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하는 광선/스킬더자료(공개)

Horace 2021. 3. 12. 13:31

스킬더의 설교론에 대한 이종인목사님과의 대담

 

이종인목사: 손 목사님과는 몇 해 전,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와 문화󰡕가 출간 후 20176월에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에서 북토크로 엘레브에서 대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항상 순종󰡕에 이어서 스킬더의 대작 󰡔수난 받는 그리스도󰡕 1권이 번역된 것은 한국교회에 있어 큰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목사님과 대담을 하게 된 것도 큰 즐거움이고, 더불어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 1. 가장 먼저는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여쭙습니다. 클라스 스킬더를 언제, 어떤 계기로 부터 알게 되셨는지와 지속적으로 스킬더의 글에 관심을 가지시고, 번역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손성은목사: 스킬더에 대한 관심은 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 제가 속해 있는 고신총회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고신총회의 역사를 살펴보게 되고, 그 역사 속에서 한 국면을 차지하고 있는 화란개혁교회 해방파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는 중, 스킬더목사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게 되고, 매료되어서, 저를 비춰보는 일종의 거울같은 역할을 스킬더목사의 신학에 대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계속해서 비평적이면서도 때로는 호감을 갖고 더욱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보다 더 넓은 시각은, 이렇게 나 자신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갖는 칼빈신학에 대한 관심의 빛에서 스킬더신학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 2. 주님께서 십자가 사역을 감당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교훈하신 내용 가운데 하나가 달란트 비유입니다. 󰡔그리스도와 문화󰡕에서도 󰡔항상 순종󰡕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내용인데요. 성도들에게 주어진 문화 명령달란트 비유와의 관계를 좀 더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달란트비유를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달란트를 재능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재수교수가 강조하는 것 같이, 문맥을 통해서 분명한 것은, ‘그 재능대로’(25:15) 주어지는 것이 달란트이기 때문에, 달란트비유를 문화 명령과 연관해서 이해하게 되면, 달란트의 차이는, 그 달란트를 맡겨진 사명의 분량, 의무의 분량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 재능보다는, 사명이나 의무의 크기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미 어떤 의미로든 재능이 있기 때문에, 그 재능에 따라서 그 재능을 활용해야 할 사명이나 의무가 있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 3. 현대 설교학에서는 적용에 대해서 많이 강조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구속사적 설교가 구원의 현재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설교 자체로 적실성을 갖기 때문에 적용이 필요 없다고 표현합니다. 스킬더가 말하는 적용이 따로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납득하기 힘들어하고, 오해하실 수 있는 분들을 위해 달리 적용이 필요 없다는 의미를 간결하게 다시 말씀해 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 이 점은 크게 오해되는 바이기 때문에, 저로서도 고민이 많았었는데, 스킬더를 알아가면서, 관련된 자료들을 검토해 가면서, 그 오해를 많이 해소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스킬더나 그 직계 후예들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은 적용의 불용성을 말하기 보다는, 적용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되는 설교, 곧 도덕적 훈화나 윤리적 교훈을 주는 것으로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을 비판하고, 설교 그 자체가 적용이 되도록, 그리스도의 통치와 나라를 구속의 역사를 강조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저도 늦게사 깨닫고는 무릎을 치면서 감사하게 되었고, 그 점을 스킬더의 설교론에서 꼭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스킬더의 의도는, “적용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고(실제로 그의 설교에는 적용이 많이 나옵니다!), 잘못된 적용을 하지 말고, 올바르게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속사적 설교, 곧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라고 하겠습니다.

 

: 적용을 하다보면, 많은 경우 결론이, 말씀, 기도, 전도, 사랑하라는 몇 가지 훈화로 환원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설교 자체가 적용이 되게 하라는 이야기는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고 드러내는 역할을 다할 때, 성도들 각자가 부딪히는 삶의 현실의 문제 앞에서 설교를 통해 각자에게 적용이 되어 진다는 의미로 보아도 될런지요?

