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창랑 장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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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2014.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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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랑(滄浪) 장택상(張澤相)

선생의 휘(諱)는 택상(澤相), 字는 치우(致雨), 호(號)는 창랑(滄浪)으로 인동 장씨 31세(世) 이고 여헌 선생 11대손이다.

선생은 고종 30년(1893)에 경북 칠곡군 북삼면 오태동(구미시오태동)에서 경북 관찰사 승원(承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숭록대부(崇祿大夫) 형조판서이다.

7세에 한학(漢學)을 배우기 시작하여 13세에는 벌써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읽었고 사기(史記)와 당송(唐宋) 팔대가(八代家)의 글까지도 통독하였다. 13세 때 일가 어른 장태화(張太和)로부터 중국의 강남해(康南海) 선생의 저서와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얻어서 읽고 한학으로는 급변하는 세계에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14세 되던 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로 올라가서 우남학회(雩南學會)에서 신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장차 국가를 위해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5세에 삭발하고 그해 가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야마구찌현(山口縣)에서 소학교에 입학하여 여덟 달 도안 공부하다가 일본 수도(首都) 도오교오에서 영어와 수학을 공부하는 한편 일본말을 더 배워 와세다(早稻田)대학에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선생은 도오쿄오에서 먼저 와서 유학하고 있던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와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등 유학생들과 함께 배일(排日)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망국의 비통한 심정을 주체할 길이 없어 비장한 각오로 와세다 대학을 중퇴하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 간 것이 18세 때의 일이다. 상하이에서 윌리엄리(李魏林)라는 한국 사람의 보호를 받으면서 그의 집에서 함께 있는데 부친으로부터 돈이 부쳐왔다. 그래서 소련 총영사의 도움으로 소련의 불디보스토크를 거쳐서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우연히 부친의 친구 이상설(李相卨) 열사를 만났다. 이상설 열사는 선생의 영국유학 걔획을 듣고 모스코바 병원에 입원중인 한말 육군 참령 이갑(李甲)씨에게 소개장을 써주었다. 선생은 이 소개장을 들고 이갑씨를 찾아가 그의 주선으로 독일을 거쳐 영국 런던에 도착한 것이 1911년 3월이다. 선생은 여기서 라틴어를 공부하는 한편 대학 입학을 위하여 독일어를 공부 하였다.

그리하여 1913년 21세 때 에딘버러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이관용(李灌鎔)씨와 함께 상해 임시정부의 특파원인 김규식(金奎植) 구미위원(歐美委員)을 모시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전심전력하였다. 구미위원회는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우선 유럽 전역에 살고 있는 동포를 보호하고 규합하여 단결하도록 하는 한편 한국의 불행한 실정을 알리는 호소문을 작성하여 일차 대전후에 개최되는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이때 일본 대표의 방해로 호소문의 접수가 어려웠는데 프랑스 수상의 도움으로 간신히 접수되어 세계 각국에 일본의 부당한 병합과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소련 풀딕주에서 망국유민의 서러움을 안고 푸대접을 받으면서 고생하고 있던 동포 남녀 340여 명을 프랑스로 이주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포에게 여권을 발부하여 자유로운 여행과 활동을 할 수 있게 도왔다.

