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해석과 자기해석

Horace 2020. 7. 31.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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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화, 탈객관화와 자율성으로서의 하나님의 휴가

 

큐핏은 하나님의 휴가(1980)는 종교에 있어서 의존성의 개념을 어떤 것으로 거부하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몇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서, 우리는 영적 자율성아무런 의존성의 흔적이 없고 그럼으로 프로이드에 의해서 비판되는 유대-기독교에 대한 비판들을 피할 수 있는 불교에 대해서 동경하는 듯이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대면하게 됩니다. 자율성내재화의 위대한 주제를 재검토하는 것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중심문제가 해석학의 문제입니다. 비록 큐핏이 그 말을 언급하지도 않고 중요한 사상가들의 전통들과 씨름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그의 논증의 핵심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적 의미는....우리들의 위에서보다는 안에서 찾아져야 할 것입니다.

 

큐핏은 핵심적으로 내재화, 자율성, 그리고 바깥으로부터 부과되어진 것보다는 오히려 안에서부터 발생되어진 내적 영성”, 이 세 가지를 핵심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성은 내재화된 선험적 원리들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큐핏이 불교와 너무나도 밀접한 친근성을 발견하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다. 1980년 초반에는 하나님이 여전히 통일시키는 상징으로 남아 있지만, 이 상징은 안에서부터 발견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그것(불교)와 유신론 사이에 있는 간극은 중요한 측면에서 메꿔 졌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요? 큐핏은 쓰기를, “위대한 세계종교들 가운데서 불교가 내 마음 속에 있는 것과 가장 가깝습니다.” 그 내용, 그 영성과 가치관은 기독교적인데, 그 형태는 불교도인 것입니다. 비실재주의자는 예언적 경험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다른 이와의 상호인격적 상봉의 모델이라는 견지에서보다는, 내부에 있는 하나님을 상정합니다.” 결국 큐핏은, “하나님이란, “나에게 대항하는하나의 도덕적 명령이라는 것을 경험하는 계몽주의 이전의 내재화로부터 고안되어진 하나의 투영이라는 칸트적 개념 주변에 머물러서 작업을 합니다. “나에게 저항한다고 하지만, 진정한 영성에 있어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이것을 선택하는 것이며, 외부로부터 부과되어지는 하나님의 뜻으로서 그것에 우리가 굴복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큐핏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권위적으로....종교적 요구를 부과시키는...우리들을 대항하는 개별적인 인격이 더 이상 아닙니다...만약 그가 자신을 그렇게 제시한다면, 우리는 그를 거절해야 합니다.” 큐핏은 부분적으로는 순전히 전능하다는 것이 예배와 복종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근거에서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이런 하나님이 인간의 자율성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에 관한 언어가 급진적으로 상징적이고, 도구적이며 비유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근거해서 큐핏은 이 모든 것을 주장하고 있나요? 하나님의 휴가에 대한 논평에서 James Mark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되는 이성적 작업(reasoning)에 대해서는......아무런 질문이 없다는 것이 큐핏의 입장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진술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마크는 큐핏이 모든 개개인의 자율성에 대해서 진정으로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자신의 관점을 어떤 종류의 요구사항으로서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냐면서 올바르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자발주의자의 준거틀 안에서, 큐핏이 , 이것이 우리가 하는 것이야라고 단순히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라는 힌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큐핏은 주장하기를, 신앙은 지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의지의 문제이며, 신앙은 신화를 사용하지만, 또한 그것을 자율성 속으로 초월을 시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큐핏은 하나의 부드러운 판매와 함께 종교적인 언어에 대한 자신의 관찰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Honest to God(1963)에서 하나님의 이미지에 대하여 John Robinson이 비판했던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로빈슨은 자신의 논증에 대한 신학적 실재를 제공해주는 틸리히, 불트만, 그리고 본회퍼로부터 요소들을 선택하였습니다. 하지만 틸리히는 하나님을 인간적 자율성의 구조들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하지 않습니다. 당연하듯이,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술은, 틸리히에게는 상징적인 것으로 남아 있으며,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시다는 전제 하나만 예외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틸리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존재의 모든 가능성을 위한 토대로서만 아니라, 미성숙한 경건주의적, 혹은 미학적 이미지의 하나님을 넘어서있습니다. 틸리히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은 자율성과 타율성을 모두 초월하시는 것입니다.

 

틸리히는 헤겔과 쉘링의 자율적인 수단들도 헤겔 이후 사상가들의 과격한 자율적 반동들도 부흥주의의 타율적 반동들보다 조금도 확신을 주거나 성공적이지 못하였다고 분명하게 주장합니다. Ian Ramsey와 같이, 그는 다양한 범위의 상징들을 활용하는데, 그것에 의해서 종교적 언어의 대개 환원적인 설명을 피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에도계시고, “안에도계시며, 또한 넘어서서도 계시는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안에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용어상 신인동형론적인 의미에서 인격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틸리히는 하나님은 하나의 인격보다 덜하신 분이 아니신분임을 주장합니다.