 

: 4. 강의 중에 줄곧 관심이 갔던 것 중 하나가 마리누스 드 용의 학위논문 교회는 수단이요, 세상은 목적이라는 논문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제목에서부터 온 삶’, ‘한 치라도와 같은 맥락의 의미가 진하게 와 닿는데요, 논문의 개요나 요약을 짧게라도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 저는 기회가 되면, 이 학위논문을 번역하고 싶습니다. 전체적으로 읽기는 하였지만, 꼼꼼하게 다시금 읽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핵심 내용은 그 제목처럼, 교회는 세상을 통해서 나타내실 하나님의 뜻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스킬더의 생애와 신학을 한 마디로 압축해놓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부제목이 교회와 세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클라스 스킬더 사상의 발전”(The Development of Klaas Schilder’s Thought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hurch and the World)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회복되어지면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회복된 자로서 이 세상을 그리스도인의 문화로 회복시켜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이 완전함을 이루지 않을 것이라 하더라도, 세상을 변화시켜가는 것을 그리스도인(과 교회공동체)으로 회복 된 것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제의식이 스킬더의 생애를 관통하면서 발전되어간다는 것이 논문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보면, 클라스 스킬더가 아브라함 카이퍼의 드넓은 개혁주의 세계관을 어느 면에서는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도 되는지요? 우리의 회복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세상을 회복해나간다는 면에서 말입니다.

 

󰡔항상 순종󰡕에서 본 것 같아요. 카이퍼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를 살았지만, 스킬더는 엄혹한 전쟁의 시기를 살았습니다. 시대의 차이에서 빚어진 세계관(문화관)의 차이가 있을 텐데요.

 

19세기와 20세기의 네덜란드와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여러모로 다릅니다. 기독교적 전통을 가지고 살았던 카이퍼와 스킬더는 세상을 그리스도인의 문화로 회복시켜가야 할 사명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한국은 종교다원사회라는 점에서 우리가 취할 스탠스에 차이가 생기지 않을까 여쭙습니다.

 

: 5. 구속사에서의 점진에 대한 논쟁에서 시드니 흐레이다누스가 스킬더의 설교에 대해 세 가지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1. 도식주의라는 비판, 2. 사변이라는 비판, 3. 마지막으로 객관주의에 매몰되어 있다는 비판입니다. 도식주의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설교의 효과를 위한 설교학적 고려로, 사변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묵상으로 답변이 되었습니다. 객관주의에 대한 비판에 있어 구체적인 반박이 빠진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아 추가적으로 여쭙습니다. 스킬더는 카이퍼주의 그러니까, 주관주의, 신비주의, 형이상학적인 접근으로 (구속협약/구속()언약)(은혜)언약을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측면에서 답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지는데, 설명을 보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사실, 도식주의, 사변의 귀결은 객관주의로 빠진다는 것인데, 앞의 두 비판만 반박해도 나머지 객관주의라는 비판은 자동적으로 반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에 대해서는 빠뜨렸습니다. 흐레이다누스가 스킬더의 설교의 객관주의를 비판하는 증거로, 스킬더의 열정적인 추종자였던 판 레이스트가 스킬더의 설교를 객관적이라고 표현한 것을 인용하는데, 제가 반박하고자 했던 것은, 판 레이스트가 스킬더의 설교를 객관적이라고 하였던 것은, 주관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 강한 것이지, 우리의 삶에 관련이 없는 공염불과 같이 관념적이고 이론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흐레이다누스가 잘못 비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그 논문의 다른 곳에서, 역설하였던 것처럼, 홀베르다와 같이, 스킬더도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이 모두를 극복하기 위해서 힘을 썼고, 어느 한쪽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극복을 그의 전체 신학에서도, 그리고 그의 설교에서 구원의 현재성을 강조하였다는 것이 저의 글의 논지였습니다. : 시원합니다.

 

: 6. 오늘 스킬더의 설교론 특강에서 앞서 출간된 󰡔항상 순종󰡕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너무 좋습니다. 스킬더의 언약론에 있어 질문 하나를 보태봅니다. 스킬더가 말하는 언약적 의미에서의 조건인 믿음을 알미니안주의에서 말하는 조건으로 오해하시는 분들을 왕왕 봅니다. 혼동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스킬더의 개혁신앙적 의미에서의 언약에서의 조건에 대해서 정돈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참 중요한 질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미니안적 의미에서의 조건은 믿음조차도 하나의 공로로서 여기게 된다는 의미에서의 조건입니다. 하지만, 개혁주의적 의미에서의 믿음이 조건이라는 것은, 그 믿음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강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의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결코 믿음이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로서의 조건입니다. 곧 컵에 물을 담아서 마시게 될 때, 물이 우리의 목의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것이지, 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컵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때, 그 컵을 물을 마시는 도구 혹은 조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이 개혁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칼빈도 기독교강요에서 우리의 구원의 네 가지 원인을 설명하면서 믿음을 도구적 원인이라고 보았던 것을 상기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 칼빈이 믿음을 도구적 원인으로 표현한 것이 시원한 답이 되는 것 같습니다. 스킬더가 언약에서 인간을 하나님과의 한편 당사자로서 책임을 강조했다는 부분을 한 번 더 짚어주시면 좋겠습니다.