1919년 3월 1일 선생이 에딘버러 대학에 재학 중 조국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나 격열한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여기에 호응하기 위해 해외의 유학생과 젊은 청년들이 미국 뉴욕에 집결하여 독립투쟁의 방향과 방법을 논의하게 되었다. 선생도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李承晩) 조병옥(趙炳玉)씨 등과 초면 인사를 하게 되었고 이들과 함께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굳게 맹세했던 것이다. 회의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온 선생은 주로 구미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29세 때 외국유학을 끝낸 선생은 실로 10여 년 만에 조국에 돌아와 경향각지를 오르내리면서 동지들과 울분의 나날을 보내다가 1930년에 민족 자본으로 설립한 경일은행(慶一銀行)에 상무로 취임하여 민족자본 육성에 일조를 하였으나 이것 역시 일본의 방해로 도산되고 말았다. 그것은 일제의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 가 설립되어 유형무형의 압박을 가해왔기 때문에 견딜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1938년에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이 발생 하였다. 이 흥업구락부는 독립투사들의 모임이었는데 일제는 이를 반일 단체로 규정하고 관련인사를 검거 투옥하였다. 이 무렵 선생은 한국 청년들의 모임인 청구구락부(靑丘俱樂部)에 속해 있었는데 흥업구락부인사들과 함께 투옥되어 약 반년 가까이 구금되어 있으면서 심한 고문을 받았는데 선생은 고문을 잘 이겨내는 3인조의 한 사람으로 이름이 났었으나 고등계 형사가 “네가 장택상이냐?”하면서 얼굴에 침을 탁 뱉는 수모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고 자서전에서 술회하고 있다.

이 시기는 세계이차대전이 치열하였고 일본군은 연합군을 상대로 격렬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때라 한국 사람에게 대한 감시의 고삐를 잠시도 늦추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은 출옥하자 고향 마을 오태에 칩거하면서 전쟁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본은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였고 우리 한국은 일본의 쇠사슬에서 풀려나 해방을 맞게 되었다. 선생은 해방의 기쁨을 안고 즉시 상경하여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외교부장(國民大會準備委員會 外交部長)을 맡아 국내치안과 건국준비(建國準備)를 위해서 동분서주하였다.

일본 총독부가 본국으로 쫓겨 가자 우리 국민들은 해방의 기쁨으로 흥분하였고 행정과 치안이 마비되어 사회가 어지러워졌다. 일제 때 자주독립을 위해 싸우던 애국지사들은 좌익과 우익으로 분열되어 싸우는 바람에 국민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총독부가 물러가고 곧바로 미군이 들어와 군정(軍政)을 실시하였으나 무정부 상태와 같은 혼란을 걷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군은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사회 질서 유지 임을 알고 1946년 1월13일 결단성 있는 선생을 수도경찰청장에 임명하여 극도로 혼란한 사회질서를 바로잡게 하였다. 선생은 취임하자 경찰인력을 증강하고 불법과 폭력이 난무하는 수도 치안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그리고 좌익세력의 준동을 경계하면서 학생동맹(學生同盟)의 난동을 진압하였고 정판사(精版社) 위조지폐 사건을 적발하여 국내 경제 질서의 교란과 공산당의 자금조달의 획책을 분쇄 하였다. 정판사는 일제가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곳이다.

선생은 군정하(軍政下) 혼란기에 경찰청장으로 있으면서 여러번 저격을 당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두려워하거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불철주야 불순분자들과 맞서는 위기일발의 나날이었다. 1946년 11월 13일 출근하던 중 괴한으로부터 수류탄 습격을 받았고 1948년 1월 24일에는 출근길에서 소이탄(燒夷彈) 공격을 받았으나 조금도 겁내지 않고 차에서 뛰어내려 권총을 뽑아들고 괴한을 추격했던 것이다. 다행하게도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고 경호원도 무사했던 것이다. 이렇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치안에 전력한 결과 이해 5월 10일에 유사 이래 최초로 치르게 되는 초대 국회의원 선거가 순조로웠고 8월 15일 정부수립이 순탄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선생을 전국의 으뜸가는 공로자라고 하였다.

