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내 사랑 예수/연속적 중생론 오해와 진실

Horace 2020. 12. 22. 07:32

10. 전제주의적 변증학의 개요

 

전제주의가 오늘날 개혁신학자들 가운데서 주요 입장이 되었습니다. 소수의 입장은 있을 수 없을 정도까지 되어 버렸습니다. 만약 새로운 것은 참된 것이 아니며 참된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찰스 핫지의 말이 옳다면, 전제주의는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실패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정도의 힘과 내용을 가지고 있는 지성적 운동은 자세히 주목해보아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특별히 증거주의적 변증학자들이면서 개혁신학자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본서의 저자들은 이런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본서는 고전적 전통주의(증거주의)와 전제주의에 대한 첫 번째 광범위한 연구입니다.

 

많은 다른 전통적 변증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전제주의에 대해서 말하고 써 왔습니다. 아마도 이런 책들 중에서 최상의 수집은 Jerusalem and Athens라는 제목이 붙은 코넬리우스 반틸을 위한 헌정논문들 속에서 발견됩니다. 다른 사람들 중에서 Clark Pinnock, John W.Montgomery, Gordon R.Lewis가 반틸의 전제주의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비판들은 유용하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간략합니다. 이 수집서는 전제주의자들 가운데서 헤르만 도이예벨트, Robert Knudsen같은 몇몇 내부 투쟁자들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전제주의자 반틸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위의 저자들에 의해서 광범위한 비판은 제시된 적이 없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코넬리우스 반틸은 전제주의의 지도적인 주장자입니다. 반틸주의라면 전제주의와 거의 유사어로 사용됩니다. 그 학파가 비록 한 사상가보다 더욱 광범위하지만 말입니다. 본서는 반틸박사에게 증정되었습니다. 존 거스트너는 무려 40여년도 넘은 예전 그분 아래에서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분을 그가 수학하였던 교수들 중에서 최상의 두분 중의 한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반틸은 그의 정신에 있어서는 날카롭고 심오하며 변증적인 것만큼, 또한 그의 강의에 있어서는 자비하고 관대합니다. 비록 이 책이 반틸적 변증학을 반박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반틸에게 본서를 헌정하는 것은 진실로 진심입니다. 우리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가 전제주의를 하나님의 발 앞에서 배웠다는 것에 철저하게 확신하고 있습니다(한역주: really?). 반틸의 제자들의 그 당당한 개혁신학적 증언은 그들도 또한 반틸주의가 참된 성경적 변증학임을 믿는다는 인상적인 증거입니다.

 

독자들은 왜 본서의 저자들이 그들이 그렇게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들의 저자들의 변증학을 그렇게도 두려워하는가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그 답변은 단순합니다: 전제주의가 함축하는 바는, 우리의 의견에는 크리스챤 신앙을 암묵적으로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 옹호자들은 기독교를 사랑하고 또한 증진시키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원리들은 그들의 의도들과는 반대로 작동합니다. 만약 전제주의적 원리들이 일관되게 실행되어진다면 그리고 그러할 때, 그들은 그들의 옹호자들이 사랑하는 것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치명적인 작업을 보고 있습니다. (토론토에 있는) The Institute of Advanced Christian Studies, 어쩌면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그것이 시작하였던 그 개혁신학으로부터 이탈하였습니다. 본서를 관통하여 우리는 이것을 헤르만 도이예벨트, H.Evan Runner, Bernard Zylstra, James Olthuis, John Vander Stelt 등의 작품 속에서 그 예들을 인용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일관성있게 실행되어진, 전제주의적 원리들의 기독교신앙 자체를 손상시키고 있음을 보여줄 것입니다. 이 심각한 주장은 계속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강조될 것이며 또한 방어될 것입니다.

 

두 개의 신앙주의들 사이에서

 

반틸을 날카롭게 반대하는 사상가들조차도 간혹 본질적으로는 전제주의적이거나 혹은 최소한 그들 자신의 원리들에 있어서 신앙주의적입니다. 이것은 예를 들자면 James Daane의 경우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신앙주의는 실제적인 용의자입니다. 우리는 반틸과 다른 이들이 자신들이 신앙주의적임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진실함을 존중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자기 평가가 잘못되었음을 입증하게 될 것입니다. Mark Hanna는 신앙주의에 매우 비판적인 또 다른 사람인데, 하지만, 그의 “veridicalism”도 그것을 실상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현대의 변증학은 하나의 반석과 하나의 딱딱한 위치 사이에 있습니다. 반석은 더욱 신앙주의적인 전통주의입니다. 현대의 복음주의는, 곧 기본적으로 경험지향적입니다(은사주의 운동이 일반적인 그 경향의 한 극단적 증상일 뿐입니다).

