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소해 장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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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2014.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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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해(宵海) 장건상(張建相)

자(字)는 찬성(贊成), 호(號)는 소해(宵海). 월포(月浦) 현도(顯道)의 4자(子) 선교랑(宣敎郞) 회일(會一)의 10대손(代孫), 참봉(參奉) 운원(雲遠)의 4자(子). 1882년 12월 19일 칠곡(漆谷)에서 출생(出生), 부산(釜山)으로 이주(移住)하였다.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政治學科)에 입학(入學) 수학(修學)하다 중퇴(中退)하고, 미국 인디아주 발프레이조 대학 법학과(法學科)에 입학 1912년에 졸업(卒業) 후,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김규식(金奎植)을 만나 동제사(同濟社)에 가담(加擔)하여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첫발을 디뎠다. 임정(臨政) 외무위원(外務委員)으로 활동(活動)하다가 1921년 소련 이루크츠에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加入) 임정의 의열단(義烈團) 고문(顧問)으로 일본인 살상(殺傷) 폭탄((爆彈) 제조(製造)를 지휘(指揮)하였으며, 일제(日帝)에 체포(逮捕)되어 상해 주재(駐在) 일본영사관(日本領事館)과 부산형무소(釜山刑務所)에서 모진 고문(拷問)을 받았으나 끝내 굴복(屈服)하지 않아 기소유예(起訴猶豫)로 석방(釋放)되었다. 그 후 비밀리에 탈출 중경(重慶) 임시정부의 의정원(議政院) 의원 학무국장으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여운형(呂運亨) 노선(路線)을 지지(支持)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民議員)으로 부산에서 무소속(無所屬)으로 출마(出馬), 경찰(警察)의 갖은 방해(妨害)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네 번째로 많은 득표(得票)로 우리나라 최초로 옥중(獄中) 당선자(當選者)가 되었다. 1957년 11월 박정호(朴正鎬) 간첩사건(間諜事件)에 연루(連累)되어 수감(收監)되었으나 무죄(無罪)로 석방(釋放)되었고, 5·16군사정변(軍事政變)직후 구속(拘束)되었으나 박정희(朴正熙)의 배려(配慮)로 병보석(病保釋)으로 석방(釋放)되었다. 초대(初代) 내각(內閣) 構成時(구성시) 이승만(李承晩)이 입각(入閣)을 요청(要請)했으나, 남한(南韓)만의 단독정부(單獨政府) 수립(樹立)으로 남북분단(南北分斷)을 염려(念慮)해 거절(拒絶)하였다. 1974년 5월 14일 서울의 오두막집에서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하다가 93세로 영면(永眠)하였다. 장례식은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루었고 묘지는 서울 신세기 공원묘지에 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와 분단(分斷)시대에 정치(政治) 한복판에 선 건국초기(建國初期)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며 사상가(思想家)이다. 1986년 건국훈장 대통령 장에 추서되었다. 부산 용두산 공원에는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부산시민과 국민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다

출처 : changjh3692
글쓴이 : 목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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