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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2021. 7. 14. 01:51

허향숙 시집 <그리움의 총량>/천년의 시작

 

우리가 사는 동안 겪는 '그리움'은 얼마나 될까.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 하고, 만날 수 없어 그립고, 옆에 있어도 그립다 하고...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건 그만큼 사랑의 감정이 깊었다는 뜻일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뿐 아니라 부모, 자식, 형제, 동성 친구 혹은 언젠가 전철 안에서 스쳤던 첫사랑...

 

허향숙 시인의 첫 시집 <그리움의 총량> 표지를 보는 순간, 내 그리움의 양은 얼마나 될까 문득 궁금해져 내 안을 들여다 봤다. 그리움이 깊어 아팠던 날들을 보내고 이젠 어느 정도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그리움은 문신처럼 내 안에 딱 붙어 있었다. 시인의 그리움이 내 감정에 이입되어 가슴이 뻐근해져 왔다.

 

시집 속 '그리움의 총량'부터 찾아 읽었다.

 

'내 그리움의 총량은

의식과 무의식의 총체다'

 

라는 말이 내 가슴에 쿵 부딪쳐왔다. 그렇지, 내 그리움 역시 내 의식과 무의식의 모든 것이었다.

 

'시인의 말'을 읽어보면 '서쪽으로 간 딸'에 대한 그리움이 뼛속 깊이 뿌리박혀 있음을 알 수 있다. 2010년 3월, 열다섯 번째 봄을 뒤로하고 생을 벗어 놓은 채 영영 돌아오지 않는 딸 '수야'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고 한 시인의 마음이 애절하다.

 

70여 편의 시가 담긴 <그리움의 총량>은, 첫 시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한 편 한 편이 깊고 절절한데 아름답기까지 하다. 오세영 시인과 이재무 시인의 표사만 봐도 허향숙 시인의 시가 얼마나 깊이 있고 수준 높은 작품인지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시집을 읽을 땐 처음부터 읽기도 하지만 대개는 아무 페이지나 열어서 읽는다. <그리움의 총량> 역시 처음 연 페이지에서부터 내 마음을 잡아끈 시가 바로 <습관>이다.

그밖에 그녀의 시 몇 편을 올려둔다.

 

습관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나를 끌고 다닌다

 

처음에는 내 집에 들어와 어색해하고

 

쭈뼛해하다가 자주 뛰쳐나가더니

 

하루 이틀 사흘......

 

내가 시키는 일 곧잘 하더니

 

이제는 상전처럼

 

어느새 나를 부리고 있다

 

***********

 

에이와나무를 찾아서

 

그녀는 서쪽 창을 열고 나갔다

연분홍 꽃 목덜미에 박힌 햇살이

피처럼 흐르고 있었다

 

십 년 전

숲으로 든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고요가 고여 들끓고

 

그날 이후

닫힌 적 없는 서쪽 창문으로

음성인 듯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

 

피우다

 

 

봄을 피워 여름이 오면

여름을 피워 가을이 오면

가을을 피워 겨울이 오면

봄이 다시 피어나지

 

피운다는 건 경계를 지운다는 것

생을 피워 죽음으로

죽음을 피워 생으로

 

피운다는 것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팎 구분 없이

나를 피워 너로 번지고

너를 피워 나로 번지는 것

 

***************

 

아버지의 구두

 

신발장 맨 위 칸

꾸부정하게 앉아 있는 검정 구두 한 켤레

바깥으로 닳은 뒷굽이 바람 빠진 리어카 바퀴 같다

 

30년 전 첫 월급으로 사드린 구두

긁힌 자국들이 아버지의 성성한 웃음 같다

깊게 파인 골들이 화보 속 지리산 골짝 같다

 

바람 몇 장

햇살 몇 줄

별빛 몇 올

달빛 몇 닢

빗방울 몇 톨

노래 몇 가닥

막걸리 말가웃

 

8년 신고 돌아가신 아버지

22년간의 휴식

밀실처럼 고요하다

 

************

 

그리움의 총량

 

무언가를 간절히 생각하고

슬퍼하는 시간의 총량이

고작 한 시간 정도라는 어느 시인의 진술을

수정하고자 한다

내 그리움의 총량은

의식과 무의식의 총체다

 

잠잘 때도

밥 먹을 때도

책 볼 때도

페북질할 때도

걸을 때도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도

글을 쓸 때도

유행가를 부를 때도

온통 너이기 때문이다

 

해가 뜨는 이유도

새가 지저귀는 이유도

바람이 동으로 가는 이유도

비가 사선을 긋는 이유도

구름이 하늘을 흐르게 하는 이유도

별빛이 어둠 가르며 내리는 이유도

풀벌레 우는 이유도

꽃이 피고 지는 이유도

슬픔이 내 몸을 지나는 이유도

웃음 한 말 빌려 오는 이유도

숨을 고르는 이유도

온통 너이기 때문이다

 

우울한 대기

낙엽처럼 깔려 있는 침울한 적요

흐느끼는 산길

널브러진 이끼들

어스름을 흔드는 개 짖는 소리

홀로 사그러지는 메꽃

 

매일 아침 나는 너로 태어나 너로 죽는다

 

 

<그리움의 총량>/천년의 시작 출판사

안녕하세요?
♡정보보호의 날 건강 관리 잘하시고 보람 되게 보내세요♡
멋진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
공감 추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비밀댓글입니다
대박 시인이 되시기를요~!!
비밀댓글입니다
잘 지내시지요?
늘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전히 블로그 활동 많이 하시나요?
예전과 달라진 글쓰기 시스템에
모처럼 포스팅하는데 애먹었어요 ㅎㅎ

코로나에 건강 조심하시고
언젠간 뵐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한 번 접해보고 싶은 시집 중 하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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