 

: 7. 스킬더는 설교와 문화를 뗄 수 없는 관계로 말하고 있는데요, 복음의 문화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목사의 설교와 장로의 심방에 대해서, 목사의 설교나 장로의 심방에서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환경, 현실에 대한 고민이 구체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여기에서 목사인 저로서는 한 가지 고민이 생깁니다. 회집하는 교우들이 머무는 삶을 이해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저도 참 고민이 많은 주제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목회자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랑을 교인들은 자기들의 관점에서 헤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제가 이목사님의 고견을 헤아려 듣고 싶은 심정입니다.^^

 

: 복음의 문화적 성격과 관련해서, 설교와 문화, 심방과 문화에 대한 부분은 차제에 듣고 싶은 부분으로 꼭꼭 담아두겠습니다.

 

: 8. 교회와 설교의 관계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위치가 사활적이라는 부분을 듣습니다. 교회의 본질적 표지가 그리스도의 불러 모으시는 사역이라면, 바른 강단, 성경적 설교가 교회의 표지라고 보아도 맞는 것이겠지요?

 

: 당연한 이야기이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스킬더의 강조점을 염두에 두고 정리한다면, 그리스도의 불러 모으시는 사역이 드러나는 설교가 있는 그 설교가 교회의 제일 중요한 표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 9. 스킬더의 교회론, 특별히 벨직신앙고백서 27-29항 해설에서 참 교회와 거짓교회에 대한 정돈에 대해서 분리주의자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스킬더의 신학이 보편교회에 대한 강조와 일치에 대한 일관된 노력을 아는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할 수 있는 비난인데요, 왜 이런 오해가 확대되고 깊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 아마도 저는 스킬더의 주장으로 인한 논쟁과 더불어서 2차대전이 발발하게 되고, 2차대전의 와중에서 벌어진 스킬더목사의 제명사건과 그로 인한 해방파교회의 설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렇게 교단까지 설립되지 않았더라면 스킬더목사가 개혁교회 내에서 크게 존경받고 인정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주기철목사와 한상동목사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기철목사가 만일 순교를 하지 않고 계속 살아서 오랫동안 살았다고 한다면 아마도 굉장히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덧씌워졌을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그리고 한상동목사가 감옥에서 순교했다고 한다면, 그래서, 고신교단을 설립하는 일들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주목사님같이 존경받지 않았을까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스킬더목사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그의 신학에 대한 우리의 접근과 관심을 막아서는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참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평가는 주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10. <교회와 설교> 파트에서 가슴이 웅대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매주 복음을 설교하는 강단에서의 설교가 어떤 지점인가를 보게 해서 장엄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데요. 스킬더는 현재의 강단이 태초의 조명 아래서 종말론적 기대 속에, 구속사적 종말을 선취하는 역사적 현장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초와 종말을 관통하는 관점은 현실에 매몰되기 쉬운 실존을, 교회를, 세상을 제대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작업이라는 데서 무서운 책임감마저 듭니다. 설교에 대한 이런 이해에서 강단을 개그콘서트나 자기자랑과 지식전시장, 혹은 사람들을 위한 치유 강연으로 만드는 분들께 한마디를 해 주시면 어떨까요?

 

: 그런 식의 설교가 더욱 인기있는 현상태에서 그런 분들을 비판하면 질투나 시기심으로 그런 것 아닌가 하고 욕을 들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판단은 주님께 맡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우리가 하는 설교가 우리의 비판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가 하고 항상 자신을 살피는 자세가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설교를 생각하는 분들이 이 세미나나 동영상을 볼 것 같다면, 할 말이 많이 있지만 말입니다. ㅎㅎ

 

