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유헌 장석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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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2014.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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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遊軒) 장석룡(張錫龍)

 

선생의 휘(諱)는 석룡(錫龍) 자(字)는 진백(震伯) ,호(號)는 유헌(遊軒)이다 순조23년(1823) 10월 17일에 인동현 오산리(仁同縣吳山里:龜尾市吳太洞)에서 규장각 제학공(奎章閣 提學公:諱 學樞)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4세 때 11촌 숙인 판서공(휘 木+悳적)에게 입양 되었다.판서공은 제학공과는 4종(10촌)인데 내외분이 구몰(俱沒)하여 절손(絶孫)이 되자 제학공이 같은 5대조의 후손으로서 의리상 그냥 둘 수 없다면서 자기의 둘째 아들 석룡(錫龍)으로 하여금 그 뒤를 잇게 한 것이다.선생은 양가(養家)의 단절된 대(代)를 통감하고 매양 제사 때는 정성을 다하였다.

오산리(吳山里)는 여헌 선생의 셋째 손자인 산음현감 옥(山陰縣監 鈺)이 처음으로 입향(入鄕)한 마을로서 그 자손들이 세거(世居)하고 있다. 선생은 산음현감공의 7대 손이다.

7세 때 조부 참판공(諱 濠)에게 글을 배우고 8세 때는 글 짓는 법을 이해하여 비오는 것을 보고 즉석에서 글 두 구(句)를 지었다. 12세 때 논어를 읽었는데 백씨 석봉(錫鳳) 계씨 석구(錫龜)와 함께 열심히 공부하였다. 이것을 본 부친 제학공과 모친 정부인 김씨는 넉넉지 못한 가세(家勢)에 베를 짜서 살림을 꾸리고 쌀을 팔아 책을 사주면서 일념으로 학문을 권장하였다. 선생은 마음 속으로 “부모님의 마음을 체받지 않으면 어찌 사람이라고 하겠는가,”하면서 침식을 잊고 공부에 매진 하였다.

15세 때 외가 동네(道塘)에서 외사촌 그리고 마을 수재들과 함께 정문(程文:과거 답안)을 지으면서 과거 공부를 했다. 16세 때는 주역 계사전(周易 繫辭傳)을 읽었고 20세 때 안동 초택(抄擇:여럿 중에 가려 뽑음)에 참여 하였다. 이해 겨울에 영남 감영 복시에 나아갔고 21세 겨울에는 임은 오양정사(林隱 五養精舍)에서 허상사 조(許上舍 祚)와 함께 글을 읽었고 22세 여름에는 약목 동락당(若木 同樂堂)에서, 23세 때는 신곡 사이당(新谷四宜堂)에서 각각 과거 공부를 했다.

현종 12년(1846 ) 24세 때 정시(庭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3월에 조봉대부(朝奉大夫))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에 제수되고 임금께서 일산(日傘:양산)과 쌀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휴가를 받아 고향에 돌아와 부모님께 인사를 올리고 집안 어른을 찾아뵈었다. 여름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승진되고 이내 전적에 제수되었다. 10월에 고반동(考槃洞)을 지나다가 동강(諱 宇禺+頁) 김선생 운(韻)에 차운 허였다. 25세 때 사헌부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正言)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고 용양위 부사직(副詞直)에 체직(遞職:직책이 바뀜)되었다. 6월에 용양위 부사과(副司果)를 배수 하였다.

26세 되던 정월달에 서울에 올라가서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고 태묘(太廟)에서 거행하는 작헌례(酌獻禮)에 참여하였다. 희생을 점검할 때 임금님께서 승지(承旨) 윤치영(尹致英)을 돌아보며 물으셨다.

“저 젊은 문관은 누구인가”

“정언 장석룡(張錫龍)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선생을 눈여겨보셨다. 3월에 증광문과 회시(增廣文科 會試)를 보이는데 선생이 7시관으로 참여하였다. 좌승지 윤치영과 우승지 이유원(李裕遠)이 시험 일을 주관하면서 출제할 때 반드시 선생과 상의하였다. 그리고 전시(殿試:임금님이 임석한 마지막 시험) 대독관(對讀官)으로도 참여 하였다. 대독관이란 과거 시험 때 응시자가 작성한 답안지(墨卷)을 대조하여 착오된 것을 바로잡는 관원이다.

