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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웅 2021. 10. 18. 06:20

실제와 달리 안계면 용기동에 세워 놓은 대제ㅔㅔ지 유허비 
대제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단북면 효제 2리, 일명 대제마을 이다
대제마을 입구의 표석 
효제2리 즉 대제마을의 당산목 팽나무
효제 마을 앞 들판 대제지가 허물어 진 곳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난미리미동국과 대제지(大堤池)

 

 

쌀이 남아도는 오늘날 1,500여 년 전 삼한 시대의 못 대제지(大堤池)를 논의한다는 것이 조금은 어색한 일인 것 같다. 또 그 못의 소재지를 한국사(이병도 1974, 294)에서는 단밀(의성)이라 했고, 의성농지개량조합(조합장 한동선)은 미기(彌基) 못으로 비정하여 19871110일 안계면 용기리 (767-5번지)대제지유허비(大堤池遺墟碑)”를 세운 마당에 다시 거론한다는 것은 당시 이 일을 주관했던 사람들에게 미안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김제 벽골제는 국가 문화재 사적(111)으로, 제천의 의림지는 지방 문화재 충청북도 기념물(11), 상주의 공검지 역시 경상북도 기념물(121), 밀양의 수산제는 경상남도 기념물 (102)로 지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주변에 농업박물관, 농촌체험관, 역사공원, 명승지, 습지로 개발하여 농업의 중요성을 알리는 관광지로 조성했다.

그런데 의성은 그와 다르다. 특히, 명품 안계쌀의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대제지(大堤池)에 대해 유허비를 세워 놓은 곳도 그곳이 아닐 가능성이 있고 김제의 벽골제나 밀양의 수산제처럼 명소로도 만들지 않았다. 이 글은 대제지가 미기못이 아닐 가능성을 살펴보고 실제 대제지가 있었던 곳을 밝히고자 했다.

 

첫째, 대제지(大堤池)는 삼한 시대에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조선 시대에는 상주목 단밀현에 있었다.

 

0, 상산지제언 조에는 대제지는 단밀현에 있는데 주(, 상주)와는 68리이다

0, 상주목(尙州牧) 읍지제언(堤堰) 조에 대제지는 단밀현 북쪽에 있는데 둘레가 2,896척이고 깊이가 10척이다

0, 단밀현지산천 및 제언 조 대제는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고 했다

 

이들 지리서(地理書) 제언 즉 방죽 조() 상산지(1617), 단밀현지(1749) 상주목 읍지(1865), 어느 곳에도 미기못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단밀현지에서는 현()의 북쪽이라고 하여 동쪽의 안계와 달리 표현했다.

 

둘째 대제지가 있던 곳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지명이 단북면에 남아 있다. 그 근거로 효제(孝堤) 2리를 속칭 대제(大堤)마을이라고 하는데 그 유래가 큰 못이 있어 천하대지(天下大池)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또한, 마을 앞에 대제(大堤)”라는 표석이 현존하고, 교회 이름도 대제이며, 마을의 남쪽 신하(新下) 2리를 하제(下堤)라고 부르는데 대제지의 남쪽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셋째, 대제지는 상주향교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학전(學田)으로 활용되었다. 상주의 선비 모암(慕庵) 조릉(趙稜, 1607~1683)이 도백(道伯, 관찰사의 별칭)에게 올린 장계(狀啓)에 의하면 대제지는 임란 이후 제방이 무너져 못의 기능이 상실되어 버러진 땅이었다. 상주향교는 예천 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13(광해군 5) 조정의 허가를 받아 향교로 귀속시켜 학전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 글에서 예천 유생의 반대는 한때 대제지의 전부 또는 일부가 예천지역이었음을 시사한다. 안계의 미기못은 위치상 예천과 분쟁이 일어날 수가 없다.

 

넷째 효제 2리 마을에는 나라에서 하사(下賜) 했다는 땅이 있는 곳을 국답골, 국답들이 있는데 이는 국가 소유인 대제지를 용도 폐지할 때 농민들에게 분양한 나라 소유의 논 즉 국답(國畓)이 있었던 데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다섯째 대제마을 왼쪽 수령 300년의 당산(堂山) 팽나무도 못이 있었을 증거로 보인다. 주로 냇가나 못가에 저절로 자라 일명 포구(浦口) 나무라고 하는데 대제지 가에서 자란 것이 마을 사람들의 보호 속에 남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단북을 포함한 단밀현은 삼한 시대 진한 12개국 중 1국인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이었다. 신라 경덕왕 대에 와서 단밀(丹密)로 바뀌는데 이 국명 역시 대제지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미리(彌離)는 용의 순수한 우리말로 물을 뜻하고 미동(彌凍) 물둑이라는 뜻이다.

즉 미리미동(彌離彌凍)물둑이다, 다만 난()은 해석에 어려움이 있는데 크다 ()”는 뜻으로 보면 난미리미동은 큰 물둑으로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 대제(大堤)가 된다. 더 부연하면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은 큰 방죽 즉 대제(大堤)의 나라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어문(語文)관련학자들의 고증이 필요하다.

현재 단북면 효제 2리는 원래 대제(大堤)마을로 불렸고, 대제라는 표석이 있으며 아랫마을 신하 2리는 하제(下堤)라고도 하는데 이는 대제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고. 일대는 한때 예천군 지역이기도 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현재 단북면 효제 2리 일대는 대제지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단밀현은 이러한 큰 저수지를 통해 일찍부터 수도작(水稻作)이 발달했다. 당시로 서는 선진 농업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풍부한 물을 이용한 높은 생산은 생활을 여유롭게 하고 따라서 예술에 대한 감성도 풍부하게 되니 신라 민중음악의 하나인 미지악(美知樂)과 민속춤 미지무(美知舞)가 탄생했다, (송방송, 한국고대사 음악연구, 1985)

의성군은 공교롭게도 동부와 서부가 선의 경쟁을 하고, 이런 경쟁은 군정 발전에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문화면에서는 늘 동부가 앞섰다. 유적의 수적인 면과 질적인 면에서 앞선 측면도 있지만, 안동김씨와 아주신씨 영천이씨 등 몇몇 명문이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데도 영향이 컸다. 특히, 최근 동부에 존재했던 조문국은 군()이 적극적으로 투자하여 사료발굴이 활발하고, 일대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그러나 서부 지역의 난미리미동국대제지는 아직 지표조사도 하지 않았다. 새가 높이 날려면 양쪽 날개가 균형이 잘 잡혀야 하듯 서부와 동부가 상생하려면 비슷한 관심과 투자가 있어야 한다. 이번 난미리미동국과 대제지의 지표조사 제안이 성사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