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내 사랑 예수/연속적 중생론 오해와 진실

Horace 2020. 11. 17. 16:52

조나단 에드워즈의 구원 준비론

(“...여러분이 저주의 형벌을 받게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죽기 전에 해야 할 위대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WTJ 42:1(Fall 1979), p.5.

John H.Gerstner/Jonathan Neil Gerstner/번역: 손성은목사

 

서론

 

개혁신학 안에서의 준비의 개념의 역사를 적절하게 검토하기 위해서, 그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두 가지 다른 방식들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 본질적입니다. 한 가지 방식은 영화를 위한 준비(preparation for glorification)라고 불러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거듭난 개인이 그의 최후의 영원한 상태를 위하여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구원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뤄갑니다. 그 안에서 일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도덕적 무능에 대한 칼빈주의자의 교의와는 여기에 불일치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유형의 준비가 있는데(청교도신학의 특징이 더욱 되는 것으로서), 시초의 알미니안주의라고 어떤 이들이 잘못되게 해석하기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중생을 위한 이 준비, 혹은 추구하는 것은 각성된 죄인이 중생의 선물을 추구하는 것에 의해서 수행되어지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사상 안에서의 준비의 역사를 검토하면서, 성도의 준비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영광을 위하여 준비해 가는데 있어서 언제나 은혜의 방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Norman Pettit는 아주 유용한 연구물인 The Heart Prepared에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다루시는 것은 절대적으로 임의적이라는 개념을 불행하게도 울리히 쯔빙글리에게 귀인하면서, 쯔빙그리는, 칼빈과 같은 후기의 개혁가들과는 달랐다고 주장합니다. 후기의 개혁가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비중생자들을 준비시키신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쯔빙글리는, “하나님의 영의 직접적인 행위로서의 회심을 말하는 바로 그 맥락에서, 선언하기를, “말씀이 선포되어서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신앙을 심으시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모든 개혁신학은 하나님께서 은혜의 방편이라는 당신의 섭리적 제공을 통해서 직접 거듭나지 못한 택자들을 거듭나기 위하여 준비하신다고 항상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간접적인(secondary) 방편들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자들이 회심하도록 준비시키신다는 개념이 종교개혁 당시에서 그 씨앗을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개혁신학사상 안에서 추적될 수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람을 준비한다는 개념이 개혁신학사상에서 어떻게 일반적으로 발전되었는지 보여주어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존 칼빈은 그의 강요에서 이미 거듭나지 못한 자들 안에서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준비에 대해서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심지어 타락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제목으로 한 장의 제목을 삼기조차 하였습니다. 칼빈은 사람들을 죄로 확신시키는 율법에 대해서 말하고, 율법이 사람들이 마땅히 추구하여야 할 하나의 이미지를 그들에게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부르심을 받을 때, 그들은 전적으로 아직 전혀 무식한 것도 아니고 훈련에 들어오지 못한 것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유형의 생각은 많은 초기의 개혁신학자들 안에서 발견될 수 있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이론적으로 남아있었고 또한 개별적인 신학적 연결을 통해서 먼저 적극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이 연결은 유아세례라는 그 수반되는 표지를 가지고 있는 언약의 자녀들이란 그들의 개념이었습니다.

 

많은 후기의 개혁신학자들은 쯔빙글리의 세계관을 변경시켰습니다. 쯔빙글리는 세례받은 언약의 자녀들은 반드시 택자들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반면, 하인리히 불링거 같은 다른 신학자들은 언약의 자녀들은 택자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언약의 자녀들의 가능성있는 선택됨에 대한 칼빈의 강조는 불링거의 것보다는 더욱 강력하게 강조되었습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신자들의 자녀들은 거룩하게 태어납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태에 있는 중에도, 그들이 활력있는 공기를 호흡하기 전에, 영원한 생명의 언약으로 입양되었습니다(adopted). 그들이 태어나기 이전에도 교회의 공동체에 속하였다는 것 외의 다른 근거에서 세례에 의해서 교회로 들어오게 되는(brought into)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신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언약의 모든 자녀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택자로서의 동일한 부모로부터 태어났으면서도 택자와 비택자로 나뉘게 되는 뛰어난 성경의 예는 야곱과 에서이며, 둘 다 언약의 자녀들이었음을 잊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여전히 (칼빈이 사용한 것과 같은) 굉장히 강력하면서도 애매모호한 신학적 용어가 개혁신앙계에 혼동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부분의 개혁신학 공동체는 점차적으로 언약의 자녀는 반대되는 것이 분명하게 나타날 때까지는거듭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 철학은 자녀양육에 적용되었을 때 흔히들 죽은 정통주의에 이르게 되었는데, 자녀들이(그들의 부모들과 더불어서) 자신들의 구원을 가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많은 이들이 결코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언약의 자녀들에 대한 이 관점은 청교도들의 중생을 위한 준비관을 산출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언약의 자녀들 중에 거듭난 자들과 거듭나지 못한 자들 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애매모호하였습니다. 어떤 언약의 자녀들은 유기된 자들이었음이 신학적으로 인정되기는 하였을 지라도, 실제적으로 모든 자녀들이 택자들이고 거듭난 자들이었다고 가정되었습니다. 19세기 남아프리카에 있던 화란인의 언약의 자녀들은 이런 정신적 분위기의 전형적 예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이런 자녀들은 단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교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하이델베르그문답을 암기하는 것만이 요구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한 것에 대해서는 대개 아무런 질문도 없었고, 그것은 그럴 것이라고만 가정되었던 것입니다.

 

영국에서의 청교도적 기획은 커다란 복음전도의 열정으로 강조되었습니다. 영국국교회 내에서의 그 운동의 발흥은 청교도적 목사들을 교구민들 가운데에 있게 하였는데, 그 당시 교구들 안에서는 거의 모든 주거민들이 의무적으로 교회에 출석해야 했었습니다. 언약자녀들에 대한 언약신학의 취급이라는 선례를 통하여,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중생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취해야 할 단계들이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 교리가 하나의 애매모호함으로부터 처음 발전되어가면서, 많은 청교도들은 준비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개인들이 거듭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확실하지 않았었습니다.

 

윌리엄 퍼킨스는 이 애매모호함의 패턴을 깨뜨렸습니다. 그의 작업은,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이 신세계로 가져왔던 준비론의 고전이었습니다. 퍼킨스는 준비(preparation)의 시작들과 기질(composition)의 시작들 사이를 구분하였습니다. “준비의 시작들은 율법의 역사(役事)로부터 일어나고, 반드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들이 아닌 것입니다.” “기질의 시작들은 하나님의 영의 내적인 움직임들과 이끌림입니다.” 그것은 이미 시작되어진 중생의 효과입니다. 존 프레스톤과 같은 다른 영국 청교도들은 퍼킨스를 따랐고 비슷한 구분들을 하였습니다.

 

중생을 위한 이 준비의 교리는 또한 영광을 위한 준비의 교리와 더불어서 첫 세대의 유명한 청교도들 중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인, 토마스 후커와 존 코튼에 의해서 뉴잉글랜드로 넘어갔습니다. 존 코튼을 준비론의 방어자로서 명명하는 것은, 하나의 논의할 만한 요점입니다. 토마스 후커의 준비에 대한 광범위한 작업은, 반면에, 그를 준비론의 광범위한 검사를 위하여 퍼킨스와 동일한 수준에 놓았습니다.

 

후커는 앞에서 이미 고려하였던 두 개에다가 세 번째 유형의 준비론이 가능한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성화하는 슬픔”(, 영광을 위한 준비)과는 명백하게 구분되는 구원하는 슬픔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이제 두 개의 질문들이 답변되어야 합니다 첫째, 이 건전한 슬픔이 유기자 안에서 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행위일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 나는 이 행위가 다른 행위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순서를 보여주겠습니다. 둘째, 나는 이것을 성화하는 슬픔과 다른 차이점을 보여주면서,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성화하는 슬픔에 이르게 되는 것을 보여주겠습니다.

순서를 살펴봅니다: 첫째 이 일에 가운데 있는 심령은 아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의심할 것 없이 그것(영혼)에 이 일을 갖고 있는 영혼은 그 안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건전한 구원하는 슬픔과 성화하는 슬픔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첫째, 준비에 있어서 차이가 있고 둘째, 성화 안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 준비 안에 있는 슬픔은 나에게 일어나게 되는 슬픔이며, 나의 영혼은 수동적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 안에 있는 어떤 영적인 능력으로부터 일어나는 일이라기보다는, 전능하신 분의 손아래에 있는 하나의 환자입니다.

성화 안에 있는 슬픔은 은혜의 원리로부터, 심령이 이전에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받았던 그 능력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이 안에서 그 사람은 자유로운 일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든 구원하는 일이 하나의 성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구원하는 일은 성화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커는 약간 다른 유형의 준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준비과정을 통과하는 사람은 아직 믿음을 가지거나 아니면 그의 행동들이 성화하는 것들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는 거듭나지 않은 자라고 참으로 불려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동적인 수납자가 되기 때문이며, 또한 의심할 바 없이 그 영혼은....그 영혼에 능력으로 (부어지는)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중생을 위한 준비도 아니고, “영광을 위한 준비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중생한 개인이 영화에 이르는 길을 따라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준비인 것처럼 보입니다. 후커의 생각은 남다른 것이 아니지만, 그의 용어만은 특별합니다.

 

이 개념은 후커의 작품 전체의 빛에서 검토되기 이전에는 너무나도 특별한 것처럼 보입니다. 후커는, 자기 앞에 활동했던 퍼킨스와 같이, 한 영혼이 구원에 이르는 길을 통과하는 각각의 모든 단계들을 검토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 준비의 단계라는 것은 아마도 논리적인 것이지 연대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핵심열쇠는, 만약 어떤 사람이 준비의 단계에 있다가 죽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후커의 답변에 담겨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적절하고 준비되어진 자가 주님을 즉각적으로(immediately)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게으른 질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건전한 슬픔이라는 이 준비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죽기 이전에 구원하는 믿음을 행사함으로써 즉각적으로(immediately)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한역주: 애매모호하다. 중생의 씨앗이 뿌려질 때, 곧 좁은 의미의 중생 후 즉각적으로인지, 아니면 죽음 직전에 즉각적으로인지, 아니면 좁은 의미으 중생 이후 준비의 과정이 진행되는 중 어느 한 순간에 즉각적으로인지 분명치가 않다. 특별히 세 번째 가능성은 해당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이 아니다!). 이것이, 자신이 하였던 다른 진술들을 화해시키는 손쉽게 조화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처럼 보이며, 또한 그가 어떻게 초기의 알미니안주의의 오류를 피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존 코튼은 준비주의자였지만, 후커와는 상당히 다른 준비론을 주장하였습니다. 후커가 어느 정도 퍼킨스가 시작하였던 그 선의 사상의 산물이라면, 후커는 약간 더 초기의 칼빈의 준비개념으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코튼은 청교도였고, 칼빈의 너무나도 초보적인 개념들보다 더욱 심화된 준비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여전히, 그는, 칼빈과 같이, 죄인을 땅에 꺼꾸러뜨리도록 겸손하게 하는 율법의 역할에 대해서 최상의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이 강조를 고전적인 준비주의를 부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정확하지 못합니다. 반율법주의논쟁을 통해서, 코튼은 계속해서 오히려 사실상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전에 필요한 준비의 단계들을 논의하였습니다. 여전히 그(코튼)의 강조는, 코튼이 신세계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신학자들 가운데서 그를 의심의 대상이 되게 하였습니다. 반율법주의의 논쟁은 그들이 코튼의 특별한 가르침들 중의 많은 것들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볼 기회가 제공해 주었습니다. 물론 Hutchison여사의 것에 대해서도 그러하였지만 말입니다.

 

한 가지 점에서, 코튼은 후커와 분명하게 달랐습니다. 코튼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모든 구원하는(saving) 준비에 앞서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후커는 우리가 보여주었듯이, 구원하는 준비는 믿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앞서는 것으로 가르쳤습니다(코튼의 관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믿음을 앞서는 것이고, 후커의 관점은 믿음이 그 연합을 앞선다는 것입니다). 코튼은, 그의 Covenant of Grace에서, 자신과 후커와의 차이점을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른 식으로 마음을 가질 수도 있는 이런 은혜롭고 값진 성도들에 대해서 충분한 명예를 돌리면서도 나는 고백하기를, 주님께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제공하시기 이전에는 그 심령 속에 어떤 구원하는 준비를 역사하시고 제공하시는지를 뚜렷하게 인식하지 못합니다.” 반율법주의논쟁 이후에, 보스톤노회가 개최되어, 코튼의 정통성에 대해서 완전히 결정하고자 하였습니다. 살펴 물었던 첫 번째 질문은, “믿음을 갖기 이전에 영혼 속에 어떤 은혜로운 상태나 성질이 있다고 보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코튼은 대답하기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수납하기 이전에는 우리 안에서 어떤 은혜로운 상태도 작용하고 있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답변의 마지막까지를 살펴보면, “은혜로운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일반적인 은혜의 행동들이 아니라, 진실로 선한(한역주 보충:구원함을 받은 자로서의) 행동들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코튼은 일관성있게 끝까지 후커의 구원하는 준비론을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반율법주의 논쟁을 통해서 분명하게 설립되었던 것들 중의 하나는, 중생을 위한 준비가 분명히 뉴잉글랜드신학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존 코튼과 같이 뛰어난 자조차도,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한역주: 준비론)의 타당성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상당한 의심을 받았었던 것입니다. 위기가 지나간 후, 코튼은 비록 자신이 후커의 독특한 구원하는 예비론을 부인하기는 하여도 준비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시점부터 계속해서, 그 형태는 다양하게 취해졌다고 하더라도, 뉴잉글랜드 신학자들 사이에서 분명한 일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 연구를 위하여, 이 일치는 에드워즈의 때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는 것을 인식하면 충분하겠습니다.1662년의 총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교회의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의 자녀를 유아세례를 받게 하는) 중도언약(the Half-Way Covenant)을 채택하는 것과 같은 중대한 변화는, 준비교리에 조그만 효과를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 교리의 뿌리는 아마도 언약적 세례관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뉴잉글랜드에서는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되어 심지어는 목회자들이 세례받지 않은 출생을 위하여 세례를 준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생을 위하여 준비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에드워즈의 조부였던 솔로몬 스토다드는 중도언약을 한 걸음 더 진척시켰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준비의 교리를 위해서 중요한 함축성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토다드는 주의 성찬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분별할 수 있기에 충분한 나이에 이르고 추문을 뿌릴 정도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세례받은 자들은, 비록 자신들이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이 안다고 하더라도, 성찬에 참여하고 또한 참여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스토다드는 그래서 주의 성찬을 외적인 언약의 구성원이 구원을 위하여 준비할 수 있는 은혜의 방편들로서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고전적인 청교도적 균형을 이제 성찬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추구함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수여하신다는 것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기회를 활용하는 것에 실패하게 되는 것은 유죄판결을 받게 될 기회를 매우 증가시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기대되어야 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의 인간적인 환상에 빠져서 행동하고 순종의 길을 걸어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는 것은, 거짓된 것입니다....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서 인정되어야 할 주의 성찬의 자리에 나아오도록 허용되어진다면, 그가 그것을 유용하게 할 것이라는 소망의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노력들과 하나님의 은혜 사이에 스토다드가 일관성있게 균형을 잡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분명하게 유지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가시적인 정도들을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자신에게 얼마나 불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지를 논의합니다. “사람들이 어린 시절부터 가시적인 성도들40대나 50대 연령에 이르기까지 왜냐하면 신앙의 실행이 결핍되어 있다고 해서 주님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지 못하다고 믿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그들은 은혜의 연약함 때문에, 그들은 부인되어서는 안 됩니다. 최소한의 은혜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보양이 되고 양육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시적인 성도들은 최소한의 연약한 은혜의 수혜자들이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연약한 은혜는 필연적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융성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광을 위한 준비의 한 사례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칼빈주의자 스토다드가 만약 그 사람이 진실로 추구하는 것이라면 단순히 소망의 근거가 있다고 진술하고 있는 앞의 인용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힘듭니다. 만약 은혜의 씨앗들이 이미 현재하는 것이라면 단순한 소망 보다 더한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유일하게 가능한 화해는 다시금 세례와 준비의 관계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회심하게 하는 규례”(converting ordinance)로서의 스토다드의 주의 성찬에 대한 관점은 아마도, 회심에 있어서 세례의 역할을 아주 강조하는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대륙의 신학자들과 같이, 스토다드는 언약의 자녀들은 거듭나지 않은 것으로 입증되기 전까지는 거듭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은혜에 관한 낙관주의는 칼빈과 불링거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그들과 같이, 그는 모든 자녀들이 구원하는 은혜를 소유한 자들이라고 문자적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스토다드의 이 낙관주의적 관점이 성례에 대한 그의 입장에 분명히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자신들이 거듭나지 않았음을 알았던 가시적 성도들조차도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할지라도, 그가 저 극단에까지 끌고 갔던 선상의 생각은 아마도 거듭나지 않은 것으로 입증되기 전에는 거듭난 자로서 성찬에 받아들여져야 할 많은 사람들이 그 당시 금지되고 있다는 그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에드워즈를 살펴보기 전에 한 분 마지막 청교도인 코튼 마더(Cotton Mather)를 고려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더는 에드워즈에게 스토다드보다는 덜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의 준비론은 에드워즈의 가르침의 중요한 배경이 되는 뉴잉글랜드에서의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더는 준비주의라는 용어와 관련된 많은 것들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준비를 거의 전적으로 창조주 앞에서 겸손한 상태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행동들에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에 의심의 눈초리를 두었습니다. 그는 반복적으로 강조하기를, 자기 자신을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자로서보다는 멸망의 길을 가는한 죄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습니다.

