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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웅 2007. 5. 6. 21:26

1960년대 내가 살았던 경기도 연천군 전곡! 이곳은 이땅에 남겨진 6,25의 잔해 그 자체였다
전쟁이 할퀴고 간 이곳 중부전선은 바로 지옥이였고 3,8 이북(휴전선 부근)에서 내일 다시 온다고 잠깐 넘어온 피난민들에게는 돌아갈 길에는 철조망이 막고있어 그날그날의 끼니를 걱정하는것이 생의 전부였다
우리가 머물던 집앞에도 전쟁의산물인 땡크 한대가 부셔저 있어 통행에 방해만 되어 거추장 스러울 뿐이였다

팔면 돈이 된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시절이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허리가 부러진 경원선(서울~원산) 전곡역 광장에는 그시절 이땅에 땔감의 주역이였던 무연탄을 저장했는데 전방의 각각 부대에 보급하기 위해 육군 제 8사단이 경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시절 이지역 1/5 정도의 주민들에게는 이것이 삶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국민학교 마지막 사친회비(기성회비)를 내지 못해 졸업장을 받지못한 나는 어차피 상급학교(전교 3등의 장학생)는 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무연탄을 퍼(훔쳐) 밥을 굶지 않을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무연탄을  훔쳐 연탄찍는 공장에 팔면 쌀을 몇대박 살수있어 하루하루 끼니를 해결 했다
흰광목으로 크게 앞치마를 만들어 허리에 두르고 다니다 보초에 눈을피해 쏜쌀같이 달려가 한가득 담아 두팔로 감싸않고 도망을 치면 허리는 끈어질듯 아파왔지만 보초들은 따라오지 못했다
아니 따라오지 않았다고 하는것이 맞는 말 일것이다 
심지어는 의식적으로 자리를 피해주는 보초들도 많이 있었다
끝까지 따라오면 앞치마를 통채 버리고 달려야했다

쌀이(무연탄)땅바닥에 버려지는 아픔이 남지만 기회는 또 있기 때문이다


어느보초 아저씨는 달리는 애들을 보고는 고향에 동생이 생각나서 더이상 잡을 용기가 없었다는 말을 했지만 무조건 많이 훔칠수밖에 없는것은 그것이 곧 쌀이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훔치는 도둑과 지키는 보초가 협조하며 이지역1/5 의 난민이 생계를 꾸려나갈 즈음 무연탄 광장에는 엄한 훈령이 떨어졌다
며칠에 한무더기씩 도둑맞는 무연탄 관리를 방관할수가 없었던것이다
결국 경비가 몇배 많아지고 그동안 모른체하던 보초들도 상부의질책에 태도가 달라졌다
보초들도 심한 기합을 면하기 위해 어쩔수없는 선택이였다
점점 무연탄 훔치는일이 어려워지자 많은 애들이 아이스께끼 장사나 구두딱이,등으로 생계전환을 했다

그러나 나와 몇몇 애들은 그것도 형편이 안되었다
당장  오늘 저녁 끼니가 걱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통 차(덮게없는 무연탄 실은 화물차)를 타기 시작했다
큰 자루를 가지고 달리는 열차를 잡아타고 방통에 올라가 하나가득 담아서 여럿이 힘을모아 밖으로 던지면 자루가 터져 무연탄가루가 많이 분실되지만 그래도 잘 쓸어 담으면 하루먹을 쌀값은 마련할수 있었다
방통에서 연탄자루가 떨어질때는 그것이 연탄자루인지 애들인지 구별이 안될정도로 자루와 사람이 함께 까만체 떨어졌다
쌀을 살수있다는 생각에 두려운걸 전혀 몰랐으며 그런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나중에 방통타는것을 알게된 기관사들이 상부에서 질책을 당한후 열차를 타지 못하게 할려고 그속도가 빨라졌지만 그시절 우리에게는 열차나 자동차의 속도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못했다
아무거나 손만 내밀면 탈수있어서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줄도 미쳐 몰랐다
이정도에 이르자 이번에는 방통 앞뒤로 역원이 타고 입환을 하면서 아예 우리들이 접근을 못하게 했다

