었는지를 상기시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얗게 칠해진 도구들은 제가 이전에 어떤 작업을 했었는지 말해줍니다. 그들도 움직이지 않고 저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고요함만이 둘러싸고 있는 그 관계 속에서 저는 평온함을 느낍니다. 저는 강박증 환자는 아닙니다만 최근 들어서 거의 모든 작업을 하얀 색으로만 하고 있어요. 그리고 온통 흰색으로만 구성된 전시를 머지 않아 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K: 그렇군요. 이제 슬슬 제가 준비한 질문도 다 떨어져 가네요. 끝나고 일정이 있으세요?

     

    칼: 이것도 질문 중 하나입니까?

     

    K: 아뇨. 이건 그냥 물어본 겁니다. 

     

    칼: 인터뷰가 또 잡혀 있어서요. 거기에 가야 합니다. 

     

    K: 단기적인 향후 계획이 있다면 비밀스럽게 저에게만 알려주시겠어요?

     

    칼: 비밀입니다. 

     

     

     






    3. 12월 1일 월요일 14시 경

     

    작스레 날이 쌀쌀해진 탓에 따뜻한 커피나 한 잔 마실 생각으로 K는 길을 걷다 무심코 카페에 들어갔다. 직원이 손에 묻은 물기를 앞치마에 닦으며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하고 물었다. K는 대답하려다 문득, 뜨거운 것도 차가운 것도 싫다던, 그래서 중간이라는 묘한 선택을 하겠다던 칼 나브로를 떠올렸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직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엇을 주문하겠냐고 다시 한 번 물었다. K는 정신을 차리고 뜨거운 카푸치노 한 잔을 주문했다. 커피를 받고 자리에 앉은 채로 지난 수요일의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카푸치노를 입으로 가져갔는데 생각만큼 뜨겁지 않았다. 그는 시계를 한 번 보았고, 노트를 펼쳐 칼 나브로와 했던 대화를 옮겨적기 시작했다. 

     

     

     
    인터뷰어 서점 직원 K(김영건): 지방 소도시에 있는 서점에서 일하고 있다. 가끔 소설을 쓰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