 

코튼 마더는 그 자신 개혁진영의 너무나도 활동적인 설교자여서, 인간의 행동들과 하나님의 주권성 사이에 있는 잘못된 이분법 때문에 준비에 관하여 주저함으로 가지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마더에게는 많은 뉴잉글랜드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준비되어진죄인들이라는 것에 태연하게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역할을 하셔야 합니다. 마더는 자연스럽게 그의 영혼의 깊은 곳에서 준비에 대한 이런 왜곡을 저주하였습니다. 이들 죄인들은 구원을 추구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자연적인 능력들을 실행하는 것을 시작조차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모든 준비주의자들은 겸손을 하나의 본질적인 단계로서 말하였습니다. 어떤 진실되게 겸손한 죄인은 자기 자신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멸망하고 있는 것으로 볼 것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면, 마지막 숨까지 모든 것을 다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준비하려고 할 것입니다. 비록 그가 자신의 자연적인 능력들을 최대로 활용하였다고 하더라도, 겸손한 죄인이라면 자신이 은혜를 받기에 가치가 있는 일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마더는 영적 자족감의 암이 준비()에조차도 퍼져 있음을 보았습니다. 물론, 스토다드의 관점은 의도하지 않은 채 이 퇴보를 부추겼던 것입니다. 이제 준비되어진 죄인은 외적인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모든 특권들에 참여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대각성운동은 준비에 있어서 멸망하는 죄인에 대한 강조로 되돌아가야 할 것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에드워즈식의 준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첫째, 우리는 준비라는 바로 이 개념에 대하여 칼빈주의자들이 느끼는 방해물들에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어려움들을 에드워즈가 어떻게 극복하였는지을 보여준 뒤에, 준비에 대한 그 자신의 정당화와 방법론이 제시될 것입니다. 그런 뒤 본고는 에드워드 자신의 학파와 19세기의 다른 발전들 가운데서 준비주의가 맞게 되는 운명을 간략하게 검토하게 됩니다. 그리고 21세기의 칼빈주의의 맥락에서 준비주의를 살펴보면서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I. 준비에 관한 칼빈주의적 어려움들

 

기독교신학의 모든 형태들 가운데서 준비주의와 가장 양립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분명히 칼빈주의입니다. 칼빈주의 안에 있는 최소한 세 가지 근본적인 주제들이 준비와 어떻게든 관련되어 있는 개념과 대립되어 싸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첫째, 예정론은 하나님과 관계해야 합니다; “수단들은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외면적으로 그것들은 구원에 관한 상호적으로 배타적인 방법들처럼 보입니다. 둘째, 칼빈주의가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이, 절대적인 도덕적 노예상태가 구원의 필수불가결한 방법으로서의 믿음과 개념적으로 결합되어질 수 있는가요? 여하튼, 셋째,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는 선행의 필연성을 이단으로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에드워즈식의 칼빈주의에서는 동일한 열정을 갖고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1. 예정론과 수단의 사용

 

칼빈주의의 번갯불관()이나 영혼의 거룩한 강간관(强姦觀)이 어떻게 그렇게도 흔한 것이 되왔는가를 보는 것이 쉽습니다. 확실하게, 칼빈주의는 절대적인 예정론을 가르쳐 왔습니다. 모든 것이 - 인간의 행동들을 포함해서 - 하나님의 영원전 작정과 - 조화로운 - 완전하게 조화로운 관계를 이뤄 왔습니다. 어느 것도 예외 없이 - 악도 제외되지 않고 - 하나님께서 미리 - 영원 전에 미리 - 결정하지 않은 것 없이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발생해야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미리 아시지 않은 것이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오류 없이 예정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완벽하게 미리 아시는 것입니다. 한 개의 나사도 느슨하지 않은, 전적으로 폐쇄된 우주에서, 팔꿈치라고 움직일 수 있는 자유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한 인간의 행동이 프로그램화된 섭리 속에서 차이를 만들어 내겠습니까? 특별히, 인간의 행동들 그 자체들이 그 프로그램의 한 부분일 때 말입니다! 분명히, 번갯불이 치거나 성령이 강간하신다면(하실 때) 그저 그는 기다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안하는 것 외에 어떤 다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면, 어떻게 사람은 구원을 위하여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무언가를 하게 되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언가를 하면 구원을 맏을 것입니다. 무엇가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일은 준비되는 것입니다! 아니라면,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2. 도덕적 무능과 신앙

 

준비를 하는데 넘어야 할 또 다른 칼빈주의적 장애물은, 도덕적 무능과 신앙 사이에 있는 분명한 불일치입니다. 구원을 위한 준비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위한 준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아무런 준비가 있을 수 없는 그 일을 위하여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요? 도덕적 무능은 사람이 죄인임을 가르칩니다. 전적으로 죄인이며 죄인 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와같이, 그는 불신자입니다. 전적으로 불신자이고 불신자 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닌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신을 갖게 하기 위해서 진짜 불신자를 어떻게 준비시킬 수 있다는 것일까요? (에드워즈가, 우발적으로라도, 관찰하고 싶어 하는 대로) 성경조차도 그 불합리성을 강조합니다: “누가 깨끗하지 못한 중에서 깨끗한 것을 가져올 수 있겠느냐? 아무도 없느니라.” 그리스도께서도 직접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위로부터 나는 새출생을 떠나서, 어떻게 우리가 믿음을 준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거듭날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그 첫 번째 때에 태어날 수 있도록 준비하였던가요? 그렇다면, 동시에, 아마도, 그는 그 두 번째 출생을 준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은 (비록 그가 영적인 영역에 대해서보다는 물질적인 영역에 대해서 그것을 적용하였을지라도) 적절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니고데모에게 그리스도께서 보여주기를 이 두 번째 출생은 영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신 것 외에는, 어떻게 니고데모가 그것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함축하는 바는, 그가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 번째 출생처럼 두 번째 출생이 그에게 발생하는 것이지 그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위한 준비는 분명히 도덕적 능력을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입장은 최소한 알미니안적입니다. 펠라기안적인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페리 밀러가 준비주의를 초기의 알미니안주의라고 생각했고, 칼빈과 에드워즈 같은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 이런 교리와 함께 죽은 자로 발견될 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지성적인 사람들은 기름을 얻기 위해서 견고한 바위를 뚫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사람이 바위를 뚫으려고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여러분은 결론 내리기를, 그것은 견고한 바위가 아닐 것이라고 하거나, 최소한 그 사람들이 그것은 견고한 바위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곳 어디엔가에 기름이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미니안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을 위해서 준비시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칼빈주의자들은 어떻습니까?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의 선이, 에드워즈가 신앙을 위하여 설교하는 것을 보았던, W.W.Sweet로 하여금, 요나단 에드워즈가 알미니안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은 기괴하다고 할 만큼 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하였던 것입니다(그는 그것을 그의 칼빈주의가 경건주의로 스며든 것이라고 부릅니다). 밀러와 스위트가 머리를 맞대고 싸우고 있습니다 - 하나는 에드워즈가 칼빈주의자로 남아있다 하도, 다른 이는 그가 알미니안주의로 바뀌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동일한 인물에 대해서 두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다른 것입니까? 진실로 칼빈주의자라면 신앙을 위하여 죄인들을 준비시키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에 그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밀러는 에드워즈가 칼빈주의자로 남아있었다고 올바르게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결론을 내리기를 에드워즈는 결코 준비론을 가르치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스위트는 (증거와는 다르게) 잘못되게 확신하기를 에드워즈는 경건주의적 알미니안주의자로 바뀌었다고 하였습니다. 에드워즈가 행동과 신앙의 필연성을 설교하였다는 것을 올바르게 관찰하였기 때문입니다. 둘 중 어느 학자도 한 명의 흠이 없는 칼빈주의자라면 신앙을 위하여 준비시켜야 할 것을 믿을 수 있다는 겉으로 보이는 불합리함을 견뎌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밀러는 에드워즈가 준비론을 가르쳤다는 것을 부인하였고, 스위트는 그가 칼빈주의자로 남아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였습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신앙을 위항 죄인들을 계속해서 준비시켜가면서도 여전히 칼빈주의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강단의 이 Houdini(한역주: 헝가리 마술사 중의 한 명. 현대 마술계의 원조인 프랑스의 장 외젠 로베르우댕/Jean Eugene Robert-Houdin의 이름에서 자신의 예명으로 사용하였다)가 어떻게 트릭을 수행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남았습니다.

 

3. 신앙에 의한 칭의와 필연적인 행위

 

만약 예정론과 자유를 조화시키는 칼빈주의적 난제가 어려운 것이라면, 전적인 도덕적 무능과 던적인 도덕적 책임을 조화시키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이며, 신앙에 의한 칭의와 행의 절대적인 필연성과 조화를 시키는 것은 칼빈주의자가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당연히 이 두 교리들의 외현상의 양립불가능성은 그들이 칼빈주의자가 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더욱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 칼빈주의적 준비론자들은 행위들을 심지어는 은혜가 오기 이전에조차도 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최소한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준비(pre-paration)가 은혜 전(pre/before)에 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 용어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요? 게다가,준비의 필요성이 설교되는 것은 특별히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 향한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심지어 칭의 이후에라도 진실로 덕이 있는 그 어떤 것을 행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들이 칭의 이전에 그렇게 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그것을 위하여서 설교한단 말인가요?

 

조나단 에드워즈는 특별히 이 점에서 약점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노쓰햄프턴에서의 제1차대각성운동은 신앙에 의한 칭의에 대한 연속 설교들을 따라서 발생하였습니다. Tracy에 따르면, 그 부흥을 설명하였던 것은 선포된 대로의 그 교리의 순전함이었습니다. 트레이스는 말하기를,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오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일도 지명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을 위하여 문을 열어주고 들어오기를 힘쓰라고 하는 것이 그 교리의 순전함이었음에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원래의 설교문에는 1738년의 편집인쇄된 형태 안에서보다 더 이상의 적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곧 이후에, 부흥설교인 천국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이라는 유명한 설교가 선포되었는데, 에드워즈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기를 힘서 그것을 차지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관한 것입니다.” 그 이후의 각성에서 우리는 창세기6:22에 기초한 그 유명한 설교를 읽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구해야 합니다.” 그가 설교하기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공을 세워야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당연히 가능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에드워즈의 부흥은 철저하게 은혜로운 칭의와 더불어서 한쌍이 되어 선포된 각성된 죄인들의 편에서 가장 힘써서 구도하는 것을 전혀 타협하지 않은 채로 요구하였던 위에 세워졌던 것입니다. 전혀 여러분의 애씀에 의존하지 않는 값없는 선물을 위하여 힘써서 구하라. 공로를 행함으로 얻을 수 없는 그것을 위하여 일하라. 여러분의 부인이 여러분을 난잡스럽도록 은혜로운 하나의 임의적인 신성을 지니는 것 외에는 그 어느 곳에도 이르게 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여러분 자신을 전적으로 부인하시라. 사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은 여러분이 애씀이 결코 여러분이 그 문을 통과하게 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실상은 여러분을 궁극적으로는 더 멀리까지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이것은 반()역설적인 정통주의를 역설적 신학자보다 더욱 역설적이게 만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종교개혁시대로부터 칭의에 대한 개신교의 교리는, 준비론이 아니라, 반율법주의를 낳게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트렌트는 천둥을 치듯이 이렇게 저주를 선언하였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말하기를 죄인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하면서, 그것이 의화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협력하는 것이 어떤 것도 요구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말한다면, 그리고 그가 그 자신의 의지로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래서 로마는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신앙만으로 칭의가 되는 것을 가르치면 신앙만 있을 뿐이다(한역주: 사랑이 역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 그 비판은 너무나도 일관성이 있기 때문에, 심지어는 어떤 개신교도들(신율법주의자들/the Neonomians)은 크게 흔들렸고 에드워즈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칭의가 어떤 때라도 어떤 행위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어떻게 그것이 준비적인 행위들과 일치될 수 있단 말인가요? 어떤 종류의 선행적인 은혜가 로마의 오직 은혜(Sola gratia)를 위한 문제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개신교의 오직 믿음(Sola fide)의 맥락에서 논의될 수 있겠습니까?

 

II. 칼빈주의적 준비론을 위한 에드워즈의 변증

 

1. 난제들의 해결

 

(1) 예정론과 준비

 

에드워즈의 책들과 설교들 중 많은 것들이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행위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인 의지의 자유의 주제였습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방향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그 제목이 저 의지의 자유라는 현대에 편만해 있는 개념들을 조심스럽고 철저하게 검토해 보는 것으로서, 그 개념은...였습니다. 그것은 예정과 자유는 상호간 배타적이라고 하는 현대에 편만해 있는알미니안적 개념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강조점은 두 교리들을 조화시키는데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대립을 반증하는데 있었습니다. 칼빈주의적 입장을 입증하는 것이기 보다는, 비판하는 주장들의 불합리함을 줄이는 것(reductio ad absurdum)이었던 것입니다. 작정과 섭리에 대한 에드워즈의 묵상집은 더욱 그 점에 기울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에드워즈가 준비와 관계해서 예정의 문제를 취급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최상의 방법은 어떻게 그가 실제적으로 예정을 준비의 한 방법인, 특별히 기도에 대해서 연관시켰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의 대 각성들 사이에, 에드워즈는 시652절에 대한 설교를 하였는데, 그 주제는, “그것은 지고하신 분의 성격이고,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였습니다. 예정이나 예정과 기도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 없이,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제와 문제를 설교하면서 그것을 명쾌하게 해결합니다: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서 왜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요구하시는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하는 바나 갈망하는 것에 대해서 보고를 받으시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전지하시고, 그분의 지식에 관해서는 불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보제공에 의해서 어떤 지식을 얻으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그분에게 간구하기도 전에,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수천 배 더욱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방식으로 말해서, 비록 하나님이 때로는 그의 백성들의 기도들에 의해서 감동을 받고 설득을 당하시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들의 기도들에 의해서 감동을 받거나 뜻하시게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적절하지 못하고, 하나님 안에 새로운 지식 보다 어떤 새로운 이끌림이나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은 전혀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원천은 오직 그 분 안에만 있습니다; 그 분은 스스로 움직이십니다(self moved); 그리고 어떤 자비를 그분이 베푸신다 하더라도, 그것의 이유와 근거는 피조물 안에서 찾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에서 찾아져야 합니다. 자비를 이런 식으로, 곧 기도에 응답하셔서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자비를 베푸실 것을 미리 계획하실 때, , 그분께서 그것을 약속하셨을 때, 먼저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에스겔3636,37절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고 한 것처럼, 우리가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기도에 설복되신 것처럼 기도의 결과로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기도하고자 감동이 되었을 때, 그것은 그분께서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시는 그분의 의도하시는 것의 효과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은혜와 간구의 영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그런 뒤 왜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서 기도를 요구하시는지를 설명합니다. 두 가지 이유를 제공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것을 민감하게 인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것이 축복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를 준비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렬한 기도는 많은 방식으로 심정을 준비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정이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동일한 원리가, 구원에 이르는 모든 단계들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으시는 것이 없으면, 준비를 포함해서 그 어떤 것도 전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심으심이 첫 번째 먼저 결정되었어야 하는 것인데, 그의 경우에 있어서는, 영원 전에 결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기도에서처럼,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에도 불구하고가 아니고, 그 작정 때문에, 발생하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피조물의 의지에 폭력을 행하지 않은 채로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피조물의 의지에 대한 폭력이 발생할 것임을 보여주고자 애썼습니다. 알미니안적 자유는 바람에 밀려가는연기와도 같습니다. 칼빈주의 체계 안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행하시고 사람이 모든 것을 행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행하시지 않으면 여러분도 모든 것을 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행하지 않으시면, 여러분은 어떤 것도 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생명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존재 속에서 순간마다 계속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의/그분의(our/his) 생명을 살고 있습니다. “생명이 그 생명자 외의 다른 어떤 원인의 효과이거나, 생명이 존재하게 된 그 살아있는 존재의 효과라고 추정하는 것보다, 행위가 그 행위자 외의 다른 어떤 원인의 효과이거나, 행위하는 그 존재의 효과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모순일 수 없습니다.”

 

(2) 도덕적 무능과 도덕적 책임

 

에드워즈의 교구민들이 구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각성되지 않고 있는 것에 관하여 자신들을 가장 변명하기 쉽게 하였던 것은, 도덕적 무능을 주장하는 것에 의해서입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볼 수가 없는데, 그 영적 실재들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단 말인가요? 우리가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요?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전적으로 무능력한 가운데서 애쓰는데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준비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느낄 수 있겠습니까? 성경적이면서 개혁신앙적 교리들에 따르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그 법칙에 우리가 예외일 수 있겠습니까? 에드워드씨, 당신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 다음에 당신은 말하기를 우리가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다고 당신이 말하는 그것을 우리가 행해야 한다고 당신은 말할 수 있는 건가요?

 

준비론에 대한 전체 주제에 있어서 에드워즈의 가장 중요한 일반적 저술들은 전도서910절에 대한 미발표의 네 설교들일 것입니다. 첫 번째는 그의 사역의 초기에, 그리고 마지막은 그가 임종하기 전 얼마 되지 않았던 때 인디언족들을 위하여 한 설교입니다. 포괄적인 방식으로, 그는 구도하는 죄인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하는 중에, 그는 준비를 위한 칼빈주의적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주장하기를, 타락한 사람은 도덕적 무능력으로 고통당하며 단순히 할 수 없는 일이 분명 있다고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첫째, (에드워즈는 이 본문에 대한 최근의 설교에 있어서 인디안들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살마들은 자신들의 죄악들을 위하여 값을 만족스럽게 치룰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이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둘째, 사람들은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하는 의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그것을 제공하십니다. 셋째,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hearts)을 변화시킬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에드워즈가 결코 초기 알미니안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합니다. 존 칼빈조차도 죄인의 도덕적 무능력을 이것보다도 더욱 명백하게 그리고 투명하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죄인은 자신을 구원하거나 자신의 중생에 있어서 협력하는 것에 있어서 전적인 도덕적 무능력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인이 새로운 구조적 기능물들이나 원리들이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죄인이 할 수 없는 것 세 가지들을 제시한다면, 죄인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최소한 열 가지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일단 목록만 제시하겠지만, 본고의 방법론을 다루는 부분에서 발전시켜서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1) “사람은 자신의 욕정들의 외적인 만족들을 제한할 수 있다.”

