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섬

임현철 2007. 6. 26. 12:35

“이 정든 집 버리고 어딜 간다냐?”
[알콩달콩 섬 이야기 24] 여수시 돌산도 ① - 탯(胎)자리

 

전남 여수시 돌산대교 왼편의 진두마을이 탯자리가 묻힌 곳입니다.

 

그러니까 34년을 살았던 탯(胎)자리를 떠나온 지 어~언 10년이 되었습니다. 결혼 생활과 함께 나고 자랐던 고향을 떠나 살기 시작했으니, 가정을 꾸린 지 벌써 10년이 되었군요.

 

그러고 보니 “느그들을 키웠던 이 정든 집을 버리고 어딜 간다냐?” 하시던 부모님께서 우리 형제들의 태어났던 그 집을 떠나 사신지도 어느 덧 4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부모님께서 몬네몬네 하시며 떠나지 못하시던 전남 여수시 돌산의 고향집을 버린 건, 돌산 제2대교 건설에 따른 도로건설로 인한 집 철거가 원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 만인 지난 24일 고향의 탯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도 왜 그 집을 가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딱히 이유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부모님이 계시지 않기에, 헐린 집을 대하는 것에 대한 미묘한 거부감 때문이라 해야겠지요.

 

도로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올 3월, 앞집에 살던 형을 여수시 금오도로 가던 배 위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이사하고 처음 만났는데 그렇게 반갑고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하는 일을 묻고 그랬습니다.

 

“야, 너 집에 가 봤냐?”
“아뇨. 아직 안 가봤습니다. 형은요?”

 

“가 봤지. 느그 집하고, 우리 집, 옆 집, 느그 뒷집은 헐려 있드라. 얼마나 서운하던지….”
“그래요….”

 

- 가고프고, 보고프고, 돌아가고프고, 찾아가고픈 고향집

 

그러고 말았던 고향 집을 찾게 된 건, 2002년 5월 20일 첫 기사를 쓰기 시작하여, 올 6월 25일인 어제까지 323개의 기사를 쓰면서, 나름대로 ‘섬 이야기’ 90개를 쓰는 동안, 울릉도ㆍ제주도ㆍ거문도ㆍ손죽도ㆍ남해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을 돌고 돌아, 드디어 ‘내 고향~ 남쪽바다’ 돌산도에 닿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고/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웃고 지내고저/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 ‘이은상’ <가고파>

 

스산한 탯자리를 보며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고향은 언제나 가고프고, 보고프고, 돌아가고프고, 찾아가고픈 곳입니다. 그래서 남북 이산가족과 새터민, 수몰민들이 절절히 눈물을 훔치고 가고파 하는 것이겠지요. 이제야 그 마음 헤아릴 것 같습니다. 가고프면 언제나 갈 수 있는 사람과 같을까, 마는.

 

- 고향 사람과의 인연이 또 다시 탯자리를 찾게 만들다

 

각설하고, 탯자리에 대한 글을 쓰게 된 원인은 고향 사람들 덕분입니다. 7월에는 ‘섬 이야기’ 글, ‘고향 돌산도에 대해 써야겠다’ 내심 마음먹고 있었지만 언제부터 쓸 것인지 장담할 수 없었는데 말입니다. (이는 다음 기사로 나올 예정입니다.)

 

지난 24일 오전, 돌산대교를 넘자마자 왼편 돌산 나루터가 있던 진두(津頭)로 접어들었습니다. 장군도를 마주하던 집들이 헐려 훵합니다. 길을 넓히는 공사 중입니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배를 기다리던 나루 대합실마저 온데 간데 없습니다. 고등학교까지 배를 타고 다녔었는데….

 

태어나 탯줄을 묻은 ‘탯자리’에 가까워지자 사알~짝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어떤 모습일까? 처량하고 쓸쓸하지만 않았으면….

 

동행했던 이장이자 친구 형님에게, “사진 좀 찍을 랍니다” 했더니 “그러소. 자네 탯자린데…”합니다. 묘한 여운이 입니다.

 

막상 대하고 보니 씁쓸합니다. ‘아! 이런 모습 안 보려고 여길 찾질 않았구나!’ 싶을 만치 일장춘몽(一場春夢)입니다.

 

20여년 전, 집에서 누이와 함께...

 

고려 말~조선 초 학자였던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과 조선 중기 선조 때의 학자였던 백호(白湖) ‘임제(林悌)’ 선생의 시조가 생각납니다.

 

"오백년(五百年)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왜 이 시조가 떠올랐는지…. 시조, 민요 등 3ㆍ4조 가락의 맛은, 역시 처량하고 황량하고 구슬픈 일장춘몽을 그리는 데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거~이, 누구데? 아이, 어디 손 한 번 잡아보자!”

 

집은 사라지고 그야말로 잡초만 무성합니다. 가족들과 나눴던 이야기며, 벗들과 뛰어놀던 마당…. 곱게 키우던 나무, 어머니의 손 떼 묻은 장독 어느 하나 남아난 것이 없습니다. 기억에만 작은 파편으로 남아 있을 뿐…. 그리고 앞집, 뒷집, 옆집도 사라졌습니다. 그 흔한 디카 한 장 찍지 못했습니다.

 

이발소와 구멍가게를 겸하던 곳에서 여러 동네 분들을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눴습니다. 우리 집을 지어주고, 대문도 달아줬던, 아랫목만 뜨끈뜨끈하던 구들을 고쳐 주던 목수 아저씨 부부도 만났습니다.

 

“안녕하세요. 잘 계시죠?”
“… 워~ 매~ . 이거~이, 누구데? 아이, 어디 손 한 번 잡아보자!”


“녜, 그래요. 여전히 건강하시네요?”
“아이, 왜 그리 한 번도 안 왔데. 어머니랑 아버지는 다녀가셨는데….”


“엎드리면 코 닿을 덴데도 살다보니 안 와지데요. 이제 자주 올께요.”
“그래. 간혹 얼굴이나 보고 살자!”

 

당시, 집에서 여수시 종화동이 그대로 보였습니다.

 

철거 이후, 고향 집을 처음 방문한 날 동네 이발사며, 목수를 만난 건 우연을 가장한 필연 같기도 합니다. 이게 인연이겠지요.

 

그리고 이틀이 지난 오늘 새벽, 고향 집 꿈을 꾸었습니다. 새벽 1시에 잠이 들었는데 덕분에 5시에 깼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 잘못을 저지른 막내를, 가족들이 쉬쉬하며 감싸 안고 있는데 집에서 함께 산 적 있는 후배가 쫓아와 잘못을 질책하는 그런 이상야릇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내용과 상관없이 참 흐뭇했습니다. 왜냐면 친구들과 동네를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와 대문이며, 장독대며, 정원이며, 네 칸 방이며, 아버지, 어머니, 큰 누나, 작은 누나, 형, 형수, 아이들, 방을 한 번 세줬던 적 있는 후배까지 나온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무 때나 고향 집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로로 변했다면 괜찮지만 스러져가는 모습 보기 싫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꿈속에서 본 가족의 사랑이면 충분합니다. 언제까지 그 탯자리는 마음에 남을 것입니다.

 

부모, 가족, 친지, 친구 등이 그리워지는 날입니다. 안부 전화나 한 번 씩 돌려야겠습니다. 이제야 철이 나는지 원…. 즐거운 날입니다.

 

제2 돌산대교 건설로 인한 도로건설로 집은 철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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