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의 학문(學問)과 학맥(學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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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2014.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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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의 학문(學問)과 학맥(學脈)

 

여헌 장현광(1554~1637)선생은 조선 중기 학자 문신이며 특히 성리학과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이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써서 학문과 덕행으로 추앙을 받았고 허목(許穆) 류진(柳袗) 정극후(鄭克後) 김응조(金應祖) 등 많은 후학을 길렀다.

 

조선조에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보은현감에 제수되어 1595년(선조28) 9월에 부임 하였다가 이듬해 2월에 병으로 돌아왔다. 읍민이 그 덕을 기려 생사당을 짓고 중봉 조헌과 더불어 흠모 하였다(보은군지). 이에 앞서 전옥서 참봉 예빈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보은현감을 사임한 뒤에도 경서교정청 낭청 경서 언해교정청 낭청으로 부름을 받았고 거창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 하지 않았다. 1602년(선조35) 11월 공조좌랑에 임명되자 부임하여 주역교정에 3일 간 참여했다가 12월에 돌아왔다.

 

광해군 때 합천군수 사헌부지평. 장령에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인제 등용에 따라 사헌부 지평. 장령에 재수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성균관 사업(司業)을 신설하여 특별대우를 하였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1624년 (인조2) 이괄의 난이 일어나 임금이 공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 행재소로 가던 도중에 난이 평정되고 대가가 궁중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향해 가던 도중에 사헌부 장령을 제수 받고 3월 5일에 입궐하여 사은숙배하였고 사헌부 집의 공조참의 등에 재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4월에 인동으로 돌아왔다.

 

그 후 이조참의 동부승지 등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4) 형조참판에 제수되어 4월에 대궐에 나아가 사은숙배하고 사헌부 대사헌에 이배(移拜)되었으나 사양하고 6월에 인동으로 돌아왔다. 1627년(인조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호소사(號召使)의 특명을 받고 관부에 나아가 각 고을에 의병장을 임명하여 의병을 모아 북진케 하였으나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였다.

 

그 후 이조참판 사헌부 대사헌이 제수되고 자헌대부에 승진 되어 지중추부사 공조판서 의정부 우참찬 등에 제수되었으나 노쇠하여 사퇴하였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의 소식을 듣고 놀라고 황급하여 고을의 젊은이를 시켜 도내에 통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자신의 가산(家産)을 출연(出捐)하여 본부(本府)의 의병을 도왔으나 굴욕적인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울분한 나머지 입암산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장현광은 7세 때 취학하여 곧 집자성구(集字成句)하게 되었고 9세 때는 자형인 송함 노수함에게. 14세 때는 집안 어른이고 11 촌 숙인 학거 장순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15~6 세경에 황극경세를 보고 이해(理解)가 됨으로 그 후로는 특별히 스승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

 

그리하여 학문의 성취를 보게 되자 독자적인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선현들로부터 학문적 영향은 받았겠으나 딱히 누구의 학맥을 이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한국학 진흥원 책임연구원 황병기는 “여헌 장현광의 도맥과 퇴계학 전승의 고찰”에서 여헌의 학맥이 애매한 것은 “여헌이 별다른 사승 없이 이른 나이에 자득의 경지에 오르고 여헌 자신의 적극적으로 누군가의 학맥에 편입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던 데에서 비롯된 것 같다”고 하면서 “여헌 스스로 자신의 도맥(道脈)을 송대(宋代)의 주돈이 소옹(邵雍) 그리고 주희(朱熹)에게 직접 연결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서울대학교 사학과 문중양 교수는 “여헌 우주론의 역사적 위치와 성격”이란 논문에서 여헌 장현광선생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역학도설(1609)과 우주설(1631)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합적이고 합리적인. 그리고 중국 송대 성리학자들의 논의를 훌쩍 뛰어 넘는 수준의 세련되고 독창적인 우주론 논의를 펼친 것으로 학계에 잘 알려져 있다. “중략(中略)”.

 

여헌의 우주론은 주희조차도 성공적이지 못했던 송대 성리학적 자연이해의 세 가지 전통 모두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단계를 넘어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정합적이고 자기완결적인 우주론을 펼쳤던 것이다. 더구나 여헌의 진취적인 사색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북 송 대(宋 代) 중국에서 우주론은 성리학적 자연이해의 틀에 결코 메이지 않는 자유롭고 시작된 성리학적 우주론은 이상과 같이 17세기 초 조선의 유학자 여헌에 이르러서 정합적이고 자기완결적인 우주론으로 확립되었다.

 

18세기이후 조선에 유입된 서양학의 자연지식을 조선유학자들은 매몰되어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홍대용이나 최한기 등 일부 유학자들은 서양학의 자연지식을 기론 적으로 재해석 했다. 이러한 조선 유학자들의 흥미롭고 독창적인 우주론 사색은 여헌의 성숙한 우주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라고 했고 또한

일본사학자 다가하시(高橋)도루는 조선 유학사에서 “조선 최대의 성리학자”라 하였고.

최영성 교수도 한국유학 사상사에서 “조선 성리학의 6대가의 한사람”이라했고.

김낙진 교수는 조선중기 이퇴계 이율곡과 함께 “3대가의 한사람” 이라고 하였다.

 

또한 최근에 현대학자에 의해 재평가 되고 있고 과학기술을 전공한 자문위원회의 추천으로 과학기술부에서 과학사상가로 선정하여 국립 과천과학관 역사의 광장에 과학 선현25명과 함께 영정과 업적안네 문이 돌에 세 겨 저 진열되어 있다.

 

이는 고려 말부터 조선말까지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출현한 수많은 유학자 중에서 유독 선생이 과학사상가로 선정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changjh3692
글쓴이 : 목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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