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내 사랑 예수/연속적 중생론 오해와 진실

Horace 2021. 2. 26. 16:32

반틸과 리고니어 변증학

존 프레임/번역: 손성은 목사

 

R. C. Sproul, John Gerstner, and Arthur Lindsley, 고전적 변증학(Grand Rapids: Zondervan, 1984. x, 364. $12.95). 원래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47.2 (Fall, 1985), 279-299에 실려 있었습니다.

 

서론

 

고전적 변증학은 열렬하게 고대되어 오던 책입니다. 본서는 상당히 흥미를 가진 한 변증학적 접근을 체계적(이면서도 또한 최소한 얼마간 기술적인) 형태로 제시된 것인데, 현재까지 주로 유명한 저서들 속에 그리고 녹음된 강의 속에서 표현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전제주의”(주로 반틸이 주장하는 형태의)에 대한 비판으로 유명합니다. 본서는 현재까지 나온 책들 중에서 반틸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비판서들 중의 하나이며, 저는 반틸에 대한 모든 비판들 중에서 이 책은 가장 철저한 연구이고 가장 정확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하나의 가능한 관심의 갈등을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저자들은 나와 거스트너 사이에 주고받은 서신들로 인하여 거스트너가 반틸의 변증학에 대하여 의미심장할 정도로 우리들의 이해력을 날카롭게 하였다고 하면서, 나에게 빚을 많이 졌다고 합니다하지만, 반틸을 이해한 것에 대해서 이 저자들을 칭찬하기는 할지라도, 나는 나 자신을 칭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저서에 대한 나의 공헌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그리고 그렇게 드러나겠지만, 언제나 이해가 되거나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스트너 그 자신이 반틸의 이전 학생이었고 (그와의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서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오랫동안, 반틸에 대한 다른 비판가들과는, 나의 의견으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관심과 학문적인 배려심을 갖고, 반틸의 입장을 곱씹어 왔습니다. 그래서, 본서의 비판적인 표준들에 대한 신뢰는 저자들 자신에게 돌려져야 하겠습니다.

 

나는 그 책의 역사적 연구들의 상세함들이 비록 흥미롭기도 하고 그 책의 최상의 특징들 안에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자세히 논의하지 않겠습니다. 거스트너는 오랫 동안 교회역사 교수였고, 이것은 그의 주전공 분야입니다. 일반적으로, 그 역사적인 부분은 주장하기를, 리고니어 유형과 비슷한 증거주의의 형태가 교회 역사의 대부분을 거쳐 오는 가운데서 정통적 크리스챤들의 공통된 관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전적이나 전통적견해라고 불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 주장은 어거스틴, 루터, 칼빈, 17세기 정통주의, 동방교회와 로마정통주의에 대한 연구들로 지지됩니다. 하지만, 저자들은 고전적 변증학이 오늘날 병들고 진통하고 있다고 합니다. 죽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전제주의는”, 그들이 우리들에게 말해주기를, 그것이 비록 교회역사의 소수자보고서라고 불려질 수도 없는 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개혁신학자들 가운데서 다수자 보고서가 되었다고 합니다. 나보다 더욱 역사적으로 실력이 있으신 다른 서평자들은 의심할 바 없이 이 논지를 평가해보려고 할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본질적인 주장들이 반대편 쪽에 제기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물론, 그 사안은 그 두 개의 접근들의 상대적 타당성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반틸의 관점이 상대적으로 새로운 것이라면, 그것 때문에 틀린 것은 아닙니다: 개신교도들은 전통주의자들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 세기의 변증학의 역사는 이 질문들에 대해서 나에게는 애매모호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통적 기독교 변증가들은, 언제나 인간의 모든 추론과정에 성경의 최상의 권위를 믿어 왔는데, 이것이 반틸주의의 본질입니다. 반면에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신앙을 합법적으로 앞서고 있는”(precede) 여러 가지 종류의 추론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인식론적 소양을 매우 증가시켰던,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에 이르기 전에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문제로 여기지 않았던, 외면상의 모순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칸트 이후에야 전제의 논리가 체계적으로 탐구될 수 있었습니다(심지어 반틸 이전에조차도, 헤겔, 마르크스, 케에르케고르, 비트겐슈타인에 의해서, 그리고 제임스 오르와 같은 기독교변증학자들에 의해서) 그래서, 칼빈이 전제주의자였느냐 아니면 증거주의자였느냐고 질문하는 것은, 어쩌면 어거스틴이 개신교도였느냐 아니면 로마천주교도였느냐 질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대적 상황에 관하여,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현대의 변증가들 사이에서 다수자 보고서라고 듣는다는 것이 놀라울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모두 어떻게 전제주의를 정의하느냐에 의존합니다. 나는 이런 제안을 해볼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이 시대에, 칸트, 헤겔, 마르크스, 아인슈타인,실용주의, 현상학, 실존주의, 비트겐슈타인, , 폴랴야니, 핸슨, 도이벨드 등 많은 사람들을 따라서, 대부분의 변증가들은 전제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들의 시대에, 인간의 생각(과학적이든, 논리적이든, 역사적이든, 철학적이든, 종교적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의 전이론적 태도들과 헌신들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아마도 이 사실은 우리의 저자들에게 전제주의는 현재 승승장구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문서상으로 증명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나의 의견으로는, 생각에 미치는 전이론적인 헌신들의 영향에 대해서 이렇게 개방되는 것은, 완전히 성숙한 전제주의로부터 멀리 돌아가는 길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것은 대화에 있어서 하나의 긍정적인 발전입니다. 본서에 대한 나의 큰 실망들 중의 하나는, 리고니어 타입의 변증학에 반대하는 가설을 많은 사람들에게 생겨나게 하는 이 강력한 철학적 흐름들을 어떤 진지한 방식으로도 취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A. 리고니어와 반틸

 

이제 나는 반틸에 대한 저자들의 비판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의 긍정적인 변증학에 대해서 논의해보겠습니다. 그 책 자체에스는 이 순서가 거꾸로입니다만, 나는 이 리뷰에서 방법론과 인식론의 질문들이 저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변증에 대한 논의들보다 앞서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전자의 질문들은 전제주의에 대한 비판과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묶여 있는 것입니다.