이해 7월에 26세라는 앳된 나이에 해남현감(海南縣監)에 제수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기실(記室:비서)을 데리고 가지마는 선생은 혼자 말을 타고 부임했다. 신임 사또의 이런 거동을 보고 공금 4만금을 횡령한 아전이 두려워하면서 4달 만에 공금을 다 채워서 장부를 깨끗이 닦아 올렸다. 태형(笞刑) 하나 가하지 않고 부정을 바로잡은 선생을 보고 순찰사 남병철(南秉哲)이 “첫 정사가 명민(明敏)한 것을보니 한 점 고기로 온 솥의 국맛을 알겠구나” 하면서 칭찬하였다. 이듬해 6월에 현종 대왕이 승하하시자 객관(客館:왕명을 받고 지방에 나가는 관원이 묵는 집)에 나가서 복을 입었다. 그리고 고을 안에 있는 연동(蓮洞)에 가서 고산(孤山 諱 善道) 윤 선생의 사당에 알묘했다. 8월에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의 겸직을 배수(拜受)하였는데 외직에 있으면서 내 직을 겸임한다는 것은 특별한 예우이다. 선생이 현감으로 있을 때 고창(高敞)에서 향시(鄕試)가 열렸는데 상시관(上試官) 신좌모(申佐模)가 자문을 구하기 위해 선생을 방문하였고 선생은 시험 감독관으로 참여했다. 또 광주(光州) 동당시(東堂試)에도 참여하였다.

철종 2년(1851) 29세 때 충청도 황간(黃澗)으로 유배 되었는데 그럴 만한 뚜렷한 잘못이 없었다. 다만 어떤 사람이 개인적인 원한으로 어사에게 부탁하여 선생을 논계(論啓:잘못을 아룀)하게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유배 명령이 내린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순순히 명에 따랐으나 선생에게 큰 잘못이 없다는 것이 밝혀지자 이듬해 5월에 풀려나 돌아와서 여러 관직에 제수되고 경연(經筵:임금에게 경서강의)에도 참여 하였다. 32세 되던 2월에는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에 제수되어 회재(晦齋 諱 彦迪) 이문원공(李文元公) 묘(廟)에 내리는 제문을 지어서 바쳤다.

33세 되던 3월에 생모 정부인 김씨의 상을 당했다. 선생은 병보(病報)를 듣는 즉시 밤낮으로 달렸으나 집에 이르기 전에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없이 달려가 통곡하였다. 그리고 상기(喪期) 내내 임종하지 못한 불효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가슴 아파했다. 35세 되던 5월에 상을 마치자 윤 5월에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어 역마를 타고 소환에 응했다. 이렇게 신속하게 직첩(職牒)을 받게 된 것은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임금님께 직접 아뢰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어전에 나아가 사은숙배하고 차자(箚子)를 올려 자주 신하를 불러 경서의 강론과 학문을 토론할 것을 진언하였다.

“하루에 세 번 신하들을 접견하여 그들의 말을 듣고 간하는 것을 따르면 선을 행하지 못할 것이 없고 이루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강석을 자주 베푸시면 팔방의 백성들이 전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없고 강하는 자리를 게을리 하시면 팔방의 백성들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신하들을 자주 불러서 학문을 토론하시고 좋은 방책을 묻고 대답하게 하시어 우임금의 촌음을 아끼는 공을 법으로 삼으시고 탕임금의 날로 세롭게 하는 덕을 본받으소서”

하였다. 이에 임금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술한 말은 절실하고 당연한 것으로서 마땅히 유념하겠다”고 하셨다.

이해에 상계군 담(常溪君 湛)을 개장(改葬)할 때 임금이 내리는 제물을 제술하여 바쳤다. 상계군은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恩彦君)의 아들이다. 외삼촌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왕위 계승이 추진되었으나 홍국영이 실각하자 상계군은 죄인처럼 지내다가 정조 10년에 음독 치사하였다. 그래서 그때의 장례는 소홀했던 것을 수십 년이 지나 철종 임금 대(代)에이르러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는데 왕이 제문을 내리게 되고 그 제문을 선생이 제술한 것이다.