: 11. 계시론과 관계해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아무래도 바르트의 영향을 피하가진 못한 듯 보입니다. 주관주의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현대에 스킬더의 성경에 대한 뚜렷한 이해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 저도 카이퍼신학과 바르트신학 사이에 참 유사한 점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는데, 그 관계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특별히 카이퍼리안들 중에서 바르트신학을 선호하고 나중에는 거의 비슷하게 동화되어가는 모습(, 벌카우워나 카이테르트의 신학)을 지켜보는 것은 참 기이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스킬더의 신학은 카이퍼신학에 경도된 분들에게 좋은 조정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별히 제가 속해 있는 고신총회 산하의 SFC의 많은 간사들이 카이퍼신학에만 주목하고 있는데(물론 그렇게만 배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늦게라도 SFC에서 스킬더신학에 주목하고 이렇게 입문서인 항상순종을 출간할 수 있는 것은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곧 이어 천국은 무엇인가?’라는 책도 발간될 것이라고 하니, 카이퍼신학을 창조적으로 극복해 가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 . 스킬더의 후속작들의 출간으로 개혁신학 안에서의 풍성한 컨텐츠와 건전한 토론들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고대해 봅니다.

 

: 12. 목사님의 스킬더 설교론강의 마지막 부분에서 개인적 소망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구원의 현재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우리 시대에 누려갔으면 하는 바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강단을 책임진 사역자들에게 바램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 구원의 현재성신전의식과도 연결되지만, 그 시작은 참된 중생으로 말미암아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역자들이 중생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어있지 않아서 구원의 현재성, 혹은 현재적 천국에 대한 개념도 혼동스러운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의 중생체험 이후 천착하고 있는 것이 이 중생개념의 혼동의 원인과 역사 등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참된 중생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등등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그 연구들의 대미라고 할 수 있는 준비론과 개혁신학적 심리학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설교자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이런 분야에 대해서 좀더 공동보조를 맞춰서 연구하고 대화를 나눠가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원하시면 저의 현재까지 확보한 자료들을 모두 나누고 싶습니다.

 

: 13. 스킬더의 설교문을 보자면, 셜록홈즈의 탐정문을 보는 듯, 관심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이끌어가는 방식이 놀랍습니다. 마치 프로파일러와 같은 천재적인 작업을 보면서 독자로서는 매우 행복한 일이지만, 설교자로서는 따라 하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공감합니다. 영역본 서문을 쓴, 오켕카목사도 말하듯이, 그의 설교스타일은 자신의 기를 죽인다는 식으로 말하였는데, 저도 공감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의 설교를 흉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원리와 내용의 핵심, 성경본문을 접근하는 방식들에 대해서 배우게 되지만, 그것을 나의 몸에 맞춰서 설교로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에게처럼, 설교의 특별한 은사가 스킬더목사에게도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달란트를 주실 때, 우리의 재능을 따라서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단지, 한 달란트 받았다고 그것을 땅에 파묻으면 안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 한 달란트도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 14. 앞의 질문에 이어서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은 스킬더의 설교준비작업 과정에 대한 세세한 부분이 아쉽습니다. 언약중심, 문화사명과 설교의 관계, 구원의 현재성에 대한 설교의 중심을 알겠는데, 구체적인 설교 작성의 방법론에 대한 내용이 있다면, 좀 더 보충해서 들려주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 사실,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나온 바빙크의 설교론을 보아도, 구체적인 준비과정에 대한 것은 거의 없고, 그의 삶 자체가 설교의 준비였다는 식의 결론을 보게 됩니다. 사실, 스킬더 목사의 삶 자체가 매번의 설교를 위해서 준비해 온 것 같습니다. 특별히 성경을 보는 관점은 쉽게 터득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성경 자체를 읽고 묵상하면서 씨름해야 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저도 그렇게 몸부림치고 있을 뿐인데,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서는 아마도, 스킬더목사의 후예로서 같은 해방파목사였던 C.트림프목사의 설교학 강의라는 조그만 책이 일찍이 신득일교수에 의해서 번역되어 회자되고 있습니다. 참고가 되면 좋겠습니다.

 

: 강의를 통해 대담을 통해 큰 유익을 나누어주신 손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차제에 더 깊은 교통과 나눔이 오가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 번역하신 글들이나 쓰신 글을 볼 수 있는 블로그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목사님과 더 깊은 소통을 하기를 위하는 청취자들을 위해서 블로그 주소를 일러주시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 제 블로그주소는 이마고 다이” = http://blog.daum.net/londonhorace 입니다.

 

: 스킬더의 설교론에 대해서 한국교회 목사님을 통해서 듣게 되어 기쁘고 뜻 깊게 생각합니다. 스킬더의 신학과 설교, 그의 문헌들에 대한 번역작업이 계속 이어져서 소중한 유산이 한국교회가운데 더 많이 소개되어질 수 있도록 힘써 주시기를 부탁드려봅니다. 오늘 시간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