 

반틸의 변증학은 그 세부적인 것은 아무리 복잡하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단순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 기본적인 주장을 합니다: (1) 인간 존재는 그들의 모든 생각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제하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2) 불신자들은 생각과 삶의 모든 면에 있어서 이 의무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주장은 반틸로 하여금 지성적인 자율성을 비판하는데 이릅니다. 두 번째는 죄의 순수지성적 효과들을 논의하는데 이르게 합니다. 리고니어 그룹은 이 두 분야에서 반틸을 비판하는데, 그 순서대로 우리는 살펴보겠습니다.

 

1. 자율성, 이성, 그리고 순환논법

 

전제주의의 초기의 기술은 반틸의 자율성에 대한 비판에 제공하는 현저한 위치에 있어서의 통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기로는, 반틸체계의 토대이며, 그 가장 설득력이 있는 원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법인 것처럼, 우리가 만물의 척도인 것처럼 변증학을 수행해서는 안 됩니다. 크리스챤의 생각도, 크리스챤의 삶의 모든 것같이, 하나님의 주권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책의 자율성문제의 분석은 불명확하고, (또는) 오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반틸의 자율성에 대한 진술들로부터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들과 함께 시작”(start with)하기 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이끌어 냅니다. 지금 함께 시작한다는 것은 [“선행하다”(precede)우선성”(priority)와 같이] 신학과 변증학에 있어서 극히 미끄러워 잡기 어려운 어휘들입니다. 그것은 주제들의 교육적인 순서, 하나의 강조, 연구방법, 우선적인 것이나 중요도에 있어서의 확신, 필요하거나 충분한 조건의 관계, 혹은 진리에 대한 하나의 준거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내가 믿기로는, 반틸은 거의 항상 마지막 사항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간혹 약간의 애매모호함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여하튼, 우리는 리고니어 저자들이 이 개념에 대해서 얼마간의 분석을 제공해 주고 (반틸과 자기 자신들의 체계를 위하여) 그것을 정의해보려는 시도를 해볼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석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저자들은 그 개념의 의미가 완전히 자명한 것처럼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일에 있어서, “우리들과 함께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자율적으로 추론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들 바깥에서 출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바깥에서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이제 확실히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반틸도 그것을 아주 간단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저자들은 심지어 반틸이 그 점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를 인정하기조차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장하기를, 그것이 그의 생각 안에서는 일관성이 없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합니다. 일종의 수치스러운 인정인 것입니다. 어쨌든, 반틸의 관점에 있어서, 자아는 근인의”(proximate) 출발점이지만, “궁극적인”(ultimate) 출발점은 아닙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생각하기로는, 생각과 실제적인 생활에 있어서 모두 그 결정들을 하는 것은 자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판단은, 우리 자신들이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자아가 진리의 그 자체의 궁극적인 준거라는 것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 외의 다른 누군가에 의존해야 하는 것에 대한 결정에 규칙적으로 직면하게 됩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제외하고) 이상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정상적입니다.

 

그러므로, 두 개의 질문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1) 모든 결정들이 자아의 결정인가 아닌하 하는 것에 대한 형이상적적(실제로는 동어반복적인)질문과 (2) 자아가 그 결정에 이르게 될 때 어떤 기준을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론적-윤리적 질문. 반틸과 리고니어 그룹들은, 내가 생각하기로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는데, 반틸이 그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첫 번째 질문의 답에 동의를 한다고 해서 두 번째 질문에도 그 답이 일치할 것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제기되고 또한 해결될 필요가 있습니다. 반틸과 - 그리고 성경이 -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두 번째 것입니다. 성경은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피조물들로 하여금 그들의 판단을 그들의 조물주의 판단에 맡기라고 호소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조차도 자아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고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자아와 함께 출발하는것이라고 반대한다면, 반틸은 단순히 그 점을 인정할 것입니다. 동시에 그에게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의미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에서, 이 선택은 자아와 함께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켜주면서 말입니다.