철종9년 선생에게 사헌부 집의(執義)가 제수되었다. 이해 하늘의 별이 비정상적으로 나타나는 재앙이 있었다. 이를 괴이쩍게 여긴 임금님께서 선생을 불러 하문(下問)하셨다. 선생은 경건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답하였다.

“주역의 계사전에서 말하기를 하늘이 징조를 나타내 보이면 성인이 법으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법으로 삼는다는 것은 자신을 살피고 닦는 것입니다. 임금님이 살피고 닦는 것은 학문을 강론하는데 벗어나지 않습니다.”

고 말하면서 임금이 수신하고 성찰해야 할 조목을 들어서 답하였다. 임금께서는 말씀 하시기를

“말한 것이 진실하고 정성스럽고 진지하니 내 마땅히 유념 하겠다”

고 하였다.

9월에 현풍현감에 제수되었다. 도임하자 백성을 어루만지고 보살펴서 현민이 모두 안심하고 수령을 따르게 되었다. 선생은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학문을 일으켜 고을의 풍습이 현저하게 달라졌다. 관찰사 홍우길(洪祐吉)이

“정사를 은혜롭게 베풀고 학문을 윤택하게 하였다.”

고 하면서 선생을 칭찬하였다. 선생은 조정의 특명으로 접위관(接慰官)이 되어 부산에 내려가서 영가대(永嘉臺)를 유람했다. 접위관은 외국 사신을 맞아 접대하는 임시직이다. 이때 아마 일본 사신을 영접하러 간 것이 아닌가 생각 된다.

이듬해 김 한원당(金寒暄堂 諱 宏弼)선생을 제향하는 도동서원을 배알하고 유가사(瑜珈寺)에서 반송을 보고 한수를 읊었다. 유가사는 신라 흥덕왕 2년(827)에 창건된 유서깊은 고찰이다. 7월 기망일에는 소동파(蘇東坡)의 적병강 뱃놀이를 상기하면서 김진사 규한(金進仕 奎漢) 규응(奎應)과 함께 도동 앞강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38세 되던 윤삼월에 내직으로 옮겨져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司諫)에 제수되고 이듬해 동당 회시에 6시관으로 참여하였다. 이해 겨울에 군자감(軍資監) 정(正)이 되었다.

40세 되던 해 3월에 병조좌랑에 제수되고 곧 이어 통정대부에 올라 동부승지가 제수되었고 4월에 부호군을 사임하고 귀향하여 근친(覲親)하였고 고향의 여러 선비들이 세심당(洗心堂)에 모여 함께 여름 공부를 하였고 7월 기망일에는 오산 앞강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철종 4년 12월에 철종대왕께서 승하하시니 상복을 입고 반렬에서 곡한 후 철종대왕의 생전을 회상하면서 시를 지었다.

머리 돌려 창오를 바라보니 눈물이 먼저 흐르고 回首蒼梧先下淚

소신이 경연에 참여한 지 여러 해였습니다. 小臣經幄己多年

하면서 군신의 의리와 정리를 술회(述懷) 하였다. 창오는 순임금이 순행 도중 붕어한 곳이다.

고종이 즉위하시자 정월달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는데 네 조목이다. 첫째는 언로(言路)를 개방할 것 둘째는 목민관을 가려 임명할 것 셋째는 의장(衣章)을 바르게 할 일 넷째는 명기(名器)를 신중하게 할 일 등인데 말이 매우 간결하고 올발랐으며 금기(禁忌)하는 사항이 많았다. 4월에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정월에 병조참의 공조참의를 연달아 제수하였다.