2) “사람은 여러 면에서 유혹의 길을 금할 수 있다.”

3) “사람들은 이웃들을 향한 외적인 의무들을 수행할 수 있다.”

4) “사람들은 성경을 연구할 수 있다.”

5) “사람들은 모든 규례들을 지킬 수 있다.”

6) “사람들은 입술을 종교의 목적에 따라서 사용할 수 있다.”

7) “사람들은 상당한 정도로 자신들의 생각들의 명령을 가지고 있다.”

8) “사람들은 상당한 정도의 시간들을 이런 일들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다.”

9) “사람들은 주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향상시킬 수 있다.”

10) “그들은 다른 일들 뿐만 아니라 이런 일들에 자신들의 힘을 투자할 수 있다.”

 

이것은 에드워즈가 자신의 준비론에 있어서 알미니안주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그 비판에 답변하고 있다는 것이 완벽하게 분명합니다. 그가 죄인들이 할 수 있다고 제공하는 한, 그 모든 것들이 자연적 능력에 의해서 수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 중에 어떤 것에도, 그 모든 것들에도, 한 점의 덕(virtue)이 없습니다. 에드워즈는 설명하기를, 죄는 손(hand)의 능력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자원함(willingness)을 파괴시킵니다. “외적인 행위들은 남아있기를 영구적으로 부패한 자들의 힘 속에 그러합니다. 청교도들이 말하기를 좋아하듯이, 죄인들의 발은 술집으로 데려갈 수 있는 것처럼 집회장으로 데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변명하는 것은, 자신들이 할 수 없었다는 것 때문에 변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만약 죄인이 자원하지 않는다”(willing), 어떻게 그가 어떤 일을 행할”(do) 수 있겠는가고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거듭나지 않은 자가 원하지도 않으면서(unwilling) 그 동일한 의미에서 (그 원하지 않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원하지도 않거나 덕을 향하고자 하는 성향도 없으며, 덕을 수행하는 것이 지속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이익을 구축하는 동기에서) 외적인 덕이나 덕으로 보이는 외적인 행위들을 자원하거나 그것들을 향한 성향들을 가지고 있고, 이런 행위들을 아주 잘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이신칭의와 필수적 행위들

 

필수적인 행위와 결합되어 있는 오직 신앙에 의한 칭의는 모든 칼빈주의적 준비론자들에게는 가장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리고 에드워즈적인 부흥에 있어서 구원을 위하여 사람들을 첫 번째로 준비시키는 것은 칭의에 관한 연속설교들이기 때문에, 아마도 이 난제에 대한 에드워즈의 해결책을 살펴볼 수 있는 최상의 장소는 이 설교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실망하지 않게 됩니다.

 

그 위대한 연속설교들의 주제는,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으로만 의롭게 되고, 어떤 방식의 덕이나 우리들 자신의 선함으로 의롭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설명한 뒤에, 에드워즈는 그것을 지지하기 위해서 네 가지 논증들을 제시합니다. 첫째, 신앙과 그 열매는 칭의에 합당치가 않습니다. 둘째, 그것으로만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 성경은 절대적 은혜로우심의 주제에 대해서 너무나도 충만합니다. 셋째, 우리들 자신의 덕에 의해서 의롭게 되는 것은 은혜로부터 타락한 것입니다. 넷째, 우리들 자신의 덕에 의해서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속하는 것을 사람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므로 그의 의를 전가하는 것과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주의에 대한 여섯 개의 반대들에 대한 에드워즈의 답변을 여기서 다룰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적 순종의 역할에 대한 그의 묘사가 본질입니다. 이 주제는 그 논문의 세 번째 부분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으로 그것을 에드워즈는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여겨진다는 것과 그것이 일치된다는 것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첫 번째 칭의에 있어서 미래(future)로서 보여 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이것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면, 칭의는 연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이 중요한 가르침에 대한 충분한 논의는 칭의를 온전히 취급하는 것으로만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선행의 불가결성은 금방 인용한 문장 속에서만큼 더욱 강력하게 진술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심지어 성도들 안에서조차도) “선행의 무공로성은 계속 강조됩니다: “순종은 그 자체로서 뛰어난 것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오직 그것(선행) 안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있을 때에만 뛰어난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날카롭게 지적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시대의 현대적인 신학자들의 체계를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앙이 순종의 행위나 표현으로서만 의롭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사실은, 순종은, 신앙의 표현이라는 것 외에는, 칭의에 있어서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만약 어떤 에드워즈적인 성도도, 아무리 완전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행위가 칭의에 어떤 관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고 한다면, 그 어떤 덕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 어떤 구도자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면, 만약 오직 믿음으로만 완벽하게 의롭게 된 사람들이, 그들의 칭의가 연기되어져야 할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복음적 순종을 계속해야 한다면, 분명 단순히 구도하는 어떤 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그것 없이 지낼 수 있는 자유가 자신에게 있다고 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완전을 향하여 추구하는 것이 의롭게 되는 자들에게 최소한이라도 요구되어지는 것이라면, 어떻게 전혀 어떤 행위들도 의롭지 않은 자들에게 요구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에드워즈가 이것과 다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그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진리를 발견하는 것보다 더 선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그것들, 특별히 신학적인 수수께끼들을 갖고 오히려 희롱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을 죽는 것 같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답변을 주기 보다는 에드워즈는 오히려 경고를 하였습니다. 신학적인 신비들에 탐닉하는 것 때문에 구원을 추구하는 것을 순간적으로라도 멈춰버리는 것은, 가장 위험한 모험입니다. “....여러분이 저주를 당하지 않으려면, 여러분은 죽기 전에 해야 할 큰 일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로마서3:11ff에 대한 미발표된 아주 중요한 설교에서보다도 구도와 칭의를 위한 자신의 기본적인 신학적 정당성을 더욱 철저하게 설명해내고자 하였던 곳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자연인이 하는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습니다는 것이 그 설교의 교리인데, 그것은 어떤 구도도 고소하고 있는 것 같고, 그것을 실제에서 금하고 있는처럼 보입니다. 만약 구도자들이 하는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들이 구도하고 있는 그것 자체도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두 가지 다른 관찰들을 하고 있습니다: 구도하는 것은 그것이 외현적으로는 옳은 것이기 때문에, 구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덜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적으로 옳을 수 있습니다. 혹은 에드워즈가 그것을 표현한 대로, “자연인들은 이 점에서 옳은 저 일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다. , 그것들은 그들의 영혼들의 선함 안에서 나오게 되는 것 같은 일들입니다.”

 

첫째, 구도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악한 것이지만, 전혀 구하지 않는 것보다는 덜 악합니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죄는 죄임을 확실합니다; 하지만, 모든 죄들이 같은 색깔은 아닙니다. 사악함은 에드워즈가 좋아하는 교리문답이 율법을 범하는 모든 범죄들이 동일하게 사악한 것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가르쳤던 것처럼 너무나도 다양합니다. 그 답변은 이렇습니다: “어떤 죄들은 그 자체로서, 그리고 여러 가지 악화되는 이유들로 다른 것들보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더욱 사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하여 베푸시는 모든 모험을 여전히 져버리는 것은 분명히 더욱 악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그분은 자신의 반역하는 자녀에게 당신의 완전히 분노를 퍼부으시기를 참으로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반역아가 그 신적인 억제의 기회를 취하여서 자신의 악한 행위를 억제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죄를 짓게 된다면, 그것은 사소한 범죄가 아닌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섭리 가운데서 특별하신 하나님의 호의, 곧 각성과 같은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면, 그것을 계속해서 저버리고 있는 것은, 자신의 큰 죄악들로부터 최소한 외적으로라도 돌아서는 것이 그들의 사악함으로 분명하게 감소시키게 될 것만큼이나 그 죄를 더욱 악화시킬 것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항상 적용되는 구도를 위한 다른 큰 이유는,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멸망을 보증하는 것이 되는 것처럼 확실한 구원의 가능성입니다. 구원은 분명히 어떠한 구도자에게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면서도, 저주는 구도하지 않는 모든 자들에게 보장되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에드워즈의 가장 흥미로운 유형론적 설교들 중의 하나의 토대였습니다. 아마도 이 주제를 가장 흥미롭게 취급한 것은 열왕기하73~4절에 기초한 아주 초기의 설교입니다. 에드워즈는 성공이 보증되지 않지만 구도하는 것의 합당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나병이 걸린 거지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아람군대에 의해서 포위를 당해서 기근이 닥친 사마리아 성문 어귀에 앉아 있었고, 그 가까이에는 아람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나병환자들은 성 안으로 들어가 굶어죽거나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면서도 살아날 기회가 있기도 한 아람군의 진지로 가는 모험 사이에 끼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혜롭게 원수의 진지로 들어가 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진이 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들은 버려져 있는 온갖 것들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부터 에드워즈가 도출해 낸 영적 평행선이 그의 설교의 교리가 됩니다. “구원받게 될 가능성은 멸망할 것의 확실성보다 더욱 선호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는 첫 번째로 멸망하게 될 확실성이 있는 다섯 가지 방식을 설명합니다: (1) 우리의 영혼들을 무시함, (2) 알려진 죄을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함, (3) 구원을 찾는 것을 포기하게 됨, (4) 우리들 자신의 의를 계속해서 신뢰함, 그리고 (5) 하나님과 다투는 것, 특별히 그분의 작정들에 관해서 다투는 것이 그것들입니다. 그 다음 그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는 자들 외에는 모두를 위하여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심지어는 너무나도 엄청난 죄인들과 아주 나이 들어 아직도 회심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서조차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설교의 세 번째 부분은, 그 교리의 이유들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혹은 왜 구원받게 될 가능성은 멸망당할 확실성 보다 더욱 선호되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첫째, 최종적인 멸망은 너무나도 두려운 것이어서 구원을 구하는데 있어서 겪게 되는 모든 어려움들은 성공적일 수 있는 단순한 기회에 대해서 그럴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재난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인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이 있다면 견뎌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계속 느끼는 것보다 수천 배가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구원받을 수 있는 단순한 가능성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둘째, 영원한 생명은 너무나도 바람직한 것이어서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소망은 그것을 얻는데 있어서 발생하는 어떤 어려움들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설령 지옥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천국을 기업으로 얻기 위해서 어떤 고통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구도를 위한 가장 근본적인 도덕적 정당성은 그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구도하지 않는 것보다 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 것도 안하는 것보다 덜 잘못된 것을 행하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분명히 이런 구도는 법정적 칭의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2. 구도를 위한 이론적 근거

 

(1) 하나님의 명령

 

칼빈주의적 준비 혹은 구도의 가능성을 위한 근본적인 정당성을 보여주면서, 에드워즈는 그 논증된 도덕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을 위한 논증들을 계속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 가지 근본적인 논증들에 있어서 구도하는 것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령하고 있다는 너무나도 기본적인 그러면서 언제나 충분한 사실이 있습니다. 둘째, 몇 가지 이것저것의 유익들이 있습니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간 부정적이지만 의미있는 영원한 유익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 신적인 명령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추구하기를 명령하십니다. 그것이 이 사안의 끝이며- 그리고 시작입니다. 계속해서 인용되고 있는 성경의 모든 구절이 여기에 연관됩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그리고 그의 교구민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명령하는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구하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 구하라하십니다. 성경이 준비하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구하라고 하십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힘쓰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힘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성경이 뛰어나게 합리적인 책이며, 그러므로 그 모든 명령들은 합리적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살마들이 성경이 합리적이라고 보려는 것보다 더욱 분명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특별한 rfl의 합리성을 볼 수 있든지 아니든지, 그것이 성경에 있다는 것은, 그 합리성이 가능하다는 가장 위대한 입증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들을 가지고 있든지, 어떤 어려움들이 있든지, 어떤 변명들을 하고 있든지,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 준비하라! 는 명령 말입니다.

 

(2) 보장된 자연적 유익들

 

영원한 구원을 추구하는데는 일시적인 유익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영원한 구원과 비교하면서 무한하도록 가치가 없는 것들이지만, 그것들은 또한 무한하도록 더욱 확실한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시대에 청교도집안의 아들이라는 것은, 수천개의 투표권만큼이나 가치가 있다다는 속담이 있었습니다. 청교도적 훈련은 주변인들이 그것들을 실행하든지 아니든지 그들이 인정해주었던 덕들을 증진시켰습니다. 만약 세상의 가장 좋은 쥐덫을 만드는 사람이 청교도가 아니라면, 분명히 한 청교도가 그 사업에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만들어서는 그것도 상당히 싼 값으로 팔 것입니다. 신실함이 청교도들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보증수표였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것을 다만 일시적으로라도 번영케 해주시는 경향이 있으셨습니다. 지혜와 신실함은 풍요와 천국으로 나아가는 것을 무시하는 저열한 사람들을 위한 길입니다. 이런 것도 있습니다: “교리1. 하나님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물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는 지혜는 경건한 자들에게만 주십니다. 그들만 그 물질들의 위로들을 진실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교리2. 하나님은 악한 자들에게 세상적으로 좋은 것들을 모으고 지키고자 하는 수고와 신경을 쓰게 하시지만, 이것들은 그들의 것이 아니고 경건한 자들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적 신중함은 번영을 촉진시키는 경향이 있었고, 만약 그 청교도가, 어떤 이유로 인하여, 번역하지 못한다면, 그는 여전히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신중하지 못함은 번역하는 파괴시키는 경향이 있었고 만약 악한 자들이, 그 어떤 이유로, 얼마큼 번영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여하튼 즐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구도자들에게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또 다른 분명한 자연적 유익은 영원한 심판에 있어서의 감소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현대의 독자를 놀라게 하는 고려사항입니다. 그는 지옥의 불은 완전히 꺼져 버렸다고 가정하는데, 미국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가 너무나도 진지하게 지옥에 확실하게 가게 될 죄인이 그 고통의 정도가 얼마큼 감소될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을 목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신학은 에드워즈가 말하는 스스로를 추켜세우는세상에 있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지옥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현대의 복음전도자들조차도 청교도들의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그 교리의 정교함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드워즈에게도 되돌아가는 것은 성경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 이 경우에는 마태복음522절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저 세상에서의 악한 자들의 심판과 비참은 그들이 죄책이 있는 죄에 대해서 비례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담의 원죄의 죄책이 있다는 것을 설명한 뒤에, 에드워즈는 인간의 부패로부터 흘러나오는 실제적인 죄들이, 그 자체로만도 악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의 경고와 같은 다양한 상황에 의해서 악화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또한 어떤 죄들의 해로운 성질과 영향력이 다음 세계에서 비례적으로 심판을 받게 될 그것들의 사악함을 더하여 줄 것임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만약 영혼들이 선지자을 무시함으로써 죄 가운데 죽어 망하게 되면, 하나님은 당신의 손에 그들의 피를 요구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죄에 의해서 타인들의 죄와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의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들은 그들의 가족들의 죄이며, 그들의 동료들의 죄이고, 또한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장소들의 죄이기에, 그들은 그들의 손에서 요구되었던 사람들의 피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머리에 더 많은 저주가 쌓일 것입니다.” 엄숙한 경고의 방식으로 그 주제를 발전시킨후에, 에드워즈는 자신들의 죄의 수와 사악함에 비례해서 진로하심을 계속 쌓아가고 있는 비언약자들의 곤궁함을 다룹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회심하였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도덕적인 대화를 가지는게 더 나을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그렇게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지옥에는 좋은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비참과 불행만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비참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여러분이 결코 천국에 가지 못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도덕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심판을 덜 받을 것입니다.”

 

그런 뒤, 에드워즈는 나는 저주를 받고 말지 뭐. 내가 어떻게 살든 신경쓸게 뭐람...”이라고 말하는 완고한 마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을 고려합니다. 하지만,“도덕적 삶을 삶으로써 많은 비참을 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유혹어리석은 실수에 토대를 둔 것입니다. “귿르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영원한 비참에 엄청나게 참으로 수 없게 하는 것을 첨가하는 것에서는 피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당연히 그 비참함의 어떤 정도도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전 생애 동안 구도하는 것은, 그들이 영원한 고통과 비참의 엄청난 정도를 피할 수 있기 때문에, 너무나도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이런 구도자들에게 낙심하지 않도록 강권합니다: “그들이 지옥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고 다만 그럴 가능성이 있을 뿐이지만, 너무나도 확실한 것은, 그들이 많은 고통을 피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이 구도하는 그 가운데서 죄를 짓는다고 반대한다면, 그는 그들에게 그렇게 반대하면서 구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더욱 직접적이고 더욱 의도적으로죄를 교묘하게 짓는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만약 여러분이 열 대의 채찍질을 당하게 되어 있다면, 열대 이상의 채찍질을 당하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은 전혀 가치가 덜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옥에 간다면, 비록 여러분이 얻을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힘써 구했어야 했었다고 후회할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여러분의 비참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키기 위해서 온 세상을 다 주려고 할 것입니다....” 그는 나이든 사람들을 경고합니다; 그는 죄 가운데 있는 지도자들을 경고합니다; 그들은 용광로의 가장 뜨거운 부분에 놓여지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자들은 자신들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다른 사람들도 또한 멸망케 하는 것입니다.