 

동일한 종류의 구분이, 본서의 또 다른 중요한 주제인, 인간의 이성의 논의에 있어서 필요합니다. 고전적 변증학은 복수심을 갖고 있는 합리주의입니다. 저자들은 우리들 시대의 반지성주의적 경향들을 공격하고, “이 반지성주의적 주연(酒宴)으로부터 후퇴의 표지를 칭송하며, 우리가 불신자들과 더불어서 변론해야 할 것을 성경을 통해서 자세히 보여줍니다. 합니다.신앙주의는 큰 원수입니다. 하지만, 반틸은, 그들이 말하기를, 불신자들과 변론하기를 거절하면서, 변증학을 포기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입증하는 것이나 증거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는 여러분이 삼단논법의 끝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저 악명높은 반틸주의자인 필자는 어느 누구와도 합리적인 논쟁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프레임과 논쟁할 수 있지만, 프레임은 알미니안주의자와 논쟁하지 않을 것입니다. 프레임은 단지 그에게 그가 오류가 있다는 것과 자신은 하나님에 의해서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도록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알미니안주의자인 그가 마음을 바꿔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저자들은 그 반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과 출발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꼭 그것처럼, 우리는 (삶의 어떤 분야에서도, 특별히 변증학에서는) 이성의 사용을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 불신자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설득하고자 하는 어떤 시도도 추론과정을 요구합니다: 당연히, 합리적 논증은 우리가 하나님을 전제하는 합리적 필요성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필연적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전제주의자들은 이유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실제에 있어서는 자율성의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실제적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지지하는 것은 이성의 어떤 기본적 원리들(비모순율과 같은)이 어떤 지성적이 담론 속에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과 비슷한 주장입니다; 당연히, “비모순율은 삶의 보편적인 전제사항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논리에 의문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우선적인 것으로 전제하지 않고서는 논리의 우선성을 반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저자들은 지성의 우선성의 원리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성이 그 지성이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보다 더욱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성의 우선성은 우리가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알 수 있기 이전에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합니다.” 그래서, 반틸이 창조주-피조물 구분에 기초하고 있는 지성의 우위성에 대해서 말하 때에 그는 논센스를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지성이 우위적이라면, 그 우위성은 어떤 것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께서 어떠튼 지성적 활동 이전에 알려지시게 된다면, 그러면 그분을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된다는 말이겠습니까?

 

하지만, 여기, “출발점으로서, 몇가지 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성이나 이성은 다양한 것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논리의 법칙, 우리가 판단을 하고 추론을 이끌어내는 심리적 기능구조물, 판단들과 추론들 그 자체, 사고의 체계가 그것들입니다. 심리적 기능구조물로서 어떤 이성적 활동에 연루된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요점의 명백성을 동의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말하기를 우리는 자아와 함께 시작해야 한다는 명제 속에서 보았던 것과 동일한 종류의 명백함입니다. 하지만, “자아와 함께 시작하는 것이 어떤 진리의 준거를 자아는 인식해야 하는가 하는 그 질문을 남겨놓았던 꼭 그것처럼, “이성과 함께 출발하는 것도 어떤 진리의 준거를 인간의 이성은 인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하나의 심리적 기능구조물로서 이성은, 다양한 논리의 체계, 다양한 철학적 기획, 다양한 종교적 헌신들 등의 다양한 원리들에 따라서 작동할 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반틸은 이성이 모든 인간의 생각과 삶에 연루되어 있음을 허용할 수 있습니다(또한 허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질문은 어떤 진리의 준거를 우리의 이성이 인식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저자들은 이 질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이성은 비모순율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답변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심지어 이성을 논리의 법칙의 견지에서 정의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이성의 우위성은 심리적 기능구조물의 우위성이 아니라, 논리의 우위성을 의미하겠지만, 그것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분명치가 않습니다).

 

하지만, 주요점은 어떤 의미에서는 참됩니다. 비모순율은 PP 아닌 것이 동시적으로 그리고 동일한 관점에서 모두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그것은 성경 그 자체에 의해서 전제되고 있는 크리스챤적인 원리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물로 매우 추상적입니다. 더욱 구체적인 그 어떤 것도 비모순율 그 자체로부터 도출될 수 없습니다. 구체적인 결론들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우리는 부가적인 원리들을 필요로 합니다. 철학적으로 문제성이 있는 원리들을 말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철학자들이 그들 자신의 특별한 체계의 견지에서 합리성(rationality)을 정의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반틸이 논의에 개입하여서 합리적 원리들의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이 수준에서, 이 종류의 관심을 갖고, 그가 창조주-피조물의 구분에 기초한 지성의 우위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표준들을 최고의 것으로 인정하는 추론의 과정을 언급합니다. 어쩜녀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지성의 우위성을 전혀 말하지 않았더라면 더우구 지혜로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가 않습니다. 이성은 언제나 인간이 지식을 추구하는 것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성은 언제나 그것의 표준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 선택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저자들은 우리가 결국은 우리가 그분을 알기 이전에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반박합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분을 알기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면, 우리의 그 탐구의 단계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전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기 이전에는 하나님을 우리의 최고의 표준으로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다른 표준을 최소한 잠정적으로라도 채택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분석은 (1) 로마서1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미 알고 있다는 분명한 가르침(20,21)을 부인하고, (2) 고린도전서1031절에 하나의 예외를 제기합니다: 여러분이 지식을 추구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다른 것, 혹은 어떤 다른 사람의 영광을 정당하게 생각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들은 스스로의 무게 의해서 넘어집니다. 그것들은 성경을 믿는 자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저잗르은 반틸이 합리적 논증, 입증들, 증거들을 포기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중립적인, 혹은 자율적인 이성과정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게 모든 것입니다. 그런데, 고전적 변증학에 있는 어떤 것도 이것들을 부인한 것에 있어서 그가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록을 남겨놓기 위해서라도,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반틸은 입증들, 논증들, 증거들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반대로, 그는 가장 강력한 용어들로 그것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리고니어 작가들은 이것을 너무나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치부하거나 반틸은 논증은 실제적으로 전혀 논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의 전제적 선택을 하지 않으면, 기독교를 위해서든, 아니면 그 외의 어떤 것을 위해서든 논증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진리의 준거가 없이는 추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준거는 광범위하게 다양한 원천들로부터 오는데, 궁극적으로는 종교적인 헌신에서 옵니다. 그 준거는 크리스챤적이든 아니면 비크리스챤적일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비크리스챤이라면, 그들은 스스로 자멸할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기독교를 위한 논증은 한 가지 면에서 언제나 순환적이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위한 논증들은 크리스챤의 준거에 기초해야 하는데, 그것은 거꾸로 기독교의 진리를 전제합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전제하지 않고 하나님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인 우리 저자들을 가장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반틸의 변증학의 원리들의 하나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순환논법은 순전히 그리고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의 논리적 오류입니다. 하지만, 그 대안은 무엇입니까? 다시금, 그 대안은 하나의 불신자가 전혀 준거가 없거나, 비 크리스챤의 (혹은 아마도 중립적인”) “잠정적준거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뒤, 직선적인, 비순환적인 추론에 의해서, 그는 자신이 크리스챤 준거를 채택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찍이 언급하였듯이, 이 구성은 로마서118절이하와 고린도전서1031절을 위반하고 있습니다(한역주: 여기서 오해가 있는 것이 아닐까? 리고니어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 출발점임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 안다는 것일까? 구원적인 의미가 아닌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 입장에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준거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크리스챤적인 표준들을 채택하고자 하는 사람들은(그리고 중립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순히 자신들이 받은 계시에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만약 중립성에서 진리로 진행할 수 있다면, 그러면 비순환논증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연히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자율성을 책망하기 때문입니다.(한역주: 여기에 논리의 흠결이 개입되는 것이 아닐까?).