고종3년(1866) 44세 때 좌부승지에서 좌승지로 옮겨 앉게 되었다. 이해 8월에 프랑스군이 침입하는 양요(洋擾)가 있었다. 이때 강화도에서는 프랑스군이 상륙하여 일대 격전이 벌어지고 지방과 도성에서는 민심이 흉흉하였다. 백성들은 피란 떠날 준비를 하고 관리들은 도망쳤다. 이때 선생은 승지로서 임금을 모시고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위기에 대처했다. 임금님께서 어장(御將) 김기석(金箕錫)을 돌아보고

‘선인문(宣仁門) 밖에 장석룡(張錫龍)이 있어서 내가 근심할 것이 없다.“

고 하셨다.10월에 돈녕부 도정에 제수 되었다. 이해에 동생 석구의 아들 승원(承遠)을 데려다 양자로 삼았다. 고종 8년에 부친 제학공이 백씨의 임지인 천안 관아에서 작고하자 삼형제가 천안 객관에서 예를 갖추어 고향으로 반장하였다. 복을 마치자 고종 10년(1873)에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는데 이에 앞서 청천당(聽天堂)의 시호를 요청한 일이 있는데 처리가 되지 않아 선생이 상경하여 다시 소를 올렸으나 역시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이듬해 겨울에는 문강공(文康公) 승무소(陞廡疏)를 계획하였으나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문강공의 승무는 역대 조정에서 논의되어 오던 것이다.

53세때 울산부사에 특별 제수되었다. 선생이 제수되기전 울산은 아전이 여러 만금을 횡령하고 도망치는 등 폐단이 많아서 민심이 소란하고 관리를 불신하게 되었다. 이 난맥상을 능히 수습하는 데는 선생이 적임자라는 것이다. 선생은 부임하자 장부를 조사하고 부내 실정을 살펴서 완급을 가려서 일을 처리하니 부조리가 쉽게 수습되어 부민들이 안심하고 따르게 되었다. 선생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어업을 돕고 농상을 권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장려하는 시책으로 매월 강(講)하고 열흘마다 시험을 보였다. 그리고 울산에 있는 태화루(太和樓) 중수기문과 재천천(在川亭) 기문을 찬하였다.

여름에 날이 크게 가물어 선생이 기우제문을 지어 몸소 기우제를 지냈다. 그러나 이 치성도 효험이 없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었다. 선생은 창고를 열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곡식을 나누어주고 큰 가마솥을 걸어 국밥을 해서 먹이는 일들을 이속(吏屬)들에만 맡기지 않고 몸소 지휘하였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경상감영에 보고하여 구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대기근(大飢饉)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다.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부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고종 21(1884) 9월에 환갑이 넘은 선생에게 이조참판이 특별 제수되었다. 선생은 사양하는 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10월에 정변이 일어났다. 임금님의 부름을 받고 급히 입궐하였다. 그러나 임금님은 북묘(北廟:관왕묘)로 피신하였다. 선생은 북묘로 가서 호종하였다. 이 정변은 김옥균 등 개화당이 일으켰는데 3일 만에 청국군에 의해 진압되고 임금님께서 환궁하셨다.

고종 27년(1890) 정월달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발탁되고 형조판서 겸 지 경연사 지 의금부사 지 춘추관사(刑曹判書 兼 知經筵事 知義禁府事 知春秋館事)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사퇴하는 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얼마 후 용양위 대호군(大護軍)으로 체직되었다가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분황제(焚黃祭)를 올렸다. 부황제는 사당에서 조상에게 제수받은 관직을 고하는 의식이다. 이해 12월에 의정부 당상(堂上)으로 특별 임명되고 이듬해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되어 공조판서 겸 지 돈령부사에 제수되고 정월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기로소는 70세가 넘는 정이품의 문관들이 모여서 놀도록 한 곳이다. 이해에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제수되었다.

76세 되던 해 주왕산을 유람했다. 선생은 일찍이 주왕산의 명성을 들어서 유상(遊賞)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고 또 선조 문강공께서 이 산을 유람하시고 주왕산록(周王山錄)이란 글을 남긴 곳이기에 많이 동경하던 차에 이때 마침 아들 승원(承遠)이 청송부사로 있어서 쉽게 관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선생은 주왕산의 승경을 감상하면서 시 한 수를 읊었는데 “선조께서 유상하던 더욱더 광채 있는 산(先祖登臨曾光彩) 후손이 장관을 보고 발걸음을 떼지 못하네(後孫壯觀若留期)” 하면서 선조를 사모하고 장엄한 절경을 보면서 경탄했던 것이다.