 

(3) 초자연적인 유익을 위한 소망

 

세 번째, 그리고 구도를 위한 지지논증으로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성공에 대한 소망입니다. 곧 우리가 추구하는 바, 영원한 생명을 발견할 수 있다는 소망 말입니다. 이 소망은 단순한 가능성일까요? 확률? 혹은 확실성?

 

20년 전 저는 구원에 이르는 단계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는 구원을 구도하는 결과에 대하여 설교하는 그(에드워즈)의 일반적인 분위기를 보기 위해서 이 주제를 다룬 50여개 이상의 설교들을 검토했습니다. 그의 가르침과 강조에 대한 얼마간의 인상을 얻기 위해서, 저는 이 설교들을 검토하면서, (구도의) 결과들이 성공적이다, 아마도 성공적이다, 혹은 확실하게 성공적일 수 있는지를 가리키고 있는지를 발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설교들 중에서 스물 일곱 개는 우리의 질문에 대해서 그 답변이 분명하였스니다. 이것들 중에서, 저는 열 두 개가 죄인이 그의 구도에 있어서 아마도 성공적일 수 있다고 가르치며, 일곱 개는 성공적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치고, 다섯 개는 그 결과는 확실치가 않다고 가르치고, 셋은 구도자가 확실하게 발견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페이지들 속에서, 저는 많은 준비를 위한 설교들의 가르침들과 풍미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뒤에, 저는 이 관점에서부터 다른 것들을 많이 검토하였습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구도에 대하여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에 뒤따르는 영원한 구원은(그것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묻기를,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한 구도자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고 질문한다면, 그 답변은 이렇습니다: “아닙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정의상 구원을 구도하는 자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도하는 삶이 있는 곳이라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구하는(seeks) 자마다 찾을 것입니다. 이 표현 자체가 다시금 이 청교도의 교리를 위해서 구도한다 ”(seeking)는 용어의 경향성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교회의 기억 속으로 파고 들어옵니다 - “구하라 그리하면 찾으리라.” 물론, 청교도들은 이것이 중생자들의 참된 구도(구도II:“영광을 위한 준비”)를 고려하는 것이지, 단순히 비중생자의 자기-동기화된 구도(구도I: “중생을 위한 준비”)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준비가 최소한 가능하게 구원에 이르게 되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그 강조는 준비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률의 정도가 아주 높다고 하는 것임이 또한 분명합니다. 이것이 날카롭게 진술되어 있는 곳은 그가 죄인들로 하여금 비록 그들이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은혜의 선물에 이르게 되지 않게 될지라도 구해보라고 설득하려고 할 때입니다. 일종의 사담(私談)으로서, 그는, 우리가 마태복음5:22에 대한 설교에서 보았던 대로, 추구하는 것이 은혜에 이르게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록 그들이 추구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추구하는 것이 어쩌면 구원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들에게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어떤 거듭나지 못한 구도자가 확실하게 (구원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에드워즈에 의하여 편집되지 않은 진술을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실, 예레미야29:13에 대한 설교는 거듭나게 된 구도자가 발견하게 되는 것에 관한 학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합니다. 에드워즈의 교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버렸던 자들이 자신들의 온 마음을 다해서 그를 찾고자 그를 구하려고 나아올 때, 그들은 그를 발견하게 되는 길에 들어서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예레미야가 거듭난 구도자를 말하든 것인지 거듭나지 않는 구도자를 말하는 것인지 확실하게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에드워즈 자신도 어느 쪽인지 확실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두 경우 모두 거듭난 자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설교의 개요의 중요성은 에드워즈가 구도하는 것을 하나의 완전한 구도로서 정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모든 마음을 다하여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적 불완전함에 어떤 굴복도 하지 않은 채로 하나의 특징적이고 관습적인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우리가 알고 있는 완전주의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거듭난 구도자들은 모든 마음을 다하여결코 구하지 않는 불완전한 구도자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의 절대적이고 제한이 없는 조건이라고 하면, 심지어 거듭난 사람이라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참된 구도자들은 바로 이 설교에서 인용되어진 많은 성경적 사례들의 경우에서처럼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 설교가 보여주고 있는 바는, 그러므로, 심지어 에드워즈가 발견하고 있는, 거듭난 구도자들을 아마도 다루고 있을 때조차도, 그는 평이하게 그것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설교에서도, 심지어는 그들은 그를 발견하는 길에 들어서 있다고 말하는 용어를 채택하는 교리 안에서조차도 진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에드워즈는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에 대해서 설교하였습니다 -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그의 신학 전체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그는 구도하는 것의 견지에서 그것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어떤 불완전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류의 구도의 교리에서는 두 가지 일들이 확실합니다: 하나는, 구도자는 자신이 실패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고, 둘째, 구도자는 자신이 성공할지에 대하여서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절망의 근거도, 절대적인 확신의 근거도 없는 것입니다. 실패의 확실성 때문에 포기해 버린 구도자는 어리석고, 성공의 확실성 때문에 계속해서 나아가는 구도자는 오만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발견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구도의 지평선 상에 분명하게 떠오르는 세 번째 사실이 있는데,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진정으로 지속적으로 구하는 이는 아마도 은혜가 주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질문하기를, 그는 그러면 불가피하게 자신의 구도가 그 성공의 공로가 될 것이라고 가정하게 되지 않을까 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한다면, 그는 심지어 구도자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공의 확률은 그를 버릇없이 만들지는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것은 또한 성공의 기회들을 손상시켜 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확실성에 관한 진술들에 대하여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물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기초하여) 성공하는 것을 보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에드워즈의 진술들에는 그것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에드워즈의 어떤 본문도, 적절하게 해석되면, 저 득의양양한 낙관주의를 가르친 것이 없다는 것이 이제 분명합니다.

 

여하튼, 에드워즈는 전체의 청교도들의 전통에서처럼 아주 권면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구도자들에게 있어서, 확실성은 언제나 표면 근처에 있습니다. 에드워즈의 말을 직접 들어보시고, 그의 말을 듣고는 절박하게 되어 당황하고 있는 간절히 구하고 있는 자들이 어떻게 파악하게 되었을 것인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살게 될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16:16)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좋은 이유가 있습니다”(마태11:12).

 

여러분이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큰 소망이 있습니다”(2:10).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사용되는 비슷한 방법들”(33:45).

 

“[진실한 구도자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은....너무나도 드문 일입니다”(5:22).

 

그들이 천국에 갈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실성이 없습니다”(5:22).

 

그들은 그를 발견하는 길에 들어서 있습니다”(29:13).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하시는 은혜를....그들에게 수여하시는 것을 통상적으로 기뻐하십니다”(3:11).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인내하면서 회심하기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보통 그렇게 성공을 허락하십니다”(5:12).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수여하시기를 더욱 기다리고 계십니다...”(11:13).

 

찾기를 결심하고 계속 찾는 이들....그들에게 그는 수여하십니다”(32:28).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자신들이 할 때, 하나님께서는 보통....그들을 위하여 그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전도서4:5).

 

III. 에드워드식의 구도의 방법

 

1723112, 에드워즈는 자신의 일기장에, “나는 내 자신을 엄숙하게 하나님께 드린다, 그리고 나 자신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포기한다고 기록하였다; 앞으로 내 자신을 전혀 고려하지 않겠으며; 어떤 면에서도 나에게 어떠한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하지 않겠다.” 이 날짜는 시몬슨(Simonson)에 의해서 에드워즈의 회심한 날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겠습니다. 하지만, 헌신과 회심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만약 회심하게 되면 헌신해야 하는 것이지만, 회심하는 것이 없이도 헌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자신을 드리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 사람이 구도자일 수조차도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 같습니다. 구도자들을 위한 청교도적인 검증은 너무나도 높아서 대부분의 현대의 크리스챤들은 자격이 없는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시몬슨의 증거는 전혀 결정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날짜는 그럴 확률은 아니어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헌신에다가 첨가하여 이것은 엄청난 영적 경험과 즐거움의 기간이었고 분명히 개인적 이야기에 분명히 그렇게 언급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723112일이 만약 에드워즈의 첫번째 회심의 날짜라고 한다면, 분명히 그것이 즉각적인 확신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0여년 뒤쯤에 그는 나에게는 어떤 면에서 나는 저의 첫 번째 회심 이후 2-3년 동안은 지금보다 더 훨씬 좋은 크리스챤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지속적인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진보가 있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더욱 완전하고 지속적인 감각을 가지게 되고; 그리고 복음서에 계시된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감각이 더욱 생겼습니다. 특별히 어느 토요일 밤에....”

 

에드워즈 자신의 구도와 준비에 대한 동일한 불확실함이 이 주제에 대한 다른 이들에게 그가 설교한 것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많은 것들이 구도의 계획 속에 있는 항목들입니다. 어떤 것은 긍정적이고, 어떤 것은 부정적입니다. 당연히 어떤 것들은 하나님의 일들이고, 어떤 것들은 사람들의 일입니다. 만약 사람에 의한 구도와 하나님에 의해서 구도자를 준비시키시는 것 사이에 구분(결코 분명하게 구분이 그어져 있지 않는)이 없는지 우리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구분하시는 것과 하나님에 의한 경향성 사이에 (결코 어떤 선이 그어질 수 없는) 구분을 여기서 우리가 가지는 것이 가능하기조차 하는 것일까요? (후커의 그림자!). 먼저 그 항목들을 제시하고 그 후에 그것들을 위한 함축적인 구조를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지 살펴봅시다.

 

1. 해야 할 일

 

에드워즈가 한 두 번 구도자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권하지 않았던 어떤 의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몇몇의 더욱 흔하게 반복되고 있어서 어쩌면 더욱 중요한 것들에 집중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긍정적인 의무들을 고려하고 그 다음에 몇 개의 금지사항들을 다루겠습니다.

 

(1) 깨어나라.

 

죄인의 자연적인 상태는, 게으르고, 졸며, “술취해져있습니다. 진노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서 거미줄에 매어달려 불타는 지옥불 위에 매달려 있는데도 죄인은 전혀 어떤 위험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만약 재난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일이 시도되어야 한다면, 그는 먼저 자신이 놓여져 있는 난국에 대해서 고통스럽더라도 깨닫게 되어야 합니다. 그는 각성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보통은 죄인을 깨어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1734년에 엄청난 스케일로 그렇게 하셨을 때, 우리는 1차대각성운동을 보게 됩니다. 분노하시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깨우셔서 그들이 구함으로써 유익을 얻도록 권하여지는 것은 그 악한 자들이 가장 운이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주의 영이 부어지시는 때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축복된 시기입니다. 그래서, 1735년 에드워즈는 이렇게 설교하였습니다: “이 도시에 이제 그러한 때가 임하였습니다; ....회심과 구원의 역사가 우리들 사이에 매 안식일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만약 이 복된 희망의 순간을 놓쳐 버리게 되면, 그것은 다시금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영원한 고통의 불길에 의해서 깨어나기 전에는다시금 깨어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어떤 죄인들은 너무나도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각성되게 하지 않으셨다고 불평합니다. 그들은 충분하게 각성되어지지 않음에 대해서 불평할 만큼은 충분히 각성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에게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각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들은 각성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졸고 있는 죄인들이 최종적으로, 완전히, 각성되었을(awakened) , 에드워즈는 놀랍게도 그들로 하여금 믿으라고 하지 않고 구하라(seek)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라는 설교에서,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부르짖고 있는 사람들은 각성된 뒤 구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빌립보의 간수와 같이 구원받기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고 거의 부르짖을 때 바울이 답하기를 주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다시금, 에드워즈는 이렇게 설교하였습니다: “구원을 구하라”(Seek Salvation). 이 설교의 전체의 긴 적용부분의 어느 곳에서도 그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이해되어질 수 있기는 하지만) 믿으라고 호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구원받는 것을 위하여 구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물론 놀라운 일입니다. 두 가지 가능한 설명들이 있습니다. 첫째, 에드워즈는 그 간수의 이야기를 다르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설교의 제목(“자연적인 상태에 있는 자들은 두려운 상태에 있는 자들입니다”)이 가리켜 주듯이, 에드워즈는 간수의 위험 때문에 갖게되는 간수의 두려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구원의 길에 대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둘째, 그는 악의 발전 때문에, 18세기는 첫 번째 세기보다 더욱 구도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2) 회개하라.

 

만약 어떤 죄인이 비구도적인 상태에서부터 한번 깨어나게 되면, 그것은 분명히 그의 마음(mind)이 변화되어져야만 합니다. 그가 적극적인 구도자가 되려면 말입니다. 회개나 급격한 마음(mind)의 변화가 요구되어집니다. 하지만, 회개는 구원을 얻게 하는 은혜이며, 만약 어떤 구도자가 회개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그가 구도자이기 이전에 하나의 발견자인 것 같습니다. 에드워즈는 회개를 흔히 회심경험의 한 부분으로서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그의 Essays on Faith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됩니다:

 

칭의의 조건들은 회개와 믿음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자유는 회개에 대해서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혹은 우리가 그렇게 회개하려고 할 때에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오직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것을 그만두는 것을 위하여 우리들에게 어떤 일로부터의 자유를 제공해 주시는 것은, 어떤 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 일을 가질 수 있도록 제공해주는 것과 동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 제공을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죄를 끊어버리려고 의지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속한 모든 악과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것으로부터도 말입니다; 그것은 자유를 우리가 받아들이기 위하여서 그 자유를 우리들에게 제공해주시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 경우에,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들의 의지 속에서 그리고 기질 속에서, 끊어버리는 것과 그것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믿음 속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의지의 한 부분입니다; 비록 믿음이, 죄와 관련해서, 그 안에 더욱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입니다. 그분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우리는 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2:18.”

 

하지만, 에드워즈는 또한 구원받지 못한 회개의 준비형태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이것은 퍼킨스-오웬의 본능적(자연적) 회개에 대한 관점인데, 구도에 있어서 본질적이지만, (구원을) 발견하게 되는 그 회개와는 천양지차입니다. 만약 토마스 후커가 진정한 회개를 비중생적 구도자에게 귀인하는 실수를 범하였다면, 이것은 분명히 에드워즈의 견해는 아닙니다. 그는 하나의 법정적, 비복음적, 회개에 대한 관점을 결코 구원의 경험과 혼동시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구원경험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3) 부인하고, 혁신하고, 버리라.

 

에드워즈식의 구도가 이 조항에서보다 현대적 복음주의적 발견처럼 더욱 닮아 보이는 곳은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부인하고, 혁신하며, 버리는 것은 오늘날 누군가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결론적인 증거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열매로서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게 될 그 가능성 있는 뿌리로서 간주되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많은 현대의 복음전도자들은 어떤 잠재적인 신자를 두려움으로 내어쫓아버릴까 염려하면서 이 불쾌한 조항들을 언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 유망한 후보자들이 첫째 복음의 초청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로 넘어오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로 그들은 이 검증들(그분을 떠나서는 그들을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하는)을 만족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이것들에 직면하는 것은, 제자도의 값을 계산하는것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보증도 없이, 그리고 그 지불은 결코 되돌려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분명히 이해를 하면서도 미리 지불해야 하는 값입니다.

 

이 형태의 구도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부인할 것을 요구합니다. “철저한 개혁의 도중에는 큰 어려움들이 많이있습니다. 그 밖에 어떤 것도 충분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요셉의 형제들이 사랑스런 벤자민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예표인 요셉과 화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헤롯은 헤로디아와 헤어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구도자로서 결코 여겨질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멈춰 서 버렸습니다.” 만약 복음서에 나오는 젊은 부자관헌이 그의 재산을 처분하려고 하였었더라면 - 혹은 그 반만큼만이라도 처분하려고 하였더라면, 에드워즈는 추측하기를 - 자기가 질문하였던 것에 관하여 영원한 생명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구도자는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멈춰서 버렸습니다.

 

사도행전1919절의 설교에서, 에드워즈는 에베소서의 주목할 만한 개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주목할 정도로 부어졌을 때, 이전에는 그들 가운데에 없었던 그런 일들의 철저한 개혁은 그것의 효과여야 했습니다.” 그는 각성하는 것, 회심하는 것을 언급하면서, 이런 시대에 흔하게 일어났던 일임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각성된 자들은 반드시 회심한 자들이 아닙니다. 비록 회심이 개혁 없이는 뒤따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회심하지 않았는데도 어떤 사람들은 개혁됩니다. 하지만, 개혁되지 않고서는 회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4) 방편들(규례들)을 사용하라.

 

구조자들이 지금까지 충족시키도록 되어있는 모든 요구사항들은 큰 노력을 요구하는 것들입니다 - 너무나도 그것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요구하는 것은, 죄인들이 자기 자신들의 힘으로 그것들을 하도록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 존재하는 어떤 덕도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지어는 그리스도 없이 그들은 구할 수 있고 또한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지 못하지만, 그들을 부르시는 이, 그리고 어떤 도움이 그 탐구를 위해서 제공되게 하시는 이는 그분이십니다. 이것들은 보통 은혜의 방편들이나 규례들이라고 불립니다; 때때로, 일반은총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그 서너 가지를 고려하겠습니다: 성경, 기도, 설교, 안식일, 그리고 어떤 의미에 있어서 성령조차도 포함됩니다.

 

a. 성경

 

이것은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모든 다른 것은 이것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며 이것만이 홀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 기도, 안식, 주의 만찬, 심지어는 성령조차도 성경적 계시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그럴 일이 없기는 하겠지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으로, 이것들 없이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성경 없이는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만약 믿음이 있으려면, 성경의 메시지를 들음으로써만 올 수 있는 것입니다.

 

b. 기도.