 

이 순환성이, 리고니어 저자들이 두려워하는 것 같이, 모든 추리의 사망이 수반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10 모든 추리는, 크리스챤이든, 비크리스챤이든, 전제주의자들이건, “고전적인자들이건, 모두 이런 의미에서 순환적입니다.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이것은 이성의 타당성에 대한 도전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성이 작동하고 있는 그 방식입니다(한역주: 이런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하라!). (2) “협소한 순환”(예를 들어, “성경이 성경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다”)넓은 순환”(예를 들어, “크리스챤적 준거에 따라서 해석되어진 증거는 성경의 신적인 권위를 논증한다. 여기에 그것이...”)을 구별해야 합니다. 모든 순환논증이 동등하게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어떤 논증들은 오류가 있는 것으로 부정되어야 합니다. (3) 크리스챤 준거에 대한 추리는 설득력이 있는데, (a) 그것은 이성에 대해서 인정을 받는 방식이고, (b) 그것은 진실한 결론에 이르며, 또한 (c) 모든 사람들이 어떤 수준에 있어서, 이미 이런 추리가 진리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다시금, 로마서1).

 

2. 죄의 순수이성적 효과들

 

반틸에 의하면, 왜 하나님을 전제하는 것일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리고니어 저자들은 그것에 관한 하나의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통적 접근의 근본적인 오류는 모든 것을 알지 않고서는 어떤 것을 알 수 없다는 개념을 반틸에게 귀인시킵니다. (이중의 부정어가 없이 말하면, 그들이 말하고 있는 바는, 반틸에게 있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않는 한 어떤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그 책의 어떤 곳에 나타나는데, 그 저자들은 “...우리는 세계 전체를 알지 못하면 깨뜨려진 담벼락 사이에 피는 꽃 한송이를 알 수 없다는 말을 시적으로 장식하는 것이 충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반틸은 우리가, 어떻게든, 실재에 대한 전지한 관점을 가지기 위해서 하나님을 전제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반틸이 이런 일을 믿고 있다고 보여줄 수 있는 말을 반틸의 책 속 어디에서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입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틸은, 관념주의를 떠올리는 말로, 참된 인간적 지식은 지식의 포괄적인 체계의 존재를 전제한다고 간혹 주장합니다. 하지만, 관념주의자들과는 달리, 반틸은 이 포괄적인 체계를 성경의 하나님 안에서 발견합니다. 그는 어떤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 존재들은 포괄적인 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식으로 들리는 명제를 명백하게 부인합니다:

 

우리가 인간지식의 객관성에 대해서 말할 때 많은 혼란이 있었던 것에 대한 점들 중의 한 가지는, 세계에 대한 인간 지식은 참되기 위해서 포괄적이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을 얻는 것을 희망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하여서도 포괄적인 지식을 얻는 것을 희망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반틸은, 사실, 어떤 것을 알기 위해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원리를 명백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원리를 일반적으로는 비크리스챤적인 방법론이고, 특별히는 현대의 현상학적 방법론에 이 원리를 돌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반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전제하고자 하는 우리의 필요는 이러한 관념주의자의 인식론적 가정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안의 본질에 있어서 그것이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 필요성(necessity)은 하나의 윤리적 필연성(necessity)입니다.