77세 되던 해 경모궁(敬慕宮)에 대하여 드러내어 밝힐 일이 있어서 봉함한 상소문을 올렸다. 임금께서 영의정 윤용선(尹容善)과 판윤(判尹) 이유인(李裕寅)에게 말씀하시기를 “경모궁 일은 영남에서 주관하였으니 장석룡의 청함이 옳다.”고 하셨다. 경모궁은 사도세자와 그 비(妃)의 사당이다. 12월에 장렬왕후 옥책문(玉冊文)의 서사관(書寫官)으로 특별 임명 되었다. 장령왕후는 인조의 계비(繼妃)이고 옥책문은 옥책에 새기는 송덕문이고 옥책은 제왕이나 후비(后妃)에게 존호를 올릴 때 그 덕을 기리는 글을 새긴 옥조각을 엮어서 책처럼 맨 것이다. 80을 바라보는 선생에게 중대한 일이 맏겨진 것을 볼 때 선생의 능력이나 인품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80세 때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에 제수 되었으나 상소하여 사퇴하였고 3월에는 숭정대부에 승진하였다. 이듬해 4월에 홍문관 학사를 배수(拜受)하였으나 곧 사퇴소를 올렸다. 소문(疏文) 끝에 문강공께서 인조조(仁祖朝) 병인년(1626)에 상소한 글 가운데 있는 “가언(嘉言)과 격론(格論)”을첨부해서 올렸더니 임금님께서 비답하기를

“사임하는 뜻을 알았다. 허락한다. 소 말미에 경의 선조의 가언을 첨부했는데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로서 귀감이 되는 것이다. 이 진술로서 경의 집안에서 힘쓰는 일을 다시 볼 수 있구나. 내 마땅히 자리의 오른쪽에 두고 살피겠다.”

고 하셨다. 전해인 임인년에는 청천당 중수상량문을 찬하였고 이해에 또 송당(松堂 諱 英) 박 선생 문집 중간 발문을 찬하였다.

고종 41년 (1904 ) 82세 되던 해 봄에 인동 교동에다 새 저택을 지어 이사 하였고 이듬해 인동읍지증보(仁同邑誌 增補)를 찬하였다고 했는데 선생의 문집 9권에는 인동읍지 지(仁同邑誌 識)만 있고 증보한 읍지는 보이지 않는다.

84세 되던 2월 22일은 등과(登科)한 갑일(甲日)이다. 그래서 10월에 인동 저택에서 경축하는 등과회갑연(登科(回甲宴)을 열었다. 이듬해 숭록대부(崇綠大夫:正1品)에 승진되었고 또 그 다음 해에는 규장각 제학(提學)에 제수되었으나 사임 하였다.

86세 되던 가을 노쇠한데다가 환후가 첨가되었다. 비록 와병중이나 손님이 오면 반드시 의관을 바르게 하여 접견 하였다. 또 병환 중임에도 불구하고 진주태후 허씨 유허비문(晉州太后 許氏 遺墟碑文)을 찬하였다. 10월 21일 임종을 앞두고 손자 길상(吉相)에게 유계(遺戒)를 받아 쓰게 하였다. 그리고는 길상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아 자리를 바르게 하여 다시 누어서 이연(怡然:안락하고 편안한 마음)히 서거하였다. 이듬해 인동부 동쪽 위봉사(威鳳寺) 남쪽 기슭 정좌(丁坐)에 장사하였다. 회장자가 500여명이나 되었다.

순조4년(1910)에 문헌이란 시호가 내렸다.“학문을 부지런히 닦고 묻기를 좋아하니 문(文)이요 (勤學好問曰文) 선을 실행하고 법도가 되니 헌이다(行善可紀曰憲)라는 뜻이다.