 

서너 페이지 안에서 우리가 살펴볼 것처럼, 에드워즈는 궁극적으로 구도자들을 주님의 식탁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그것은 자녀들의 식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참되게 기도할 수 있고,우리의 기도들은 그분(그리스도)에 의해서 제시되지 않는 한 몹시 증오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도가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독점적인 특권이라고 결코 느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에드워즈는 비크리스챤이 어떤 세속적인 모임에서 주의 기도문을 따라서 드리는 기도를 제공해야 할 것을 제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발견자들이 드리는 기도이지, 구도자들이 드리는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기도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자들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어떤 종류의 기도를 하나님을 살해하려고 하는 이들이 올려드릴 수 있는 것일까요(우리는 에드워즈의 구도자들은 자신들이 증오하고 있는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죄인의 마음(heart)이 그 안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증오하고 있으면서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무턱대로 하는 결혼식(shot-gun wedding)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여러분이 그에게 구하였던 그것 - 이나 다른 것으로부터 여러분의 마음(heart)을 변화시켜 달라고 간구합니다. 자기-관심만이 죄인을 이것에 계속 유의하게 합니다. 에드워즈가 불평하고 있는 그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구도자가 다음과 같이 계속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당신은 나를 미워하고 나를 지옥으로 위협하시는 바로 그것 때문에, 나의 모든 목숨을 다해서 증오하나이다. 내가 당신을 증오하는 것보다 아마도 더욱 증오하는 것은 이 심판이나이다. 아니라면, 아마도 내가 당신을 증오하는 것보다 더욱 나의 편안함을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겠나이다. 그 이유로 나는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나이다. 나는 당신이 나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나이다. 내가 이것을 간구하는 때라도 당신을 증오하고 있고, 내가 이것을 간구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더욱 그러하나이다. 당신은 내가 얼마나 당신을 증오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내가 내 자신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내 보다 더 잘 알고 계시나이다. 내가 진지한 척 한다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나이다. 나는 가장 확실하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있으며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치 아니하나이다. 나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그 생각조차도 증오하지만, 그게 지금 바로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구하고 있는 그것이나이다. 당신이 이 기도에 답하실 수 있다면, 나는 그것과 함게 감사의 선물이 오게 되고, 그러면 내가 지금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것을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내가 증오하는 당신을 사랑하게 만드시는 것에 대해서 당신께 감사하나이다. 아멘.”

 

물론, 에드워즈는 결코 이런 기도문을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칼빈주의신학과 일관해서 제정했을 법한 유일한 종류입니다. 그가 제안했던 강조는 비참과 절박함에 대해서였지만, 그는 결코 구도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물론, 결코 잊지 않으셨던 것을 잊지 않게 할 것입니다 - 비중생자는 비록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가장 끈덕지게 기도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을 증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단순히 구도자로 하여금 기도하되 진지하게, 자기-이익으로부터, 기도하도록 권하였던 것입니다. “자기-사랑으로부터 기도하는 것을 무시하는 것보다 자기-사랑으로부터 기도하는 것이 더욱 낫습니다. 악한 자가 자기-사랑으로부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자기-사랑으로부터 그것을 믿지 않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자기-사랑으로부터 물속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을 자기-사랑으로부터 그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기도해야 할 본능적(자연적)” 의무감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하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하나의 선물을 구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는 것 같은 것입니다.

 

이 은혜의 방편은 악한 자들을 위해서는 더욱 하나의 짐이며, 그들은 기도 안에서 인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위선자들은 기도의 의무에 부족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구도하는 것의 한 가지 유익은 구도자가 자신의 기도하는 방식 안에 어떤 공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유혹은 받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c. 설교

 

하나님의 말씀은 독특하게 필수불가결한 것이지만, 구도자를 위한 그것의 가장 효과적인 형태는 설교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 말씀의 읽기를, 하지만 특별하게 말씀의 설교를 죄인을 확신시키고 회심케 하는 하나의 효과적인 방편으로 만드십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의 단순한 스타일”(plain style)은 투명한(plain) 유리 창문같은 설교여서 그 창문을 통해서 단순한(plain) 사람들도 하나님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강단에서 성경을 강해하고 적용하는 것 외에 어떤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문학적 풍미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학문성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개인적인 반영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가 열한 명의 자녀가 있었다는 것은 막론하고 결혼하였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예화도 노쓰햄턴에서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에드워즈가 계속 1인칭으로 호소하는 유일한 때는 그가 자기 회중들에게 자신의 목사로서의 직무가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의 전달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상기시킬 때입니다. 이렇게 그의 목소리가 들려져야 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직므 여룹능 너무나도 특별한 방식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내가 이제 여러분의 위에 세워진 자로서 그 목적으로 여러분에게 보냄을 받은 자로서 여러분을 불러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에 부합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내가 지금 그분의 음성으로 말하고 있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 그분의 뜻인 것입니다....” 그는 사회적 방문에 있어서의 무능력 때문에, 자신의 정상적 목회적 방문이 결핍된 것을 변명하였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간과하였던 것을 계속해서 영혼들을 구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계속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보상하였습니다. 그의 목회활동은 그의 강단사역이 흘러 넘쳐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우리는 그가 그 자신의 설교문을 강단에서 읽지 말라는 스토타드의 조언을 왜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를 이해합니다. 만약 그가 강단에서 설교를 제시할 때 그 설교를 외워서 하도록 심지어 중요한 내용들만이라도 외워서 하도록 요구되었다면, 에드워즈는 이런 양의 설교들과 다른 저작물들을 결코 산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대단히 많이 남아있는, 개요로만 남아있는 수기설교들에만 제한해서라도,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였던 언설의 자유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창함은, 홉킨스가 말하였던 대로, 그가 쓴, 그리고 읽은 말들의 감동적인 그 엄숙함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그 모든 것 이전에, 요나단 에드워즈는 하나의 설교자였는데, 그것은 모든 다른 방법들 이전에 하나님께서 복음전도설교를 사용하시는 경향이 있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는 회심케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마음을 굳어지게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후커의 말을 빌리자면, “설교자의 음성의 소리가 귀에 다가올 때, 그 말들의 마음(mind)에 의미가 이르게 되는데, 그 방편에 의해서, 성령께서는 영혼 속에 들어가셔서 여러분을 변화시키시거나, 아니면 여러분을 혼란스럽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d. 주의 식탁

 

아마도 17318월과 그 다음 해의 12월까지 선포한 한 설교 가운데서, 에드워즈는 제정된 규례들을 사용하는 것이 은혜를 구하는 하나의 방편임을 설명하는 것을 우리는 듣게 됩니다. “...신약의 성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겠다고 하는 모든 이들에 의해서 열심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준비들을 하여서,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두 그가 재빨리 그 주제를 저버리는 것같이 말하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그는 그때조차도 회심케 하는 규례들교리에 관하여 불편하였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기설교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 설교의 결론은 이 방식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사람들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곧바로 이렇게 첨가합니다: “당연히, 어느 누구도, 진실로 그리고 성경에서 가장 흔하게 취하고 있는 그 의미에서, 하나님을 기다릴 수 없지만, 은혜를 받아서 이렇게 기다리는 이들은 그 본문에 주로 주의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본문은 나를 듣는 자는 복되도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어떤 이유도 없이, 에드워즈는 다시금 주장하기를, “하지만,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그들이 구도하는 가운데서 이 규례에 힘써서 나오면 나올수록, 그들 자신들의 노력들이나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방편들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유일한 주권적 은혜의 수여자이시고 그분께서만 그것을 내려주실 수 있는 분이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또한 거듭난 자들에게도 적용될 것입니다. 그것은 거듭나지 않은 자들만 특별하게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드워즈는 성례들에 거듭나지 않은 자들을 참석시키는 것에 관하여 점증하는 관심에 대해서 단순히 너무 지나치게 반응하는 지도 모릅니다. 심지어는 더욱 이른 시기에, 스토다드가 죽은 이후의 해에, 에드워즈는 그의 회중들에게, 그들이 의롭게 하는 믿음을 받으려면, 은혜의 방편을 개선하라(improve)고 강권합니다. 1차대각성운동이 시작되면서, 그는 구도자들에게 종교의 모든규례들에 참석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0여년이 더욱 지난 후에, 그는 적용이 없는 설교는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모두 적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에스겔서44:9에 대한 설교는 분명히 회심케 하는 규례들로부터 그가 이탈하는 것을 방어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는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싸웠던 이 새로운교리에 반대하는 네 가지 논증들은 심지어 뉴잉글랜드에서조차도 새로웠습니다. 스토타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서,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언약을 소유하게되었던, 그 처음부터, 심지어 노쓰햄프턴에서조차도, 그들은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그렇게 하였었다고 주장합니다 - 그들은 단순히 구도자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는 결코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데, 충분히 흥미롭게도 그는 결코 그 표면상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 회심케 하는 규례들이란 말이 성례가 회심을 소망하면서 사용될 수 있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에드워즈는 구도자의 다른 측면, 곧 그의 회심하지 않은, 그러므로, 적대적인 상태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고백을 가시적인 성도”(모든 사람이 동의하기를, 그가 언약을 소유하고 있다고 이해되는 것으로서)가 되게 하였다는 것은 구도자라는 말에는 전적으로 일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후기의 교리는 구도자들로 하여금 이 규례에 나아오는 것을 강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강한 표현으로 금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에드워즈가 성찬에 참여할 자격에 대하여 마음이 바뀌게 된 것을 추적할 필요는 없습니다. 1차각성운동때에는 분명히 에드워즈가 스토타드와 함께 있었다는 것만을 언급해 둔다면 충분합니다. 에드워즈로 하여금 강단에서 쫓겨나게 하였던 이 주제에 대한 훗날의 변화는 그의 구도에 대한 일반적인 교리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죄인됨의 확신 가운데 있는 자은 언제나 종교의 규례들을 사용해야 했지만, 훗날에는 그것이 주의 성찬만은 제외하고 모든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에드워즈식의 일관성을 위하여 분명하게 필요한, 그 규례에 대한 이 변화는, 에드워즈로 하여금 기도의 규례에 대하여서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깨닫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기도가 성도들에게 의미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형식상의 그림자라도 구도자들에게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면, 왜 주의 식탁은 그렇게 되지 말라는 것입니까? 만약 주의 식탁이 하나의 형식상의 그림자나 외적인 형태를 가질 수 없다면 어떻게 기도는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요?

 

e. 성령

 

주의 식탁과(이나) 기도를 구도자들을 위한 은혜의 방편들 속에 어떻게 포함시킬 수 있겠느냐는 논의를 이해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이것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성도 안에서(within) 하나의 원리로서 작용하신다는 것과는 별도의 것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upon)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성령께서 더욱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잡문록에 이렇게 진술되어 설명되고 있습니다:

 

준비되는 일은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에 적절하게 소속된 일이면서도, 그 안에는 아직 아무런 거룩함이 없고, 성령의 본성에 속하는 그 어떤 것도 영혼에 전달되지 않으며 또한 그 안에서 영혼에 작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태 안에서 그리스도의 배아처럼 그것은 비록 아직 영도 혼도 그리고 아무런 적절한 본성의 거룩함도 그리고 그 안에 성령의 본성에 속하는 그 어떤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녀의 태 안에서 작용된 역사이며, 그것은 준비적인 것이었으며, 그녀 안에서 하나의 거룩한 효과를 갖고 태어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녀에게서 태어난 것은 거룩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5) 힘쓰라(Strive).

 

구도자들”(seekers)힘쓰는 자들”(strivers)로 불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불행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예레미야29:13과 마태복음7:7의 진실된 성경적 구도자들과의 혼동을 피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seeketh) 자들도 없다는 성경구절과도 단순히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 이름처런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추구하였던 퀘이커라는 극단적 집단과도 잘못 혼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그가 구도하고 있는 것을 구도하지 않고 있는 구도자의 개념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주지도 않았을 것이며, 또한 힘쓴다는 바로 그 용어가 긴장과 싸움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용어들보다도 성경과 청교도문헌에 더욱 자주 등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구도한다고 하는 것이 구제될(extricated:유리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모든 혼동들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힘쓰는 자들구도하는 자들이 불려야 했던 바로 그것입니다.

 

이 힘쓰는 것은, “격렬함”(violence)과 더불어서, 구원에 이르는 힘든 길에 서 있는 사람을 묘사하는 최상의 그림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힘듭니다 - 너무나도 힘듭니다 - 그래서 하나의 목표를 정하여서 그 목표에 이르는 중에 죽을 지도 모르는 군인의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고집스러움(obstinacy)이 그 길의 본질에 해당됩니다(18:38, 여리고의 맹인이 지니고 있었던 것과 같이). 그 길은 협착하고, 그 문은 좁으며 그래서 힘을 써서 들어가야 합니다. 사실, 좁다는 것과 힘쓴다는 것이 그 구호들인 것입니다.

 

동시에 그 힘쓰는 것은 너무나도 분투하는 일이어서, 그 힘쓰는 자는 또한 자신의 힘쓰는 것이 자기 자신의 힘쓰는 것, 곧 자기 자신의 힘으로 힘쓰는 것이 아님을 알기 위해서 또한 힘써야 합니다. 그는 최상의 노력으로 힘써야 하지만, 자기 자신의 힘으로 힘써서는 안 됩니다. 그는 최고의 신실함으로 힘써야 하지만, 자기 자신의 힘으로서 힘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는 수행해야 할 큰 일이 있지만, 자기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수행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그의 최상의 힘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 자신이 격렬하게 힘쓰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내는 것 말입니다.

 

(6) 보편적으로 순종하라.

 

요나단 에드워즈 이후의 신학적 발전에 대한 Haroutunian의 너무나도 유용한 역사적 취급에 대한 문제점은 Piety Versus Moralism라는 그 제목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청교도들의 본질적인 경건은 동시대와 후대의 자유주의자들의 단순한 도덕주의에 반대하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 제목은 정교하지 못한 현대의 독자에게 청교도들의 종교는 도적에 대해서 무언가 반대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도덕주의가 의미하는 것보다 훨씬 더 도덕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보편적 순종은 그들의 상투적인 용어였습니다. “외적인 도덕은 어떤 사람이 은혜를 구하는 구도자로 여겨질 수 있기 이전에는 거의 완벽한 것이어야 했습니다(had to be)만 그 은혜만이 참된 도덕을 산출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는, 도덕으로 자신들을 구원하고자 희망하는 사람들의 도덕보다 어떤 사람이 뛰어나야, 그들이 구도자들이라는 용어를 붙여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구도에 대해서 말해왔던 거의 모든 것이 한두 가지 면에서 도덕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시금 반복해서 말하지만, 구도자들은 그들이 어딘가 도덕적 동조에서 멈춰 섰기 때문에 발견자가 되지 못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악들은 포기하였지만 다른 것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어떤 덕성들을 보여주었지만 다른 것들은 거부하였습니다. 하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죄거나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범하는 죄거나 어떤 유혹의 죄이든지, 그들의 사랑스러운 베냐민을 덕을 추구하는 가운데 포기해야 했습니다. “철저하지 못한 것이 하나의 흔한 약점이었습니다(11:7). 경건이 반대하는 바가 그 무엇이든지, 도덕을 반대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7)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라.

 

구도자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에드워즈가 주장하는 것은, 구도자가 어떻게 여하튼 어떤 일이든 행할 수 있는 자로서 생각되어질 수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최상의 자리일 수 있겠습니다. 전도서910절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에드워즈는 한 번 이상 여러번을 들었던 반대에 대해서 응답하면서 이것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 반대는 이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사탄의 종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은 죄악된 일인데, 어떻게 그들이 (구원을) 구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조심스러운 답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첫째, 악마에 대한 노예상태는 악마가 사람들을 강제하여자신들의 욕망을 충족하게 할 수 있거나, 그것들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는 그런 식으로 지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의지 자체에 직접적으로 행사하는 영향력으로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heart)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노예상태가 할 수 없는 두 번째 일특별한 외적 행위들이나 죄의 방식들을 죄인들로 하여금 피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과 불신앙, 오만함, 모든 죄의 큰 원리들인 세속성과 같은 마음의 죄들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는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 속에는 죄가 있기 때문에 그의 외적 행위 속에 있는 일반적인 죄를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를 들어서 술취함과 간음같은 죄의 외적인 행위들을 피할 수 있습니다. 셋째, 죄에 대한 노예상태는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양심과 이성에 반대해서 선택할 수는 있을지라도, 자신의 의지에 반대해서 죄를 짓게 할 수 없습니다(한역주: 죄는 의지가 원해서 짓게 되는 것이라는 뜻).

 

도덕적으로 성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도덕적 능력을 하나님의 초청에 관계해서 논의하면서, 에드워즈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의 충분성이나 죄인들 안에서의 능력에나 아무런 결핍도 없습니다...” 그는 계속하기를, “하나님께서 영향을 행사하지 않으신다면 이 일에 있어서 사람들은 결코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수단으로 인하여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숙고함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금 감동을 받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청교도의 현인”(한역주: 에드워즈)은 그들의 기질이 그들로 하여금 원하는 것을 방해할지는 몰라도, 그 기질로 원하게만 되면 어떤 고통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을 저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8) 소망하라.

 

구도하는 가운데서 소망은 특별히 강조되지는 않더라도 가정되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구하도록 권면을 받고 있거나 어떤 사람이 구하고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 안에는 어떤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소망으로 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에드워즈가, 모든 일들에 대한 어떤 유익들과 소망에 관하여, 소망 그 이상의 것, 심지어 확신을 위한 하나의 토대를 제공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가능하기도 하고 확실성이 있는 구도의 결과를 논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위에서 보여주었던 바와 같이, 확실하거나 확실하지 않거나, 각성된 자는 필연적으로 소망을 갖고 구하게 될 것입니다.

 

(9) 스스로 겸손하라.