 

이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죄의 순수이성적 효과들에 대한 질문으로 데려다 줍니다. 이 점에서, 나는 리고니어 저자들과 반틸 사이에 놀라울 정도의 일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교도의 문제는 그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시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시편들과 로마서1장에서 자연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세상 속에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고, 모든 인간 존재들은 이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말해줍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자연신학은 창조에 의하여 매개됩니다. (나는 이것이 로마서1장의 가르침임을 인정하지만, 이 사실은 로마서1장에 묘사되고 있는 매개적 형태에 부가하여 다른 형태이 계시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점을 첨가하겠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신앙하기 위해서 복잡한 논증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요? 답변은 그들이 창조 속에서 계시된 진리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보들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지성적인 연약함이 아니라, 분명하게 계시된 것을 받아들이기는 거부하는 것입니다.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지성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지성적인 문제는 도덕적 문제에 의해서 산출되는 것이지, 도덕적 문제가 지성적인 것에 의해서 산출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압니다. 하지만, 그분을 구원에 이르도록 아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모든 점들(과 그들의 요약)에 있어서, 나와 반틸이 동의하지 않는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리고니어 사람들은 반틸이 아주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 그는 죄가 불신자들의 추리하는 능력을 파괴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처럼, 그들은 그들의 해석이 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반틸의 반대되는 진술들을 무시해 버리고 있습니다.

 

나는 성령의 증언에 대한 그들의 설명에도 일반적으로 동의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을 더욱더 놀라게 하겠습니다.  그들이 나에게 같다 붙인 그 전적으로 신앙주의적인 관점은 근거도 없이 만들어낸 그들 자신의 창안물입니다. 나의 저서들로부터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구절들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나의 다른 입장들이 이런 관점을 필요하게 만든다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것을 믿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에게 있어서 성령의 내적 증인은 추론적인 지식과 말씀의 영감의 증거와는 무관하고 그것들에 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도 안됩니다. 나는 성령이 증거에 대해서 증언하시는 것을 통해서(확실히 다른 방식으로도 하시지만) 말씀에 증언하신다는 것을 그들과 함께 너무나도 동의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추론적인 지식에 앞서는 것(prior to)”에 관해서는, 나는 신학에 있어서 우선성”(priority)이란 언어가 가지는 애매모호함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나는 사람들은 성령의 증은이 없이도 하나님에 관한 참된 결론에 도달한다는, 그들이 나로 하여금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는 인정합니다.

 

반틸의 글들은 여기서 약간의 어려움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불신자들이 진리를 알고 있다는 것(1:21)과 그들은 간혹 그들 자신에도 불구하고”, 곧 그들의 불신앙의 전제들에도 불구하고 참된 진리에 도달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불신앙은 언제나 지성적인 오류에 이르게 되며 어떤 전제적 진리도 성령의 증언 없이는 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그는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요점들입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로도, 충분하게 일관성이 없습니다. 더욱이나, 이 분야에 있어서 얼마간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들은 불신자들이 진리를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반역이 때때로 그들의 지성적 활동에 잠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데서부터 생겨납니다. 많은 이교도의 철학은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를 회피하려는 시도로서 정확하게 설명되어질 수 있스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의 문제들은 (리고니어 저자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대로) 지성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도덕성은 지성적인 판단들에 영향을 미칩니다. 물론, 때때로, 본서의 저자들은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지성적인 문제는 도덕적인 문제에 의해서 야기됩니다. 도덕적인 문제가 지성적인 문제에 의해서 야기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나는 동의합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그들이 최소한 도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지성적인 문제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비록 그들은 그 논의에서 그 사실을 그리 많이 다루고 있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흥미로운 순전한 결과는 서면상으로 죄의 순수지성적 효과들과 성령의 증언에 대하여 리고니어 그룹과 반틸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양편 다 타락은 전적이고, 그것은 진리의 억압을 야기시키고, 불신앙자는 그의 도덕적 반역 때문에 지성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구원에 이르는 지식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양편 모두에게 있어서, 성령의 증언은 우리의 변증적 노력들과 함께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그 반역을 깨뜨리고, 불신자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진리를 인식할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이 동의를 하는 이유의 한 부분은, 리고니어 형태의 전통적 변증학은 (예를 들어서, 클락 핀녹의 변증학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으로서) 자의시적으로 칼빈주의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리고니어 저자들은 전적 타락에 대한 그들의 고백에 있어서 철저하게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아직 크리스챤은 아니지만 진리를 구도하고 있는 자들에 무엇을 말하는지 여기에 주목해 보십시오:

 

(반틸은) 신적인 법수여자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은 채로 우주를 탐사하기 시작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의 신분을 하나의 법수여자로 전제하고 있다고 언제나 가정합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가까이 있는 자료를 검토함으로써 시작하는 사람의 필연적인 가정이지 않습니다...그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고 반틸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신적인 존재를 필연적으로 부인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그렇게 한다고 반틸이 주장하는 대로 애시당초 알려진 하나님에 대적하여 자신들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순히 인간 본성을 따라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들은 그들이 처음에 로마서1장을 토대로 하여 확증했던 불신자는 하나님을 안다고 한 것을 부인하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한글주: 이런 터무니 없는 오해를?). 게다가, 그들은 모든 불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적대적이고 진리를 억제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부인합니다(한역주: 이것도 오해야!). 최소한 그들의 의견에는 어떤 불신자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신실한 구도자이며, 단순히 창조된 인간 본성에 따라서 작동한다고 합니다. 심각하게 말하자면, 이제, 이것이 칼빈주의자에게 가치가 있는 타락교리인 것입니까? (한역주: 와우!)

