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청천당 장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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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2014.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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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천당 (聽天堂) 장응일 (張應一)

청천당(聽天堂)은 호(號)이고 응일(應一)은 휘(諱)이며 자(字)는 경숙(經叔)이다. 선조32년(1599) 1월 15일 성주 대곡방 월오촌(星州大谷坊月塢村)에서 월포(月浦)선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7세 때 종숙인 여헌 선생에게 입양되었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명석하고 총명하여 글을 몇 번 읽지 않고도 단박에 외었다. 어릴 때 부터 가학(家學)을 이어받아서 열심히 갈고 닦아 크게 성취하였다. 뿐만 아니라 특이한 기질과 고결한 인품이 있었고 점차 자라면서 검소하고 청렴하였으며 정직하고 굳세였다. 또 자신에게 엄격하고 의지가 꿋꿋하여 옛 군자의 기풍이 있었다. 6세에 생모 이씨가 돌아가시니 슬피 울부짖으며 모친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고 조상(弔喪) 온 이들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인조 7년(1629) 문과에 급제했고 곧바로 승문원(承文院)에 예속되었는데 이해 겨울 12월에 모부인 송씨 상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돌아와 한결같이 예에 따라 정성을 다하여 장례를 치르고 잠시도 여막을 떠나지 않았다. 상(喪)을 마치자 인조10년(1632)에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제수되어 상경하였다. 이때 부친인 문강공께서 “너는 이미 입신 출세하였으니 마땅히 충의(忠義)에 힘써야 한다”고 하시면서 다시 시를 지어 공(恭:공손)약(約:검약) 두 글자로 경계하시니 종신도록 마음에 새겨서 잊지 않았다. 인조 11년(1633) 6월에 유곡도(幽谷道:문경의 유곡역에서 선산 안곡역 까지) 찰방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생가 부친 월포 선생이 서거하시자 사임하고 돌아와서 상을 치루었는데. 애통하고 상심하여 거의 건강을 잃을 정도였다. 상을 마치고 인조14년(1636)에 다시 부정자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4월에 승문원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 이 무렵 부친 문강공께서 입암정사에 우거하시니 부친 봉양을 위하여 사퇴소를 올리고 돌아왔다. 이해 9월달에 상을 당하여 영구를 고향으로 모시고 와서 12월에 금오산 기슭 오산에 장사하고 애통하면서 상복을 벗지 않고 여막을 지켰다. 상을 마치고 인조18년(1640)정월에 박사(博士)에 제수되었고 4월에 성균관 전적(典籍),6월에 예조좌랑에 제수되어 사은(謝恩)하고 돌아왔다. 함경도 좌막(佐幕:비장)의 명을 받아 출발하였으나 큰 고개 밑에서 병이 나서 돌아왔다. 인조19년(1641)6월에 사간원 정언(正言) 겸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6월에 전라도 도사(都事)에 제수되었고 인조 22년(1644) 5월에 사헌부 지평(持平)에 제수되었고 인조23년(1645) 5월에 병조 좌랑, 윤 6월에 병조정랑에 승진하였다. 이때 전라도 나주목에 목사가 잔혹한 정치를 하여 민원(民怨)이 많았고 살인 사건이 있어서 조정에서 선생을 추고관(推考官)으로 차출하였다. 선생이 즉시 내려가서 조사하다가 죄수 중에는 부자가 서로 증언하였는데 선생이 “아비가 자식의 죄를 증거대면 천하의 부자가 어떻게 되겠는가.” 하면서 아들을 석방하니 조정에서는 명판결이라 하면서 칭찬 하였다. 이해 11월에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에 제수되었다.