 

틸리히는 개념적 사고의 대상으로서 -객관화시키는하나님을 향하는 길의 부분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적으로 그 길로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틸리히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내재화, Iam Ramsey가 말하는 의미로서의 모델들과 한정하는 것들에서 제한하거나 수정하는 다른 상징들을 배제시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루돌프 불트만의 해석학을 큐핏이 해석하는 것은, 그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데 더욱 직접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3장과 4장에서 탈객관화와 비신화황 대한 불트만의 프로그램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큐핏이 불트만을 활용하고 있는 것은, 세 가지 분명한 흐름들을 함께 섞어 놓고 있습니다. 첫째, 그럴 듯하게 논증될 수 있는 설득력을 갖고, 그는 하나님-언어에 대한 의미심장하거나 도구적인 해석을 포함시키기 위해서, 불트만의 해석학을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둘째, 그는 칸트, 포이에르바허 그리고 프로이드로부터 이끌어낸, 인간의 투영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그의 개념을 이것과 결합시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율성”, 다원주의적 맥락주의, 그리고 인식에 대한 불교적양식이라는 개념들에 특수한 위치를 제공해주려고 합니다. 이 세 가지를 하나로 통합시키기 위해서, 큐핏은 실재의 본질에 대한 진리-주장들을 가지고 있는, 해석학들(이해의 이론들)이나 지식의 이론들을 융합시켜야 합니다. 돈 큐핏과 앤써니 프리맨이 초기의 과학적 탐구들을 사용하면서 자신들이 즐겼던 기능주의해석학과 신학에 있어서의 진리에 대한 이론들 속으로 수입하는 것은 우발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가 로빈슨을 통해서 부드러운 판매와 더불어서 시작했던 꼭 그것처럼, 큐핏은 자신의 상점 창가에 슐라이에르마허를 앞부분에 진열해 놓습니다. 우리가 언급하였던 것처럼, 슐라이에르마허는 교의를 경험으로부터 추출해내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교의들은 크리스챤들의 종교적 정서들을 언설로 진술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그의 이태릭체). 하지만 이것은 주관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거의 모든 현대의 슐라이에르마허 전문가들은 이전에 schlecthin abhangig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이라는 인간의 감정”(feeling of absolute dependence)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믿기를,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경험의 핵심이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의 의미”(a sense of being utterly dependent)였다고 말하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큐핏의 자율성은 정반대로 뒤집혀 집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즉각성의 존재론을 제시하지만, 그것은 기독교 교의의 그저 자기-표현으로 작용하는 것을 위한 의식에 대한 단순한 심리학적 분석이 아니라 어떤 관계에 대한 진리-주장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Speeches(1799)의 좀 덜 주의한 낭만주의로부터 더욱 주의해서 공식화한 The Christian Faith(1821)Hermeneutics(주로 1809-101826-33)으로 그가 의식적으로 전환한 것은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의식과 타자에 대한 의식은,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양극적인 것(German, Duplizizat)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드러나게 되는 자아의 환원될 수 없는 개별성(Eigentumlichkeit) 그 이상입니다. B.A.Gerrish가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의 모든 자기-활동은 어딘가 바깥에서 오는 것입니다”.신성”(deity)감정 안에서 즉각적으로 현존하는 어떤 것과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들은 초기의 1799년도에 있었던, Speeches에서 옵니다. 이것을 훗날 슐라이에르마허는 더욱 정통적방향으로 의식적으로 수정하였던 것입니다.

 

첫눈에 보면, 큐핏은 그가 슐라이에르마허에서 불트만으로 관심을 돌릴 때에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더욱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토대를 향하여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그의 저작물들 중에서 처음으로 그는 해석학에 대해서 명백하게 세 페이지를 할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이해에 대한 해석학적 양식들을 실증적인 것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인지적 객관성표현적 주관성사이에서 덜 미묘한 양극성을 지닌 채 작업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페미니스트 해석학에 대한 나의 논의에서 이 대조가 여러 가지 목적들을 위해서 얼마나 부적절하도록 재난을 불러왔는가를 보여주려고 시도하였었습니다. 큐핏은 성경 텍스트들에 대한 기술적주석과 현대적 적용을 구분하는 용어들에 호소합니다.

 

1980년에 큐핏은 자신이 포스트모던 시기에 진입했던 1985-6년에 함축적으로나마 거부했어야 하는 너무나도 순진한 가치중립적 관점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의 목적은 신약의 기자들이 초자연적 섭리와 천사와 마귀들의 개입을 믿었다는 주석적 결론으로 믿어지고 있는 것을 해석학에 의해서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독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언어는 실존적으로나 표현적으로나 의미가 없는 채로 기능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이하게도, 큐핏은 불트만이 이것이 언어적인 문제이고, 서로 다른 진리-주장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트만은 언어가 신약기자들의 참된 의도를 좌절시키고 또한 방해한다는 것을 충분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큐핏과 불트만은 모두 창조나 종말에 관한 언어를 사실들과 같이 과거나 미래의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는 언어로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피조성, 청지기역할, 그리고 책임감을 인정할 것에 대한 부르심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Hans Jonas2세기 영지주의의 이상야릇한 우주관은 심지어 영지주의자들 자신들에 의해서도 위성들과 위성들을 지키고 있는 수호신들에 대한 기술적인 언어들로 이해되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지식이나 행동에 관련되어 있는 구원의 언어들로서 이해되었음을 제시함으로써 불트만에게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주었었습니다.

 

이 중의 어떤 것들(모든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은 건설적입니다. 많은 창조에 관한 언어가 주로 원형적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님은 당연합니다. 많은 종말론이 당신은 여기에 있습니다고 표시되어 있는 런던의 지하도표시판으로 비유되는 하나의 천상의 시간표를 제공하는 것보다는, 책임감과 소망에 대한 현재의 부르심과 더욱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체적으로 그리고 배타적으로 모든 것을 말한 것일까요? 그것은 내적으로나 아니면 전적으로 그리고 남김없이 주관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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