 

그래서, 지면에서, 이 분야에 있어서의 차이점은 크지 않을지라도, 리고니어 저자들은 타락의 교리를 변증학에 적용하는데 있어서 진지함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비슷하게 공통의 토대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 우리의 저자들dems 반틸과 정확하게 동일한 입장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공통의 토대를 실재에 대한 고통의 지각과 관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분명하게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논의를 위하여 이런 공통의 토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자의 유리한 점으로부터 삶의 모든 측면, 모든 조각의 경험, 모든 차원의 실재는, 신학적 관점으로부터 이해되고 해석되어집니다....둘 모두다(신자와 불신자) 수선화의 일의적 이해를 즐기는 것처럼 보입니다....(하지만) 신자는 그 수선화가 가지는 의의, 곧 우주적 우발성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과 아름다움을 증언하고 있는 그 무엇으로서의 의의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불신자는 인정하지 않고, 대신 완전히 반대로, 반립적으로 그 수선화의 의의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의 다른 관점으로부터 공통의 토대, 곧 전체 창조세계가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는 동일한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각각은 동일한 현상을 보고 있습니다. 불신자와 신자는 2 더하기 24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원리들은 타당하고 다른 원리들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에도 동의합니다. 그래서 일종의 공통의 토대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나의 의견으로는, 반틸 자신도, (내 의견으로는 소수의) 몇 가지 문제들을 야기시키는 일의적이해에 관하여 약간을 제외하고는, 이 문장을 작성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들과 거의 동일한 문단들을 반틸의 저서들에서 따와서 갖다 붙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틸과 리고니어 저자들 양편 모두가 다 여기서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반틸은 신자와 불신자들 사이에 있는 동의의 분야(“그들에도 불구하고”)를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고, 리고니어 저자들은 (우리가 보았던 대로)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있는 완전히 반대가 되는 반립적인 이해에 대한 그들의 개념을 타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영역에 있어서 마지막 언급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한 지점에서 반틸을 분명하게 오독한 것이 저자들로 하여금 반틸의 입장에 대해서 심각한 오해에 이르게 된 점은 참 불행합니다. 214페이지에서 그들은 반틸이 크리스챤은 비크리스챤들과의 접촉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 것으로 인용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반틸 자신의 입장의 진술로서 여기고 있지만, 문맥을 보면, 실제로는 그것이 Stuart Hackett의 칼빈주의에 대한 비판의 말을 조금 바꾸어서 반틸이 재진술한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사소한 실수로 치부할 수 있겠습니다만, 단지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은 그들이 반틸의 입장에 대해서 너무나도 무지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틸은 크리스챤이 비크리스챤과 더불어서 접촉점이 전혀 없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한역주: 하지만 이보민교수의 반틸에 대한 강의는 이런 인상을 강하게 주지 않았던가?); 사실, 그는 그 반대되는 바를 수도 없이 말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실수들은 이 저자들이 반틸을 진지하게 이해하려고 해 보았는지에 대해서 의아심을 갖게 합니다. 그들은 반틸이 접촉점에 대해서 헤아릴 수 없이 긍정적으로 언급한 것들을 단순히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었던 것일까요? 단 한 가지 이 언급을 그의 결정적인 공식이라고 초점을 맞추고는 다른 것들은 설명조차 시도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아니면, 이 부분을 쓴 저자는 반틸이 실제적으로 이것이 반틸의 대표적인 한 공식이었다고 생각할 정도록 반틸에 대한 지식이 빈약했었던 것일까요? 이런 종류의 실수를, 무식과 강한 편견으로부터 나온 심각한 학문성의 결여로서, 반틸이 실제로는 하지도 않은 말을 한 것으로 만들어서 그로 하여금 더욱 비판을 받게 하고자 하는 열망으로밖에는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B. 리고니어 변증학

 

시공간의 요구 때문에, 그리고 논증 자체는 반틸의 비판만큼 (나에게!) 새롭거나 흥미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책의 기독교를 위한 긍정적인 논증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는 더욱 간략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여전히 몇 가지 새로운 좋은 점들이 있기는 합니다.

 