인조 24년(1646) 2월에 사간원 헌납(獻納)에 제수되었다. 이 무렵 궁인(宮人) 조씨가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를 무고하여 임금이 강빈(姜嬪)을 사사(賜死)하려고 하였다. 이에 3사(弘文館.司憲府.司諫院)가 극력 간하였으나 도리어 임금의 진로(震怒)만 사게되어 모두 쫓겨났고 겁을 집어먹은 신하들은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이때 선생이 죽음을 무릅쓰고 9일 동안 단독으로 소를 올려 부당한 명령을 거두시라고 간하였으나 임금님의 노여움만 사게 되어 사퇴하고 돌아오니 조정과 재야에서 그 굳세게 항거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두려워하면서 감복하였다. 그래서 서울 장안의 아이들이나 하천배(下賤輩)까지도 청천백일(靑天白日) 장헌납(張獻納)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인조 27년(1649) 6월에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에 제수되었다가 이내 사헌부 장령(掌令)을 배수(拜受)하였고 8월에 사복시(司僕寺) 정(正), 10월에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돌아왔다. 효종 원년(1650) 5월에 사간원 사간(司諫)에 제수되었고 6월에 필선(弼善)을 겸하게 되어 사은하고 나아가면서 소를 올렸다. ”임금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뜻을 먼저 정해야 하고 시비를 밝게 해야 하고 스스로 정사를 해결해야 합니다“고 하면서 ”뜻이 정해지면 근본이 하나같이 서고 백사가 이루어질것이며 시비에 밝으면 어질고 사특한 것이 저절로 구별되어 논의가 어긋나지 않고 임금이 정사를 스스로 재결하면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도 머뭇거림이 없어 요순(堯舜)이 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고 하면서 직언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산림(山林)의 고사(高士)들이 여전히 사색당파의 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며 천하의 대로(大老)들도 또한 사당(私黨)의 론리를 주장하니 그 밖의 것은 어찌 족히 논하겠습니까.”하면서 당쟁의 폐단을 말하였다. 이 소가 들어가자 홍문관에서 파직하라는 소를 올렸고 임금님께서는 듣지 않았으나 선생이 스스로 소를 올리고 돌아왔다. 윤 7월에 성균관 직강(直講), 장악원(掌樂院) 정(正)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효종 2년(1651) 3월에 시강원 문학(文學)에 제수되고 4월에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을 겸하게 되어 사은하고 한 달이 조금 지나서 사헌부 집의(執義) ,6월에 종부시(宗簿寺) 정(正)이 되고 7월에 홍문관 수찬(修撰) 지제교(知製敎), 8월에 홍문관 교리(敎理), 11월에 시강원 보덕(輔德)에 제수되었다. 효종 3년(1652) 5월에 공조참의에 제수되어 두 번이나 사퇴소를 올리니 임금님께서 비답하기를 “너는 능력을 다하여 가정에서 받은 훈육은 많은 선비를 양성할 수 있으니 사퇴를 하지 말고 직무를 살펴라.”고 하였으나 공은 황송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세 번째 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10월에 동부승지,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이해 둘째 아들 건(鍵)이 급제함에 따라 소를 올리고 돌아와 산소에서 제사를 올렸다. 효종 4년(1653) 1월에 사직(司直)에 제수되고 8월에 삼척부사로 나가서 너그럽고 공평하며 간소하고 검약한 것으로서 백성을 다스렸는데 산골 백성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고 학정에 시달리다가 도망친 어부들이 돌아와 마음 놓고 어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부임한지 10달 만에 여러번 글을 올려 사임하고 돌아 올 때 행색이 초라하여 모두들 청백리(淸白吏)가 돌아간다고 하였다.

효종 7년(1656)에 공조참의, 예조참의가 차례로 제수되었고 10월에 밀양부사에 제수 되었다가 상신(相臣)들의 말썽이 있자 사퇴글을 올리고 돌아왔다. 효종 9년(1658)에 여주목사에 제수되었는데 이 고을은 권력 있고 존귀한 분들이 많고 그들은 관용성이 없다는 것을 미리 알고 사은하기 전에 글을 올려 교체되었다. 현종 원년(1660)에 김산(金山)군수로 부임하여 삼척부사 때처럼 엄정한 행정을 펴니 이속(吏屬)들이 두려워하였다. 겨우 1년 만에 사퇴하고 필마로 귀거래사를 읊으면서 돌아오는데 다만 국화 몇 떨기 만 가지고 왔다. 현종 14년(1637) 영릉(寧陵:효종의능)의 석물에 틈이 생기는 변이 있자 공이 소를 올려 장지를 복택(卜擇))한 신하들과 봉심(奉審)의 명을 받고 바른대로 고하지 않은 신하를 엄벌하라고 하였다. 소가 들어가자 조정 신하들이 처벌을 두려워하여 소를 올려 추악한 말로 공을 헐뜯고 또 경연 중에 터무니 없는 말을 꾸며 대론(臺論)을 계속 일으켜 공을 멀리 귀양 보내도록 청하였다. 이에 임금님은 마지못해 황간(黃澗)으로 귀양을 명했다. 이해 10월에 적소에 도착하여 2년 만인 숙종 원년(1675) 정월달에 왕의 특명으로 해배(解配)되어 돌아왔다. 이해 7월에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소를 올려 교체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께서 사퇴하지 말고 올라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9월에 길에 올랐다가 선산에 이르러 병이 나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소를 올리니 부호군으로 체직되었다.