 

우리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수 없었다

 어떠한 경우라도 식구들 생계를 위해 쌀은 사야 하기 때문이다

그시절 무연탄은 전곡과 신탄리 경원선에서는 이 두곳에 하차를 시켰다

인부들이 삽으로 퍼 내렸기에 바닥에 많이 남아있었다

바닥으로 갈수록 힘들어서 인부들이 퍼 내리지 못한 무연탄은 우리가 훔쳐 가기는 충분한 양이였다
우리는 경원선 상행 열차를 타고 신탄리(종착역)까지 가서 방통차로 바꾸어타고 내려오면서 전곡역 깃발 근처에서 속도가 느려질때 방통 문을땄다

레바를 틀면 방통 밑문이 열리면서 무연탄이 바닥으로 쏟아진다
너무많이틀면 무연탄이 전부 쏟아지니까 표시 안날만큼만 틀어야 했는데 어느날 결국은 표시가 나서 들키고 말았다


그후 부터는 연탄방통에까지 보초를세워 우리는 연탄방통에 접근할수가 없었다
우리는 일반방통(지붕이 있는 통상적인 화물차)지붕에 올라타 찰싹 달라붙어 엎드려 있다가 보초가 안심하고 하차하면 무연탄 방통으로 옮겨 방통을 열고는 했다

지금 생각하면 영화에서나 볼수잇는 그런 상황을 연출햇던 것이다
표시 안나게 아주 조금씩만 해야했다
그래야 그나마 경비가 더욱 강화되는것을 막을수 있기때문이다


미리 연락해둔 연탄집에서 리어카로 싣고가면 우리는 그 집에서 돈을받아 쌀 한대박과 연탄두개만 새끼줄에 메어달고 집에오면서 붕어빵도 하나 사서 먹을수있는 그생활이 그시절 우리에게는 최고의 행복이였다 
너무 어린 나이(12전후)에 굶주림으로 무연탄을 훔치는것이 죄가 되는지 달리는 차에서 떨어지면 죽는것인지 내몸이 연탄보다 더 까많게 빤짝거리는지 그런것은 아예 관심 밖이였다

그져 식구들과 내가 굶지 않는것 그것이 최대듸 과제였다

그렇게 훔친 무연탄으로 밥을 굶지는 않았는데 또한번 날벼락이 떨어졌다
이제는 그것 마져 사실을 알고 상행 열차에 아예 우리를 타지 못하게 보초를 촘촘하게 세웠다
궁리에 궁리를 하던 어느날
우리들 아주 절박한 애들3명은 전곡에서 버스를 타고 대광리(버스 종착역)에서 하차 거기서 신탄리(한정거장)까지는 걸어가서 전곡오는 무연탄 방통열차를 타고 미리 약속해둔 전곡 깃발 있는데 와서 방통문을 열고는 했다

그렇게 생계를 이어가던 어느날 신탄리역에서 방통을 타려고 하는데 이사실을 눈치챈 전곡에서 연락을 받고 우리를 못타게 하려고 방통에 보초가 빽빽하게 서 있었다
이번 열차가 마지막이고 이것을 놓치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식구들이 끼니를 굶고 우리들은 여기에 갇힌다는 초조함이 몰려들었다
아무리 봐도 방통위에는 보초들이 있어서 도저히 불가능 하고 무작정 가야한다는 생각에 어둠을 이용해 기어서 방통밑으로 숨어들었다


거기에 사람이 탈수있는 공간은 방통밑 바퀴옆 스프링 위 단지 그곳 뿐이였다
한쪽 바퀴옆 스프링위에 혼자 메달리다시피 탈수있는 그곳뿐이였다
우리셋은 각각 바퀴옆 스프링위에 각기 떨어져 않아 서로가  손을 꼭잡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죽을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않았다
기차가 출발했다