리고니어저자들은 우리가 보았듯이 전통적인 변증학이 병들어 신음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죽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그 질병이 든 이유들 중의 하나는,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현재적 고전주의자들이, 단순히 가능성(probability)을 주장하는 논증들을 펼치면서, 기독교의 진리가 논증될 수 있다는 전통적 주장을 포기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흥미롭게도, 리고니어 그룹과 반틸 사이에 또 다른 일치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저자들은 여기서 자주 반틸이 강조하고 있는 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만약 기독교가 확실하게 참되지 않다면, 그러면, 우리는 어느 정도 불신앙에 대해서 변명거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증명력이 있는 확실성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리고니어의 관점에서는, 특별계시에 대한 결정적인 호소가 배제됩니다(한역주: 참 오해가 되는 평가이다!): 그것은 전제주의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논증이, 특별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인간의 감각과 이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은 인간의 이성과 감각이 오류가 있다는 것을 동의합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그 바람직한 확실성이 온다는 것입니까? 리고니어 저자들은 이런 확실성이 어떤 보편적이고 필요한 가설들”(universal and necessary assumptions)에 호소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한역주: 출처는?). 이것들은 때때로 도전을 받기는 하지만, 규칙적으로 그리고 일관성있게 부인될 수 없는 그런 가정들입니다. 이러한 것들로서, 그것들은 과학의 전제조건들이며, 당연히 모든 인생의 삶의 전제조건들입니다. 이것들은 비모순율, “인과율”, 그리고 감각지각의 기본적 신뢰성에 대한 가설들입니다. 이 원리들은 규칙적으로 그리고 일관적으로 부인될 수 없기 때문에, 본서는 주장하기를, 그것들은 그것들의 모든 함축성들과 더불어서 확실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자들은 기독교는 그 함축성들의 한 가지임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기독교를 부인하는 것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가설들중의 한 가지 그 이상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독교는 또한 확실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논증은 초월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전제적입니다. 저자들은 삶과 지식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가정들이 가능한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반틸도 동일한 질문을 질문하면서 결론을 내리기를 하나님의 계시의 모든 내용이 이러한 필요한 가정들이라고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리고니어 저자들은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지만, 덜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부인하는 것은, 그들은 말하기를, 당연히 우리가 일관적으로 그리고 규칙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진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비슷하게, 반틸은, 불신자들이 일관적으로 그리고 규칙적으로 기독교를 부인할 수 없고, 자신들이 거부하기를 원하는 크리스챤 개념들을 그들은 일관성이 없도록 활용하면서, “빌려온 자본”(borrowed capital) 위에서만 그들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리고니어의 논증을 일종의 간접적인 전제주의라고 읽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크리스챤의 가설들이 피할 수 없는 그 방식들(반틸보다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시도라고 말입니다. 이런 접근 위에서, 저자들은 비크리챤으로 하여금 논리, 인과, 감각-경험에 관한 크리스챤 개념들(성경과 양립할 수 있는 개념들)을 전제하도록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 개념들을 부인하는 것은 혼란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반틸과 리고니어 그룹은, 그 해석 위에서, 다시금 너무나도 가까워질 것입니다. 내가 보기로는, 리고니어의 논증의 응집성은 이와 같은 어떤 것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일어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자율성과 타락에 대한 불일관성 등등에 대한 모든 담론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이 실제로 어떤 것이든지, 이 저자들은 최소한 자신들이, 비록 분명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함축하고 있지만, 특별하게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는(한역주: 이게 뭔 말?), 인과성 등의 개념들을 갖고, 하나의 중립적 토대 위에서, 추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자들의 유신론적 논증들을 간단히 살펴봅시다. 그들의 존재론적 논증, 요나단 에드워즈를 따르고 있는데, 그것은 거의 파르메니데스적(Parmenidean)입니다: 우리는 존재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존재외에 어떤 것도 사유할 수 없습니다. 비존재는 생각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존재는 영원하고, 편재하며, 모든 완전성에 있어서 한계가 없습니다. 곧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에는 하나의 명백한 반대가 있는데, 본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존재가 아무리 무한하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존재의 개념은 유한한 존재에까지 확장됩니다. 그러므로, 만약 존재가 신적이라면, 그러면 유한한 존재들은 그 신적인 존재의 한 부분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얼마간 교정이 없다면, 그 논증은 범신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논증은 무한”, “영원”, “편재등등의 사이에 어떤 구별을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범신론적 신에 속한 속성들이어서 성경의 하나님에 관하여 계시되어진 속성들과는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너무나도 다른 속성들인 것입니다.

 

우주론적 논증: 우리의 저자들은 먼저 인과율을 자신들이 동의어반복식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것을 먼저 진술합니다: “모든 효과는 하나의 원인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세상은 우발적(contingent)이기 때문에, 그것은 효과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효과는 무엇입니까? 세상은 단순한 환상(비존재-위를 보라)이 아니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견해는, 난센스입니다. 만약 그것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러면 그것은 사실상 초월적이고 신적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는 입증됩니다. 만약 그것이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에 의해서 창조되어졌다면, 그러면 하나님이 입증됩니다. 무한한 수의 우발적인 존재들은 세상의 원인일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것들 중의 어느 것도 세상을 존재하게 하는데 충분한 것이 아니라면, 그 전체의 연쇄도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논증에 대해서 많은 것이 말해질 수 있고 또한 말해졌습니다. 나에게 가장 주목이 되는 것은, 리고니어식의 우주론적 논증에서처럼, 저자들은 범신론적 대안을 배제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우주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 책에서 이 반대에 관하여서 내가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한 문장인데, “(하나님은) 목적과 인격적인 것을 포함하는 모든 것들 속에 스며들어 있는 원인이기 때문에, 그분은 인격적입니다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의 존재가 인격성의 원인이기 위해서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명백하지 않습니다.

 

존재론적 논증들과 우주론적 논증들은 함께 리고니어 관점에서 존재는 무제약적이며, 그러므로 무한한 정도로 모든 뛰어남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뛰어난 점들은 인격성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모든 전통적 속성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십니다. 하지만, “뛰어남”, 하나의 완전성은 종교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뛰어난 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결핍되어 있습니다. 인격성은 크리스챤 가르침이 배어 있는 하나의 서구적인 것입니다. 불교도에게는, 그것이 반드시 뛰어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서에서 제공되는 종류의 입증은 특별한 종류의 가치관들을 전제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순히 타당성이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의 전제주의적 논증이거나 아니면 그것은 실패한 논증인 것입니다.