 

만약 전통주의가 반석의 위험 가운데 있다면, 전제주의는 딱딱한 위치에 대해서 주의해야 합니다. 이 사상학파는 신경의 결핍으로 오는 고통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전통적 유신론적 증거와 크리스챤적 증거들을 거절하였습니다. 그것은 초자연성의 깃발 아래에서 궁극적으로는 신앙주의를 타고 있는 형상이 되었습니다. 고든 H. 클락은, 반틸을 합리적으로 공격하는 주요인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절대적 신앙주의를 갖고 반틸의 신앙주의를 뛰어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자신을 자신의 최근의 책에서 영적 합리주의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본질적으로 건전한 전통적 변증학을 그 합리적 정박지에 데려오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정박지는 가장 위대한 전통적 변증학자들 중의 한 명인 조나단 에드워즈와 결합되는 것인데,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상승하면서, 후험적으로나 효과들로부터 하나의 영원한 원인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두 번째로, 통찰이 아니라 논증에 의해서 입증하기를 이 존재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그의 존재를 입증한 그 필연성으로부터, 우리는 하강하면서, 그분의 완전성의 많은 것들을 선험적으로 입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신학을 확증하는 한 문단에서, 입증한다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타납니다. 아메리카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신학자로서 필명을 날리고 있는, 에드워즈는, 성경의 영감을 위한 합리적 사례에 있어서 동등하게 위대한 증거주의자로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전제주의자들은, 에드워즈와 같은 모든 전통적 변증학자들은 무익하고, 무익한 것보다 더 나쁘게 - 잘못되었고, 잘못된 것보다 더 나쁘게, 신성모독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전제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전통주의자들은 잘하기를 의미할지 몰라도, 그들이 생각을 잘 하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를 의도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분의 영광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당신 자신을 위하여 하실 수 있는 일을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은 이성을 조롱하면서 경건을 위한 오만함으로 대체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심각한 기소는 여러 가지 주장들에 기초해 있습니다. 첫째, 전통적 절차는, 전제주의자들에 따르면, 잘못된 출발점, 곧 자율성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통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의 생각하기를 하나님 없이 시작하여 자기 자신들에게 하나의 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자신들을 만드신 하나님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의 척도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이 잘못된 변증학이 어쨌든 출발하게 된다 할지라도 - 그것이 출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 그것은 결코 그 목적에 도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으로 시작한다면, 그것은 사람으로 끝나게 되고, 그것은 결코 하나님과 함께 끝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끝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전제주의자는 만약 전통주의자가 자신의 목표에 도착하게 되면 그것은 가치가 없는 목표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증거주의자는 자기가 시작하는 곳에서 시작할 수 없고, 만약 그곳에서 시작한다면 그의 목표에 도달할 수 없으며, 만약 그가 자신의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 확신은 그의 궁극적인 어리석음입니다. 명백하게, 유한한 출발로 시작하고 유한한 발걸음으로 진행하면서, 그는 유한한 끝으로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위의 모든 비판은 부정적입니다. 하지만, 전제주의자는 전통주의자가 잘못된 것임을 입증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그 자신의 접근이 옳다는 것을 또한 입증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마땅히 출발해야 할 곳, 곧 하나님과 함께 출발한다면, 우리는 올바른 위치에서 끝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을 포함해서 그 밖에 모든 것을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변증학이 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며, , 크리스챤 신앙을 합리적으로 방어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전제주의자의 주장의 이 뼈대에 살을 붙여 봅시다.

 

전제주의자들의 주장

 

하나님을 전제하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입증할 수 있고, 우발적으로는 하나님 그분을 확증할 수도 있습니다. 전통적 입장의 근본적인 오류는, 모든 것을 알지 않고서는 우리가 어떤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하면서 어떤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통주의자의 초기의 오류이며, 이 오류가 그 이후의 모든 발자국들에 재앙이 되게 하고 그 발자국들이 새겨지자말자 빠르게 그것들을 지워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른 어떤 것들과 관계 속에 있고, 그 어떤 것은, 물론, 또 다른 것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만약 그 다른 일들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면,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그 일에 관한 어떤 것은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고, 만약 그것에 관한 어떤 것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면, 그러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깨어진 담벼락에 자라는 꽃의 문제와도 같습니다. 그 시인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가 세상과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다면 깨어진 담벼락에 사이에서 자라고 있는 꽃을 알 수가 없습니다. 반면, 만약 우리가 어떻게든 세상과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그때에야 우리는 깨어진 담벼락 사이에 있는 그 꽃을 또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전제주의자는 어떻게 자신이 세상과 모든 것을 알 수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제주의의 영광입니다. 그것은 지식의 비밀을 발견하였습니다; 모든 진리에 대해서 열려라 참깨식입니다. 맹목적인 사실은 말 못하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제주의는 말 못하는 사실들을 전제주의자가 우리들에게 어떻게 알게 되는지를 알게 해주는 그 세상의 한 부분으로 변화시킴으로써 그것들의 입을 열어줍니다.

 

물론, 그의 비밀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십니다 -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말입니다. 모든 유신론자들은 이것을 잠시 동안 깨달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어떻게 세상을 알 수 있게 하는가요? 확실히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을 우리가 처음부터 쭉 알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면, 어려움은 우리가 어떤 것을 알고 있는 그 점에서 일어납니다.