 

모든 의도들과 목적들에 대해서, 이것은 구원을 위하여 준비하는 그 준비입니다. “사람의 마음(heart)....그가 그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민감하게 되기 전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기에 준비되지 않습니다.”만약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얻으려면, 그들은 죄를 탄식해야 합니다.” 각성된 죄인의 구도의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그로 하여금 자신이 (구원을 스스로)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참된 의미로서, 구도하는 것조차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구도는 구도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구도의 목적은 구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힘쓰는 것은 고뇌하가 힘쓰는 것을 멈출 때 그 목표를 달성하게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를 매고 나에게서 배우라. 왜냐하면 나는 겸손하고 온유하니 너희 영혼에 안식을 누리게 되리라.”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발견하게 되면서(as), 모든 수고의 헛됨을 배우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하지만, 만약 사람이 구하지 않으면 그는 결코 구도하지 않는 것을 실현하지 못합니다; 만약 그가 힘쓰지 않으면 그는 결코 힘쓰지 않는 것 속에서 누리는 쉼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표를 바라보면서, 에드워즈는 전체 문제를 두고 다시금 씨름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겠다고 하면서, “어떤 사람이 겸손이라는 분명한 사전의 역사에 의하여 자기들 자신의 의로부터 구조되는 것의 필요성에 관하여 회심의 역사나 본성의 성화 이전에 있는 죄의 죽임이 계속되기 위하여 분명한 준비적인 역사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은혜가 주입되기 이전에는 아직 어떤 건전한 하나님의 뜻이 말하기를 죄가 죽임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그 사안이 그의 욕정의 대상과 어떤 사람의 자기 의에 관해서도 동일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으로부터 기울어지는 그 길을 일반적으로 준비하는 법적인 작업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의로부터 그를 때리고 강제하는 하나의 법정적인 확신과 그의 욕정의 대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을 치는 그의 법정적인 회개가 있지만, 그 마음은 은혜가 주입되기 이전에는 어느 쪽으로도 진실로 기울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더욱 철저하게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은 한 설교 속에서입니다. 어떻게 교만하고 본성적인 사람이 복음적인 겸손이 없이 겸손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이것이 겉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서 에드워즈가 자신의 가장 비판적으로 기능적 구조물을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한 죄인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자신이 버림받았는가를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대면하면서, 지나가는 중에, 자연인은 하나님의 뛰어나심에 대한 아무런 감각이 없기 때문에,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유사한 감각을 가질 수 있음을 언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확신하게 되고에드워즈는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옳고 그름의 감각을 제공해주는 자연적(본능적) 양심과 이성과 특별히 하나님의 두렵고도 무서운 위대하심의 빛 가운데서, 응보(retributuion)에 대한 그것들(한역주: 양심,이성,위대하심)의 관계를 지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사람에게 자신의 무력함을 확신시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피상적으로 최소한 복음적 회개와 비슷하게 보이는 어떤 체험을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이 준비적인 경험들 가운데서 독특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하지 말아야 할 일.

 

우리는 단지 그 중의 두세개만 기술하였는데, 모든 다양한 방식의 구도와 더불어서, 우리는 구도중인 죄인은 해야 할 일을 하느라고 너무 바빠서,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서는 염려할 시간조차 없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그 지침들만큼이나 응급하고 또한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 만약 그것이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의무들을 무색하게 해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지 않으려면 매우 조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적절한 구도가 그렇게 성공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으려면, 그러면 그것은 죄인에 있는 가장 큰 위험은 구도하지 않는 것이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구도하는 것일 터입니다.

 

(1) 꾸물거리지 말라.

 

시간은 청교도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소유물이었습니다. 일기들과 설교들은 이 주제와 이 가장 값진 재산을 잃어버릴 위험들에 대한 경고들로 차고 넘쳤습니다. 심지어는 윌리엄 에임스와 같은 공식적인 신학자들조차도 우물쭈물”(De Procrastinatione)에 대하여 전체 부분을 할당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시간은 또한 요나단 에드워즈의 가장 소중한 소유물이었습니다. 여전히 십대였을 때, 그는 결심하였습니다: “일초의 시간도 잃어버리지 말고, 그것을 활용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유익한 일에 사용한다.” 성숙한 설교자로서 그의 시간을 아끼라”(Redeeming the Time)는 설교는 신년설교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청교들과도 같이, 매일은 최후의 날이며, 그는 그의 교구민들에게 말하기를 자신들이 죽게 되었을 때, 죽는 것 외에는 남겨둘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에드워즈 자신의 죽음은 전적으로 예상치 못한 것이어서 그에게 죽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결론적으로, 시간은 값진 것만큼이나 불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우물쭈물하는 것은 최악의 죄는 아닐지라도 가장 어리석은 것이며 또한 가장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하겠다는 것에 의존하는 죄와 어리석음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이것을 날카롭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2) 잘못된 길을 따라 가지 말라.

 

불확실한 내일까지 미루지 않고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는 저 구도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못된 방식으로 하거나, 잘못된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하게 멸망할 것입니다만, 그는 잘못된 방식으로 어떤 일을 행하면서 멸망할 수도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설교하기를, 수천 가지의 잘못된 방식들이 있고 오직 한 가지만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것들이 구부러진 것들이지만 오직 한 가지만이 곧은 것입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하나뿐이고 그 외의 나머지 다른 것들은 지옥에 이르는 길입니다.” 힘쓰는 길은 언제나 협착함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우리는 힘써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길로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만약 사탄이 죄인을 계속 졸도록 만들지 못한다면, 그가 다음에 하는 일은, 그 자신의 길을 벗어나서 열정적으로 힘쓰도록 고무시키는 것입니다. 그는 열정이나 신실함만이 중요하다는 이론의 아버지입니다. 청교도들은 감상주의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길은 치명적인 길인데, 그것에 얼마나 헌신하든지, 그 안에서 얼마나 수고하든지, 그것은 오직 잘못된 장소에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정통주의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 에 대한 모든 강조는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알 수 있고, 그 진리와 함께 멸망할 수 있지만, 진리가 없이는 그가 반드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의 참된 뛰어남은불과 진리(열정과 지식)로 가득하게 불타면서 빛을 내는 등불이었던 세례 요한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칼빈이 말하였던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중 속에서 구원받기를 원하지만 칼빈주의적 청교도들은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넓은 길은 오직 멸망으로 인도할 뿐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번연은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들이 어떻게 허영의 시장에 머물러 있으면서 멸망을 당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3) 자기-의에 빠지지 말라.

 

에드워즈의 설교들은 반대들을 취급하고 있을 때에 가장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어떤 반대들도 구도하는 것을 연기하는 것이 그들 속에서 자기-의의 영을 산출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미루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 제기되어진 것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이 없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구도하는 것을 피하고 있는 자기-의는, 자기-의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흥미를 느끼기는 했더라도, 그는 그 반대를 아주 심각하게 다루었습니다. 의지의 자유의 가치 있는 분석과 더불어서, 그는 이 주저하는 이들이 머무르고 있는 두려움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즐기고 있는, 무엇을 하면 할수록 그것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을 아주 잘못된 개념입니다. 그 반대가 참입니다. 무엇을 하면 할수록, 혹은 더욱 철저하게 구도하면 할수록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덜 의존하게 되며, 더 빨리 자신들이 하는 모든 일들의 헛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의로움을 신뢰하게 만드는 개념 아래에서, 그것이 종교의 의무이든지, 정의든지 아니면 사랑이든지, 계속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서나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의무를 무시하게 된다면,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놓쳐버릴 것입니다. 사람들이 진지하게 구원을 추구할 때, 자신들이 겪게 되는 고통들을 신뢰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흔하게도 더욱 미세한 방식으로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기 위해서 힘쓰는 자가 진지하게 자신의 일에 힘쓰는 것보다, 더욱 자신들의 게으른 봉사들에 안전하면서 그것을 너무나도 신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종교생활 안에서 느슨함은, 그리고 그렇게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자기 의를 찾는 자들은 서로의 입장을 세워주며 강화시켜줍니다. 자신들이 했던 일과 지금 하고 있는 것에 대한 만족감은 그들로 하여금 게으르게 안심하고 편안하게 하며, 자신들이 열심을 내어서 일어나서 앞으로 힘을 내어 진전해야 할 필요에 대해서 민감하게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참된 구도는 교만와 자기-의보다는 겸손과 겸비함을 가져오는 경향이 있다는 이론이 아무리 건전하다고 하더라도, 많은 죄인들은 실제적으로 자기-의를 발전시킵니다; 그리고 그 꼭대기 위에는 자기 의로움으로 가득 찬 모멸감이 있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자면, 에드워즈는 그 상황의 비극을 흥미러워한 것이 아니었겠고, 그런 상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겠습니다만, 20세기 인간은 어떤 냉혹한 즐거움 없이는 이런 언급들을 거의 읽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불평하는 구도자들에게 그들의 구도 자체는 구하지 않고 있는 것보다 덜 나쁠 뿐인 죄악된 활동임을 상기시켜 준 뒤에, 수천 개의 시체들이 하나의 시체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느냐고 의아해 합니다. 만일 구도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면, 그 안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은 짧은 시간 동안 있는 것보다 더 나을게 전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본성을 고려하시면서, 적은 것에 대해서보다 많은 것에 대해서 분노하실 더 많은 이유가 있으십니다. “그들이 읽고 기도하면서 자신들은 자신들의 죄에 아무 것도 첨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자연인들의 큰 실수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호의를 받을 수 있는 공로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그 언제라도 그들은 그분의 증오와 분노를 받기에 충분한 공로를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드워즈식의 구도자들에게도 참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구하면구할수록, 더욱 죄를 짓게 되고, 더욱 그는 자신이 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가 전혀 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기-의에 있어서 심지어 더욱 빠르게 자랐을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구도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며, 또한 참된 구도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도하는 것은 분명하게 상급이 아니고 선물을 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보다는 구원을 획득하는 것으로 고집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를 추구하는 자들로 판명되어졌던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조나단 에드워즈가 천둥을 치듯 호령하였던 그런 헛된 영광을 추구하기 보다는, 여러분들은 수치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 이 이탈된 상태로 추구하였고 그들 자신의 제단에서 예배하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게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하나님을 계속 증오하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는 질문합니다. 자신의 간음을 위장하기 위해서 자신의 남편에게 친절한 한 아내가 자기 남편의 칭찬을 받기에 합당하겠습니까?

 

(4) 발견했다고 할지라도 구하기를 멈추지 말라.

 

마지막으로, 구도자들의 위험들 중에서 가장 심각한 위험입니다. 그가 발견할 때에라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 말입니다. 오랫동안 찾아왔떤 선물이 최종적으로 자기의 것이 되었는데 자기 손에서 그것을 놓쳐버려서 다시금 찾을 수가 없게 되고, 어쩌면 다시금 찾으려고도 하지 않게 되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렇게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너무나도 자주 에드워즈는 성도의 견인을 설교하였꼬 변호하면서 진정으로 (구원을) 발견한 구도자는 결코 그것을 다시금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잃어버린다면 결코 그것을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은, 자신들이 회심하였다고 느꼈던 많은 이들이 그 뒤에 계속해서 구하는 것을 그쳐버렸습니다. 왜 계속 구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구도하였습니다. 그들은 발견하였습니다. 왜 자신들이 발견한 것을 위하여 계속 바라보지 않았습니까?

 

보통처럼, 에드워즈는 외면상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외면적으로 답변하기가 불가능한 것같은 반대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반박을 제공해 줍니다. 사실, 그는 답변할 수 없는, “왜 내가 발견했는데 계속 추구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여러 가지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의로움을 얻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계속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만약 그가 성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가 아직 칭의를 발견하지 못하였음을 입증해주는 것입니다. 둘째, 성화의 본질 그 자체가 평생토록 그 동일한 추구의 과정을 계속 요구하고 있습니다. 셋째, 바울과 같은, 모든 진실한 크리스챤들은, 성경에 의하면 평생동안의 구도자으로 보이며, 얼마나 더 많은 것이 더욱 발견되어야 할 것인지를 계속해서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비록 구도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칭의를 발견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계속해서 성화를 위하여 힘써야 할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반()()율법주의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발견하였으면서도 계속해서 인내하지 않은 자들은 애당초부터 발견하지 못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하였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둘째, 성화의 바로 그 본질은 동일한 구도의 과정을 평생토록 요구합니다. 에드워즈의 성화의 관점은 특징적으로 독특합니다. 그것은 여기서 제공될 수 있는 것보다 더 충분한 취급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성도가 죄인과 동일한 육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주님을 구함으로써 그것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성도로 하여금 이길 수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죄인이 구도해야 했던 것처럼 동일한 이유로 구원받았다면 그 구원 이후에도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차이도 전혀 없는가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성도의 영혼에 내주하시게 된 성령께서는 거듭나지 못한 구도자에게는 전혀 약속이 되지 않은 것으로서 평생을 통해서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또한 응답하실 것이라고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것 그리고 그것만이 성도가 결코 멸망하지 않게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셋째, 모든 참된 크리스챤들은 성경에 의하면 평생 동안의 구도자들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중요한 연속설교가, 최상의 구도자로서, 사도 바울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 구도의 성격을 사도바울의 첫 번째 성격으로 삼는데, 그것이 17402월에 설교했던 부흥설교, 바울의 성격과 크리스챤들에 대한 모범(The Character of Paul and Example to Christians,빌립보서3:17)에 있습니다:

 

사도는 그렇게 진지하게 그의 회심과 소망 이전에도 구원을 추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빌립보서3장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 말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하였고, 그것은 그가 구원을 추구하기 위한 한 가지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가 자신의 달려옴이 헛되지 않고 오히려 구원의 상급을 받고자 함이라고 결심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육체를 쳐서 버림을 당한 자가 되지 않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의 회심 이후의 오랜 뒤의 일이고, 자기 자신의 복된 상태에 있기를 바랬던 그 소망을 얻은 지 오랜 이후의 일인 것입니다.

만약 이미 회심하였다는 것이 더 이상 구원을 추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변명하게 한다면, 혹은 그가 자신의 진지한 염려와 애씀에서부터 면제될 수 있다는 것을 정당하게 하는 것이라면, 분명히 사도는 변명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얼마큼의 은혜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아주 뛰어날 정도로 얻었습니다. 모든 성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생존했던 가장 뛰어난 성도들 중의 한 명이 자기 자신의 구원을 구하기 위하여 그렇게도 힘쓰면서 노력하는 것을 보는 것은, 그보다 수천 배나 아래에 속해 있고 단지 그에게 비교하면 어린아이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부끄럽게 해야 하겠습니다. 만약 그들이 조금이라도 어떤 은혜를 받은 것이 있다면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변명하면서 힘써서 지금의 천국을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그 확신을 갖고 구원을 계속해서 추구하는 짐을 가볍게 할 수 있고, 자신들은 그 일을 모두 다 통과했기 때문에, 소망을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뛰어난 분이면서도, 자신 안에서, “나는 회심하였어. 그래서 나는 구원이 확실해.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그것을 약속하셨어; 내가 이제 구원을 얻기 위해서 더 이상 염려해야 할 것이 어디 있어? 그래, 나는 회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정도의 은혜도 얻었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는 자신이 회심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자신이 해야 할,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해야 할 큰 일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좁은 길이 있고 자신이 통과해야만 하고 다른 어떤 방식으로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구원을 여전히 열심히 구하여야 하는 것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게으른 방식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소망과 확신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열심을 덜하여서 구원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열정적으로 구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그가 회심하기 이전에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힘썼던 것과 같이 힘썼다고 하기보다는, 우리가 회심한 이후에도...

가장 확실한 것은, 만약 사도가 올바른 방식으로 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면에서 일반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참된) 고백자들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한 뒤에 일어나는 흔한 일로서, 이전보다 신앙생활에 열심과 진지함이 놀랍게도 식어버리는 것보다, 더욱 분명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구도와 준비의 교리에 있는 더욱 중요한 점들의 개요만을 몇 가지 제시하였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 구분이 그렇게 명명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구도하는 것과 준비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제안합니다. 비록 구도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은혜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더욱 특별하게 신적인 자극보다는 인간의 활동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반면, 준비는, 준비되어지는 사람에게 관계되지만, 주로 신적인 산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성을 구도하는 것의 단계들로 생각할 수 있겠고, 죽임(억제:,mortification)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궁극적인 겸손함과 겸비를 구도가 준비가 되는 그 지점으로 고려할 수 있겠습니다.

 

에드워즈는 가장 철저한 예정론으로부터 한 치도 물러나지 않으면서도 아담의 가장 타락한 자녀들의 극한의 활동에 진짜 상여금을 제공합니다. 조금도 알미니안주의에 기울어지지 않으면서도 그는 타락한 사람들이 구원을 향하여단계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지금까지의 어떤 신학자가 설명해 온 것과 같이 오직 믿음주의의 순수한 한 형태를 취하면서 그는 가장 격렬하게 힘써야 하는 것을 구원에 필수불가결인 것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에드워즈적인 구도와 준비가 뒤따르는 세대에서 어떻게 진척되어 갔는지를 간략하게 주목해 보겠습니다.