 

저자들의 기독교적 증거들로서 제시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목적론적 논증은 건너 뛰겠습니다. 여기서 저자들은 이 종류의 다른 책자들의 패턴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서들은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원천들이라는 전제로 시작합니다.  (물론 이 책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전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원천들 안에서 우리는 예수에 관하여 배웁니다: 그가 기적들을 행하셨다는 것과 그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다는 것 말입니다. 예수의 기적들은 그의 주장에 대한 신적인 확인을 입증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그분의 증언은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성경이 우리의 궁극적인 표준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성경의 기초위에서, , 전제주의자들과 같이 변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논증에 대해서 몇 가지 언급들을 합니다: (1) 내가 생각하기로는, 저자들이 복음서들의 신뢰성에 대한 현대의 학자들의 동의를 지나치게 과신합니다. 그들은 거의 모든 신약학자들이 복음서들은 일반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고 결론내릴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나는 그것을 의심합니다. (2) 우리가 몇 명 너무나도 비통상적인 사건들이 예수의 공생애 동안 발생하였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우리는 이것들이 예수의 권위에 대한 확증으로서만 설명되어질 수 있다고 우리가 확신할 수 있을까요? 이 사건들을 어떤 다른 원인이 산출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제를 (기독교적 전제와 무관하게는) 입증하기가 극심하게 어렵습니다. 저자들은 자신들의 경우를 증명하기 위해서 이 명제를 입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책의 어떤 것도 이런 입증에 이른 것이 없습니다(한역주: 검토,검토,검토!). (3) 이 저자들은 앞서서 자부심을 갖기를, 자신들은 하나의 가능성이 있는 논증(argument)이 아니라, 하나의 확증, 확실성을 담보하는 확증(demonstration)을 제공하겠노라고 하였음을 상기하십시오. 이제 나는 그들이 그들의 논증의 앞 부분에서 보편적이면서 필요한 가설들이라는 유신론적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는 이 주장을 어떤 의미로 하였는지를 이해하겠습니다. (나는 그들이 그 주장을 확실하게 증명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들이 왜 자신들은 그것을 잘 하였다고 생각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역사적 증거들에 이르게 될 때, 나는 그들의 확증이라는 주장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그럴 듯한 것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서의 신뢰성에 대한 가정은 매우 논쟁적입니다; 기적들은 언제나 신적으로 지명된 메신저를 확증해준다는 논증도 또한 허약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예수가 성경에 대한 신앙을 보증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일들에 대하여, 나는 리고니어 저자들이 옳고, 자유주의자들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완전한 범위의 기독교적 전제를 가지지 않고서는 이 질문들을 바라볼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그들이 높은 정도의 확률성(probability) 보다 자신들의 논증을 위해서 보다 더 나은 것을 제시할 수 있다고 책임감 있게 주장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몇 가지 형식적인 문제들

 

독자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할 위험을 안고, 나는 미래의 판본에서는 수정되어야 할 것을 보이는 본서의 편집상의 몇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은 매우 많은데,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삼중의 저자권 때문일 것입니다. (1) 나는 신학적 창의성에 대해서 세 페이지(pp.64ff)나 다룰 필요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2) 신학에 있어서의 확률주의에 대한 논설(pp.125ff)도 또한 다른 곳에 속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무목적론의 논의의 흐름을 깨뜨려버리는 것 같습니다. (3) 185페이지에서, 세 번째 요즘은 나에게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최소한 그것은 두 번째 요점과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4) 187페이지에 있는 철자상의 실수(“poetic influence of sin”를 보십시오! (한역주: 역자가 소장하고 있는 것도 1984년 초판인데, noetic이라고 올바르게 되어 있어서, 프레임박사가 어떤 판을 보고서 이 실수를 지적하는지 궁금하다!) (5) 220페이지에서, 저자들은 반틸의 SSurvey of Christian EpistemologyMetaphysics of Apologetics와는 다른 책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두 책들은 한 책이며 동일한 것입니다. 전자는 후자보다 더욱 최근에 재판하면서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6) 214페이지에서 반틸을 인용하면서 오독하고 있는 것에 대한 우리(한역주: 누구? 왜 복수일까?) 초기 언급을 상기하십시오. (7) 나는 Runner재출간개념에 대한 저자들의 평가(p.251f)에 동의하지만(p. 251f), 그것은 문맥에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8) 254페이지에서, 두 번째 문단은 누가 말하고 있는 것인가요? 반틸인가요? 설리반인가요? 아니면 리고니어 사람들인가요? (9) 둔스 스코투스에 대한 자료(p. 260)도 맥락과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결론들

 

여기에 우리로 하여금 생각할 거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이 저자들이 여러 곳에서 반틸과 너무나도 가까워서 놀랐습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여기 몇몇 곳에서, 반틸주의자들과 리고니어 변증학자들 사이에 계속되는 대화가 요청됩니다. 일반계시와 죄의 순수이성적 효과들에 대해서는 많이 유사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토대를 놓는데 있어서 단순한 확률성 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저자들은 또한 증거주의적 논증들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어떤 요소들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주된 차이점은, 자율성에 대한 평가입니다. 또한 공유하고 있는 칼빈주의적 전제들과 가장 일관성이 있는 쪽이 어느 쪽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계속되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확실히, 주님 안에서 상호간에 지지하며, 격려해야 할 여지가 충분합니다. 개인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나는 존 거스트너에게 빚을 많이 졌습니다. 그는 여러 세대 동안 서펜실베니아에서의 개혁신앙의 가장 일관되고 지칠 줄 모르는 방어자였습니다. 스프라울과 린슬리는, 리고니어연구센터를 통해서 거스트너의 사역을 계속하면서, 이 개혁신학적 메시지를 강의들과 테이프들로 온 세상에 전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복음을 훌륭하고 소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반틸주의자들은 이 용감한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감히 말하거니와 그들도 우리들로부터 또한 배울 것이 많이 있다고 말합니다.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P.O. Box 2215
Escondido, California 92025

WTJ 47:2 (Fall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