우의정(右議政) 허목(許穆)이 임금께 사뢰기를 “전 대사간 장응일은 장현광의 아들로서 명성이 맑고 절개가 곧아서 사림(士林)에서 명망이 높으니 청컨대 대우하는 은전을 베프소서” 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장응일은 나이 80에 육박하고 또 재능과 학문이 있어서 비록 한 번 보고자 하나 그럴 형편이 못되였다”고 하시고 10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에 가자(加資)하고 11월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을 제수하였다. 선생은 사양하는 소를 올리면서 겸하여 제왕으로서 도덕에 나아가고 공업(功業)을 닦아야 함을 진술하였다. 임금님께서 비답하시기를 “소장에 가득한 말은 정성이 지극하고 충성심이 넘쳐 내 마음을 깨우쳐 윤택하게 하니 조심하지 않겠는가. 봄날이 점차 화창해지니 조용히 올라 오너라”고 하였다. 12월에 또 임금님의 소지(召旨)가 있었는데 말씀하시기를 “경은 영남 선현의 문중에서 나서 시골로 물러간 지 몇 해가 되었구나. 이제 높은 직위를 제수 하였으나 올라온다는 소식이 적적하여 들을 수 없구나. 이렇게 심한 추위에는 길 나서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봄날 따뜻할 때 의당 속히 올라오너라.” 하시니 이는 대게 특별한 예우가 아닐 수 없다. 교지를 받은 선생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억지로 올라가려고 하였으나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숙종 2년(1676) 10월 19일 병환이 위독하여 21일에 인동부 서쪽 임강 별장에서 고종하시니 춘추가 78세였다. 12월에 부서(府西) 삼후곡(三候谷)에 안장 하였다가 숙종13년(1687)에 성주 원현산(元峴山) 임좌(壬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숙종 13년(1687)에 한쪽 사람들이 천능(遷陵)할 때 올린 상소문을 험잡아 죄안을 꾸며서 관직이 삭탈 되었는데 다행히 숙종 15년(1689)에 복작(復爵)의 논의 있었고 4월 5일에 동지사 유명천(柳命天)이 복작의 계장(啓狀)을 올렸고 상신(相臣)들이 “품계를 바꾸어 추증(追贈)하고 치제(致祭)함이 옳습니다”고 하였다. 이해 4월 20일에 임금님의 제가를 받아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 경연 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 중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 經筵 義禁府 弘文館 大提學 藝文館 大提學 知 春秋館 成均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에 추증되고 왕이 제문을 내려 선생의 넋을 위로 하였다. 그 후 헌종(憲宗) 연간(年間1835~1849)에 귀봉사(龜峰祠)를 창건하여 향사를 치루었으나 고종 5년(1868)에 내려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는데 아직 복원 못하고 있다. 고종 말년에 문목(文穆)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이는 ”학문을 부지런히 익히고 묻기를 좋아하니 문이요(勤學好問曰文) 진실된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서 목이다(中情見貌曰穆)라는 뜻이라고 한다. 선생의 유문(遺文)은 영조 51년(1775)에 4권으로 편집하여 간행한 것을 정미년(1967)에 석판으로 인행(印行)하면서 4권을 2책으로 하였다.

1권에는 시(詩) 81수 비답(批答) 2편 소(疎) 23편이고

2권에는 계사(啓辭) 5편 서(書) 29편 서(序) 3편 기(記) 2편 발(跋) 3편 축문(祝文) 5편 제문(祭文) 15편이고

3권에는 잡저(雜著) 1편 묘지(墓誌) 2편 묘갈(墓碣) 4편이고

4권은 부록으로 가장(家狀) 신도비명(神道碑銘) 묘갈명(墓碣銘) 묘지명(墓誌銘) 과정록(過庭錄) 경산지(京山誌) 사제문(賜祭文) 귀봉사 상향축문(龜峰祠常享祝文) 만장(輓章) 신장(贐章) 등이다. 문집을 통해 볼 때 선생의 글은 질적으로는 우수하나 양적으로는 많지 않다고 하겠다. 더욱이 자의(自意)에 의한 창작이라기보다 남의 요청에 의한 타의(他意)의 저술들이라고 할 수 있다. 논(論)이나 설(說) 부(賦) 등의 글이 보이지 않고 서(序) 기(記) 발(跋) 비갈(碑碣) 등은 모두 글을 받으러 온 분들에게 응한 것이다. 시도 81수 라고하나 만사를 제외한 창작시는 58 수 밖에 되지 않으니 극소수라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선생은 저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몇 수 안되는 시가 모두 주옥 같고 다른 글들도 모두 유창하고 우수한 작품들이라고 하겠다. 시(詩) 한수를 들어본다.

階上玉梅花 뜰에 핀 옥매화

鮮明眞可愛 선명한 빛깔 참으로 사랑스럽네

何如人似玉 옥매화 같은 사람 그 누구냐

永歎今不在 길이 탄식할 뿐 볼 수 없구나!

옥매화 같이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결하고 조촐한 시라고하겠다. 아주 평이하게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매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은근히 바친다고 하겠다. 선생의 문집에 있는 다른 분들의 문집에서 볼 수 없는 비답(批答)이라는 글이 두 편 있다. 비답은 임금이 신하의 상주문에 대한 답변이다. 선생의 문집에는 비답은 우의정(右議政) 한흥일(韓興一)의 상주문에 대해 허락하지 않는다(不允)는 것과 영의정 김육(金堉)의 상주문에 대한 불윤(不允)한다는 답변이다. 이것은 선생이 효종 2년에 지제교(知製敎)로 있을 때 지어 받쳤다(製進)는 주(註)가 있다. 지제교는 임금의 교서(敎書)를 지어 바치는 벼슬아치이다. 문집 3권에는 추정록(趨庭錄)이란 굉장히 긴 글이 있다 추정(趨庭)이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 뜻한다고 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다. 선생은 추정록에서 부친 문강공으로 부터 받은 가르침과 문강공의 일거일동을 190여항(條項)으로 나누어 자세히 기록하였다.

출처 : changjh3692
글쓴이 : 목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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