 

IV. (에드워즈 때문은 아니고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전개된)

에드워즈 이후의 준비론

 

청교도인 에드워즈 이후, 칼빈주의적 구도(seeking)와 준비는 미국의 표면에서 곧 바로 사라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거의 흔적도 없는 채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사실, 하나의 흔적보다 덜한 것입니다. 페리 밀러같은 학자들은 에드워드의 글들 자체에서조차도 그것을 발견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당연히, 밀러는 에드워즈가 그것을 반대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나도 철저하게 역사적 판이 요나단 에드워즈가 그렇게도 강하게 일관성있게 방어했고 열정적으로 설교했고 실행하였던 것이 뒤집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신학의 초기 알미니안주의의 환영받지 못하는 흔적으로서 그는 근절되어 버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현대 칼빈주의는 어느때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을 껌뻑거리면서 뭔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게 되는 일이 칼빈주의 복음전도의 최첨단으로서 구도(seeking)에 관하여 오늘날 미국의 칼빈주의적 집단들에게 강의를 할 때보다도 더 많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1. 직후의 에드워즈 학파

 

준비론은 에드워즈 자신의 즉각적인 학파 안에서도 거의 남아있지 못했습니다. 벨라미, 홉킨스, 아들 에드워즈, 드와이트 혹은 에몬스는 그 교리를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 안에서도 그것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홉킨스 안에서는 거의 인위적인 것 같고, 에몬스의 사상에 있어서 양립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으며, 드와이트 안에서는 새침하게 조신하면서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에드워즈는 벨라미의 True Religion Delineated(1750)에 그것이 상대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것을 눈치챘었음이 분명합니다. 이 작품은, 에드워즈가 서문을 써주었는데, 일반적으로 심지어 준비론에 있어서조차도 그 자신의 가르침과 일반적으로는 일치합니다. 하지만, 구도하는 것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어떤 의미심장한 역할에 대한 강조가 없다는 것에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400페이지 책자에서 유일하게 한 번 그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거의 억지로 하면서, 다시금 우리가 인용하였던 문장 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놀라운 신적 은혜의 방법로 깊이 감동을 받는 것, 그리고 복음의 계획하고 있는 것에 빠져들기 위해서, 자신들의 죄악된, 죄책을 치러야 할, 파멸한 상태에 민감하기 위해서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최대의 고통을 참는 인내심을 갖고 힘쓰고 애쓰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하여 누가복음1324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신 대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불쌍한 죄인의 의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 죄인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그들의 심령 속에서는 하나님께 원수들이겠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눈에서 볼 때 죄악되고 독한 냄새가 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성령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견해보다 성경이나 이성에 대해서 반대가 되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힘써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성은 가르치기를 세상의 통치자이신 하늘의 하나님께서 자비의 길 안에서 죄악된 반역자들을 찾아서 나오실 때, 그것에 대해 매우 감동을 받고, 또한 자신들의 게으름과 부패에 저항하면서 자신들의 모든 합리적인 능력들을 행사하되, 확신을 위한 수단에 대해서 스스로 열어두기를 힘쓰며, 안전을 도모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들을 무효화시켜버리려고 경향이 있는 모든 것을 회피하면서 그렇게 하며, 또한 각성을 깊게 하는 경향이 있는 모든 일을 실행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마땅한 바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악에) 넘겨주시는 것은 은혜의 방편들을 거부하는 죄인들 때문임을 말입니다.”

 

신적인 제안들에 반응해야 할 의무는 유지되고 있지만 심각한 긴급성이나 어떤 가시적인 소망이 없는 채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분명히, 사무엘 홉킨스도 또한 그 교리를 계속 유지하였습니다. “수단들은 중생을 위하여 사람들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필요합니다.....거듭나게 될 때 적절하게 행동하도록 사람들로 하여금 준비되어지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홉킨스는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이러한 준비에 의해서 그것은 그들의 심령이 변화될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다른 식으로는 거의 희망이 없을지라도, “그들의 종교적 이점에 비례하여 양심의 빛과 확신의 정도와 함께...그리고 마음의 몰두하는 정도에 따라서구도자들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교리가 강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에드워즈가 많은 구도에 대한 언급을 했었을 많은 페이지들을 읽습니다만 그곳에서는 힌트조차도 없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것은 어떤 반대에 대한 응답으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만약 반대가 없었었더라도 그 교리를 언급하는 일이 없었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 교리가 인정되기는 하였습니다. 그리고 벨라미 안에 상대적으로 침묵하고 있는 것에 대한 무언가 설명이 있고, 그리고 홉킨스는 절대적인 독특성과 사람이 전적으로 수동적인 새출생의 신성함을 약화시키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던 자들을 쫓아내어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뉴잉글랜드신학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연구로 여전히 남아있는 책인 FosterGeneric History, 홉킨스는 중생은 하나님의 즉각적인 역사이며 중생하는 자들은 즉각적인 것으로 회개하고 믿을 수 있다는 그의 교리에 의해서 준비의 장애물을 제거해 버렸다는 놀라운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능력에 대한 옛교리에 있어서 마지막 요소가 부숴졌습니다. 즉각적인 회개가 뉴잉글랜드 부흥설교에 의해서 강조되었던 구별점이 되었고 위대한 효율성의 원천이었습니다.” 분명하게 포스터는 에드워즈가 동일한 즉각적 교리를 가르쳤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차이는, 에드워즈는 구도하는 것 없이 하나님께서 즉각적인 중생을 부여하시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님강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설교들 중 한 곳에서, 우리가 보았던 대로, 에드워즈는 그리스도를 불신자의 심령의 문 앞에서 들어갈 수 있도록 탄원하고 계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믿음으로 그 문을 열어제치라!”고 말할 것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꼭 그 때, 주님께서도 안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외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신자의 심령 속에 들어가시는 것으로부터 비유를 뒤집어놓기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진실로 본질적인 차이점들이 아닙니다. 홉킨스의 차이점은 분명히 담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묘사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믿는 것이 준비되었을 때 에드워즈는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라고 설득하였고, 어떤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을 때, 홉킨스는 구도하는 것을 조언하였습니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일이 홉킨스의 경고에 대하여 말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에 의해서 더욱 악화될 수 있는 수단들을 사용하는 위험에 대해서 경고하였던 것입니다. 에드워즈도 동일한 것을 말하였습니다. 게다가, 둘 다 동의하기를 만약 구도자가 진심으로 진지하게 방편들을 사용한다면 그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보다 덜 악하거나, 아니면 덜 신속하게 악화되어질 것이라 하였습니다. 둘 다 또한 동의하기를, 그 사람이 거듭나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음성의 음조상의 차이였고, 그것이 들려지는 방식에 있어서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역사가들에 의해서 들려지는 것에 있어서도 그런 차이가 느껴졌던 것입니다.

 

Jonathan Edwards Jr.는 구도라는 주제를 강조하는 것같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기대감을 갖고 선택에 관하여 정치적 번영을 위하여 코네티컷주의 시민들에 의하여 기독교의 신앙을 가져야 할 필연성이라는 제목으로 한 설교를 읽게 됩니다. 견고한 설교로서 그것은 현장에 있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언급함으로써 관습적으로 끝을 맺는데, 그들 모두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 시민 일반을 포함하고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어떻게 그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습니까? 그는 설교하기를,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호의의 대상이 아니시라면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상속할 자들이 아니시라면, 여러분은 진실로 비참한 상태 가운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여러분의 하나님으로 선택할 수 있는, 영원한 행복의 동기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평화와 좋은 질서, 그리고 정치결사체로서의 국민들의 행복과 코네티컷주의 일반적인 번영에 위한 동기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듣는 이들이 발견되어질 수 있고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주님을 찾도록 하는 경고가 전혀 아닙니다. 여전히 신앙을 위한 동기가 있고, 아마도 그 아들 에드워즈는 만약 그들이 믿으려고 한다면 그들은 조만간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을 품고 찾아야만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Nathaniel Emmons, 철저한 홉킨스주의자였는데, 자신의 정신적 지도자를 추종하였고, 준비교리에서 이탈하는데 있어서 그보다 훨씬 앞서갔습니다. , 홉킨스가 자신의 지도자 에드워즈가보다 그 교리에 대해서 덜 말하고 덜 생각하였던 꼭 그것처럼, 에몬스도 자신의 지도자 홉킨스에 관하여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예를 든다면, 에몬스는 다음과 같이 설교하였습니다: “저주받은 자들의 심령은 죄를 확신하면서도 점점 더 악화되어지는 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될 것입니다.” 홉킨스와 심지어는 에드워즈도 동일한 것을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에드워즈는 홉킨스가 덜 말하고 에몬스는 실제적으로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그것에 대하여 덜 나쁜 것이라는 개념을 설명하였습니다. 에몬스는 위험에 대한 저 두려움을 설명하지만 준비를 위한 설교 프로그램에 있어서 다른 조항들은 반대의 것 외에는 죄인들의 심령을 달래주는 그 어떤 경향도 없습니다. 동시에, 신적인 유기가 선택할 수 있는 그들의 자유를 파괴시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방편이 유기자들에게 사용될 수가 있습니다(그는 오히려 텅빈 뜻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구도의 교리는 여전히 살아있지만 분명히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손자, 티모디 드와이트(1752~1817)는 너무나도 흥미롭게 자신의 조부의 것과 너무나도 닮은 완전히 발전된 준비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찾지만 모두가 발견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합니다 - 많은 사람들이 개가 그 뱉어놓은 것을 찾아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구도자들은 일반적으로 발견하게 되고, 드와이트는 조부가 하였던 것과 같이 거의 비슷하게 말하기를, 진실되고 지속적인 구도자는 궁극적으로 실패하지 않을 것이지만, “어쩌면이라는 것이 그 밑바탕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두번째 대각성운동의 지도자는, 그 첫 번째 대각성 지도자처럼 구원을 위한 준비론의 칼빈주의적 챔피온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부하였고 계승자였던, 나다나엘 테일러에서는, 구도하는 것이 펠라기안적 씨앗을 뿌렸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에 살펴보겠습니다.

 

2. 테일러주의: 펠라기안 스타일의 준비론

 

나다나엘 테일러는 티모디 드와이트의 추종자였습니다. 만약 드와이트가 에드워드식의 준비교리에 있어서 무언가 순전하지만 늦게 어디에서 피어나고 있는 것이라면, 테일러는 늦게 피는 꽃송이들에게 불어왔던 이른 겨울의 혹한이었습니다. 하지만, 테일러가 이루고자 했던 것은 테일러 자신에게서보다도 Charles Grandison Finney 안에서 더 잘 보여질 수 있습니다.

 

에몬스가 홉킨스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처럼, 피니는 테일러에 대해서 가졌습니다 - 거칠게 만들어진 판(version)이었던 것입니다. 홉킨스와 테일러는 깊이 사고하였고 동일한 스타일로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에몬스와 피니는 홉킨스와 테일러가 주장하고자 하였던것을 누군가가 처음으로 이해하였던 대로 설교하였습니다.

 

테일러는 피니가 하였던 대로 결코 하지 않았고 또한 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곧 회심은 마땅히 사용해야 할 수단들을 올바르게 사용한 것의 순전히 철학적인 결과라고 피니는 말하였던 것입니다. 씨를 뿌려라 그리하면 열매를 맺는다는 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일러는 피니식의 주장에 있어서 특징적인 토대를 놓았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회심이라는 에드워즈식의 개념과는 정확하게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피니는 그렇게 놀랍지 않은 회심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을 가능성도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테일러의 신학을 설명할 수 없겠습니다만, 단순히 그의 입장을, 에드워즈의 이름으로 에드워즈로부터 얼굴을 돌려 돌아서버린 것으로 묘사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테일러는 어떤 사람을 필연적으로 악을 행하게 만드는 원죄라 불린 어떤 원리적인 부패도 부인하였습니다. 둘째, 그는 동기는 선택을 결정한다는 것을 부인하면서도 외면적으로는 에드워즈에게 충실한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선택은 언제나 동기를 결정하지는 않을지라도 동기처럼(as) 작용한다고 주장합니다. 셋째, 그러므로, 사람들은 언제나 제시된 동기와 일치해서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찰스 피니는 이런 삼단논법의 총결산입니다.

 

준비주의(preparationism)의 씨가 뿌려지게 되었습니다. 에드워즈의 미묘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것이, 그 완전함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패망을 한 것입니다. , 에드워즈는 도덕적 무능성, 신적인 작정, 중생에 있어서의 수동성, 그리고 모든 칼빈주의 교리들을 뒤흔드는 것 없이, 구도의 잠재적인 관점을 옹호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피니와 함께 준비는 확실한 것이 되었고, 무능력, 작정, 중생의 수동성 같은 모든 칼빈주의적 교리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뇌의 좌석과 다른 준비적인 고안물들이 맹렬하게 들어왔습니다. 피니의 권세가 휘둘러지던 시절에, 사람들은 자발적(willing)이 되었던 것입니다.

 

3. 준비에 반대하는 옛 프린스톤 학파

 

조나단 에드워즈가 예일에서 프린스톤으로 이동하게 되었던 것처럼, 뒤를 잇는 역사 속에서, 에드워즈식의 칼빈주의는 예일에서부터 프린스톤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예일의 총장으로서 티모시 드와이트와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그의 행정직을 마치고 있는 존 위더스푼과 함께 시작된 19세기 초반, 아키발드 알렉산더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그가 봉직하기 시작하였을 때 모두 칼빈주의 전선에서 상대적으로 조용하였습니다. 그때 테일러가 예일에 오게 되었고, 프린스턴에 있는 핫지와 더불어서 경쟁하는 상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옛전투가 새로운 전선에서 벌어졌던 것입니다.

 

찰스 핫지에 대한 대표적인 조크 하나를 Edwards Amasa Park이 던졌습니다: “핫지박사를 펠라기우스만큼이나 그렇게 크게 혼란스럽게 하였던 유령은 없습니다 - 세미-펠라기우스 유령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많은 좋은 조크들처럼 이것은 우리가 펠라기우스주의를 놀릴 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재미가 없습니다. 테일러(Taylor)가 세미-펠라기우스보다는 오히려 펠라기우스의 유령을 대표하였다는 그것을, 타일러(Bennet Tyler)가 테일러(Taylor)의 뒷정원에서 하고 있을 때 핫지가 그것을 보여주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테일러가 주장하는 것처럼, 타락한 사람 안에 악을 향한 어떤 성향도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펠라기안입니다. 만약 테일러가 주장하였던 것처럼 타락한 인간이 선이나 악으로 자의로향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펠라기안입니다. 만약 호소력있는 동기들이 타락한 사람들에게 제시되어진다면, 테일러가 주장하였던 것처럼 그가 되돌아설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펠라기안입니다.

 

만약 핫지가 테일러의 복수의 여신이라면, 피니를 추적하였던 분노B.B.Warfield였습니다. 물론, 피니는 그의 일생 동안 그를 반대하였던 다른 프린스톤신학자들과 또한 많은 다른 칼빈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명백한 프린스톤의 반대자는 워필드였는데, 그의 완전주의 연구(Studies in Perfectionism), 웨슬리의 알미니안적 뿌리로부터 찰스 피니 안에서 완전히 개화한 펠라기우스주의까지의 완전주의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린스턴에서 준비주의에는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프린스턴인들은 에드워즈의 어린애(준비론)를 피니의 목욕물(펠라기아니즘)과 함께 내버렸던가요? 아주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귿르은 그저 그 어린애를 알미니안주의의 고아원에 맡겨버렸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소유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버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초라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여 그래서 그것을 조용하게 입양을 위하여 내놓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알미니안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칼빈주의자로서가 아니고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하면, 교회에 출석하면, 성경을 읽으면, 성령의 도우심이 그로 하여금 믿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에드워즈적인 구도입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이 에드워즈를 위하여 가정을 제공했던 프린스톤은 자신의 자녀를 입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에드워즈식의 구도라고 여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왜 프린스턴은 준비론에 대해서 그렇게도 소심하였을까요? 왜 그들은 그것을 채택(입양)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말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그것을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코셔(kosher) 칼빈주의 아이로서 보이지가 않았습니다(한역주: 코셔는 유대인의 율법에 따른 음식을 말하는데, 먹거나 팔기 전에 일종의 정결예식을 거친 것을 말한다. 준비론이 칼빈주의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 칼빈주의가 이런 예식을 지켜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초기의 알미니안주의가 아니었던가요? 그들은 에드워즈가 신학적인 잡놈을 낳았다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모두 무시하거나 부인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강제로 그렇게 해야 한다면 깊은 곳에 그것을 숨겨 놓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19세기 프린스톤의 문헌들을 상당히 익숙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프린스톤식의 언약과 유아세례의 개념은 교회의 자녀들을 위하여 구도를 불필요한 것이 되게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칼빈 안에서 그리고 어떤 다른 정통적 종교개혁의 신학자들 안에서 주목하였던 그 동일한 패턴이 다시금 나타났습니다. 핫지는 이 정신적 분위기를 완벽하게 예시하고 있습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택자들의 자녀들이 가정적으로 중생하였다고 가르치는 어떤 개혁신학적 원리도 없습니다(그 자녀들은 교회직원에 의해서 확실하게 택자로서 알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 프린스턴신학자들은 목회자들이 아니고 신학자들인 경향이 있었습니다. 에드워즈와 에드워즈파들은 학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목회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언약을 소유하지못하였던 교회 안에서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놓칠 수도, 무시할 수도, 혹은 잊어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들에 대하여 무언가를 해야 했습니다 - 그들에게 무언가를 말해야 했던 것입니다 - 그리고 그것이 구도하는 것과 준비하는 것을 강조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프린스턴신학자들도 역시 실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목회활동과 교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활발하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걸음 물러서 있었고, 그 문제를 한 걸음 더 잊어버리게 쉬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로교 목사들은 그 목회활동에서 한 걸음 물러나있는 사람들 아래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반면 원래의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그들의 교수들이 목회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19세기 미국에서 개혁정통주의의 위대한 보루가 준비론에 대해서 기껏해야 이방인이 되었고, 최악의 경우, 원수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4. 준비론을 다시금 회복하는 것이 없었던 앤드오버(Andover)의 반작용

 

만약 테일러주의나 신학파”(The New Divinity)가 에드워즈의 이름으로 에드워즈를 뒤집어 놓는 것이었다면, 그 테일러주의와 신학파에 대해서 완전히 반대하면서 에드워즈로 돌아가되 (준비론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던 것)이 바로 우리가 보았던 프린스톤이었습니다. 뉴잉글랜드의 토양 위에서, 에드워즈를 선호하면서 예일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 앤드오버와 그 학파였습니다. 만약 프린스턴이 테일러에게서 180도 되돌아서서 에드워즈에게로 돌아간 것이라면, 앤드오버는 90도만 돌아서서 테일러와 에드워즈의 사이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발전을 이야기하는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앤드오버도 역시 에드워즈를 자신의 선조로서 주장하였다는 것입니다.