선생은 초대 외무장관에 취임하였다가 대통령과 뜻이 맞지 않아 석 달 만에 사퇴하고 두 번이나 보궐 선거에 출마 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0년 5월30일 제2대 민의원(民議員) 선거 때 고향인 칠곡군에서 당선되어 국회부의장과 탄핵제판소 의장에 피선되었다. 국회 부의장이 된 지 한 달도 못되어 6.25사변을 만나 서울이 함락되자 천신 만고 끝에 부산 임시수도에 와서 정신을 차리고 국회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해 9월 군사원조 요청을 위하여 제5차 유엔총회에 임병직(林炳稷) 외무장관 김동성(金東成)의원과 함께 파견되어 각국 대표와 접촉하여 전쟁 상황의 어려운 실정을 호소하고 그들의 협조를 구했던 것이다. 한국은 회원국이 아닌데다가 소련 대표의 방해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선생은 자서전에서 말하였다. 귀국할 무렵 미국 트루만 대통령을 면담하고 전쟁의 참담한 실정을 호소하면서 모포 50만장을 요청 했더니 트루만 대통령은 즉석에서 국무장관에게 30시간 내에 모포 50만장을 한국으로 수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듬해 9월 재6차 유엔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장면(張勉) 국무총리와 임병직 외무장관과 함께 파리로 가서 4개월 반 동안이나 다방면으로 활동하였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한국은 비회원국으로서 자명도가 낮았고 또 공산국가들의 방해에 기인함이 많았다. 만리 타국 프랑스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2월에 귀국하면서 제2의 고향인 영국에 들려 며칠 전에 서거한 영국 황제를 한국정부의 대표로 조문하고 미국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이해 5월에 내각제 개헌 문제로 정국이 불안하고 정치파동의 조짐이 엿보이는 와중에서 제3대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정국 수습에 사력(死力)을 다했다. 그러나 국민당이 제출한 내각책임제 개헌안과 정부에서 제출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가운데 이승만 박사는 정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공공연하게 국회의원을 탄압하였다. 국회 부의장에다 국무총리를 겸직하고 있는 선생은 이 험악한 정국을 수습해야함을 통감하고 발췌개헌안을 입안하여 간신히 통과시켜 난국을 타개하였다.

선생은 국무총리로 재임하면서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혁혁한 업적을 쌓았다. 그 하나는 공무원의 기강확립이었다. 이때 공무원들의 근무자세가 말이 아니었다. 이것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의 공무원인가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그래서 선생의 취임 제일성(就任第一聲)이 공무원 기강확립이었다. 그리하여 “전시생활 개선에 관한 국무총리령” 을 제정 공포하여 공무원들의 다방 출입이나 요정 출입을 금지하였다. 그 결과 공무원 사회는 정화되었고 비위공무원 4900여며 명을 척결하였는데 이 중에는 국방부차관도 있었다. 다음으로 시행한 것이 대여양곡貸與糧穀) 제도였다. 이것은 기아(飢餓)에서 허덕이는 영세민을 보호하는 제도로서 정부수립이래 선생이 처음 실시하였다.

1954년 3월에 실시한 민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11월에 있었던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파동 후 호헌동지회(護憲同志會) 결성에 참여하여 사사오입 개헌의 부당성을 성토하고 헌법수호에 앞장섰던 것이다. 사사오입 개헌은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위한 개헌으로서 11월 17일에 부결 선포한 법안을 사사오입하면 정족수가 된다고 하면서 그 이튿날 번복하여 가결을 선포한 것이다. 1955년 9월 달에는 무소속의원들을 규합하여 무소속구락부를 발족하였고 1956년 9월에는 공화당(共和黨)을 발기하여 이범석(李範奭) 배은희(裵恩希)와 함께 최고위원에 피선되었고 1957년 1월에는 이승만 대통령 탄핵 경고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5월에는 국민주권옹호 투쟁위원회 주최 장춘단 집회가 열렸는데 선생은 여기서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를 성토하고 국민주권 회복을 위해 열변을 토했던 것이다.

1958년 1월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농림장관으로서 토지개혁을 성공리에 끝마치고 국회부의장과 2, 3,대 대통령후보로 출마 하고 진보당(進步黨)을 창당하여 그 위원장으로 활약하던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씨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자 경찰청장으로서 좌익타도를 진두지휘하던 선생이 조봉암은 사회주의자이기는 하나 국가를 배반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그의 구명운동에 나섰으나 1959년에 끝내 사형되었다. 선생은 자서전에서 그를 구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그때 일이 성사되지 못한 것은 “당시 법무장관의 배신과 식언” 때문 이라고 회고하였다.

출처 : changjh3692
글쓴이 : 목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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