바퀴와 철로가 부딪히며 불꽃이 일어나 그런 현상은 미쳐 생각하지 못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캄캄한 어둠속에 쇠와쇠가 부딛히는 마찰로 불꽃이 일어나는것이다
그 불꽃이 그 작은 공간에서 굴절되고 반사되어 우리의 얼굴과옷에 내려 않았다
그렇다고 달리는 열차에서 내릴수도 없었다
우리는 엉겁결에 감짝놀라  손에손을 꼭잡고 그 불꽃을 이리저리 피하며 전곡역에 빨리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리를 지날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불꽃이 그안에 퍼져 피하기만 하면(사실은 피해지지도 않지만)됐었는데 다리를 지나면서 그불꽃들이 다리 아래 공간으로 쏟아져 내려가 강물을 따라 흘러가니까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나도모르게 불꽃을 따라 머리가 밑으로 저절로 기울고 있는것이다

우리셋은 서로 불꽃을 보지말라고 악을쓰며  안떨어지기 위해 몸부림칠때  온몸은 땀으로 젖어 검정때국물이 옷에 법벅이 됐지만 일단 전곡에 도착은 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번의 위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탄리역에서 전곡역으로 연락을 한것이다
어딘지 모르지만 우리가 타고 내려갔으니 전곡에서 꼭 잡아야 한다고 명령이 떨어진것이다
기차가 정차하자 캄캄한 역광장에는 빈틈없이 역무원, 헌병, 보초전원,이 손전등을 들고 우리를 잡으려 번뜩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빈틈을 찾아도 나가면 잡힐수밖에 없을것 같았다
우리는 잡히면 안된다는 생각에 나오지를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열차는 출발을했다
우리셋은 죽고사는것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아니 그져 몰랐다고 해야 오히려 옳을 것이다
그져 저 사람들에게 잡히지만 않아야 한다는 생각외엔 아무생각도 나지 않았다
달리는 기차밑 바퀴옆 스프링위 에서 빠져 나오는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실려 갈수는 더욱 없었다


기차는  달리며 우리에게 불꽃 세례를 퍼붓고 있었다

다행스럽게 기차는 필히 깃발 근처에서는 서행을 하게 돼 있었다
어둡기는 했지만 기차가 서행을 하고 있으며 기차길옆 풀잎이 좀 많아진다 싶어 깃발부근이라 생각하고 우리셋은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무조건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 다음 또 그 다음 이렇게 달리는 기차 방통밑 발통옆 스프링위에서 우리는 몸을 날렸다 아무생각도 없이 그냥,죽을지 살지도 모른체,,,
나가 떨어져 뒹굴고 있는 몸 여기저기 피가흐르고 있었지만 내렸다는 생각에 아픔보다 먼저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아직은 살아 있다는  신호인 것이다


그후 한동안 이렇게 어렵게 생을 연명하다 한친구는 그렇게 차에서 또 뛰어 내리다(미군수품트럭) 내장파열로 죽고 또 한친구는 골병이 들어서인지 시름시름 아프다가 세상을 하직했다

그둘은 그렇게 세상과 이별했다

그리고는 그 유일 무이 한 경험은 나만의 것이 되어 더 잊혀지기 전의 기억으로 이렇게 남기고 있다

우리 부친께서도 일제에 강제동원 되어 이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을까?
부친이 계셨어도 내가 이토록 참혹한 고통을 당해야 했을까?


부친께서도 해방후까지 얼굴의 상처에 고름을 짜내야 했고 배가고파 일본놈의 구정물 통에서 밥알을 골라서 먹기도 했다는데,,,

국방경비대 출신이라는 죄로 철원 공산당에게 쫓기다 피살됐다는 소문만 남기신체 이 아들에게 이별을 통보하셨다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대를이어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하는데 청구권자금 수혜자들은(?) 위로 한다면서 상처만 후벼파놓고

예산타령으로 핑계를 늘어 놓고만 있다

대한민국 이래도 괜잖은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