 

갈등하는 신학들이 서로가 동일한 혈통을 주장하는 이 혼란스런 상황에 관하여 한 가지 좋은 일은, 그것이 최소한 둘 중의 하나는 틀린 것임이 그저 우발적으로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분명하게 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관찰자들은 피상적인 경향이 있어서 집단들이 전적로 잘못되었는데도 어떤 이름을 자신들에게 붙여두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저 지나갈 분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식자들-그리고 무식자들의 99퍼센트의 대중은 로마가톨릭교회가 자신들을 그 이름대로 주장하기 때문에 가톨릭교회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름들에 따르면, 테일러주의, 앤드오버주의, 그리고 프린스턴주의는, 진실로 에드워드주의자들입니다. 만약 이들 중에서 어느 것도 하나가 참이라면 다른 것 둘은 참일 수 없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분명하고, 모든 이들에게 그렇게 인정되겠지만 말입니다. 그들 모두가 동일한 혈통을 주장하지만, 그것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무심결에 스쳐지나가면서 본 것을 분명하게 분별하고 싶어 하는 관찰자라면 이제 더 이상 무심한 채로 남아있을 수만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테일러주의와 프린스턴을 살펴보았을 때 지적하기를, 테일러주의는 에드워즈의 반립(反立)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앤드오버는 단순히 일관성이 없고 그러므로 90도만 되돌아선 것이라는 점을 간략히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에드워즈에게 반쯤만 돌아섰다가 다시금 또 되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두 의견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일관성없게 주저하는 것입니다.

 

Frank Hugh Foster에 따르면, 앤도오버의 가장 위대한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학자는 - “에드워즈보다 더 위대한 지성- Edwards Amasa Park(1808-1900)이었습니다. 포스터는 에드워즈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보다 Park에 대해서 지면을 더 할애하고 있어서 우리는 정당하게 결론을 내리기를, 만약 Park이 한 명의 주저하는 에드워드주의자였다는 것은 그의 신학의 전범위에 대해서 포스터가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보여질 수 있다면, 바로 그곳에서 보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포스트 자신은 팍에 대한 부분을 시작하면서 (세상에 있는 악의 허용에 관하여) “이 두 신학자들 모두(테일러와 팍)에게 있어서 불일치함은 그들이 모두 에드워즈와 동의한다고 스르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에 의해서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라고 언급합니다. 테일러는 자유의지의 본질 때문에 악이란 필연적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에드워즈로부터 이탈하였습니다. 에드워즈와 깨끗하게 절연한 거십니다. 팍은 어떠하였습니까? 에드워즈에게로 되돌아가는 테일러와 함께 깨끗하게 절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의 선택론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설득하심으로써 통제하시고 그러므로 악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것을 막으실 수 있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포스터가 관찰하는 대로, “여기에서조차도 그()는 테일러를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는 테일러를 포기하는 것을 회피하고 있나요? “어쩌면을 첨가함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최상의 가능성이 있는 우주 안에서 죄를 방지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어쩌면그것은 도덕적 힘 등의 발전을 위해서 더 나은 것입니다. 여기에 90도의 전환이 있습니다: 에드워즈를 향해서 완전히 돌아섰지만, 그런 뒤에 테일러에게로 가정적으로 회귀하면서 그 둘 사이, 곧 절대주권과 어쩌면전적 자유사이의 중간지점에 와 있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로 되돌아가면서 그리고는 그로부터 되돌아서버리는 팍의 동일한 전환은 모든 에드워저의 교리들의 가장 근본적인 것 - 오류가 없이 영감된 성경관에 대해서 분명합니다. 우리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성경에서, 어떤 글에서도 전체적으로 이 무오류의 관점에 초점을 맞춘 것은 없을지라도, 에드워즈의 전집을 관통해서 가정되어 있고 또한 변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팍은 자신의 성경관에 있어서 에드워즈에게 충실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분명하기는 하여도, 그는 전적으로 그것을 버리고 있습니다. 포스터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팍의 영감론은 저자들에게 실행되어져서, 성경은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이 의도하고 있는 것을 위한 목적을 위해서 완전한 것이게 하는, 거의 신적인 초의도적인 것(superintendancy)’입니다. 또한 영감은 성경의 저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그들의 써놓은 것에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관점은 Frank Hugh Foster와 오늘날의 많은 다른 크리스챤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의 부적절함은 조나단 에드워즈에게는 저주를 받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팍의 신학의 모든 조항들을 우리는 따라가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의 많은 것들의 에드워즈의 것과 아주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제 중생과 준비에 대해서 이르렀습니다. 팍은 중생을 위한 준비가 무엇이든지, 그리고 얼마나 이것이 지속되는지에 관계없이, 중생은, 성령에 의하여 진리의 최종적인 제시로서, 그리고 영혼이 회심 중에 그것에 결과적으로 굴복하게 되는 것으로서, 모두 하나의 분리불가능하면서 또한 즉각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저 역설적인 진술의 의미가 무엇이든지, 결정적인 요점은, 팍이 가르쳤던 것은, “거룩이 지선으로 보이게 될 것이고 그래서 선택되어질 것이라는 방식으로, 동기들이 의지에 제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포스터는 이것을 에드워즈에 대한, 실제적이면서 또한 상상적인 (하나의) 유착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 상상적인유착을 볼 수 있습니다만, 실제적인것은 우리를 빠져나가 버립니다. 테일러에게 하나의 실제적인 유착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상상적인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에드워즈는 더 이상 알미니안적 세미-펠라기우스와 싸워야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펠라기우스와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하나의 상상적인 유착으로 뉴잉글랜드신학에서 준비론은 끝장 나 버렸습니다.

 

5. 준비를 무시하고 있는 오늘날의 미국의 칼빈주의

 

저는 어떤 주저나 의심도 없이 오늘날 우리는 에드워즈가 원래의 구도자들(seekers)에게 요구하였던 모든 근면성, (자기)부인,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어떤 잘 알려진 현대의 칼빈주의자들 안에서 그것을 찾을 확률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큰 소망이나 가능성도 없는 채라도, 구도의 교리(The Doctrine of Seeking)를 추구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칼빈주의자들 대부분은 그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 사실, 그들은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 당연히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들에게 말하려고 한다면, 그들은 그것이 잘해봐야 알미니안적 교리임에 분명하다고 확신할 것입니다.

 

유명한 현대의 복음전도가들 모두가 최상의 알미니안주의자들이라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빌리 그래험(Graham), 오랄 로버츠(Roberts), 브루스 훔바르트(Humbart), 올 브라이트(Bright), 밥 로벗슨(Robertson) - 그들 모두는 최상의 알미니안주의자들입니다. 대각성의 시대에서는 가장 유명한 복음전도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프레일링하이전(Freylinghuisen), 에드워즈, 휫필드, 테넌트, 데이비스 - 모두 칼빈주의자들이고, 또한 준비주의자들입니다(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설명입니까? 오늘날의 칼빈주의자들은 그들이 복음전도자의 일을 수행하지 않기 때문에, 준비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을 뚜렷하게 수행하고있는 자들은 이런 교리가 필요가 없는 알미니안들입니다. 그래서, 준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복음전도사역 안에 들어와 있지 않고, 복음전도사역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칼빈주의자가 즉각적인 회심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설교하고자 한다면, 그는 그것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알미니안주의자가 계속해서 실제로 준비를 필요로 한다면, 그는 알미니안주의자이기를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복음전도의 직업시장에서는 단순히 준비주의자들을 위하여 열려있는 어떤 곳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 상태입니까? 저는 여기서 알미니안주의가 오류가 있음을 입증하고자 하지 않고(에드워즈가 그것을 250년 전에 분명히 입증하였습니다) 오히려 단순히 그것을 가정하겠습니다. 알미니안이 아닌 사람들만 아니라, 알미니안인 자들은 알미니안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가정 위에서 구도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한역주: 알미니안주의)이 반대하는 것은 또한 잘못임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것들(한역주: 알미니안주의와 구도의 교리)은 함께 서고 함께 넘어집니다. 우리가 칼빈주의자들은 만약 알미니안주의가 참되다면 그것(한역주: 알미니안주의)이 준비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도 또한 참된 것임을 인정할 것입니다. 알미니안들은 만약 자기들의 체계가 잘못이라면 그들이 구도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도 또한 잘못되었을 자발적으로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그곳에서 쉬게 하여야 할까요? 본고를 위하여서 말입니다!

 

하지만, 준비론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칼빈주의를 위하여 좋은 일일까요? 저는 여기서 칼빈주의가 성경적으로 참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지 않고(그것은 에드워즈가 250년전에 이미 확정적으로 입증하였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가정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날 구도하는 것을 구도(seek for seeking)해야 하는 것(역주: 구도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성경적 기독교, 칼빈주의를 위하여 좋은 일일까요? 아니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구도하는 것을 구도해야 하는 것(, 잊어버리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좋지 않습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좋지 않고, 성도들을 위하여 좋지 않고, 일반적인 교회를 위하여 좋지 않습니다.

 

첫째, 그것은 죄인을 위하여 좋지 않습니다. 저는 한번 자신은 준비에 반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개혁신학을 따르는 목사 한 분과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당신은 죄인됨의 확신 아래에 놓여 있는 한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자, 그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하지만 나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어요라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하시나요?” 그의 답변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 그것은 충분히 나쁩니다만, 그는 또한 그 불쌍한 죄인을 으쓱하면서 자기 어깨에서 떨어뜨려 버렸습니다. 그것은 더욱 나쁜 짓입니다. 우리 칼빈주의자들은 모두 잘 압니다. 어떤 사람이 즉각적으로 중생하지만, 그가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은 너무나도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즉각적인 중생이 일어나게 되기 이전에 오랜 시간이 때때로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만일 그것이 일어난다면 말입니다. 그 동안에 그 불쌍한 파선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요? 저는 자신이 회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보다 그 묘사를 위해서 더 나은 말이 없기 때문에 저는 불쌍한 파선자라고 조언을 하듯이 표현합니다. 죄인됨의 확신 이전에 그는 파선되는 것이 없이 불쌍합니다. 회심 이후에는 그는 자신이 파선자였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도 파선자임을 알고 있지만, 더 이상 불쌍한 것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죄의 확신 아래에서 그 사람은 자신이 불쌍한 파선자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칼빈주의 설교자는 그에게 어깨만 으쓱한단 말인가요?

 

분명히 여러분은 만약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안으로 데려오실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분명히 여러분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칼빈주의자들이 아닌 사람들이 우리들을 중상모략하여 희화화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하나의 회화화된 것을 진실된 것으로 입증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 명의 칼빈주의자로서, 하나님께서는 목적만 아니라 수단들도 예정하신다는 것과 그 수단들을 그분께서는 바로 여러분의 손에 맡겨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은 답변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공므을 설교하였을 때 그리고 이 불쌍한 파선자에게 그리스도를 가리켰을 때, 저는 그에게 유일한 수단을 제공하였습니다. 그 수단에 의해서 그는 혹은 어느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수단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에 이르는 수단이시며 또한 유일한 수단이심이 인정됩니다. 하지만, 그 수단에 이르는 수단은 없는 것입니까? 우리는 말씀 외에 무엇으로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죄인됨의 확신 아래 있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말씀을 공부하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신앙의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그것은 들음으로써, 공부함으로써, 그리고 읽음으로써 올 것입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조금 공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많은 공부하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라고 그에게 경고를 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신앙이 없는 채로 읽는 것이 아무리 위험한 것이라 하더라도, 신앙이 없는 채로 읽지도 않는다면 더욱 위험한 것입니다. 그 구도자에게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도 멸망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다인은 분명히 성경이 없는 채로 멸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준비되어진 자라고 한다면, 당신이 얼마나 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은혜를 제공하신다고 상상해 보세요. 모두 은혜와 지식 가운데서 자라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이제 준비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렇게도 많은 지식을 갖게 될 것이고, 그것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불쌍한 파선자가 소망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말하기를, “그래, 하지만, 나는 여전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구원받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어요.” 여러분은 이거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거짓 선지자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사신들이지 하나님의 사신들이 아닐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삶의 신맛을 희석시키지 않으려고 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만약 여러분이 칼빈주의자가 되기를 바라고 진실로 그러하다면 감히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의 신맛 - 곧 지옥 자체를 희석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죄인됨을 확신하고 있는 죄인이 무릎을 꿇고 손에는 성경을 든 채로 자신의 죄 가운데 멸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모든 뜻을 설교하여 왔다면 그는 그것이 정확하게 자신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것임을 알게 되고 확신(convicted)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에게 거짓된 확신(assurance)을 주지 않는다면 그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에게 한 가지 진실된 확신(assurance)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성경을 경멸하는 것보다 성경을 공부하는 중에 덜 죄스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이제까지 해 왔던 것과 같이 신속하게 진노의 날을 위하여 진노를 쌓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것은, 칼빈주의적 목사들이 모든 게으른 말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두려운 사실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설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섬뜻하도록 어이가 없는 것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것은 범하는 모든 죄를 위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정도의 진노가 더하여질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욱, 여러분은 우리들의 불쌍한 파선자에게 지옥을 피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더 많은 것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큰 일이지만, 천국의 실재에 대한 소망은 더욱 큽니다. 지금까지 구원받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도하였고, 또한 지속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구하였던 자들 대부분이 (찾고자 했던 바들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진실로 의심할 수 있을까요? 말해질 수 없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더 적을 수 있을까요?

 

죄인으로 하여금 소망을 가진 채로 계속 공부하도록 하되, 평생토록 거짓확신을 가지지 않게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는가요? 그리고 그것은 그가 구할 수 있고 또한 구해야 하는 다른 방법들 모두를 언급하지도 않았습니다 - 그것들 모두는 무언가를 얻게 하고, 때로는 모든 것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성도들이 구도하는 것”, 영광을 구하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슬프게 노래하는 것이 진실되지 않습니까?

 

여기 아래에서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보렴아 Look how we grovel here below,

저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을 좋아하면서 Fond of these trifling toys;

우리 영혼은 날지도 못하고 나아가지도 못하네 Our souls can neither fly nor go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지도 못하도다 To reach eternal joys.

 

허망하게 이전에 불렀던 노래들을 부르면서 In vain we tune our formal songs,

헛되게 우리는 솟구쳐 오르려고 하지만 In vain we strive to rise;

찬송소리는 우리의 혓바닥에서만 맴돌고 Hosannas languish on our tongues,

우리의 열심은 죽어만 가는구나 And our devotion dies.

 

시편기자는 여름의 기근”, “시냇가의 물을 갈망함”, 자신을 찔러대는 전능자의 화살에 대해서 자주 불평하지 않는가요? 이것들은, “사망의 몸이 여전히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들 각각의 영혼 속에서 비준되고 있다는 표지들이 아닙니까? “, 나는 곤고한 자로다!” 바울이 말하는 대로, 우리를 구하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은혜의 방편을 통해서이지 않습니까? 유혹에 저항하고, 선한 행위를 행하게 하는, 말씀, 기도, 묵상들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들을 거듭나지 못한 구도자로서 그것들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의 이끌림과는 반대하는 의지의 행위로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와 우리 사이에 있는 차이는, 우리 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원하게 하시고 그분의 선한 즐거움에 따라서 그 일을 행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바람이 불든지 불지 아니하든지, 우리의 항해를 위하여 깃발을 올려야 합니다. 오직 우리가 아는 것은 거듭나지 못한 자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하지않은 그 순간,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들이 죄인들로서 구하지 않을 때에 성도가 아닌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준비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반적인 교회를 위하여 좋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면,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교회를 위하여 좋지 않습니다. 만약 교회가 그것(한역주:준비론)에 대해서 무지하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한 것입니다. 묵시가 없는 곳에는 백성이 멸망합니다 그리고 분명히 그들은 교회 바깥에서처럼 교회 안에서도 너무나도 신속하게 오늘날도 멸망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대의 마지막까지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그 조건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무엇이든지 가르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만약 에드워즈가 옳다면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에 잘못되었음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쓸 의무가 있음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의 사역 가운데서 그것을 현저하게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주님보다 더 나은 복음전도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분의 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보다 얼마나 더 지혜로운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어떤 교회지도자들 집단과 대면하였던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논의를 진행하면서 저는 그들에게 만약 그들이 영혼을 설득하여 그리스도에게 넘기려고 하고 있다면 무엇을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인가하고 질문하였습니다. 그 사람에게 그들은 이렇게 답변(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율법과 의무 그리고 물건들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때 젊은 부자관헌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것인지를 질문하였고, 우리 주님께서는 바보같이 다음과 말씀하셨던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노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간단히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1.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과 구주로서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있다면;

2. 만약 교회의 지상 사명이 영혼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가장 거룩한 믿음으로 세워가는 일이라면;

3. 만약 그리스도와 성경만이 교회가 어떻게 그 사명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말해줄 수 있다면;

4. 만약 그리스도와 성경만이 교회에 말해 왔고, 그 지시들이 구원을 위하여 죄인들과 성도들을 준비시키라는 것이라면;

5. 만약 교회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불순종하지는 않으면서도 그것을 총체적으로 무시하고 거부해 왔다면;

6. 그러면, 교회는 하나님께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끈질기게 구하면서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사자(한역주: 엘리야와 세례요한)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중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할 것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길을 곧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