 

전제주의의 답변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성경 속에서 그분에 대한 지식을 우리들에게 계시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분께서 이것을 행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열매없는 전통적 변증학으로 되돌아 갈 것인데, 우리의 맹목적이면서 말 못하는 사실들로서 그분에게 도달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또 다른 질문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성경 속에서 우리들에게 계시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이것이 우리들을 도울까요? 전제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우리들의 문제는 우리의 맹목적인 사실들이 말못하고 있는 사실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실들을 알고 계시며 또한 그것들은 그분에게는 맹목적이고 말못하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전혀 문제라곤 가지고 계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에게는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여전히 그 문제를 지니고 있는 우리들을 도우는 것일까요?

 

전제주의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라서(after) 하나님의 생각을 생각하게 할 수 있으십니다. 이것이 그분의 계시의 전체 요점입니다 - 우리들에게 당신께서는 아신다는 것을 말해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아시고 계시는 그분을 전제할 때에 우리도 또한 알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분께서 아시기 때문에 우리들도 알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일까요? 유비적 사고에 의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아시는 대로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을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빛 가운데서 그분은 우리들에게 빛을 볼 수 있도록 허용하십니다. , 그분은 그분께서 사실들을 아시고 우리들에게 지식을 부여하시되 그분을 따라서 그분의 생각들을 유비적으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그 사실들에 대한 지식을 우리들로 하여금 단정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또 다른 문제가 전제주의자에게 일어납니다. 성경은 인간들이 죄인이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전혀 자발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분을 따라서 그분의 생각을 생각하고 모든 것에 있어서 그분에게 의존하기는 고사하고 말입니다. 그 해결은 순전하고 혼합되지 않는 칼빈주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을 열주셔야 하고 우리의 심정을 바꿔주셔야 하고, 우리는 중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중생하지 않았다면요? 그러면 나는 그 변증학자가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결코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전통적 사고에 있어서, 원리적으로 알미니안주의자이기 때문에 가지데 되는, 기본적인 오류는, 그것이 죄의 순수지성적 영향력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것은 죄가 정신을 어둡게 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죄를 제거하실 수 있고, 빛이 들어오게 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전제주의자에게 있어서, 신학과 변증학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건전한 신학은 건전한 변증학자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입니다. 모든 전통적 변증학은 핫지와 워필드 같은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 발전되어진다고 하더라도 알미니안으로 간주됩니다. 그런 칼빈주의자들은 변증학을 수행하는 중에는 자신들의 칼빈주의를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주의는 사람들이 눈이 멀어있고 자신들이 중생하기 전까지는 어둠 속에서 오직 더듬고만 있다고 가르칩니다. 진정한 변증학은 중생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제주의적이지 않으면서 중생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중생하지 않은 자들은 전제주의적일 수가 없습니다(한역주: 진정으로 이것이 전제주의자들의 주장일까 구체적으로 확인해보자.믿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생 이전에는, 전제주의적 사고가 어리석고 반계몽주의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제주의는 자율주의보다는 타율주의를; 죄의 순수지성적 영향력보다는 중생을; 일의적 사고보다는 유비적 사고를; 입증하는 것 대신에 전제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마치 그것이 증거주의가 모든 변증학적 요점에서 오류가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꼭 그것처럼, 모든 변증학적 요점에서 증거주의로부터 이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증거주의는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금 한 번 더 그것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만약 우리가 입증하기 보다는 전제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변증학을 수행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전제주의자의 모든 답변들이 그럴 듯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그들은 모두 또 다른 질문들을 불러오고 있지 않는가요? 만약 그것들이 증거주의를 대체시킨다면, 그들은 그 과정에서 변증학을 포기함으로써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것은 전제주의자를 무척 쓰라리게 하는 점입니다. 자신이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가장 가깝게 이르는 점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을 듣는 바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그 단어의 일상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입증할(prove)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확증하고(confirm) 있습니다. , 하나님을 출발점에서 가정하는 것은, 모든 지식을 위한 토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입증이 아닌가요? 실제적인 입증? 확증? 그것은 지성적인 삶을 얻기 위해서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요?

 

그것은 경건한 답변입니다만, 또한 순환적이고 역설적입니다. 순환성에 대한 비난은 모든 다른 형태의 사고를 파괴시킬 것입니다; 하지만, 전제주의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무장을 하라는 요청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연히 말입니다. 그렇게 그는 선포합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순환인가요! 얼마나 신적인 순환인가요! 모든 사상가들은, 전제주의자들을 포함해서, 순환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인간적 순환입니다. 우리들의 것은 신적인 것이며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입니다. 전제주의자들은 바로 그 최상의 순환들 속에서만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전제주의자의 입장의 개요를 제시한 후, 이제 본서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그 전제주의의 비판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그 증언을 들어보기 위해서 변증학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변증학이 18세기 동안 거의 들어본 바가 없다가 새롭게 생겨난 것이라는 것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실제적인 그 역사적 접촉점은 과거의 크리스챤 변증학과의 접촉이 아니라, 그것의 현대적 생략(eclipse)- 계몽주의와의 접촉에서 온 것입니다(한역주: 이게 무슨 말???). 본서의 세 번째 부분은 전제주의를 위한 현대의 논증들을 제시하고 반박하고 모든 시대의 전통주의를 재옹호하면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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