아들 승원(承遠)이 선생의 뜻을 받들어 정사년(1917)에 마진(馬津:말구리)에다 정자를 짓고 이우정(二憂亭)이라 하였다. 마진은 낙동강 중류에 있는 나루이다. 물과 산이 어우러져 경치가 썩 좋아 선생이 평소 자주 찾던 곳이고 벼슬에서 물러나면 은거할 곳으로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듬해 무오년에는 이우정에다 신도비를 세웠고 을축년(1925)에 문집을 간행하였다.

선생의 문집은 11권이고 부록으로 연보가 3권이다. 1.2.3권은 시와 만사로서 시가 370여 수 만사가 60여 수이다. 4권은 상소문 23편인데 여헌 선생의 향교 승무소가 한 편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사림을 대신해서 지은 것이다. 5권은 차자(箚子)가 2편 교서(敎書)가 2편, 표(表)가 5편, 전(箋)이 8편 진향문(進香文)이 1편, 고유문(告由文)이 7편 경연강의(經筵講義)가 21회 등이다. 이 5권의 문체(文體)들은 일반 선비의 문집에는 볼 수 없는 글들이다. 차자는 임금에게 올리는 간단한 서식의 상주문이고 교서는 임금이 훈유(訓諭)하는 글로서 이 문집에 있는 교서 .고유문 진향문 등은 선생이 지제교(知製敎)를 겸직하고 있을 때 지어 올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표는 문체의 하나로 임금에게 진정이나 하례를 위해 올린 글이라고 하고 전은 황후나 태자 그리고 왕에게 상주하는 글이고 진향문은 국상(國喪)이 났을 때 임금의 친척이 빈전(殯殿) 또는 빈궁(嬪宮)에 제전(祭奠)을 올릴 때의 글이다. 경전강의는 19일 동안 21회의 강한 기록이다.

6권에는 편짓글이 65통,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치제문이 2편, 제문이 10편, 축문이 8편이다. 치제문 역시 선생이 지제교(知製敎)를 겸직할 때 지어 올린 것으로 갑인년에 철종대왕이 회재 이선생의 사당에 제사를 올리게 한 것이고 또 하나는 정사년에 상계군(常溪君)을 개장할 때 철종대왕이 내린 제문이다. 축문은 동신제(洞神祭)축문이 1편, 기우제 축문 4편 있는 것이 특이하다

7권에는 상량문이 6편, 서(序)가 30편인데 상량문 6편 중에는 조상에 관련된 사사당사(四事堂) 상량문 부지암정사 중건 상량문 청천당 중건 상량문 등 세편이 있다.

8권도 서(序)가 6편, 기(記) 28편이다. 9권은 발문(跋文)이 7, 잠(箴)이 4, 명(銘)이 3, 잡저(雜著) 5, 예장(禮狀)이 5, 묘비명(墓碑銘)이 6, 비명(碑銘) 1, 묘표(墓表) 2, 묘갈명(墓碣銘)이 10편이다. 잡저 중에는 황계록(黃溪錄)이 있다. 황계는 황간의 옛 이름이다. 이 황계록은 선생이 29세 때 황간으로 유배 와서 쓴 것이다. 서두에서 황간은 미풍양속의 고장으로 경치가 빼어남을 찬양하면서 8대조 청천당 종 7대조 진주공 부자가 귀양살이하던 곳에 자신이 또 귀양 오게 된 불우함을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어 쫓겨난 유자후(柳子厚 諱 宗元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와 견주면서 그래도 자신은 유자후보다 낫다고 하면서 자위(自慰)를 하였다.

10권은 묘갈명이 17, 음기(陰記)가 2, 묘지명이 2이고 11권에는 시장(諡狀)이 2, 행장(行狀)이 9, 유사(遺事)가 3편이다.

부록 1권은 연보이고 2권은 가장 시장 신도비명 묘지명 등이고 3권은 기로소에 들어가서 사은숙배 할 때 차운한 시가 7수이고 등과한 회갑에 방연서(榜宴序)가 2편이고 만장 49, 제문 19편 등이다.

선생의 문집은 문체의 유형이 다양하고 내용 또한 풍부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부(賦) 논(論) 설(說) 등은 한 편도 없어서 선생의 사상적 측면은 엿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고 하겠다.

 

 

 

 

출처 : changjh3692
글쓴이 : 목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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